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배 요한복음 4:20-26 인간을 가만히 두면 인간은 모여서 종교를 만듭니다. 누가 종교를 만들라고 강요했기 때문도 아니요, 누가 종교의 중요성을 인식시켜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종교는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에 스스로 만듭니다. 왜 종교를 만듭니까? 종교를 만드는 이유는 천재 지변이 일어나면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신이 노여워하여 그렇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신을 달래기 위해 제물을 바치게 되었습니다. 또는 농산물이나 가축이 병충해를 입게 되었을 때 신의 노여움을 받은 것으로 알고 노여움을 거두고 풍년과 가축의 건강을 달라고 기원하게 된 것입니다. 가족 중에 병이 들어 죽게 되면 신의 노여움으로 알고 가족의 건강을 기원하는 일을 했습니다. 고기를 잡는 바닷가에서는 바다의 신이 있기에 바다의 신께 제물을 드렸고, 땅의 농작물을 가꾸어 먹는 곳에서는 땅을 지배하는 신이 있기에 땅을 지배하는 신께 제물을 바쳤습니다. 지진이 일어나면 땅을 지배하시는 신이 노여워했다고 봅니다. 산에 화산이 터지면 산의 신이 노여워했다고 봅니다. 이러한 인간의 종교성은 그들이 살고 있는 지형 환경을 지배하는 것을 신으로 삼게 된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종교성을 성경을 통해서 보면 애굽의 종교들입니다. 하수 물을 피로 만드는 재앙, 개구리 재앙, 이 재앙, 파리 재앙, 짐승들을 쳐서 심한 악질 재앙, 사람과 짐승에게 독종 재앙, 우박 재앙, 메뚜기 재앙, 흑암 재앙, 장자의 죽음의 10가지 재앙을 통해 인간의 종교성을 잘 보였습니다. 10번째 재앙인 인간의 장자를 치는 것을 통해서 인간의 종교성의 최고의 정절이 바로 인간을 신격화시키는 것임을 보여 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종교성을 무너뜨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종교성을 북돋아 주거나 하여 잘못된 종교성을 고쳐 하나님께로 방향을 틀게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종교적인 열성이 있는가를 중요시하고 있지 않고 참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는가를 알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했던 것은 인간에게 기대를 걸지 말라 였습니다. 장자를 하나님께서 죽음의 사자를 보내 죽이신 것은 인간의 기대를 무너뜨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인간의 인간 됨을 만드는 것은 인간에게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집안에는 장자를 살리기 위해 1년 된 흠없는 어린양을 대신 잡아 피를 흘리게 했습니다. 이 의식은 인간을 하나님께서 대신 죽게 하는 것을 통해 참 인간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죽음의 사자가 넘어가 이스라엘을 살렸음을 알라고 유월절을 기념하여 제사(예배)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제사)예배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예배란 타락한 인간을 살리기 위해 희생 된 것을 알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1)이렇게 애굽에서 나오게 된 이스라엘은 그 이후부터 어린양의 희생을 기억하여 예배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예배하는 자로 남았습니까? 아니었습니다. 모세가 40일 동안 시내산에 올라가 여호와 하나님께 증거판을 받으려 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산밑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이것이 애굽에서 우리를 인도한 하나님이라면서 예비(제사)를 했습니다. 왜 그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예배를 했습니까? 보이는 것으로 위안을 받고 싶은 것입니다. 바로 타락한 인간의 모습을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도 그 예로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렇습니다. 인간은 예배의 대상은 언제나 그랬듯이 보이는 것으로 하고 살았고 그래야만 예배하는 것 같나 봅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이것이 인간에게 있는 예배의 대상의 시각화입니다. (2)그리고 예배를 정치적인 것으로 이용한 사람이 있습니다. 솔로몬이 죽고 난 뒤 이스라엘이 10지파와 2지파로 나뉘어졌을 때 북쪽은 이스라엘 남쪽은 유다가 되었습니다. 이 때 북 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은 남쪽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하려 백성들이 가는 것을 걱정하여 금송아지 둘을 만들어 벧엘과 단에서 예배하게 했습니다.(종교의 정통성을 잊고 있음을 보이려고) 이와 같은 과정에서 북 왕조는 예루살렘에서 예배하지 않고 벧엘과 단에서 예배하는 것의 정당성을 옛날 아브라함이 그리심 산에서 단을 쌓은 것과 연결하여 누군가가 정당성을 이야기했을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과정 가운데 예배는 왜곡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배를 누구한테할 것인가? 가 아니라 어디에서 해야 하는가? 였습니다. 곧 북왕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장소가 예배의 중요한 문제로 등장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요4: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고 예수님께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요4:21)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배를 어떤 장소에서 예배하는 것이 좋은가? 다시 말하면 어떤 공간이 예배하는 것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배는 이미 출애굽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예배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예배를 어디에서 하는 것이 중요한가? 가 아니라 예배의 대상이 어떤 분이며 어떤 일을 하신 분인가? 를 바로 알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의 정신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기억해야 합니다. \"(요4:21)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잘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예배를 하는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할 때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때\"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죽음의 때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남 유다 왕국이 예배하던 예루살렘도, 북 이스라엘 왕국이 모여 예배하던 산에서도 예배의 출발점이 아니라고 합니다. 오직 예배의 출발점은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방되어 나오게 되었을 때 벌어졌던 어린양의 희생을 출발점으로 삼았듯이 예수님의 희생의 죽음이 예배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확실히 정리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철저히 예배는 누구를 위해 있는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인간을 구원했다는 것을 확실히 해 두려는 것입니다. 결국 예배는 인간의 한계를 발견한 그 자리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교회 와서 예배한다는 것은 인간의 어떠함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 돌 예배, 생일 예배, 출판 기념 예배, 헌당 예배, 개업 예배, .....(예배를 바로 알았다면 이런 예배를 할까요?) -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4: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요4: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요4:25)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요4: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