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강 요 3:16-21절 강해

하나님의 사랑


요한복음3:16-21

요한복음 3장16절은 너무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왠만한 사람들은 외우고 있습니다. 선교 단체에서는 이 말씀으로 전도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말씀을 가지고 전도도 하고 잘 외우고는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을 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너무 성경 본래의 의미를 모르면서 그것을 인용하고 외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16절)
이 말씀을 보통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하나님께서 타락한 세상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아들을「이처럼」보내셨으니 이것이 어찌 큰 사랑이 아닌가? 그러니 독생자로 오신 예수님을 믿자 그러면 영생이 내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종 C.C.C 나 네비게이트 같은 선교 단체에서는 이 말씀을 이같은 식으로 이해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니 당신도 지금 당장 이 예수을 믿기만하면 되니까 믿는다고 말해라.그러면 영생이 주어진다. 어려운 것 아니지 않느냐? 지금 예수님을 믿겠다고 해 봐라.’라는 식으로 전도합니다.
정말 그럴듯해 보이는 해석이요, 그럴듯한 전도 방식 입니다. 정말 그런 의미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이 말씀을 바로 이해 하려면 크게 다시 눈을 뜨고 14-15절을 보셔야 합니다.
“(요 3:14-15)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4절에서 무어라 합니까?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예수님도 들려야 한답니다. 그러고 난 뒤에 16절이 나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16절 다시 읽겠습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 14-15절 말씀과 16절 말씀을 비교해 보면, 뒷 부분에 있는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하려 하려 하심이니라’는 곳은 거의 같은 말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14절 앞 부분에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라는 말로 되어 있고, 16절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로 되어 있습니다. 잘 보십시오. 여기에서 중요한 단어가 무엇이겠습니까? 16절의 ‘이처럼’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니 희한한 해석이 나오는 것입니다.‘이처럼’이라는 말은 어디와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까? ‘이처럼’이라는 말은 앞의 14절과 연관이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했다는 말은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장대에 달아 든 것처럼 - ‘이처럼’- 예수님(인자)도 들리게 하려고 하나님이 세상에 독생자를 보내셨다는 말입니다.민수기 21장에 나오는 불뱀에게 물린자는 지난 주에 살폈듯이 모세와 하나님에게 불평하며, 원망하던 자였습니다. 이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준비시킨 것이 장대 위에 달게한 놋뱀이 있었습니다.그것을 달게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교훈을 단단히 줄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뱀을 나무 위에 달리게 한 것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뱀은 죄의 원흉입니다. 이 죄의 원흉이 저주와 심판을 받게 됨으로 이스라엘이 살아 남게 된다는 것을 알아라는 것이지요. 이처럼 예수님께서 인단들을 대신하여 죄의 원흉이 되어 저주의 나무에서 달려 심판을 당하는 일을 자처하겠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저주 받아야 하는 데 말입니다.
자 여기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게 있습니다.바로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처럼’‘모세가 뱀을 든 것처럼’ 예수님도 아버지 하나님께서 바로 인간들을 위해 ‘이처럼’저주를 받고 심판을 받게하려고 보냄 받는 일이 벌어 졌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이 저주 받고 심판 받는 분으로 준비 된 것은 인간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준비 하신 것입니다. 어디 인간이 그런 분을 보내 달라고 했습니까? 어디 인간이 그런 분을 기다렸습니까? 어디 그런 분을 기다릴 자격이 있었습니까? 인간은 이런 분을 생각도 못했고, 그런 분을 기다리기는 커녕 배 체워 주는 분이나 기다리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살리기 위해 예수님을 저주의 자리에까지 내려 가도록 보냈다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그런 분을 보낼 테니 너희들은 ‘십자가 모형 만들어서 다듬어라든지, 예루살렘을 향해 절을 몇번 해라든지,구원을 위해 어떤 한 것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어떠한 행위나 능력이 구원을 위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아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님께서 인간에게 ‘너희들은 구원을 위해 이것을 해라. 저것을 해라’가 있었습니까?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면 꼭 이런 질문을 하시는 분이 생길 것입니다.“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라”(16절)는 말에서 ‘저를 믿는 자마다다 영생이 ’주어지지 않느냐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믿어야 되는 것이 아닙니까? 라고 질문할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을 하시는 분은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데서 나온 질문인 것입니다. ‘믿는다’게 무엇입니까? ‘믿는다’는 것은 행위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현재 전혀 자식도 없고 사라의 몸은 전혀 얘기 낳을 수 없는 상태의 고령의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그를 이끌어 밖으로 나가 이렇게 말합니다. (창 15:5)“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하자. 아브라함이 이를 ‘믿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믿은 것을 그의 의’로 여겼다고 합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이것이 행위입니까? 만약 행위였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렇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모순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롬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철저히 의로움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믿은 ’것이 행위라면 하나님이 그에게 ‘의’로 여긴 것은 무엇입니까? 행위가 아니라 철저히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입니다. 드러다면 아브라함이 ‘믿으니’ 하나님께서 ‘의’로 여겼다고 할 때 믿으니라는 말은 ‘아브라함 자신에게서 감히 이러한 일을 발생시킬 능력이 전혀 없음을 알고 항복의 태도’를 가리켜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나에게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저를 믿는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바로 여기서 말하는 믿는 자라는 말은 자신의 결단을 내리고 믿기로 한 사람을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전혀 자신의 결단과 관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믿는다는 것’은 철저히 인간의 행위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철저히 자신의 의도와 전혀 상관없이 인간 나에게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는 자를 가리켜 ‘믿는 자’라는 말입니다. 만약 믿는 일이 나에게 있다는 것은 나의 행위로서의 믿음이 발동한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출발 되지 않은 것이 나를 덮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믿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는 자가 발생했다면 그가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해야 된다고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을 위해 타락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예수님으로 제공하고 이것에 대해 인간이 선택함으로 구원이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니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이 있다’는 이 말씀을 ‘너희들 뭐하니 믿어라니까? 선택하기만 하면 영생인데 그것도 못해 이 바보야... 이러고 있는 것입니다. 결코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의 사랑이 이런 것이라면 구원은 누구 손에 달린 것이 됩니까? 인간의 손에 달린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면 얼마나 불안한 사랑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에게 좀 믿어 달라니까?’구걸식의 사랑이 아니라, 인간에게 그 어떠한 행위나 어떠한 조건을 제시하지 않는, 아니 그 어떠한 것이 구원에 통하지 않으니 바라지도 않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인간들을 위해 저주와 심판을 받을 하나님되시는 예수님을 보내는 사랑인 것입니다. 이 사랑은 인간을 깜짝 놀라게하는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런 사랑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철저히 조건적이고 주고 받는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성도는 이 같은 사랑에 대해 늘 감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에 감각이 없으면 ‘하나님 저 이렇게 해 드리지 못했는데 하나님 저를 사링하십니까?’ 이럽니다. 스스로 기준을 세우지 마십시오. 처음부터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롬 5:8)“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사랑은 이 세상의 어떠한 것이 우리를 대적할 수 없게 한다고 합니다.
(롬 8:31)“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 그러면 이 사랑의 크기가 어떠 한가를 살펴 보겠습니다.
(롬 5:6)“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롬 5: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