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강 요 6:1-15절 강해
생명의 양식(오병이어)
요한복음 6:1-15
오늘은 예수님께서 디베랴 바다 건너편에 가셨습니다. 이 곳에서 예수님은 큰 무리들의 추종을 받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큰 무리들이 예수님이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몰려오는 것을 보고 빌립에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빌립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 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이백 데나리온 어치로도 부족합니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제자 중 안드레가 한 아이가 가져온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와서 예수님께 내어놓으며 하는 말이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은 잔디에 앉히고 그것을 가지고 축사하시고 나누어주니 그 곳에 모인 5000명 이사의 사람들이 배부르게 먹고 남은 것을 거두어 보니 12바구니가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교회 다니면서 한 번 이상 들어보았던 내용입니다. 내가 어릴 때 오늘 본문에 대해 설교자가 설교하기를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을 때 어린아이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께 내어놓으므로 그것을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켜 5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먹고 12광주리가 남았다. 그러니 우리도 예수님께 나의 적은 것을 바쳐서 기적을 맛보자. 예수님께 바치면 기적이 일어난다.\' 또는\'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본받아 예수님께 나의 적은 정성을 바치자\'는 등의 설교 였습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오늘의 이야기는 무엇을 말씀하시려고 예수님께서 이런 표적을 보이셨을까요? 우리는 오늘 그것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6장 4절부터 보겠습니다.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을 풀어 나가는데 중요한 시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유월절은 바로 출애굽을 연상시키고 있으며, 어린양의 죽음이 있었던 날입니다. 이 날이 가까이 오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어린양의 희생과 예수님 자신과 연관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빌립에게 넌지시 말을 건넨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이렇게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말을 꺼낸 것은 빌립을 시험하시고자 했다고 6절에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빌립을 시험한 것을 결코 빌립이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라거나 소극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폭로하기 위해서 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빌립을 시험했다는 것은 계산에 밝은 빌립이 어떻게 나올 것을 아시고 그랬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빌립의 계산으로는 지금 모인 큰 무리를 먹일 수 없다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한 시험이었다는 것입니다. 빌립의 계산으로는 모인 큰 무리를 먹이는데 장정의 200일의 품삯을 가지고도 넉넉히 먹기에는 부족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지금 어디서 200데나리온의 돈이 생기며, 돈이 있다고 한들 어디서 그 많은 사람들을 먹일 수 있는 음식을 일순간에 주문할 곳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모르지요 요사이 같으면 돈만 있으면 해결 나지 않겠습니까? 263-1138 \"여보세요. 거기 산동성이지요. 여기 디베랴 건너편인데요. 짜장면 100 그릇 빨리요. 또 디디디 디디디디 여보세요. 거기 북경성이지요. 여기 디베랴 건너편인데요. 짜장면 200 그릇 빨리요. 이렇게 하여 이곳 저곳 짜장면 집에 연락하여 주문하면 엉덩이 치켜든 흰 가방 실은 오토바이 출동대가 긴급히 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전혀 불가능합니다. 돈도 확보될 수도 없었고 돈이 생긴다 할지라도 먹을 음식을 마련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런 빌립의 태도를 예상하시고 예수님께서는 빌립에게 질문했던 것입니다.
자 이쯤 되면 이곳에 모인 큰 무리들이 먹을 음식은 인간적인 계산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확실해 졌습니다. 이때 였습니다. 제자 중 시몬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님께 말씀했습니다. 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과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렇게 말하는 안드레의 표정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떠했을 것 같습니까? 1)아주 생기가 돌았고 아주 큰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서 예수님께 말했다. 2)그렇게 자신 있는 사람들이 하는 행동은 아니었으며 내가 가지고 온 것으로 해결되겠나? 하는 식이었다. 어느 것입니까? 2번이 정답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9절을 계속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였습니다. 자 여기에서도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이 본문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데 빌립은 소극적인 사람이었고 안드레는 적극적인 사람이어서 사람들 속에 들어가서 아이가 가져온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께 가져오는 적극성을 보인 긍정적인 사람이다 는 말에 속아 넘어 가는데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결코 안드레도 긍정적인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그러니 이 본문을 가지고 소극적인 사람과 적극적인 사람을 대조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우리도 안드레와 같이 적극적인 사람이 되자는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이 상황 속에서 어떤 태도로 나올 것인가를 시험하시는 장면을 보았고 안드레가 떡 다섯과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오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자 이제 우리는 여기에서 질문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이런 상황까지 몰아가십니까? 무엇을 의도하시고 계신 것입니까?
200데나리온의 돈이 있어도 안된다면 그러면 더더욱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어떻다는 말입니까? 더더욱 안된다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10-1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요6: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대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요6: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자 보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턱도 안되는 것 가지고 어떤 일이 벌어진 것입니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그래 맞아서 예수님께 정성을 바쳐 바치기만 하면 이런 기적이 일어나는구나. 나도 그래야지 이러면 안됩니다. 아니면 봐라 예수님은 대단하신 기적을 일으키는 하나님이시지 믿으라니까? 이런 식의 얘기를 하려고 하지 안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다는 것 정도를 알리려면 오병이어는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없이 아시지요. 그렇지 안습니까? 지금 이 정도로 보시면 영 엉뚱한 곳으로 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을 말하려는 것입니까?
지금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빌립의 계산과 같이 200 데나리온으로도 지금 큰 무리들을 배부르게 먹일 수도 없으니 안드레가 가져온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는 더더욱 불가능하다는 것을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치 이런 것입니다.
적막강산이다는 말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우리가 동원시킬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늘입니다. 어떻게요. \"내가 살던 고향 그곳의 고요함은 어찌 이루 말할 수 있으리요. 그 때의 고요함이란 마치 바늘 떨어지는 소리가 천지를 개벽하는 소리같이 크게 들렸습니다.\" 바늘이 등장하는 것은 지금 그 고향 마을의 고요함이 어느 정도인가를 표현하기 위해 등장되었습니다. 이처럼 지금 상황에서 볼 때 큰 무리들이 인간적으로는 먹일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었음이 강조 되게 하기 위해 동원 된 것이 오병이어였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적인 계산으로 봐도 불가능한 것 보잘 것 없는 것 이것이 오병이어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예수님은 메시지를 남기고 싶은 것입니다.
다시 11절로 가봅시다. \"(요6: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예수님께서는 그 보잘 것 없는 떡과 고기를 나눠주시고 저희들을 원대로 먹게 했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6장41-4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요6:41)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수군거려 (요6:42) 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예수님께서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는 말씀을 하시자 유대인들은 수군거리며 부모를 안다며 어찌 자신이 하늘로서 왔는가라고 했습니다. 곧 부모를 안다는 것은 속속들이 그 집안을 안다는 말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집안은 보잘 것 없는 목수의 집안이고 목수의 아들로서 보잘 것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냐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11절에서 예수님 자신이 보잘 것 없는 떡 다섯과 물고기 두마리를 나눠주었다는 것은 깊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바로 자신을 보잘 것 없는, 인간의 눈으로 보아도 보잘것없는 집안이요. 오병이어와 같은 그런 존재로 지금 이 세상에 보여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고 계셨다고요. 바로 큰 무리를 먹이데 저희들이 원대로 먹게 하는 일을 하시는 분으로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그런 분으로 지금 세상 속에 숨겨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이미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53장 1-3절에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사53:1)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사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53: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귀히 여기지 않을 존재로 예언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나사렛 예수 그 초라한 인간이 무엇을 할 것인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자신이라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하늘로서 온 떡이요 보잘 것 없이 보이는 존재 같으나 큰 무리를 충분히 먹이고도 12바구니나 남음이 있는 풍성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분으로 예수님은 구세주로 자신을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요6:14)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분명 예수님은 성경에서 계시된 오실 선지자입니다. 모세와 같은 이스라엘을 인도할 선자자임이 틀림없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할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물질적인 인도자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이 떡이 되어 풍성을 줄 그런 존재로되 물질적인 풍성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실을 다음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1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요6:15)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표적을 보이면서 분명 예수님 자신이 하늘에서 온 떡으로서 참 이스라엘을 풍성히 먹이는 그런 일이 벌어지게 하겠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오해하여 물질적인 풍성을 주는 분, 그런 선지자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런 구세주가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예수님은 산으로 도망가 버리고 계십니다. 여기 인간이 있습니다. 메시야를 어떤 메시야로 있어 주기를 원하는 인간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메시야를 자신의 주님으로 모시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