제25강 마가복음 11장 강해


하나님을 믿으라


마가복음 (11:1-25)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22).\"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경배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만왕의 왕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의 왕들과 달리 겸손과 온유로 다스리시는 공의와 사랑과 평강의 왕이십니다. 이 예수님은 우리가 믿고 의지하여야 할 믿음의 대상입니다. 이 시간에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믿어 태산을 옮길 수 있는 능력 있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1-6).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가까이에 있는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곳에 도착하시자 제자들에게 한 명령을 하셨습니다. 2절을 보면 예수님은 돈도 주시지 않고 남의 집에 있는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곧 그 이유를 설명하여 주셨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지금까지 예수님은 자신을 \'인자, 섬기는 종\' 으로 표현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주(主 : The Lord)\'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볼 때 예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요, 만유의 주가 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3절은 말씀하십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예수님은 나귀 새끼도 창조하셨습니다. 이를 볼 때 나귀 새끼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나귀 새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생명, 시간, 물질도 나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이를 관리하고 지키는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쓰시겠다\' 하면 언제든지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역대상 29:14절에서 다윗은 말년에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우리는 사는 날 동안 무엇인가에 쓰임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의의 병기로 쓰임을 받느냐? 불의의 병기로 쓰임을 받느냐? 순종의 종으로 쓰임을 받느냐? 불순종의 종으로 쓰임을 받느냐(롬6:12-16)? 즉 \'하나님께 쓰임을 받느냐? 죄에 쓰임을 받느냐?\' 둘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님께 쓰여지면 영생의 열매를 맺고, 죄 짓는 데 사용되어지면 사망의 열매를 맺습니다(롬6:23). 나귀도 하나님께 쓰임을 받음으로 값지고 귀한 나귀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때에 가장 값지고 영광스럽습니다.

우리는 젊은 시절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쓰임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로 일학년 때부터 fishing되어 죄를 즐기지 못한다고, 나를 fishing한 목자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옛날을 그리워하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사람들에게 \'네가 그 때 무슨 열매를 맺었느냐(롬6:21)?\' 묻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쓰임을 받지 못했다면 현재 무엇을 하였겠습니까? 우리는 인생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고뇌의 밤을 지내거나 정욕과 교만과 열등감과 탐욕 등으로 괴로워할 것입니다. 김안드레 선교사가 하나님께 쓰임을 받지 못했다면 애늙은이가 되어 시커먼 얼굴을 더 시커멓게 하고 다녔을 것입니다. 김다니엘 선교사가 하나님께 쓰임을 받지 못했다면 컴퓨터에 미쳐서 머리와 손이 떨려 제 정신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김메리 선교사가 하나님께 쓰임을 받지 못했다면 깊은 허무로 밤잠을 자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분들이 하나님께 쓰임받았을 때 천사도 흠모하는 선교사가 되어 생명 살리는 귀한 역사에 쓰임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이 명령을 듣고 어떻게 했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은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말씀에 순종하고자 할 때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남의 나귀 새끼를 주인에게 말도 안 하고 끌고 온단 말인가? 제자 3년 반만에 절도 현행범으로 끌려가는 것이 아닌가?\'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그들은 남의 나귀 새끼를 풀어 끌고 올 생각을 하니 등에서 식은땀이 났습니다. 말씀에 순종하고자 나서려고 하니 발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도저히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목적도 좋아야 하지만 방법도 좋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막노동으로 돈을 벌어 떳떳하게 사 오자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도둑으로 몰려 교도소에 갈지라도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들은 속 두려움과 불신을 극복하고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들은 자의식과 의심을 극복하고 순종했습니다. 그들은 양심과 합리적인 생각을 극복하고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모순을 극복하고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이 때 \'사람들이 그것을 무엇에 쓰려고 하느냐\'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깜짝 놀라 \'주가 쓰시겠다\' 했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가져가시오\' 순순히 허락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제자들은 예수님이야말로 만유의 주시라는 것과 순종을 통한 믿음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7,8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은 나귀 새끼를 끌고 와 겉옷을 벗어 안장을 만들고 예수님이 타시도록 했습니다. 이 때 많은 사람들이 자기 겉옷을 벗어 길 위에 깔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밭에서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다가 길 위에 폈습니다. 이는 왕이나 전쟁에서 승리하고 입성하는 장군들에게 행하는 예식으로 존경과 영광과 찬양의 표시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왕으로 입성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왕으로 열렬하게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란 하나님의 권세로 이 땅에 오신 약속된 메시야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 란 다윗에게 약속하신 메시야 왕국을 가리킵니다. \'호산나\'란 우리를 구원하여 달라는 외침입니다(save us). 우리는 여러 문제로 고민하고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죄 때문에 고통합니다. 죄 때문에 신경쇠약에 걸리고, 죄 때문에 불면증에 시달리고, 죄 때문에 무력하고, 죄 때문에 슬픈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욕과 교만과 욕심으로 고통하고 있습니다. 이는 심령 깊은 곳에서 구원받고자 하는 몸부림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맞이할 때 열정적으로, 온 마음으로, 진심으로,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환영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믿음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미지근한 신앙 생활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라오디아 교회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 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3:15,16).\"

그러면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은 어떤 왕이십니까? 예수님은 세상 왕들과는 전혀 다르십니다. 세상 왕은 무력으로 다스립니다. 세상 왕은 금면류관을 쓰고 쌍두마차에 백마를 타고 예루살렘 성을 입성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남루한 옷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십니다. 요즈음은 차로 그 사람을 평가합니다. 그렌져나 무쏘를 타고 다니면 교통 순경들도 경례를 붙입니다. 그러나 티코를 타고 다니면 딱지만 떼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굶어도 좋은 차를 타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즈음 말한다면 티코를 타고 예루살렘을 입성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평강의 왕이십니다. 말은 전쟁을 상징하고, 나귀는 평화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다스리는 곳에는 진정한 평화가 임합니다. 반면에 세상 사람들이 다스리는 곳에는 분쟁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겸손과 공의의 왕이십니다. 스가랴 9:9절을 보면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사람들은 권위로 다스립니다. 사람이 권위로 다스릴 때 사람들의 겉은 지배할 지 모르지만 내면은 지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겸손으로 섬기는 곳에는 내면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가위, 바위, 보\'에서 \'보\'가 \'바위\'를 이깁니다. 겸손이 궁극적으로 승리합니다. 예수님은 겸손으로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둘째, 성전을 깨끗케 하신 예수님(12-19).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자 곧 성전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정치적인 메시야로 오셨다면 헤롯 궁전으로 들어가셔서 로마의 앞잡이인 헤롯을 몰아냈을 것입니다. 아니면 빌라도 총독이 살고 있는 곳으로 가셔서 빌라도를 몰아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전으로 가심으로 영적 메시야임을 드러내셨습니다. 이튿날 예수님께서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 시장하셨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멀리서 잎이 무성한 무화과 나무를 보시고 열매가 있는가 보셨습니다. 그러나 그 무화과 나무는 잎만 무성하지 열매가 없었습니다. 무화과 열매는 3,4월에 열려 6,7월에 땁니다. 무화과 나무의 특징은 잎사귀가 무성하면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무화과 나무는 때가 아니더라도 열매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열매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열매가 없는 것을 보시고 저주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14).\"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배가 고파서 화가나 저주하신 것이 아닙니다. 겉은 화려하지만 속이 부패한 성전을 보고 심판하신 것입니다. 심판에는 종말론적인 심판과 현재적인 심판이 있습니다. 종말론적인 심판을 받으면 즉시 심판을 받게 됩니다. 현재적인 심판은 현재 심판을 받았지만 집행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입니다. 만일 끝까지 회개치 않으면 어느날엔가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성전에 들어갔을 때 그 곳에는 말씀과 기도와 찬송 대신에 짐승 우는 소리, 장사치들의 외치는 소리가 가득했습니다. 이 모습을 보시자 예수님은 채찍을 만들어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이 분노는 영적인 분노입니다. 그리고 기구를 가지고 들어가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예수님은 형식적인 예배를 싫어하십니다. 이 예수님의 분노는 장차 예루살렘의 심판에 대한 예표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청소하시고, 성전이 어떤 곳이 되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성전은 하나님이 계신 하나님의 집입니다. 성전에는 성소와 지성소가 있고, 지성소 안에는 언약궤 곧 하나님의 말씀과 속죄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전은 하나님의 말씀과 죄 사함의 은혜가 있는 곳입니다. 성전은 말씀과 기도와 찬송이 차고 넘쳐야 합니다. 성전은 죄인들이 나아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죄 사함을 받는 곳입니다. 무엇보다 성전은 세계 만민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곳입니다. 성전에 말씀이 없고, 기도가 없고, 물질적이고 세속화될 때 더 이상 성전이라 할 수 없습니다. 특히 만민 구속 역사를 위해 기도하지 않을 때 성전으로서의 존재 의미를 상실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보셨을 때 마치 강도의 굴혈처럼 보였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말씀과 기도와 제자 양성과 세계 선교에 힘쓰기보다 성전을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웠습니다. 교회가 세속화될 때 주님은 준엄한 심판을 하십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의 종교, 정치, 사회, 문화의 중심이었습니다. 성전이 부패했다는 것은 곧 그들의 중심이 썩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의 부패에 과감하게 메스를 가하심으로 성전을 깨끗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우리의 성전이 되십니다(요2:20). 그러므로 우리의 중심에 예수님 이외의 다른 것을 섬겨서는 안 됩니다. 이러할 때 예수님은 무섭게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더욱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어떻게 예수님을 멸할까 궁리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두려워 예수님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저물자 제자들과 함께 성 밖으로 나가셨습니다(19).

셋째, 자립적인 믿음을 심으신 예수님(20-25). 2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이튿날 아침에 성전으로 가시는 길이었습니다. 이 때 제자들은 전날 탐스러웠던 무화과 나무가 예수님의 저주를 받고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때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이 나서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외쳤습니다.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 나무가 말랐나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 권세에 놀라 탄식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열매 없는 나무를 저주하신 것을 보고는 열매 없는 인생은 결국 저주를 받을 수 밖에 없음을 깨닫고 두려움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관심사는 예수님의 말씀 권세였습니다. 베드로는 자신도 말 한마디에 나무가 말라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는 권세를 갖고 싶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하면 이런 권능을 행할 수 있는가 의아해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하나님만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믿음의 대상이 다를 뿐 무엇인가를 믿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결코 의지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사람을 의지하다가 상처를 받고 절망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을 믿다가 배신당할 때 그것보다 더 허무하고 비참한 것도 없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물질을 의지합니다. 사실 물질만큼 큰 위력을 가진 것도 없습니다. 전에는 官의 입김이 컸지만, 요즈음에는 재벌들의 입김이 아주 쎕니다. 그러나 돈도 결코 믿을 것이 못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세 자리 I.Q.를 의지합니다. 어떤 사람은 출신 배경과 학연과 지연을 의지합니다. 어떤 사람은 친구를 의지합니다. 어떤 사람은 부모님을 의지합니다. 어떤 사람은 남편을 의지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아내를 의지합니다. 그러나 부모님도, 남편도, 아내도 언젠가 내 곁을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아름다운 몸매를 의지합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몸매도 늙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어떤 분은 목자를 의지합니다. 그래서 목자가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합니다. 그러나 목자는 결코 의지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나라도 강대국을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의 보이는 것은 결코 믿음의 대상, 의지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이런 것들을 의지하면 결국에는 의지하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망하게 됩니다. 그 때 우리는 자립적인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제자들은 인간 예수님만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 때 그들은 큰 소리는 치지만 능력이 없어 쉽게 절망하고 넘어지기를 잘 했습니다. 그 때 그들은 예수님이 계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능력 많으신 예수님이 영원토록 자기들과 함께 있어 주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제 곧 십자가를 지신 후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나라로 가셔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마음 가운데, 우리의 삶 가운데, 우리의 역사 가운데 살아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한 인간으로서 자립적인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그 때 내면이 강한 믿음의 용사가 될 수 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화과 나무를 뿌리채 마르게 할 수 있는 능력의 원천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말씀 한 마디로 無에서 有를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면 그대로 되었습니다.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자 그대로 찬란한 빛이 생겨났습니다(창1:3).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시고, 마른 막대기에서 새싹이 나게 하시고, 반석에서 샘물이 나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을 때 어느 정도 큰 일을 할 수 있습니까? 23a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예수님은 산을 바다에 던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말로 산을 던질 수 있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산은 그 특징이 요지부동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능히 하실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합니다. 믿음으로 도전할 때 태산과 같은 장벽도 능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윌리암 캐리는 하나님을 믿고 위대한 금언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큰 일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하여 큰 일을 시도하라.\" 바울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했을 때 식민지 백성으로서의 연약함과 슬픔과 절망적인 상황을 극복하고 로마를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후에 그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고백했습니다(빌4:13). 바울은 믿음으로 세계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믿음으로 종교개혁을 한 마르틴 루터, 믿음으로 아프리카를 정탐한 David Livingstone, 믿음으로 인간 조건을 극복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한 D.L.무디, 믿음으로 중국 선교를 한 허드슨 테일러, 믿음으로 약소민족의 슬픈 운명을 극복하고 세계 지성계에 복음 역사를 이룬 Samuel Lee 선교사님, 그리고 수많은 복음 단체들, 그리고 이름도 없이 믿음으로 불가능에 도전하여 복음 역사를 섬긴 믿음의 용사들이 곳곳에 많이 있습니다. 이 분들은 모두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는 믿음을 가지고 불가능에 도전한 분들입니다.

우리 앞에는 여러가지 태산들이 놓여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어학 정복의 태산이 있습니다. 전공의 태산이 있습니다. 전공만 생각하면 머리가 아픕니다. 일대일 300팀과 주일예배 180명 학생 목자 양성의 태산이 있습니다. 120명 목자 박사의 태산이 있습니다. 이런 태산에 부딪칠 때 우리는 절망하고 좌절하고 포기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결코 절망하거나 낙망치 않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도전하는 것입니다. 이 때 위대하고도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을 때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내적으로 극복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의심입니다. 23,24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의심은 사단이 심어 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의심병에 걸리면 어떤 영웅이나 천하장사도 힘을 쓰지 못하고 넘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간 순간 사단이 심는 의심과 싸워야 됩니다. 의심은 우리가 싸워야 할 가장 큰 원수입니다. 믿음으로 큰 일을 한 사람들은 모두 의심과 불신과 싸워서 승리한 분들입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기도할 때 먼저 형제와 걸리는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런데 형제를 용서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는 태산을 바다에 던지는 것처럼 쉽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죽으면 죽었지 그를 용서 못하겠다며 복수의 칼을 갑니다. 심하면 사람을 죽이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일생동안 한을 품고 살다가 자식들에게까지 대물림합니다. 이는 다른 사람의 허물과 실수를 용서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잘 말해 줍니다. 그러나 우리가 용서하지 않을 때 기도가 막히고,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을 깨달을 수 없고, 하나님께로부터 죄 사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합심하여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형제를 용서할 때 용서의 사랑과 사죄의 은혜가 넘치게 되고, 합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제의 죄를 용서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태산을 옮겨 바다에 던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믿음으로 불가능에 도전하여 새 역사를 창조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우리 생 가운데 큰 역사를 이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경배 찬양] 주님과 담대히 나아가
  • 글쓴이: 두나미스 신학대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