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강 마가복음 12장 강해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마가복음 (12:28-4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29).\"
우리가 현재 살고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방향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여러분은 현재 무엇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돈입니까? 명예입니까? 사람입니까? 아니면 자신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입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어느 정도 사랑하고 있습니까? 본문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기를 기도합니다. 이 때 하나님은 여러분의 삶을 크게 축복하여 주실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은 유일한 주가 되십니다(28,29).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나아와 물었습니다.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28)?\" 서기관은 당시 성경 선생 중 한 사람으로써 성경을 양피에 쓰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열심히 읽고 암송하고 연구했습니다. 특히 계명에 대해 연구를 많이 했습니다. 당시에는 10계명과 613개의 규례가 있었습니다. 서기관들은 이런 많은 법 조항 중에 \'어느 조항이 가장 중요하며 어느 계명이 고차원적인가?\' 등을 연구했습니다. 특히 613개의 규례를 한 마디로 표현할 수는 없는가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율법은 생활이요 삶의 전부였습니다. 그들은 방향을 잡을 때나 어떤 것의 가치를 정할 때에 율법을 따라 정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계명 중에서 첫째가 무엇입니까?\' 하는 질문은 곧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는 질문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절대적인 것을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가장 중요하고 절대적인 것을 알 때 방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첫째의 것을 놓칠 때 창세기 1:2절처럼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임하게 됩니다. 절대적인 것을 놓칠 때 상대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첫째되는 계명을 안다는 것은 생명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냥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갑니다. 혹은 그날 그날 기분에 따라 사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하지 않은 일에 마음과 시간과 정열을 쏟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런 삶은 한 번 밖에 없는 귀한 삶을 허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분은 자기 꿈을 이루고, 자기 만족을 채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합니다. 어떤 분은 무엇보다도 재미있게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재미를 좇아 살아갑니다. 어떤 분은 첫째가 공부라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결혼과 가정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어떤 분은 부모님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학문이나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학문과 예술이 먼저라고 합니다. 나름대로의 꿈이 있는 사람들은 꿈을 이루는 것이 첫째라 합니다. 돈 버는 일이 첫째인 줄로 알고 돈 버는 일에 전심전력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실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라면 이는 인생을 허비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인생에 있어서 첫째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2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간의 광야 훈련을 마치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주신 말씀입니다. \'들으라\'란 \'쉐마\'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드시 지키고 영접하여야 할 신앙의 근본이요, 신앙의 신조를 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말씀을 주셨을까요? 가나안 땅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는 각종 신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의 대표적인 신은 농경신인 바알이었습니다. 그리고 여신인 아세라 목상, 풍요의 여신인 아스다롯 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곳 사람들은 이런 신들을 섬기면서도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종교의식은 화려한 축제 행사로 먹고 마시고 춤추고 놀고 즐기는 글자 그대로 육신의 축제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신은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유혹을 받기 쉽습니다.
우리도 신앙 생활하면서 가장 힘든 것은 어떤 점에서 보면 믿는 자보다 믿지 않는 자들이 더 잘 먹고 잘 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잘 놀면서 학점도 좋다는 것입니다. 이 때 우리는 갈등하고 고민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보이는 것을 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역사적이고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온 인류를 그 주권 속에서 통치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유일하신 구원자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린 양의 피로 구원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습니다. 하나님은 유일하신 창조주요, 구주가 되셔서 우리의 경배와 찬양과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이는 천지가 변한다 할지라도 변개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4:12).\"
사람들은 사람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고, 물질이 사람을 사람답게 하고, 體制가 사람을 사람답게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이 사람을 사람답게 하고, 행복하게 합니다. 아프리카가 못사는 것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지 않고 각종 우상을 섬기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들은 각종 우상과 모슬렘을 신봉하고 있습니다. 모슬렘이 들어간 곳은 어느 곳을 막론하고 피폐하여졌습니다. 그리고 공산주의가 들어간 곳도 다 황폐하여졌습니다. 한 때 에디오피아는 \'에디오피아를 통한 아프리카\' 라는 거대한 꿈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김일성을 형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김일성은 교회가 들어서야 할 자리에 그의 주체탑과 그 탑 위에 별을 만들어 세웠습니다. 이로 인해 에디오피아는 지상 낙원이 아니라 기근과 질병, E.T 같은 난민만을 양성했습니다. 러시아의 공산주의자들은 교회의 십자가를 내던지고 별을 달았습니다. 북한의 김일성은 교회를 헐고 김일성의 주체탑을 만들어 거기에 절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 때 그들은 어떠합니까? 가난과 기근과 질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처럼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지 않고 각종 우상을 숭배할 때 반드시 망합니다. 미국은 로마의 천년 왕국도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인류 역사상 가장 축복을 받은 나라입니다. 왜 그토록 축복을 받았습니까? 미국의 선조들이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마태복음 5:14절을 기초로 미국에 하나님 나라의 왕국을 세우고자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그들을 넘치도록 축복하셨습니다. 한 나라 뿐만 아니라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는 가정은 축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물질이나 남편이나 자식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가정은 비극적이 됩니다. \"주 곧 하나님은 유일하신 주시니라(The Lord is one. The Lord is our God.).\" 신앙은 바로 하나님만이 유일한 주가 되심을 고백하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하나님은 유일한 주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요,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둘째,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자세(30). 30절을 보십시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다한다\'는 말씀이 네 번 나옵니다. \'다한다\'는 것은 아낌 없이, 남김이 없이, 자기 생명을 불태워서 온 마음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일부분이 아닌 전폭적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정열적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Love is blind\' 라는 말처럼 사랑하게 되면 모든 것을 아낌 없이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아까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곧 마음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도록 말씀합니다. 마음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방향을 알 수 있습니다. 물질에 마음을 두면 물질을 사랑하는 것이고, 하나님께 마음을 두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다른 것에 뺏기지 않도록 힘써야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기 마음을 지키는 자는 열 성을 빼앗는 것보다 낫다\' 고 했습니다(잠언16:32). 한마디로 신앙 생활이란 마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라\' 했습니다.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목숨을 바치는 것입니다. 성경은 \'뜻을 다하여 사랑하라\' 했습니다. 이는 자발적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또 성경은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 했습니다. 이는 열정적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때 위로부터 힘을 공급받아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JOY\'란 예수님을 정열적으로 사랑할 때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기 것을 꾸릴 때 내면에는 기쁨이 사라집니다. 내면에 기쁨과 행복이 없어질 때 나의 내면을 가만히 살펴보면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을 사랑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곧 행복과 기쁨의 근원입니다. 사랑은 힘의 원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내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부은 바되어 사랑이 충만한 사람이 됩니다. 사랑이 충만하면 먹지 않아도 배가 부릅니다. 사랑이 충만하면 십자가가 결코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사랑이 충만하면 fishing을 하고, 양을 돕는 것이 조금도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전폭적으로, 열정적으로, 순수하게 사랑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그녀는 옥합을 깨어 값비싼 향유를 모두 예수님께 쏟아 부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가장 귀한 것을 예수님께 드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귀한 나의 꿈과 젊음과 전공을 예수님께 아낌 없이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축복의 때에 주신 말씀입니다. 사람이 축복을 받으면 축복에 마음을 뺏겨 하나님을 잊기 쉽습니다. 사람이 망하는 것은 축복을 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축복을 감당하지 못해서입니다. 아브라함이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축복의 때에 축복을 잘 감당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셨습니다. 이삭은 그에게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이삭을 번제로 드리고자 했습니다. 그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하늘의 별과 같고 해변의 모래알과 같은 많은 자손을 약속하시고,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얻을 것이라고 축복하셨습니다(창22:16-18). 한국은 그 동안 많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단군 이래 최고의 축복이라고 합니다. 한국 역사를 보면 눈물 겨운 사연들이 많이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에는 하도 배가 고파서 왜병이 토해낸 것을 서로 먹으려고 아비규환을 이루었다는 슬픈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어떠합니까? 먹을 것이 풍성합니다. 보릿고개가 어디 있습니까? 이 축복의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축복을 주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점점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젊은이나 늙은이나 할 것 없이 쾌락과 물질의 노예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내일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오늘 놀지 못하면 늙어서 놀 수 없다며 젊음을 탕진합니다. 인생을 흥청망청 허비합니다. 과거 우리의 선배들은 허리띠를 졸라 매며 집 한 칸을 마련코자 얼마나 고생을 했는 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의 세대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먹고 입고 쓰자\' 식입니다. 이런 한국을 보고 세계적인 이코노미스트 최신호는 경상수지적자가 누증되는 가운데서도 높은 소비성향, 낮은 저축률로 인해 멕시코 사태가 올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축복의 때에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모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엄청나게 축복하여 주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일대일 역사를 귀히 여겼습니다. 그러나 점점 우리는 육신의 안일만을 사랑합니다. 일대일 역사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사랑하지 않고, 희생을 싫어합니다. 바로 지금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안주하여 축복만 따 먹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때 망하는 것은 明若觀火한 일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표현은 양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로부터 사랑의 고백을 들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양들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말씀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것처럼 말씀을 사랑했습니다(시42:1). 그는 눈이 쇠하기까지 말씀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새벽잠을 깨워 말씀을 읽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사랑하고 캠퍼스로 나아가 일대일로 양들을 도와야 합니다. 일대일의 꽃을 피워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셋째, 이웃에 대한 사랑(31). 31절을 보십시오.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사람은 이웃을 경쟁의 대상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이웃은 경쟁의 대상이 아닌 사랑의 대상이요, 교제의 대상입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 사랑을 기초로 한 사랑입니다. 그러면 이웃을 어느 정도 사랑해야 됩니까?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고 하십니다. 우리는 내 몸을 대단히 아낍니다. 우리는 꼭 세 끼 밥을 먹습니다. 우리는 자기 건강을 위해 지대한 관심을 갖습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아프면 약을 사서 먹습니다. 우리는 몸을 무척 아낍니다. 그래서 추우면 두툼한 파카를 입습니다. 우리는 몸을 열심히 가꿉니다. 그래서 크림도 바르고 옷을 다려 입습니다. 이처럼 다른 사람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자기 건강과 행복에 관심을 갖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건강과 행복에도 관심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쉽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자기 부인과 희생이 필요합니다. 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 되지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어야만이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심각한 문제는 사랑의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사랑의 빈곤으로 군중 속의 고독을 느낍니다. 현대인들이 방황하는 것은 인간 소외에서 오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기계와 사회 조직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소외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사랑이 참으로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습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롬13:10). 그러면 우리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이웃은 도움이 필요한 자들입니다. 이웃은 영적으로 기갈된 자들입니다. 이웃은 바로 캠퍼스 지성인들입니다. 이들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32,3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서기관은 큰 은혜를 받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는 말씀이 참되니이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신앙의 본질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신앙 생활이란 단지 예배를 잘 드리고 봉사를 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서기관이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네가 하나님 나라에 멀지 않도다\" 고 칭찬하셨습니다. 그 후에는 아무도 감히 묻는 자가 없었습니다.
넷째, 과부의 두 렙돈(35-44). 예수님은 성전에서 가르치시면서 먼저 서기관들의 그릇된 메시야관을 바로 잡아 주셨습니다. 서기관들은 성경 선생들로서 백성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리스도는 다윗의 후손으로 다윗의 줄기에서 탄생하셨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알지 못하고 인성만 강조한 데 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임을 강조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다윗과 같이 모든 원수들을 물리치고 지상 메시야 왕국을 건설할 것이라는 민족적 희망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장차 인류의 가장 큰 원수인 죽음을 정복하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시고 온 세상을 통치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심판주로 강림하십니다.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의 문제를 해결하는 민족적 메시야가 아니라, 인생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시는 세상의 구주가 되십니다(35-37).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서기관들의 악영향을 경계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들은 풍채를 더하고 위세를 나타내기 위해서 긴 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좋아했으며,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원했고, 과부를 도와 준다는 명목 아래 재산을 탈취하였으며, 자신이 경건하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나타내기 위해 미사여구를 써서 마음에도 없는 말로 길게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이중생활을 하고 거짓되었습니다. 서기관들이 이렇게 된 근본 원인은 하나님 앞에서 살지 않고 사람들 앞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자기를 더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들이 받을 판결이 더욱 중하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게 행해야 합니다(38-40).
예수님은 성전에 앉으셔서 무리들의 헌금하는 것을 통해 제자들에게 \'참된 연보가 어떤 것인가\' 라는 연보궤에 대하여 바른 가치관을 심어 주셨습니다. 여러 부자는 100만원 짜리 수표를 사람들이 보라는 듯이 자랑스럽게 연보궤에 넣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난한 과부는 두 렙돈의 동전을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넣었습니다. 그러나 그만 땡그랑 하는 소리가 나고 말았습니다. 과부는 연보가 너무 부족하여 죄송스러운 마음으로 넣었습니다. 사람들은 부자들이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을 보고 믿음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과부가 헌금하는 것을 보고 그것도 헌금이라고 드리느냐고 무시했습니다(41-44).
그러나 예수님의 가치관은 달랐습니다. 43,4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가난한 과부가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부자들은 다 풍족한 중에서 넣었지만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질보다 양을 보고 상대적으로 평가하였지만 예수님은 양보다 질을 보시고 절대평가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친 양보다 바치는 자의 진심과 바치는 동기를 중요하게 보십니다. 참된 연보는 여인과 같이 우리의 진심을 드리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에 나오는 마게도냐 성도들은 참된 연보에 대해 우리에게 좋은 본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들은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도 넘치는 기쁨으로 풍성한 연보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하였습니다. 또 그들은 억지로 하지 않고 자원함으로 하였습니다. 그들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렸습니다. 이러한 헌금은 하나님께서 받으심직한 향기로운 제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유일한 주가 되십니다.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은 말씀 사랑이요, 양들을 돕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일대일 성경 공부입니다. 이번 가을 학기에 일대일의 꽃을 피우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