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강 요 21:15-23절 강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복음21:15-23

모든 인간은 자신이 살아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을 하는 주체가 자신이고, 자신이 살아 있기 때문에 선한 행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만약 자신이 죽어 버리면 일하는 자신, 선한 일을 하는 자신이 없어짐으로 일의 양과 선한 일이 줄어들게 된다고 대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자신을 끊임없이 챙기며 열심히 살아남으려고 애를 씁니다. 정말 살아남아 현재 존재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최고의 자리일까요?
그 동안 우리는 요한복음을 통하여 예수님 앞에 선 인간이란 어떤 존재들인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인간이란 끊임없이 자기들에게 주어진 율법을 통해 자신들의 추함과 죄악을 보고 메시야를 바라보라고 했는데 그것을 이용해서 자기들의 우월감을 가지는데 이용해 먹고 있었습니다. 율법 잘 지켜 하나님께 괜찮다 인정받을 만한 인간을 착각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진짜 메시야를 보지 못하는 소경인줄 모르고 본다고 하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이었습니다. 5병2어의 표적을 통해 예수님께서 하늘로서 온 만나 - 이 세상 것으로 영생이 없고 하늘로부터 온 양식 -임을 계시해 주었으나 겨우 인간들은 먹고 배부른 까닭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고 있으니 한심한 노릇이었습니다. 그 뿐입니까? 차라리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인간, 살인을 저지르기까지 하면서도 유대나라를 살리려는 바라바를 더 좋아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하시면 인간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예수님보다 바라바를 더 났다고 판단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고 바라바를 주시오.\" 라고 하여 결국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정성과 노력으로 자기에게 가까이 오기를 원치 않고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자기 목숨을 바치기까지 하면서 접근하려는 인간까지도 거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인간의 열심과 정성과 노력과 목숨받침으로는 불가능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생명 주심으로 들어갈 수 있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러한 나라를 위해 제자들은 이 세상에서 무엇을 보여 주어야 합니까? 오늘 21장이 그것을 답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디베랴 바닷가에서 다시 고기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가 다시 고기잡이를 하게된 것은 수제자인 베드로로서는 예수님의 다른 제자들을 위한 사랑의 태도였습니다. 그들을 먹여 살리겠다는 마음에서 시작한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해 보겠다는 데서 나온 행동이었습니다. 밤을 새워 고기를 잡았으나 아무 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날이 새어갈 때 쯤되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고기 잡는 것을 도와주었습니다. 그 결과 153마리의 고기를 잡았습니다. 이 때 베드로는 예수님이라는 말을 듣고 육지로 올라와 떡과 고기를 예수님과 같이 먹었습니다. 이렇게 아침을 먹은 후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물었습니다. .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이 것들보다-고기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베드로는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말씀했습니다. \"내 어린양을 먹이라\" 이렇게 예수님과 베드로의 묻고 답하는 것이 세 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질문을 하고 부탁한 것은 지금 어떻게 하면 이 땅에서 살아 남을 수 있는 방도가 무엇인가를 알아라 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고기잡이를 하면 살게된다는 말도 아니었습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라고 묻고 있습니다. 여기 \'이 사람들보다\' 라는 말이 성경아래에 다시 번역되기를 \'이것들보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지금 잡은 고기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말하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고기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묻고 계십니까? 베드로는 지금 고기를 잡아 예수님의 다른 제자들을 먹여 살리려는 마음에서 이것을 다시 시작한 것입니다. 먹여 이 땅에 살아 남게 하려면 물고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생계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베드로는 제자들의 생계가 걱정이 되어 고기를 잡은 것이지 예수님을 사랑해서 고기를 잡은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질문 한 것입니다. \"네가 이 고기들보다(고기가 있어야 다른 제자들의 생계가 유지되니까.),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라고 했을 때 베드로의 대답은 예수님이 원하는 만큼의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 좋아합니다.\" 라는 수준에서 대답합니다. 헬라어 성경의 표현으로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두 번 아가페(사랑)하느냐 라고 물었는데 베드로는 그렇게 못한 자기를 압니다. 자기의 열심으로 사랑할려 해보았지만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경력만 있는 자입니다. 그래서 15, 16절 모든 대답이 필로에(사랑) 그랬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에게 자신도 필로에(사랑) 하느냐고 하실 때 베드로 역시 필로에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이 수준밖에 안된다는 것을 압니다. 아가페 수준으로 주님을 사랑해야만 하지만 인간은 안된다는 것을 베드로를 대표로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 예수님은 성도에게 바라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형제가 먹고사는데 지장 없도록 하기 위해 돌봐달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하는 차원에서 형제를 돌봐 달라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구제를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성경에서 구제를 하라고 하니까 돈 갖다주고 먹을 것 갖다주어서 저 사람이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제의 목적은 예수님의 희생이 우리를 살렸다. 내가 하는 이 구제를 보고, 내가하고 있는 이와 같은 희생을 봐서 그것을 알아라 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소개하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구제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이것들보다 더 사랑하느냐? 라고 하시며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고 하신 것도 다른 형제 배불리 먹여 살려라 는 수준에서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종합해서 말하자면 예수님은 이렇게 자신이 희생을 통하여 자기 백성들을 먹이고 치신 것과 같은 수준으로 베드로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라시는 바는 자신이 목자로서 양을 위하여 목숨을 던져 순교하는 그 발자국을 너도 똑같이 남기기 위해 형제들을 사랑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게 베드로에게 요청된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들에게 요청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누가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인간은 안되지만 믿음을 가진 신자들은 따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성령이 따라가게 해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인생이 어떻게 끝이 날것인가를 미리 예고했습니다.
18-19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요21:18-19)
이렇게 베드로의 마지막 운명을 통하여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이며 주님의 양을 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결코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돈 몇 푼 교회에 바치는 것으로 땜질하는 것으로 다했다고 하는 신자와는 너무 거리가 멉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이라는 것은 주님의 흔적을 이 세상에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과 같은 운명을 그대로 이 세상에서 자신도 뒤집어쓰고 나타내 보이다 죽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길을 가다 죽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요 이러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을 주님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남을 도와주고 먹여 살린다 할지라도 주님은 보여주기 위해 형제를 돌보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날의 교회가 그런 것입니다. 많은 사람을 구제하고 선교사를 보내고 많은 사업을 벌리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일은 오직 그 교회의 교세와 확장을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자신과 같은 전처를 밟고 희생의 흔적을 남기는 것만이 형제를 진정으로 돌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예수님을 사랑해 달라고 합니다.
마치 어린이를 위한 놀이 노래와 같이 \"나처럼 해봐 이렇게\" 라고 할 때 \"나처럼 해봐 이렇게\" 하듯하여 진정 주님을 사랑한다는 표시가 주님 따라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버림받은 이 세상에서 주님과 같은 운명을 겪어야 만이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아니겠습니까? 어찌 주님께서 버린 받은 곳에서 상금 타고 금메달 받으려고 합니까? 이것은 불법이요, 주님과 상관없는 자들이 아닐까요?
이제 마지막으로 20절 이후에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는 주를 파는 일에 참여한 자를 어떻게 될 것인가를 물었습니다. 이 때에 주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찌라도 내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요21:22)
예수님은 신자의 관심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는 자가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를 핍박하는 자가 어떻게 될 것인가? 가 아니라, 우리의 관심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주님의 희생을 내 몸에 담아내는데 관심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신자는 살아가는 방식이 다른 자들입니다. 한가지 사실을 보여주면서 살아가야 하는 자들입니다. 주님을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더 사랑하면서 살아가기로 한 자들입니다. 주님을 보여주기 위해 형제에게 관심을 가지기로 한 자들입니다. 결코 예수를 이용해서 잘되어 세상에 잘 살아보자고 하는 가짜 예수를 만들어 부담을 주지 않는 타락한 교회와 같이 살지 않기로 해야 합니다. 이러한 오늘날 교회 분위기 속에서도 예수님이 목자가 되어 양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셔서 먹이시고 치신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 지상에서 주님의 희생이 생명을 낳았다는 것을 알리는 우리의 삶이 됩시다.
찬양+모음] 부활 찬양 메들리 (예수부활했으니 外)
    예수 부활했으니 할렐루야 만민 찬송하여라 할렐루야 천사들이 즐거워 할렐루야 기쁜 찬송부르네 할렐루야 대속하신 주예수 할렐루야 선한 싸움 이겼네 할렐루야 사망권세 이기고 할렐루야 하늘문을 여셨네 할렐루야 길과 진리 되신 주 할렐루야 우리 부활하겠네 할렐루야 부활 생명 되시니 할렐루야 우리 부활하겠네 할렐루야 주님께 영광 다시 사신 주 사망권세 모두 이기시었네 주님께 영광 다시 사신 주 사망권세 모두 이기시었네 흰 옷입은 천사 돌을 옮겼고 누우셨던 곳은 비어 있었네 주님께 영광 다시 사신 주 사망권세 모두 이기시었네 주님께 영광 다시 사신 주 사망권세 모두 이기시었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 할렐루 할렐루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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