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강 요 18:25-27절 강해

베드로의 부인


요한복음18:25-27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3년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닭이 울자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왜 베드로는 이렇게 3년동안 따라 다닌 예수님을 모른다고 한 것입니까? 베드로가 왜 이렇게 된 것입니까? 베드로가 그렇게 기고만장하게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요한복음 13장 36-37절을 보면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요13:37)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떠나가신다는 말씀을 했을 때 베드로가 어디를 가시는지를 물으면서 자신은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겠다고 하는 장면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은 아버지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그렇지만 베드로는 그 곳이 어떤 곳인 줄 알지 못하고 따르겠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 곳은 베드로의 열심만으로 갈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은 올 수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열성을 내어놓았습니다. 바로 자기의 목숨을 내어놓기까지 해서라도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고 있다는 것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왜 요한복음에서 이와 같이 베드로의 열심을 이야기하다 베드로가 이렇게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하는 장면을 싣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바로 베드로를 고발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같이 자기의 목숨을 내어놓기까지 하는 열심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른다 할지라도 아버지의 하나님의 나라에 올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성경에서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오는데 어떤 것이 방해되는 것인지를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곧 인간의 자립심, 인간의 힘, 인간의 열심, 인간 승리를 고집 하는 그것이 하나님께 방해꺼리요. 죄라는 것입니다. 바로 베드로가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을 잘 드러낸 것입니다. 인간의 목숨까지 내어놓는다 할지라도 예수님이 가시는 곳을 갈 수 없는 자들이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손에 달려 있지 않는 문제를 베드로는 자기의 열심히 풀려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예수님의 나라에 인간들은 들어갈 있다는 말입니까? 인간들은 가망성이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시는 손길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9장9-13절에 잘 말씀하고 계십니다.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9:9-13)
여기에서 예수님은 마태 세리를 자신의 제자로 불러 그와 함께 식사를 나누게 됩니다. 지금 이와 같은 일은 당시 바리새인들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세리는 동족들에게 관세를 많이 받아 자기 배를 불리는 죄인으로 낙인이 찍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런 죄인과 어울려 식사를 한다는 것 자체가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불렀고 그와 함께 식사를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바리세인들은 당연히 시비를 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이와 같은 죄인으로 낙인찍힌 세리 마태를 자기의 제자로 삼는 것입니까? 그것은 마태와 같은 죄인을 부르는 방식(불쌍히 여기는 방식)으로 자기 백성들을 부르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긍휼(불쌍히 여김)을 원한다는 것은 인간의 열심이 하나님께로 접근할 수 있는 열쇠가 아니라 주님 쪽에서 손을 써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 죄가 되는 것은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인간의 자립심, 인간의 열심, 인간의 힘, 인간 승리 이런 것으로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시 마태복음 9장의 말씀에 비추어 표현하자면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심을 거부하는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말해주는 사건이 사무엘하에서 벌어집니다. 사무엘하 11장을 보시면 이스라엘의 군사들이 전장에 나가고 다윗은 왕궁 지붕에서 거닐다가 목욕하는 한 여인을 발견하고 그를 자기의 궁에 데려와 범하게 됩니다. 그 여인은 우리아라고 하는 장군의 아내 밧세바 였습니다. 다윗은 밧세바가 남편이 있는 줄도 알면서 법함으로 간음죄를 짓게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로 말미암아 밧세바가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되면 다윗은 자신이 간음죄를 지었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남편 우리아는 전장에 오랫동안 나가 있었기 때문에 아기 아버지가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남편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 전쟁 중에 나간 남편 우리아를 불러들여 잠시 휴가를 주어 아기를 갖도록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아는 충성스러운 군인(여호와의 전쟁에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기 때문에 집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자기 부하들과 함께 거하기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합니까? 입장이 난처해진 다윗은 작전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남편 우리아를 죽여서 완전히 다윗 자신이 저지른 첫 번째 간음죄를 감추기 위해 두 번째 살인죄를 저지르기로 결단했습니다. 살인의 방법은 적진의 최전방에 나가 싸우다 다른 사람들은 후퇴함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전사한 것처럼 꾸몄던 것입니다. 아무 죄없는 우리아는 이렇게 아내 빼앗기고 목숨까지 빼앗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다윗의 죄를 하나님께서는 가만 두겠습니까? 그래서 등장한 선지자가 나단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나단 선지자가 다윗의 죄를 지적하기 위해 나타날 때 그의 살인죄나 간음죄를 지적하지 않습니다. 한 예를 들어 죄를 지적했습니다. 사무엘하 12장1-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와서 저에게 이르되 한 성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부하고 하나는 가난하니 그 부한 자는 양과 소가 심히 많으나 가난한 자는 아무것도 없고 자기가 사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 하나뿐이라 그 암양 새끼는 저와 저의 자식과 함께 있어 자라며 저의 먹는 것을 먹으며 저의 잔에서 마시며 저의 품에 누우므로 저에게는 딸처럼 되었거늘 어떤 행인이 그 부자에게 오매 부자가 자기의 양과 소를 아껴 자기에게 온 행인을 위하여 잡지 아니하고 가난한 사람의 양 새끼를 빼앗아다가 자기에게 온 사람을 위하여 잡았나이다 다윗이 그 사람을 크게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저가 불쌍히 여기지 않고 이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사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삼하12:1-6)
이 이야기에서 나단은 어떤 부자가 자기 집에 온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자기 집에 있는 짐승을 잡지 않고 가난한 집의 딸처럼 여길 정도로 귀하게 키워 온 암양을 강제로 빼앗아 그 짐에 온 손님을 대접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것은 부자가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지 않은 행위였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렇게 불쌍히 여기지 않은 사람은 마땅히 죽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왜 이렇게 다윗이 불쌍히 여기지 않은 일에 대해 크게 문제를 삼느냐하면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는 철저히 하나님의 불쌍히 여김을 받아 선택되었고, 불쌍히 여김을 받아 유지되는 국가였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하지 않는 인간이 있다면 죽어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때 나단은 당신이 그런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런 자가 성경은 죄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다윗의 근본적인 죄는 간음죄와 살인죄 이전에 불쌍히 여기지 않은 죄입니다. 이 죄는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는 방식에 의해 인간들을 구원하신다는 그 정신을 배척하는 것이 되므로 하나님께 죽임을 당해도 마땅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윗이 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불쌍히 여겨서 죄없는 한 사람 우리아를 의도적으로 죽여 자신이 살수 있었다는 것을 알고 시편 51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께서 꺽어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시51:8) 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불쌍히 여기시는 방식을 구약에서 뿐만 아니라, 신약에서도 그대로 적용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분으로 돌아 가봅시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이렇게 예수님을 모른다고 한 베드로의 실수가 왜 등장하고 있는지? 성경의 무슨 자랑 꺼리라고 성경에 기록하고 있겠습니까? 여기에 나오는 베드로를 통해 오늘날 신자들에게 가르쳐 줄 것이 있는 것입니다. 신자로 불려온 자나 모든 인간은 모두가 자신의 자립성을 자랑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베드로와 같이 한 번 결심한 것으로 자신의 노력한 바로 주님을 끝까지 따라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베드로를 통해 인간들아, 신자들아 버려라! 버려! 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신자에게 자기 자신의 독립심이 생겨 이제는 내가 하리 이제는 내가 충성하리 라고 하는 그 순간부터 주님께 \"불쌍히 여겨 달라는 마음\"이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3번 예수님을 부인하는 장면을 다시 떠올려 보아야 합니다. 그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할 때마다 닭이 울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사랑해서 그와 같은 장치를 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네 열심과 네 목숨을 바쳐서 나를 따르겠다고 너는 불가능해\"를 알려주는 자명종이었습니다. 아마 우리에게도 베드로와 같은 생각으로 예수님을 따르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만약 이와 같은 자명종이 우리에게도 있다면 아마 하루에도 몇 수십번 수백번 울릴 것입니다. 늘 명심합시다. 베드로의 부인을 기억하면서 내가 예수님께 할 수 있는 것이란 불쌍히 여겨 달라고 부르짖는 자로서 살아갑시다. 이 사실을 인정한다면 생활 가운데 이웃을 불쌍히 여기면서 살아갑시다.

찬양+모음] 부활 찬양 메들리 (예수부활했으니 外)
    예수 부활했으니 할렐루야 만민 찬송하여라 할렐루야 천사들이 즐거워 할렐루야 기쁜 찬송부르네 할렐루야 대속하신 주예수 할렐루야 선한 싸움 이겼네 할렐루야 사망권세 이기고 할렐루야 하늘문을 여셨네 할렐루야 길과 진리 되신 주 할렐루야 우리 부활하겠네 할렐루야 부활 생명 되시니 할렐루야 우리 부활하겠네 할렐루야 주님께 영광 다시 사신 주 사망권세 모두 이기시었네 주님께 영광 다시 사신 주 사망권세 모두 이기시었네 흰 옷입은 천사 돌을 옮겼고 누우셨던 곳은 비어 있었네 주님께 영광 다시 사신 주 사망권세 모두 이기시었네 주님께 영광 다시 사신 주 사망권세 모두 이기시었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 할렐루 할렐루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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