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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라기안 논쟁
기독교에 있어서 성경의 계시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지닌 인간의 본질적 의미와 하나님과의 언약에 따른 의무를 우리에게 제시해 준다. 성경적 인간학은 성경에서 제시하는 인간의 속성과 능력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믿음의 올바른 자세를 잘 제시하여 주고 있다.
삼위일체론이나 기독론과 함께 인간이 지닌 능력과 그 존재의 의미에 관한 입장에 있어서도 성경에서 어긋나는 이단적 주장들이 항상 공존해 왔다. 인간론에 있어서 펠라기우스가 성경적 사실에 어긋나는 입장을 주장함으로써, 신앙인들에게 잘못된 영향을 끼쳤으며 현대의 자유주의 신학의 기반에 만연히 깔려지는 기반이 되었다.
그의 인간관은 성경에서 제시하는 원죄를 인정하지 않은 비성경적 관점으로서, 인간의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경솔하게 여기게 되며 하나님의 영광을 제거하게 된다. 그의 주장은 당시의 제자들인 켈레스티우스(Celestius)와 율리안(Julian)을 비롯하여 이후의 소시니안주의자들(Socinians)과 이성주의자(Rationalists)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 뿐 아니라, 알미니안주의를 취하는 자들도 펠라기우스의 입장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인 반-펠라기안주의(Semi-Pelagianism)를 취하였다. 소시니안주의자들은 인간의 도덕성과 그 능력에 관한 입장과 신적 은혜의 작용에 관하여 인간의 원죄를 부인하고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펠라기우스 입장을 수용하였다. 반-펠라기안주의자들은 용어의 개념들에 있어서 모호성을 지닌 중도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지 못하며 교리적으로도 모호성을 지니고 있다.
가. 역사적 진술
초대교회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교리에 대하여 정확한 정의도 없었으며 그에 사용되는 용어에 관해서도 정확한 설명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특히 동방 교회에서는 인간의 존재에 관한 진술보다는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주장들을 더욱 선호하였으며 신비주의나 숙명론 등의 입장을 선호하며 여러 가지 면에서 영지주의(Gnosticism)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
3세기까지만 해도 타락 전(후)에 인간이 맞이한 자유의 상태와 영적인 상태 간에 있어서의 관계 등에 있어서의 그 기준점을 제시할만한 논의가 없었다. 대체로 인간의 부패성을 인식을 하였으며 인간에게 끼친 하나님의 특별한 영향을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성경적 원리와 다른 분야들 간의 관련성과 그것들의 개념들은 확실하지 못하였다. 5 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어거스틴이 ‘은총론’의 기반 위에서 인간에 관한 성경적 원리를 바르게 변증하고 조직화시켰으며 펠라기우스의 이단적 주장들을 방어하는데 공헌하였다. 어거스틴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인하지는 않았으나, 그는 성경적 입장에서 인간의 의지를 신적 은혜의 기반 위에서 서술함으로써 당시의 펠라기우스를 방어하고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펠라기우스는 수도사였으며 자신과 함께 하였던 켈레스티우스와 에클라늄의 감독이었던 율리안은 409년에 카르타고에 정착함으로써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다. 펠라기우스는 본래는 도덕주의자로서 올바른 행실에 관심이 많았으며 인간의 본성과 관련해 비관적 관점을 지녔다. 그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그 책임에 관하여 자신의 사상의 주춧돌을 삼았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의 다른 피조물들과는 달리 자연법에 종속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뜻을 실행할 수 있는 특권을 받았다고 했다. 펠라기우스는 인간들의 행동에 있어서 능력(Posse), 의지(velle), 실현(esse)이라는 특징이 있는데, 능력(Posse)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지만 나머지 두 가지는 인간에게 속해 있다고 하였다. 그는 자신의 그러한 기반위에서 인간의 원죄를 부인하고 인간의 자율적 능력을 인정하는 입장을 내세웠던 것이다.
펠라기우스는 어거스틴이 있었던 아프리카에서는 동의나 지지를 얻지 못했지만, 오리겐의 견해들이 많이 알려져 있던 동방에서는 많은 호응을 받았다. 아프리카에서는 그 감독들이 아폴리나리우스, 네스토리우스, 그리고 유티케스의 이단적 오류들을 논의하는데 집중되어 있었다. 펠라기우스주의는 어거스틴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되었으며, 431년에 개최된 에베소회의에서도 네스토리우스와 함께 펠라기우스(켈레스티우스와 율리안)가 정죄를 당하였다.
그러한 회의로 인한 종결이 있은 후 얼마간은 펠라기안주의가 지지를 얻지 못했으며 많은 반대의 교리들에 직면하여 그 자체로서 존재하기 힘들었다. 그러한 상태에서 그 사상은 ‘인간의 원죄’교리와 ‘인간의 타락’교리의 입장을 취함과 동시에 인간의 자유의지도 인정함으로써 반-펠라기안주의(Semi-Pelagianism)를 취하는 자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한 입장은 알미니안주의의 신학적 입장에도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반-펠라기안주의는 교회에 있어서는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프랑스 지역종교회의(529), 2차 오렌지 종교회의 등에서 공식적으로 정죄를 당하였다.
어거스틴은 당대의 이단적 오류들을 정리하는데 많은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그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는 입장에서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의 교리에 대하여 정확한 진술에 있어서 충분하지를 못하며 모호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칭의와 성화(Sanctification)의 의미를 확실하게 정의하지 못함으로써 그것들을 혼용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의 입장은 성화에 대하여 2차적 칭의로 간주하는 카톨릭의 견해를 보여주고 있다. 올바른 신학적 입장에서 우리는 성경의 진술에 대하여 인식을 제한하며 언제든지 어떠한 형태로든지 자신을 한정시키며 진리의 결단을 그 성경적 진술 위에서 세워야 할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
나. 타락-원죄
인간이 지닌 영적 능력과 도덕적 성격에 대한 성경적 진술은 인간의 능력들과 자신의 가치의 개념을 즐길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범죄자들로서 그에 따른 모든 결과를 져야만 하며 자력만으로는 자유로워 질 수가 없다. 그러한 사실을 부인할 때 선입관이나 비성경적 주장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의 죄로 인해 인간들에게 도덕적 타락을 지니게 되었다. 만일 성경적 진리와는 달리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는 능력을 지닐 것이다. 펠라기우스 주의를 취하는 자들은 이러한 성경적 사실에 기반을 둔 원죄와 무능력의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인간의 본성에 있어서 불경건성과 타락의 기원과 이유에 대한 심의에 있어서 그 어려움은 인간이 도덕적 조건의 특징으로서 실질적 존재의 표현과 그 증거에 매우 많은 영향을 끼치는 요인이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의지가 타락의 결과로서 범죄할 수밖에 없다는 선천적 편향성을 지니고 있다는 성경적 개념을 거부하였다. 게다가 그는 선을 선택하도록 인간의 의지에 가해지는 어떤 특별한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가 존재한다는 점도 부인하였다. 그가 ‘자유의지’라는 용어를 통해 의지했던 것은 (1)범죄를 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의지 자체, (2)이성을 통한 하나님의 영원한 상벌에 관련된 법에 대한 계시, 그리고 (3)모세의 율법과 그리스도의 가르침 및 그의 모범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인간이 저지른 최초의 원죄 이후로 지속적인 마음속에서의 악한 생각들이 가득차 있다는 사실을 성경의 기반위에서 바르게 인식한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자신의 이성만으로는 존재와 실재에 관한 진술이나 인간 생각의 어두움과 그에 대한 원인들을 올바르게 인식할 수 없을 것이다. 타락과 범죄 행위에 관한 아담의 최초의 범죄는 인간의 실질적 조건에 보다 직접적 관계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후손들인 모든 인간들은 아담 죄의 전가(Imputation)가 실질적 구성의 중요한 특징을 이루는 구성 요소를 형성하며 그들의 실질적 범죄의 직접적인 한 부분으로서 소유하게 되었다.
어거스틴은 아담의 인류의 대표적이며 머리가 되었다는 원리를 변호할 때 완전하게 정립되고 예증되었던 위대한 진리들을 모든 자들이 볼 수 있도록 잘 진술하였다. 아담의 범죄는 합법적이며 사법적인 의미에서 그들의 본질이 된 것이다. 인간들이 전적으로 타락한 도덕적 본질을 지니고 세상에 태어나서 하나님과 그의 율법에 관련하여 타락을 했다는 사실을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도록 제시된 유일한 진술이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서 지니는 본질상의 모든 것은 편협이나 하나님을 경시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자신들에게 부여된 의무들을 무시하고 그 분의 율법을 실행하지 않는 경향을 가리키는 것이다. 인간의 보편적 타락과 부패에 관하여 아담과 모든 인류가 관련되어 있으며 그의 최초의 죄에 대하여 정확히 진술되어 있는데,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의 법칙, 구조, 또는 언약의 기반 위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러한 진술은 그 자체로서 완전히 공정한 것이며 아담의 행위가 모든 인류에 대한 판결이 되었다는 것을 볼 때도 적용이 되는 것이다.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간의 논쟁에서 가장 큰 차이를 지녔던 사실은 인간의 원죄와 타락에 관한 것이며 그에 따른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성화에 관련된 사실에 관한 입장이다. 자유와 속박의 주제, 인간의지의 자유와 노예상태 등은 원죄의 교리와 인간을 회심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 교리 간에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 인간의 전적 타락이라는 교리는 인간 의지의 실질적인 노예상태와 속박의 교리를 의미하거나 그와 직접적 관련을 지니고 있다.
다. 회심-주권과 유효한 은혜
어거스틴과 그의 반대자들이 주로 다루었던 주제들은 하나님 은혜의 속성, 중요성, 그 근거들, 그에 따른 결과와 관련되었다. 펠라기안주의자들도 하나님의 은혜와 호의는 인정하였으나 하나님의 주권적 실행을 경시한 채 인간 스스로를 각자 구원의 저자들로 만들었다.
펠라기안주의의 인간의 행위로 이끌었던 하나님의 은혜를 두 가지로 언급하였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인간성에 부여하는 능력과 재능들이 자력으로 자신을 돕고 지지하도록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이 소유하도록 해 주셨다는 것이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시며 지도하시려고 주셨던 계시와 섭리적 환경들을 구성하신다는 점이다. 그들은 인간에게 무능력의 상태로 떨어뜨린 도덕적 타락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그들도 하나님의 초자연적 영향이 존재할 수 있다고 언급했으나 그러한 영향들이 구원에 관한 것들을 이루기 위한 필수적 요소라고는 보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들이 그것들을 받을 만하고 그것을 받기 이전에 자연적 능력을 증진시켰던 것에 대한 공로로 수용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이 인정하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사역은 인간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그 사역 자체의 근원, 성격, 그리고 결과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우리는 성경에서 가르치는 근본적인 원리로서 구원의 길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본질적인 것으로서 다음의 두 가지를 인식해야 할 것이다. 첫째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한다는 점이다. 둘째는 인간들이 도덕성을 지녔지만 타락으로 심하게 오염되었으므로 절대적으로 필요한 과정은 하나님께서 성령의 초자연적 은혜로운 사역이 없이 본질적으로 성취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회개와 성화의 과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성령을 통한 역사의 필요성을 인식하는 자들도 많은 오류와 혼돈의 견해를 지니고 있다. 그러한 잘못된 오해의 한 부분으로서 성령의 존재에 대하여 위격을 지닌 하나님으로서 인식하지 못하고 단지 영향을 주는 말씀이나 사실에 불과한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그들은 성령의 은혜로운 사역을 사람들에게 진리의 도움을 통해 이해할 수 있도록 조명하는 것으로 제한하였다.
어거스틴은 믿음이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과 그분의 성령의 활동으로 사람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만족하는데 어려움을 지녔으나, 그러한 사실은 성경에서 명백하게 제시해주고 있다. 성령의 사역을 가장 애매하게 만들었던 시도들 중의 한 가지는 본질상 죄와 범죄 이전에 존재하였던 것으로서 믿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성령의 사역으로 영적인 삶은 주입되며 진리를 파악하고 순종하는 능력이 인간의 마음에 전달된다. 인간의 능력은 완전한 속박상태와 노예상태로 인하여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중생되어야 하고 성령의 직접적 작용으로만 중생될 수가 있다. 구세주를 믿고 회개함으로써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은 확실한 이유로서 성령의 초자연적 작용까지 추적이 될 수 있다.
어거스틴은 은혜의 불가항력을 언급할 때 인간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해 자기 의지의 혁신으로 인해 그 능력이 만족할 정도로 발휘되었는지 그 결과를 이루는 데 그 능력이 요구되었는지 확실하게 효력 있게 자발적으로 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커닝햄은 어거스틴과 그의 사상을 따르는 자들이 성령의 역사에 대한 불가항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언급하였다. 인간 내에서 모든 선의 참된 원인으로서 회심하고 중생하는 은혜의 교리와 인간들의 믿음을 역사하여 그들을 그리스도께 연합시키는 하나님의 효력 있는 활동을 추적할 수 있는 것으로서 영생에 이르게 하는 개인적 선택의 교리 간에서 그 관계의 고리를 형성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이 거부된다면 성경의 진술에 불일치할 수밖에 없으며 반박의 기반을 내어 주게 된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자신들의 창조주이시며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이면에서는 인류가 영향을 받지 않으며 모든 인류의 미래에 대하여 모든 것을 개방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단지 관찰하시는 분이신 ‘예지자’에 불과하여 그 분 없이도 사건들이 일어날 수 있도록 여지를 남겨두게 되신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루시는 모든 것에 그 분이 보거나 예견하는 것에 의해 지도를 받아야만 하는 관찰자의 상태로 격하시키는 것으로서 알미니안주의 입장과 다를 바 없다. 이러한 두 가지의 입장들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찾을 수가 없다.
라. 성도의 견인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에서 그의 오류를 바르게 평가하였던 어거스틴이 신앙인들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것으로 언급한 것이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Saints)이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어 중생한 자들이 실질적으로 최종의 구원의 순간까지 확실하게 견딜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카톨릭의 입장에 있어서는 성도의 견인이 정립될 수 없는 상황을 이루고 있다.
하나님께서 영원부터 선택하셨던 구원의 대상들에게 자신의 목적과 작정을 실행하시기 위해 그들에게 믿음과 회개를 주셨으며 그로 인해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들의 본성이 중생하게 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한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 아래서 하나님만이 행하시는 영원한 구원의 계획의 작정과 완성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보여주는 인간에 관한 하나님의 은혜와 예정에 관하여 다룰 때 확실하고 확인할 수 있는 인간의 최종적 견인을 준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기독교에 있어서의 참된 교리들로서 인간의 전적 타락, 회심한 후 하나님의 극복할 수 없는 은혜, 영원한 선택, 그리고 영원한 견인 등의 상호간의 밀접하고 완전한 관계를 볼 때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활동을 잘 알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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