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강 마가복음 12장 강해


산 자의 하나님


마가복음 (12:13-27)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27).\"

12:1-12말씀에서 예수님은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통해 종교지도자들의 죄악을 간접적으로 지적하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을 들으며 이것이 바로 자기들을 가리켜 하시는 말씀인 줄 알았습니다. 그들은 마땅히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감동되어 회개하고 예수님을 공경해야 옳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반대로 더 완악해져서 예수님을 잡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이런 그들과 예수님 사이의 불꽃 튀는 논쟁이 나옵니다. 본문을 통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는 정교분리의 대원칙을 배울 수 있습니다. 또한 어떻게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산 자가 될 수 있는가 배울 수 있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 안에서 산 자가 되어 살아계신 하나님과 교제하며, 성장하고, 열매 맺는 가을 학기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12-17). 13절을 보십시오. 종교지도자들은 이제 작전을 바꾸어 예수님의 말씀을 책잡고자 했습니다. 이를 위해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예수님께 보냈습니다. \'책잡다\'라는 말은 덫을 가지고 짐승을 잡을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이는 그들의 방법이 얼마나 야비하고, 정치적인가를 말해 줍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충실한 유대 민족주의자들로서 반로마적인 입장을 취하며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것을 결사반대하는 재야세력이었습니다. 반면 헤롯당원들은 로마의 권력에 붙어 기생하는 친로마파들로서, 세속적이며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을 적극 지지하였습니다. 이들은 평소 서로를 혐오하고 경멸하면서 상종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데 있어서는 마음을 같이하여 연합전선을 폈습니다. 이와 같이 율법주의자들과 세속주의자들은 둘 다 복음의 원수입니다. 겉으로는 극과 극으로 서로 다른 것 같지만, 둘 다 인본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결국은 손을 잡고 복음을 대적합니다.

14a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자신들의 악한 의도를 숨기고 예수님께 듣기 좋은 아첨의 말을 했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그들은 마음에도 없는 아첨의 말을 했지만, 이는 사실 예수님께 합당한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말한 대로 참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셨습니다. 여기서 \'참되시다\'란 \'거짓이 없고 진실하다(true:KJV)\', \'청렴하다(integrity:NIV)\'는 뜻입니다. 또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다\' 는 것은 \'다른 사람을 의식하거나 눈치를 보지 않는다\' 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렇게 본 것은 예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시고,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가 요구하는 메세지나 국민들의 정서에 부합되는 듣기 좋은 메세지를 전하시지 않고, 진리에 기초해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제국주의 로마의 식민통치에 대해서 비판적인 말을 해주기를 바랬습니다. 또한 의인 세례 요한을 목 베어 죽인 부도덕한 헤롯 정권에 맞서 투쟁해 주기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의 요구와 타협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수복음만을 가르치셨습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진리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허탄한 이야기를 좋아하고, 회개와 희생과 헌신 등과 같은 복음적인 메세지보다는 은혜와 사랑, 축복의 메세지만을 듣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메세지 중에서 재미 있는 유머만 기억하고,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와 같이 정말 기억해야 할 내용들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립니다. 그리고 나서는 은혜를 못받았다고 합니다. 이는 은혜를 못받은 것이 아니라 안 받은 것입니다. 우리 모임이 이런 시대와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진리에 기초하여 순수복음만을 가르치는 복음적인 모임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한껏 추켜 세운 뒤 덫이 들어 있는 정치적인 질문을 하였습니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4b,5a)?\"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이 문제는 대단히 민감한 문제였습니다. 당시 로마는 식민지 백성들에게 인두세를 부과시켰는데, 유대 백성들은 이에 대해 늘 반항적이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세금을 바치라고 하면 백성들의 거센 비난을 받고, 위선자, 로마의 앞잡이, 매국노 등으로 매도당하게 됩니다. 반면 세를 바치지 말라고 하면 로마에 대한 반역을 선동하는 죄로 헤롯당에 의해 즉시 체포당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세금을 바치라고 할 수도 없고, 바치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무책임하게 알아서 하라고 할 수도 없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이제야 말로 예수님이 덫에 걸려들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이 파 놓은 함정에 빠지기 쉬웠습니다. 항상 종교지도자들에게 비난만 받다가 오랜만에 인정과 칭찬을 받으시니, \'아, 이제야 너희가 말귀를 알아 듣는구나, 다 썩은 줄 알았더니 그래도 너희와 같은 양심적인 지도자들이 남아 있었구나\'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곧 그들의 중심을 꿰뚫어 보시고 그 외식함을 아셨습니다(15a). 그들이 아무리 겉으로 진실한 척해도 예수님을 속일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15b)?\" 책망하시고,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 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데나리온은 로마의 작은 은화로서 제국의 세금 납부를 위해서 사용하던 화폐였습니다. 이 동전의 앞면에는 월계관을 쓴 가이사의 형상이 있고, \"가이사 디베료, 신성한 아구스도의 아들, 만민의 주\" 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동전을 가리키시며, 그 화상과 글이 누구의 것이냐 질문하셨습니다(16a). 그러자 그들은 가이사의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16b). 그러자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17).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이는 정교분리(政敎分離)의 대원칙을 천명하신 말씀입니다. 먼저 가이사의 것을 가이사에게 바치라는 것은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하라는 것입니다. 국가에 대한 의무로는 납세의 의무, 병역의 의무, 교육의 의무, 근로의 의무 등이 있습니다. 이 밖에도 국가에서 정한 일정한 법과 질서를 지키고, 사회규정을 준수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이상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해야 할 이와 같은 의무를 다 해야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로마가 유대를 무력으로 점령했기 때문에 가이사에게 세를 바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가이사에게 세를 바쳐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 이유를 로마서 13:1절에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우리는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되 권세를 가진 그 사람이 무서워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불필요한 제재를 받고 신앙 생활에 훼방을 받게 됩니다.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할 때 건전한 시민으로서 좋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신앙적인 문제와는 엄격히 구분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가게 되었을 때, 그 곳에서 인간적으로는 적국의 왕인 느브갓네살을 충성스럽게 섬겼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이 만든 금신상에게 절하라 하였을 때, 세 친구들은 끝까지 이를 거부하고 믿음의 순결을 지켰습니다(단3장). 또 다니엘은 다리오 왕 시대에 왕 이외에 누구에게든지 기도하면 사자굴에 던져 넣기로 한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하루에 세 번씩 전에 하던 대로 기도 생활을 계속했습니다(단6장). 이로 인해 그는 각각 극렬히 타는 풀무와 사자굴에 던져졌지만,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당시 로마는 유대인들의 종교를 인정하고, 이를 보호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금 때문에 문제를 일으킬 경우 불필요하게 탄압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학생으로서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합니다. 이것은 학생의 의무입니다. 우리가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을 때 학교당국으로부터 학사경고를 받고, 제적을 당하게 됩니다. 또 부모님들로부터 신앙 생활을 그만 두라는 압력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 열심히 공부하여 장학생이 될 때 부모님이나 교수님들, 다른 학생들에게 신자로서 좋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각자 자기가 있는 위치에서 감당해야 할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평신도 목자님들은 직장에서, 사모님들은 가정에서 해야 할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한 나라의 국민인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것을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야 할 하나님의 것은 소득의 십일조입니다(신12:11). 우리가 하나님께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 됩니다(말3:8,9). 또 첫 열매도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출23:19, 신26:2,10). 그리고 주일은 주님의 날(Lord\'s day)이기 때문에 이 날 만큼은 다른 날과 거룩하게 구별하여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원망과 불평 대신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야만 합니다. 우리 마음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마음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주어서는 안 되고, 반드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마음 뿐만 아니라 몸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6:19,20절을 보십시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 몸은 안일과 쾌락을 즐기는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써야 할 거룩한 몸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과 젊음 등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데나리온에 가이사의 형상이 새겨 있듯이 인간의 내면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 있습니다(창1:26,27). 다시 말해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진 하나님의 화폐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로마서 12:1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바리새인들은 눈에 보이는 십일조 같은 것은 하나님께 드렸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은 하나님께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로마에 대해서는 꼬박꼬박 세금을 내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를 내지 않을 경우 불이익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것을 드리지 않는다고 당장 어떤 제재도 받지 않습니다. 십일조를 늦게 낸다고 과태료가 붙지 않습니다. 주일예배를 보지 않는다고 어떤 처벌을 받지 않습니다. 다만 마음이 조금 편치 않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는 자발적인 투쟁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것을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드릴 때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을 수 있습니다. 이 때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특히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고자 애써 투쟁하여야 하겠습니다. 가을 학기 우리가 학생으로서, 또는 평신도로서 각자의 위치에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친다는 분명한 영적 질서를 가지고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산 자의 하나님(18-27). 바리새인들이 1라운드에서 KO패를 당하자, 이번에는 사두개인들이 도전하였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없다고 하는 현실주의자들이었습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의 기초 위에 세워진 종교입니다. 신앙 생활이란 이 땅에서의 축복과 영광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부활을 통한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천성을 향해서 가는 순례자의 길과 같습니다. 우리는 지난 제자 수양회에서 천로역정 심포지엄을 통해서 이것을 실감 있게 배울 수 있었습니다. 부활이 없다고 할 때 인생을 사는 것만큼 허무한 것도 없습니다. \'죽으면 그만인데\' 생각하면 온 몸에서 힘이 쫙 빠지고 의욕이 사라집니다. 부활이 없다고 생각할 때 미래가 없기 때문에 현실적이 되고 현재 상황에서 최대한 즐기고자 하는 쾌락주의자가 됩니다. 믿음이 없는 불신자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는 것은 그래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종교지도자들이면서도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그들의 삶은 불신자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부활을 믿지 못할 때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상실하여 세상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게 됩니다. 부활을 믿지 못할 때 세상의 잔재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러면 그들이 왜 부활을 믿지 않았을까요? 이는 부활을 믿고 인정할 경우 심판도 믿고 인정해야 하고, 그렇게 되면 죄를 마음놓고 지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부활의 모순성을 지적하기 위해 신명기 25:5-10절 말씀을 기초로 기상천외한 질문을 하였습니다.

19-23절을 보십시오. 이 이야기는 전설의 고향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입니다. 신명기를 보면 형이 아내를 취하였다가 후사가 없이 죽을 경우 동생이 형수를 취하여 대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라는 율법이 있습니다. 어떤 가정에 칠 형제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일곱 명이 모두 건강하게 성장하여 그 중 장남이 먼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장남은 나머지 6명의 형제들의 축하를 받으며 웨딩마치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설레이는 마음으로 갈릴리 해변으로 신혼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신혼여행지에서 신랑이 준비운동을 안 하고 해수욕을 하다가 그만 물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여인은 할 수 없이 율법에 따라 둘째 아들과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둘째가 백화점에 반지 사러 간다고 들어갔다가 백화점이 무너지는 바람에 그만 깔려 죽고 말았습니다. 여인은 슬픔을 딛고 셋째와 결혼하였습니다. 그런데 셋째 아들은 뚜렷한 이유도 없이 시름시름 앓더니 아들도 낳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이 때부터 이 여인에게는 남편 잡아 먹는 귀신이 붙었다고 소문이 퍼졌습니다. 넷째는 이 형수와 결혼하는 것이 너무나 무서웠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무서워한 나머지 첫 날 밤에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칠 형제가 다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고, 마침내 여인도 한 많은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인지 아니면 이들이 머리를 짜서 만들어낸 이야기인지 알 수 없지만 참으로 슬픈 이야기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만일 이들이 모두 부활한다면 여인은 칠 형제 중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한단 말입니까? 먼저 결혼한 장남입니까? 아니면 제일 나중에 결혼한 막내입니까? 아니면 제비를 뽑고 결투를 벌어야 합니까? 이 얼마나 비극이요, 모순입니까? 이렇게 볼 때 부활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참으로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실 때 이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24,2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그들의 문제는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을 제대로 알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많이 알았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기보다는 말씀을 책잡고자 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말씀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성경 말씀을 모두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합리적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자들도 이와 같이 성경을 인간의 이성으로 모두 이해하고자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영적인 세계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무지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이 세상 삶의 연장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활시에 현재의 모습으로 부활하지 않습니다. 만일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부활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활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부활시에 우리는 천사와 같이 불멸의 영적인 존재가 되어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을 하지 않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을 보면 우리는 부활시에 지금과 같은 이런 욕되고 추하고 연약한 몸으로 부활하지 않고 신령하고 영화롭고 영적인 몸으로 부활하게 됩니다. 그 때는 더 이상 죄의 소욕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부활의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가장 아름답고 거룩한 모습으로 부활시켜 주실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출애굽기 3:6절 말씀을 기초로 부활의 진리를 심어 주셨습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을 의논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다 하신 말씀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이 말씀은 시제가 모두 현재형으로서 하나님은 현재 살아계신 분이심을 말해 줍니다. 또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벌써 죽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활시키셔서 현재 그들도 살아서 하나님과 함께 계심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은 개개인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시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은 언약을 기초로 역사하시는 언약의 하나님이심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은 사두개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 같이 비인격적이고 기계적이고 관념적인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이고 우리의 삶과 역사 속에서 살아서 역사하시는 역동적인 분이시요, 약속하시고 때가 되면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요 모세의 하나님이요, 바로 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불신 세상에서 믿음으로 산 믿음의 조상들입니다 그들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며 이 땅에서는 나그네임을 자처하며 믿음으로 캠프 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살다가 죽어 막벨라 굴에 장사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부활의 새 생명을 주셔서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 부활의 새 생명을 주셔서 영생을 누리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년수는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으로서 때가 되면 육신은 죽어 흙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만일 우리에게 영광스러운 부활이 없고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 난다면 우리의 생이 얼마나 허무하고 비참하겠습니까? 인생에 아무런 소망이 없기 때문에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는 쾌락주의자가 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믿음으로 사는 자에게 영광스러운 부활의 새 생명을 덧입혀 주셔서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토록 사랑하는 우리 주님과 함께 살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이 땅에서 나그네의 인생을 살 수 있으며 또한 주님을 위해 기쁨으로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2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죽은 자\' 란 사두개인들과 같이 부활의 믿음이 없는 자들입니다. 죽은 자는 몸이 차갑고 뻣뻣하듯이 영적으로 죽은 자도 마음이 차갑고 딱딱합니다. 이런 자는 믿음이 없어 늘 생각이 부정적이고 운명적입니다. 이들의 말은 죽어 있고, 생각도 죽어 있고, 표정도 죽어 있고, 행동도 죽어 있습니다. 이들은 \'안 된다, 힘들다, 불가능하다, 허무하다, 해도 소용없다, 무의미하다, 절망적이다, 될 대로 되라\' 는 등의 부정적인 단어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늘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의심하고 불신합니다. 이들은 살았으나 죽은 자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에게 결코 그 능력을 나타내지 않으시고, 이런 자들과는 교제하지 않으십니다. 반면 \'산 자\' 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같이 부족하지만 믿음으로 사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부활을 믿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새 생명을 주시는 생명의 주요, 부활의 주이심을 믿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위로부터 하나님의 생명을 덧입고 살아가기 때문에 늘 생명력이 넘칩니다. 이들의 말은 살아 있고, 생각도 살아 있고, 행동도 살아 있습니다. 이런 자들의 삶에는 죽음의 요소가 없습니다. 항상 밝고 긍정적이고 생동감이 넘치며 희망찹니다. 이런 자들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단어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런 자들과 교제하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죽은 자가 산 자가 될 수 있습니까? 요한복음 5:25절은 말씀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성경 말씀을 듣고 영접할 때 죽은 자가 살아납니다. 말씀에는 영적으로 죽은 자를 살리는 부활의 능력이 있습니다. 말씀에는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 있어 우리의 영혼을 소성케 합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늘 푸르며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음과 같이 그 행사가 다 형통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가을 학기에는 늘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이 우리 안에 살아 역사하여 산 자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우리가 산 자가 될 때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고, 성장하며,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같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 자가 되어 열매 맺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경배 찬양] 주님과 담대히 나아가
  • 글쓴이: 두나미스 신학대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