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강 마가복음 14장 강해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가복음 (14:27-72)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36)\"

우리는 본문에서 가장 엄숙하며 비장하고 장엄한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에 놓고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 모든 슬픔과 연약함과 고독을 이기시고 십자가를 기쁨으로 지시고자 결단하셨습니다. 우리가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배워 자기 뜻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기도로 결단하신 예수님(27-42). 27,2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갈 것을 아셨습니다. 그 때 양들을 변함 없이 사랑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가랴 13:7절을 통해 큰 위로를 얻고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들에게 부활의 믿음도 가르치셨습니다.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이 연약하여 실족할지라도 말씀을 붙들고 다시 일어설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 때 베드로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29절을 보십시오.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 베드로는 제자들을 가리키며 저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갈지라도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가 오늘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3번 예수님을 부인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큰 소리를 치지만 그가 얼마나 연약한가를 아셨습니다. 그의 장담이 믿음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의리에 기초한 것임을 잘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를 아시고 그가 부인할 횟수까지 정확히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힘 있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31).\" 그는 순교할 각오까지 되어 있다고 힘 있게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얼마 못 가 주님을 배반하고 말았습니다. 이는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치 않고 깨어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간적인 의리로 충성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한 형제는 인간적인 의리로 저에게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기까지 주님을 따르겠다\' 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몇 년 못가서 떠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인간적인 의리에 기초한 충성심은 노도와 같이 밀려 오는 사단의 세력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깨어 기도하며 말씀에 기초한 신앙 생활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드디어 겟세마네에 이르셨습니다. 겟세마네는 올리브를 으깨어 기름을 짜는 틀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곳에서 자신의 피와 땀을 으깨어서 기름을 짜듯이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기도하는 동안에 이 곳에서 기다리라 하시고, 세 제자인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시면서 심히 놀라시고 슬퍼하시며 세 제자들에게 기도를 부탁하셨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내가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예수님은 지금까지 제자들에게 이런 연약한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파도와 광풍 앞에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 하느냐?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막4:40)?\" 또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이런 예수님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예수님은 놀라시고 슬퍼하시고 고민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한 인간으로서의 진실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어느 누구도 죽음을 원하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십자가의 죽음을 자원하는 사람은 더욱 더 없을 것입니다. 거기다가 사랑하는 제자로부터 배반을 당한다고 생각할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겟세마네에서의 애통과 고민은 이것들만이 아닙니다. 이 고민과 슬픔과 아픔은 세상 죄를 홀로 지신 하나님의 어린 양의 고민과 슬픔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달려 만민의 비방의 표적이 되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체포와 조롱과 멸시와 침뱉음, 저주,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잠시나마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이것을 생각하니 심히 답답하고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이는 인간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우리는 작은 십자가 앞에서도 끙끙거리기를 잘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셔야 하니 그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고민만 하고 계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비록 어리지만 동역자로 영접하고 기도를 부탁하셨습니다. 이는 자신의 연약함을 아시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자 함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린 제자들에게 기도를 요청하실 만큼 겸손하셨습니다. 기도를 부탁하는 것은 겸손한 자만이 할 수 있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만이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교만하여 자신의 약점과 연약함을 좀처럼 드러내려 하지 않습니다. 김대통령은 사람들에게 강한 이미지를 심기 위해 머리를 새카맣게 염색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연약함을 아시고 겸손히 기도를 부탁하셨습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려\" 당시에는 서서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 절대 복종코자 하는 자세입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자 하는 자세로 기도하셨습니다. 또 이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입니다. 어떤 분은 기도할 때 다리를 꼬거나 손으로 턱을 게고 기도합니다. 이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 없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땀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셨습니다. 히브리서 5:7절은 예수님의 기도를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피땀의 기도였습니다.

35b,36절을 보십시오.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 때\' 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때를 말합니다. \'잔\'이란 십자가의 고통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죽을 지경에 이르렀지만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 라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인간으로서의 소원과 자신의 고통과 번민을 진실되게 아뢰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하나님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은 인간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그것이 비록 십자가일지라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기도는 결코 쉬운 기도가 아닙니다. 육신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가장 어려운 기도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승리적 기도를 보게 됩니다. 이 기도는 \'아무래도 할 수 없으니 부득이 그렇게 되게 해 달라\' 는 것이 아닙니다. 또 속으로 불평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체념으로 하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이 기도는 십자가의 잔이 쓰지만 이것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뜻으로 믿고, 또 현재는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나 하나님의 선한 뜻임을 전적으로 믿는 믿음의 기도입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고난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큰 슬픔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실패의 잔을 마실 때가 있습니다. 이런 때 세 가지 태도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할 수 있나, 그저 모든 것이 다 운명이고 팔자 소관이지\' 하는 절망의 태도입니다. 또 하나는 \'하필이면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나?\' 땅을 원망하고, 하늘을 원망하며, 사람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반항의 태도입니다. 한편 신앙의 태도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의 깊은 경륜 가운데서 오는 줄 믿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합니다. 이런 사람은 무슨 일을 당할 때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 주옵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은 그 일을 감당할 만한 새 힘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소원과 뜻에 복종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뜻과 소원보다 하나님의 뜻이 크고 웅장하고 높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55:8,9).\" 아브라함은 소시민으로서의 꿈을 갖고 살았습니다. 그는 부르심을 받은 후에도 현실 문제에 부딪칠 때 소시민으로 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큰 스케일을 가지고 웅장하고 장엄한 인생을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열국을 품고 열왕들을 키우는 위대한 사명인이요, 복의 근원으로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는 자신의 계획과 뜻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과 소원을 영접했습니다. 그 때 그는 위대한 믿음의 조상이요, 열국의 아비가 되었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하나님의 백성 편에 섰습니다. 그 때 그는 장군이요, 목자가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꿈은 갈릴리 바다의 얕은 물가에서 피래미나 잡으며 아기와 자기와 함께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의 좁은 생각을 부인하고 깊은 데로 나아가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 때 그는 1세기의 스승이요, 목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캠퍼스에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죄악의 낙을 누리며 살도록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장차 목자 박사가 되어 21세기를 주도할 수 있는 믿음의 용사로서의 큰 꿈과 비전을 두고 부르셨습니다. 고지를 점령하여 민족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대학을 변혁시키고, 시대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빛과 소금으로서의 소원을 두고 부르셨습니다. 김뭇별 목자의 꿈은 졸업이나 하여 중소기업에 들어가 장가나 가서 아기와 자기와 함께 그럭저럭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꿈은 썰렁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 분만의 꿈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성경을 공부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두신 뜻과 소원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꿈과 소원은 목자의 나라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장차 목자 박사가 되어 향락과 물질과 거짓된 사상으로 춤을 추는 캠퍼스를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 소원과 뜻을 영접하고 열심히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이제 그는 목자 박사가 되기 위해 오늘 나고야대로 파송을 받습니다. 이처럼 누구나 자신의 좁은 생각과 계획을 부인하고 하나님께서 두신 소원을 영접할 때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는 일시적인 손해와 아픔이 있을 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각기 십자가와 사명이 있습니다. 장차 목자 박사가 되기 위해 공부해야 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500팀 일대일 성경 공부와 500명 제자 양성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우리는 세계 캠퍼스 개척의 사명이 있습니다. 이 십자가를 지고자 할 때 갈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죄 짓고 인생을 즐기고자 할 때에는 전혀 갈등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할 때에는 반드시 갈등이 있습니다. 바로 신앙 생활이란 나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 사이에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의 principle은 자기를 부인하고 사명의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막8:34).

41,4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동일한 기도를 세 번이나 반복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로 승리하시고 결연하게 일어나셨습니다. 이 모습은 승리자의 모습이요, 영적인 장군으로서의 모습입니다.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이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리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도다.\" 예수님은 기도로 두려움과 연약함을 이기시고 십자가를 감당하고자 결단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마음에는 모든 어려움과 슬픔이 사라지고 기쁨과 평강이 임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때 사람 앞에 바로 서게 됩니다. 사람 앞에 바로 서려면 겟세마네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고 제자들에게 와 보니 그들은 침을 흘리며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자기의 이상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는다고 생각하니 너무 슬퍼 잠을 자고 만 것입니다. 사람에게 슬픈 생각이 들면 만사가 귀찮습니다. 그러나 이 때야말로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6:43절을 보면 이는 저희 눈이 피곤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심각한 말씀을 듣고 보니 머리가 아파서 잠을 잤는 지도 모릅니다. 하여튼 그들은 누르는 눈꺼풀을 도저히 들어 올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깨어 있을 때 잠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38절을 보십시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깨어 기도하도록 부탁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기도 부탁을 받고도 깨어 있지 못했습니다. 기도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했을 때 그들은 위기의 때 시험에 들어 주님을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큰 경고가 됩니다.

우리가 깨어 있을 때 사방을 살필 수 있고, 원수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깨어 있지 않을 때 북한의 잠수함이 내 집 드나들 듯 드나들어도 알 수 없게 됩니다. 우리의 원수인 사단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습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깨어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를 통해 새 힘을 얻게 되고,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무장을 하게 됩니다. 깨어 있는 눈, 기도하는 눈, 이 두 가지만 있으면 어떤 환경에서도 어떤 시점에서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깨어 기도해야 할 이유는 육신이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육신이 약하여서 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육신이 연약하기 때문에 기도해야 합니다. 유혹은 나의 의지와 뜻과는 관계 없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 몇 년 한 사람도 원치 않게 넘어지고 죄를 짓습니다. 우리가 깨어 기도하지 않을 때 번번히 세속적인 소원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약하여 미혹되기도 하지만 잘 될 때에도 우리의 소원과는 관계 없이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43-72).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유다가 무리를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까지 왔습니다. 그는 이미 약속한 대로 예수님께 배반의 키스를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3년 반 동안 한 솥밥을 먹던 그가 배반한다고 생각할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군병들이 예수님께 손을 대어 잡으려 하자 이를 곁에서 보고 있던 사람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쳐서 떨어뜨렸습니다. 이는 베드로였습니다(요18:10). 예수님은 그에게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진 자는 검으로 망하느니라(마26:52)\"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왔느냐며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무엇 때문에 잡히시는가를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이 때 제자들은 다 도망을 갔습니다. 52,53절에 도망가는 한 청년이 나옵니다. 그가 마가복음의 저자인 마가입니다. 그는 자다가 예수님의 베 홑이불을 두르고 따르다가 무리가 잡으매 벗어 던지고 도망했습니다. 그는 연약한 자입니다. 그러나 부활 신앙을 체험했을 때 마가복음을 기록할 만큼 영적인 장군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려가실 때 베드로는 멀찍이 좇아 따라갔습니다. 그가 멀찍이 따라간 것은 따르자니 두렵고 안 따르자니 수제자로서 말이 아니기 때문에 엉거주춤한 상태로 불을 쬐고 있는 것입니다. 불을 쬐고 있는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승리자의 모습이라면 베드로는 패잔병의 모습과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를 때 적극적으로 따르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사단의 유혹에 말려들게 됩니다. 사단은 항상 엉거주춤한 사람을 공격합니다. 말씀을 확신 있게 믿고 분명하게 따르는 자는 감히 공격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베드로처럼 어정쩡한 자세로 예수님을 따라서는 안 됩니다. 분명하고 확신 있게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에게 심문을 받고 있을 때, 한 사람이 베드로에게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다\' 고 말하자, 베드로는 나는 제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한다며 앞뜰로 나갔습니다.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물어 보았습니다. \'이 사람은 그 당이라\' 하자 또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당황한 나머지 그만 갈릴리 사투리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장담하여 \'너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당이다\' 고 하자 베드로는 \'너희의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한다\' 며 단호하게, 초지일관으로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그는 저주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마26:69-75). 이처럼 베드로는 비천한 계집종 앞에서도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이 때 곧 닭이 \'꼬끼오! 꼬끼오!\' 울었습니다. 이 때 베드로는 말씀을 기억하고 대성통곡하며 회개했습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왜 부인했을까요?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지 않고 깨어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심을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순간에 \'나는 아니다\'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석방되어 나오시며 \'그래도 나는 그리스도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도로 영적인 힘을 덧입고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가 되심을 증거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부활 승천하셔서 심판주로 오실 것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을 강한 사람으로 착각하여 깨어 기도하지 않았을 때 예수님을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깨어 있지 않으면 정욕과 물질에 쉽게 무릎을 꿇게 됩니다. 우리가 깨어 있지 않으면 안일과 탐심의 노예가 되어 타락하게 됩니다. 우리가 깨어 기도함으로 추석 연휴를 믿음으로 승리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누구나 겟세마네와 비슷한 애통, 고독, 환난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의 기도를 배울 때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모든 고민과 애통과 환난과 고독, 그 이상을 다 체험하셨기 때문에 어떤 환경과 처지에 있을 때에라도 우리를 이해하시고 도우실 수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무쇠로 만든 무쇠팔로 오셨다면 예수님과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입고 오셨기 때문에 나의 번민과 연약함과 실패를 다 잘 아시고 도우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 기도하면서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야 합니다. 겟세마네 동산까지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에서 하신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옵소서!\" 우리가 자기 뜻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기도합니다.

[경배 찬양] 주님과 담대히 나아가
  • 글쓴이: 두나미스 신학대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