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강 요 5:1-9절 강해
베데스다
요한복음5:1-9
오늘의 이야기는 예루살렘에 있는 제사용 양들이 들어오는 양문 곁에 베데스다라는 곳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 곳에는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 곳에 누워 있는 이유는 그 연못에 가끔 천사들이 내려와서 연못의 물을 휘젓곤 하였기에 먼저 들어가는 환자는 병에서 나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곳에 병이 중하여서 38년이나 투병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 병자를 오늘 예수님께서 만나 병이 중한 줄 아시고 \"네가 낫고자 하느냐\" \"네 자리를 들고일어나 걸어가라\"는 말씀으로 그 병자를 낫게 해 주었습니다.
분명 오늘 말씀 속에서 예수님께서 이러한 행동을 하신 것도 뭔가 메시지를 남기고 있음이 분명한데, 무슨 이야기일까요?
(먼저 우리가 잊어서는 안되는 것은 요한 복음은 철저히 말씀 한마디 예수님 행동 하나 하나가 메시지라는 것을 짖지 마십시오.)
그럼 천천히 추적해 보겠습니다.
오늘의 이야기의 장소는 베데스다입니다. \"베데스다\"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인가 하면 베이트(집) 와 헤세드(은혜)라는 두 말이 합쳐져서 만들어 진 말입니다. 곧 \"은혜의 집\"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 베데스다 곁에는 양들이 제사를 위해 죽으려 들어오는 문, 양문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다시 표현하자면 제사로 희생될 양들이 지나는 양문 곁에 은혜의 집이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결국 이것은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까? 양문 곁에 베데스다가 있었다는 것, 지금 이 분위기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엇을 느꼈겠습니까? 희생의 짐승들이 양문으로 통과하는 것을 보면서 베데스다에 앉아 무엇을 깊이 생각 했겠느냐는 말입니까? 그 양문을 통과하여 인간의 죄를 위해 희생되어질 짐승을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생각했을 것이 뻔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은혜의 집\"에 누워 있는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 그리고 38년이나 투병 생활하고 있는 자를 보십시오.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한결같이 은혜를 모르고 있습니다. 겨우 기다리고 있는 것은 천사가 내려와 물을 한 번 휘저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38년된 환자를 고쳤다는 것은 크나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예수님께서는 1년도 아니고, 10년도 아니고, 아니 20년도 아닌 38년이나 병석에서 꼼짝도 못하고 있는 환자를 말씀 한마디로 고쳐 자리까지 가지고 가라고 하셨단다. 그러니 38년 이하의 병자들은 다 예수님께로 앞으로 나란히\" 이런 말씀입니까? 결코 그런 말씀이 아니지요. 지금 예수님께서는 \"은혜의 집\"에 모인 자들뿐만 아니라, 은혜, 은혜 말하면서 은혜를 통 모르는 자들에게 은혜가 무엇인가를 알리고 싶으신 것입니다.
다시 본문 5-7절을 보십시오.
\"(요5:5) 거기 삼십 팔년 된 병자가 있더라. (요5: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요5: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님께서 38년된 병자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러자 이 사람은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주여 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주\"되시는 분 인줄 알았다는 말이 아니다. 예수님이 누구신 줄 모르고 있다.<요5:13>)
여기에서 한 번 생각 해보아야 합니다. 만약 이 사람이 은혜의 집에서 은혜가 무엇인줄 알았다면 예수님께서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었을 때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 마땅히 \"예,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겨 낫게 되기를 바랍니다\"이렇게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38년된 환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끝까지 자기 자존심은 있어서 자기의 구원을 위해 뭔가를 해야한다는 것을 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서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인간은 이렇습니다. 곧 죽어도 인간의 힘을 빌리기를 원하고 자기 능력을 사용하여 구원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인간의 자존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38년된 병자에게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에 늘어져 누워 있던 38년된 병자에게 입에 침이 튀기는 기도도 하지 않았으며, \'믿씁니다\'라고 하는 쌍 시옷을 붙여가며 고함도 안쳤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삼창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말씀으로 그 사람을 일으켰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이런 인간, 38년된 병자를 비롯하여 은혜를 모르면서 은혜의 집에 늘어져 있는 인간들에게 은혜가 무엇인가를 보여 주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하고 싶은 메시지 였습니다.
보십시오. 이것이 당시의 이스라엘의 현실이었습니다. 은혜의 집이라는 곳에서 이런 꼴이 벌어지고 있으니 다른 종교 지도자들이나 성경을 안다고 하는 바리세인 서기관들 대제사장들도 어떻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은혜를 말하면서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고 있으니 도대체 은혜를 알고 있다는 말입니까?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까?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면 5장10절을 보시면 당시 유대인들이 은혜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요5: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38년된 병자가 낫게 된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시비를 걸고 있습니다. \"안식일날 자리를 들고 노동을 하는 것이 옳으냐\"는 것으로 말입니다. 이렇게 말함은 율법에서 말하는 안식일의 취지를 전혀 모른 데서 나온 말인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은 출애굽기 20장 2절에서 \"애굽에서 종 되었던 시절 어린양의 희생의 덕택에 이제 안식이 주어졌으니 안식일을 지키라\"는 데서 출발했습니다. 곧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이 죽지 않고 대신 희생당한 어린양이 이었다는 것을 기억시키기 위해 안식일은 지키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안식일을 지키는 자는 \"아! 하나님의 은혜, 은혜\"이렇게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38년된 병자가 자리를 들고 갔을 때 무어라고 하고 있습니까? \'너 안식이 법했어 자리를 들고 가다니, 회개해\' 이러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바로 알고 있었다면 \"그래 바로 이거야! 옛날 하나님의 은혜 덕택에 안식일이 있었듯이, 38년된 병자를 하나님의 덕택에 이렇게 병에서 해방 시켜 놓으시는구나. 이 사람을 안식케하시는 분이 누구지?\" 이렇게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은 은혜를 잊어버리고 오직 안식날 \'무엇을 했느냐 안했느냐\'하는 형식주의에 빠져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안식일이 왜 주어졌는지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은혜의 집에 드러누워있는 유대인들도 은혜란 개념이 무엇인줄 모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고작 종교적인 인간이 되어 있을 뿐인 것입니다.
바로 오늘날 교회가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무엇을 해야 하나님을 기뻐 시게 할까? 내 아이가 대학 들어가야 하나님께 영광이 될 텐데... 내가 교회에 얼마나 헌금을 해야, 몇 번이나 주보의 헌금자 명단에 기록되어야 하나님께서 좋아 하실까? 몇 날 몇 칠을 금식하며 철야를 해야 하나님께서 감동하셔서 우리 교회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내 소원이 이루어질까?
예수님께서는 이런 인간을 참아 보시지 못하십니다. 이런 인간은 하나님의 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38년된 병자의 병의 중함을 보시고 그 사람을 골라서 도대체 은혜의 집에 드러누워 은혜가 뭔지 모르고 은혜를 왜곡시키는 인간들에게 은혜를 알리고 계신 것입니다. \"인간들아 은혜란 너 힘이 전혀 개입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인 줄 좀 알아라\"는 것입니다. 일방적으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였습니다.
결국 은혜란 인간에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인간은 고작 생각해 내는 것은 38년된 병자 같이 자기 힘 타령만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은혜! 좋은 것이지요. 그래도 미안해서 어찌 합니까? 내가 조금이라도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준비해서 하나님의 은혜에 보탬이라도 되어야지요. 이럽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인간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은혜에 보탬이 되는 인간이 없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형제를 돌아보고 구제하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거나 보탬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구원되게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인 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철저히 은혜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준비하신 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은혜를 아는 사람은 교회에서 자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랑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교회에서 자신을 어떠한 것으로 잘하는 자가 있다면 그 인간은 은혜를 전혀 모르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정리하면서 마쳐 봅시다. 성경은 무어라 합니까? 성경은 성도들에게 영생의 길을 열기 위해 은혜만이 그 길을 열었다고 합니다. 철저히 인간의 노력이 첨가되지 않은 오직 하나님이 준비한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희생을 통하여 인간에게 은혜를 베풀겠다고 했습니다. 이 은혜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은혜의 흔적을 잊어버리고 안식일 지킨다고 날리 치는 종교 형식주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니라 은혜의 집에 드러누운 인간들은 은혜! 은혜! 하면서 은혜의 참 의미를 모르고 \'내가 그 은혜에 좀 도움이 되어 드리지요\' 이러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인간들은 못 말립니다.
그래서 저는 성도의 귀를 이렇게 표현하고 쉽습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성도의 귀는 당나귀 귀처럼 커진 자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은혜를 몰랐기 때문에 은혜를 알리려고 귀를 잡고 잡아당겨 성도 만든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기억합시다. 왜 이 땅에 교회가 있는지? 왜 성도가 남아 살아가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교회와 성도는 철저히 예수님의 은혜만이 영생이라는 사실을 흔적으로 남기기 위해 있는 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