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강 요 4:46-54절 강해

두 번째 표적


요한복음 4: 46-54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왕의 신하 중 어떤 사람이 그의 아들의 병을 예수님께 고침을 받은 사건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가나에 도착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행하셨던 예수님의 많은 기적들을 보고 온 사람들로 인하여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갈릴리 지방의 많은 사람들에게 퍼졌습니다. 마침내 소문을 들은 왕의 신하도 그의 아들이 심히 아파서 죽게 되자 예수님께 달려 왔습니다. 그는 가버나움에 사는 사람으로서 가버나움에서 가나까지 약 34km, 걸어서 약 4시간 정도 걸리는 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찾아와 \'내 아들이 죽게 되었으니 오셔서 고쳐 주십시오\'라고 청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하신 후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고 하셨습니다. 그 사람은 다음날 가는 도중에 그의 종들을 만나셔야 아들이 나았다는 얘기를 듣게 되는데 나은 시각을 물어보니 예수님께서 가라고 하신 그 시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신하의 온 집은 \'다 믿었다\' 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야 병을 예수님께서 병명도 모르시고, 만나보시지도 않으시고,시공을 초월하여 말씀으로 단번에 낫게 하시네.대단하다.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셔... 이제 병이란 병은 예수님께서 다가져 가야겠네. 이렇게만 이해 하면 성경의 본래의 의미를 놓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무엇을 알려 주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것을 확실히 알기 위해 예수님께서 하신말씀을 살펴 보아야 합니다. 47-48절을 다시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요 4:47)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 하니 저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요 4:4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는 말씀에서 핵심이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왕의 신하를 칭찬하고 있는 것인가 잘 보시기 바랍니다. 칭찬이 아니라 책망입니다.
곧 이 말씀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수준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 만드셔야만 대단한 분으로 취급하려고 덤벼던다는 것입니다. 병든 사람을 눈에 보이게 고쳐야만 대단한 일 하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믿으려 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인간의 눈에 보이는 위력을 보이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왜 표적과 기사를 보이셨습니까? 예수님께서 표적과 기사를 보이는 것은 어떤 위력을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려 오신 분인가를 알리려는 목적에서 였습니다.

예수님의 기적 속에는 자신을 소개하시기 위한 표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두 번째 표적(싸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왕의 신하의 관심이 어디 있었습니까? 47절에서 \'예수님 내려오셔서 내 아들 고쳐 주십시오\' 48절에서도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 오소서\' 두 번이나 간청합니다. 어찌보면 예수님을 의지하는 믿음 좋은 사람 같아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닙니다. 관심은 예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병에서 낫는데 있었습니다. 인간은 이렇습니다.

마치 에밀레 종을 치고 있는 곁에 서있는 사람들이 에밀레 종 소리가 \'뎅\'하고 은은히 울립니다. 사람들은 이 소리를 들고 에밀레 종 소리에 감동을 하여 \'야 종소리 좋다. 정말 죽인다.\' 이렇게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한결같이 \'야 그 종 뭐로 만든거야 동으로 만들었네 그 종 엿 바꾸어 먹으면 엿 대단히 많이 주겠네\'하는 깃입니다. - 예술적인 감각이 전혀 없죠.
이처럼 인간의 관심은 자기 자신들이지 인간을 창조한 창조주를 못 알아 먹는다는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들 눈 앞에 오셨는데도 불구하고 믿기는커녕 기적이나 일어키면 뭐 나에게도 눈에 보이는거 뭐 안해 주나? 이런 쪽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신하의 집으로 가시지 않으십니다. 단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라고만 합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예수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갔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왜 기적을 일으킨 것입니까? 정말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킨 이유가 어디에 있었던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신하의 아들을 병에서 낫게 해 주시고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53절에 보면 \"(요 4:53)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 때인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니라.\" 결국 예수님께서는 그 집안 사람들을 믿게 하는데 목적을 두고 기적을 일으킨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가지 살펴 보고 갈게 있습니다. 신자에게 주어지는 병이나 어려움은 그것을 없얘기 위해 기도하라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 연단한 금과 같이 되어지게하기 위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간섭임을 앎니다.
자 이제 더 나아가서 욥엑서 하나 더 배웁시다. 욥기를 보시면 어느날 사탄이 \"하나님이여 하나님께서 축복하시지 않는데 하나님을 섬길 사람이 있겠습니까?\" 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에게 \"욥의 생명을 제외하고 다 쳐도 좋다\"고 했습니다. 그 후 욥의 집은 사탄이 자녀와 재산을 몽땅 다 쓸어 갔습니다. 심지어 자기 아내까지도 도망갔습니다. 자신도 병들고, 이런 시련을 당한 욥은 다시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리게 되었을 때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욥기42장5절에서 욥은 시련 후 내린 결론입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이 만난 시련은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을 귀로 듣는 정도가 아니라 눈으로 생생하게 볼 수 있는 실감나시는 하나님으로 믿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욥에게는 시련이 병이 아픔으로 주어 졌지만 복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더 확실히 믿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아픔이 단지 저주가 아니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자에게 문제가 무엇인가하면 아픔이 오면 그것을 괴로워 한다는 것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아픔을 아픔으로 느끼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이런 병을 무슨 병이라고 합니까? 문둥병입니다.

저가 전에 있던 교회 장로님들과 교인들이 자주 화상을 입었습니다. 화로에서 그런 것이 아니라 방에서 그랬답니다. 겨울에 불을 너무 때어서 방바닥 장판이 녹을 정도로 불을 땐방에서 주무시다 그랬답니다. 그 분들이 잠을 너무 깊이 들어서 그랬냐구요? 아닙니다. 그럼 무슨 이유로 ... 그분들은 나병환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문중병은 감각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화상을 입는 것입니다. 아픔이 있다는 것은 좋은 현상입니다. 복입니다. 그래야 더 이상 몸을 상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에게 재난이 있고 고난이 있고 아픔이 있다는 것은 복인 것입니다. 감각이 있다는 것은 더 주님을 향하게 합니다. 더 주님을 믿는 자로 남게 됩니다. 더 이상 지옥으로 가는 사람들과 같이 살아 가지 않게 됩니다. 신자의 가장 큰 병은 죄짓고 더러움 속에서 그것을 이상하지 않은 것처럼 좋아하면서 사는 자들입니다. 마치 무좀 걸린 사람처럼 말입니다. 무좀은 끍어면 시원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시원함을 맛보기위해 무좀에서 탈출하려고 하지않고 끍어 시원함을 느끼는 스릴 있는 인생을 살려는 자가 있다면 심각한 자가 아니겠습니까?
이제 오늘의 말씀을 정리 합시다. 왕의 신하를 통하여 인간을 보았습니다. 정말 인간들은 자신의 처한 일(신하의 자기 아들의 병)을 처리하는데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은 그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인간에게 있는 일을 해결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인격에 초점이 모여 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땅에 오셔서 저주의 죽음을 치루려 오신 분인가? 무엇 때문에 니고데모 같은 인간은 거듭나야 된다고 말씀하시고 계시는가?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예수님께 관심을 가져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리기 위해 두 번째 표적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