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강 요 21:23-24절 강해

말씀이 주는 축복/요21:23-24


< 축복과 부흥의 원천 >

구약성경 느헤미야 8장에는 워터게이트(수문) 앞 부흥사건이 나옵니다. 그 부흥의 원천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느헤미야 8장 1절 말씀을 보면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스라에게 율법책을 가지고 오기를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워터게이트 앞 광장에 모여 새벽부터 정오까지 성경만 읽는데도 모든 백성이 그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3절). 오늘날에 그렇게 하면 아마 오전 7시만 넘어도 10%도 남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말씀에 대한 목마른 갈증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서서 말씀을 들었습니다(7절). 거의 7시간을 서서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들은 말씀에 귀를 기울였고, 그 다음날에도 말씀을 듣기 위해 에스라 앞에 모였습니다(13절). 그처럼 말씀에 대한 갈증이 있는 곳에 부흥이 있고, 축복이 있습니다.

한 교회의 영적 수준과 한 영혼의 영성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말씀을 어떻게 받고 있느냐?”를 보면 그대로 알 수 있습니다. 그때 에스라가 율법책을 펴니까 모든 백성이 일어섰습니다(5절). 그리고 에스라가 하나님을 송축하자 백성들은 “아멘! 아멘!” 하고 화답했습니다. 그처럼 말씀에 아멘의 심령으로 화답하고 말씀의 권위를 높이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지만, 말씀을 우습게 알면 아무리 그럴듯하게 신앙생활을 해도 성령의 역사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높이면 하나님도 우리를 높여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높인다는 것은 결국 말씀을 높이는 것입니다. 누가 내 말을 잘 들으면 “저 사람이 나를 높여주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말을 잘 듣는 것은 인격을 높여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말씀을 잘 듣는 것은 하나님을 높이는 가장 중요한 표시입니다.

말씀은 분석하는 것이 아니고 높이고 양식으로 삼는 것입니다. 비행기가 어떻게 나는지 몰라도 비행기를 믿고 타면 목적지까지 가게 됩니다. 갈색 소가 푸른 풀을 먹고 어떻게 하얀 우유를 만드는지 그 원리는 몰라도 우유를 먹으면 그것이 내게 에너지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을 다 이해하지 못해도 내 이성보다 크시고, 우주의 모든 비밀을 알고 계신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기에 말씀을 높여 살기로 결심하면 그때부터 말씀은 능력의 원천이 될 것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도 “기록되었으되... 기록되었으되...” 하면서 구약 성경을 높이셨습니다. 그처럼 우리 영혼이 잘 되고 축복 받기를 원하면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을 높여야 합니다. 그러면 말씀의 능력이 내 영혼과 삶과 환경을 극적으로 새롭게 만들 것입니다.

< 말씀은 영적인 연료입니다 >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낸 러브레터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모든 축복이 담겨 있습니다. 성경은 지혜와 마음에 평안을 주고, 통찰력과 이해력 및 흔들리는 사람에게는 굳건한 믿음을 줍니다. 성경은 인간을 최상의 인간으로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링컨은 하나님께서 천지창조 이후 인류에게 주신 최상의 선물은 곧 성경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소중히 보고 무엇을 해도 성경보다 앞서지 말고, 성경에 기록된 것 이상으로 현명해지지 말고, 성경 앞에서는 어린아이처럼 그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미국 사람들의 한 가지 장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말에 잘 반응해주는 것입니다. 웃기는 말을 하면 잘 웃어줍니다. 저도 신학교 때 설교학 시간에 설교하게 되었는데, 웃긴다고 생각한 얘기를 열심히 번역했습니다. 스님이 자신을 골탕 먹인 속인의 머리를 깎는 얘기인데, 그 얘기를 번역하면서 속으로는 걱정했습니다. “이 엉터리 번역에 학생들이 웃어줄까?” 그런데 그 설교를 하니까 여지없이 신나게 웃어주었습니다. 그때 그 상큼한 반응에 얼마나 고마운 느낌이 들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국 사람은 잘 웃지 않습니다. 서양 사람은 “한번 웃어보자!”고 하지만 한국 사람은 “한번 웃겨봐라!”고 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도 어떤 분은 “말씀에 은혜 받자!”고 준비하고 듣는데, 어떤 사람은 “은혜를 줘봐라!” 하고 듣습니다. 사실 말씀에 대한 태도에 따라 은혜의 질이 달라집니다.

옛날 부흥회 때 자주 들었던 얘기입니다. 시골 교회에 한 할머니가 부흥회 때 계속 울었습니다. 부흥 강사 목사님은 은혜가 넘치는 줄 알고 신나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예배 끝나고 할머니에게 “왜 그렇게 눈물을 흘리세요?” 하고 물으니까 대답하길, 그 할머니가 1년 전에 예쁜 돼지 한 마리를 사서 자식처럼 길렀는데 그만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강사 목사님이 통통하게 살이 찐 것이 돼지처럼 생겨서, 1년 전에 죽은 돼지가 생각나서 울었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가끔 말씀을 엉뚱하게 잘못 듣는 분들이 있습니다.

말씀을 잘못 들으면 귀만 커집니다. 그러나 말씀을 잘 들으면 마음이 커집니다. 사람들은 대개 지난주에 무슨 말씀을 들었는지 잘 기억 못합니다. 그래서 말씀 듣는 것이 소용없는 것 같지만 사실 그 말씀 때문에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커지고, 신앙이 자라게 됩니다.

말씀은 영혼의 연료와 같습니다. 그 연료를 최소한 일주일에 한번은 채워야 합니다. 미국행 비행기는 연료를 500드럼씩 채워간다고 합니다. 비행기 타는 사람의 총 무게보다도 몇 배 무거운 양이지만 그 연료가 없으면 비행기는 추락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혼이 높이 비상하려면 최소한 주일마다 영적인 주유소인 교회에 와서 말씀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 말씀을 듣는 자세 >

오늘 본문은 우리가 말씀을 잘 받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가르쳐주는 본문입니다. 19절에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셔서 베드로가 주님을 따르는데, 돌이켜 보니까 사도 요한도 따르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사도 요한은 어떻게 됩니까?”하고 묻자 주님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할지라도 내게 무슨 상관이냐? 너를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그 말씀의 원래 의미는 “너는 너의 길을 가고 요한은 요한의 길을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마다 다 자기가 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내게 주어진 길이 초라해보여도 그 길은 주님께서 내게 펼치신 최선의 길입니다. 사람마다 주어진 일이 다르고, 가는 길이 다릅니다. 남의 모습이 부러워보여도 내가 그 사람처럼 될 필요는 없습니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한 남자에게 애완견과 나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귀가 보니 주인이 개만 사랑했습니다. 그 이유를 살펴보니 개가 꼬리를 흔들면서 주인에게 사랑받을만한 행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나귀도 사랑받겠다고 결심하고 주인 앞에서 꼬리쳤지만 주인은 표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엔 개처럼 앞발을 들어 재롱을 부렸습니다. 그러자 깜짝 놀란 주인이 피하려고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것도 안 되니까 이번에는 큰 혀로 개처럼 주인의 얼굴을 핥았습니다. 그랬더니 주인이 몸서리를 쳤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주인 옆에서 종종 걸음을 치며 까불다가 그만 주인의 발을 밟았습니다. 화가 난 주인은 지팡이로 나귀를 후려치며 마구간에 묶어두었습니다. 개는 개의 길이 있고 나귀는 나귀의 길이 있습니다.

우리는 남과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남의 떡만 크게 보면 어느새 인생의 겨울이 됩니다. 반면에 무슨 선물이든 감사하고, 무슨 자리든 감사하며 최선을 다하다 보면 어느 새 축복의 문이 활짝 열려 있을 것입니다. 남의 일은 쉬워 보이지만 쉽지 않고, 남의 선물이 커 보이지만 크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선물을 잘 활용하면 그는 가장 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처럼 서로 비교하지 말라는 것이 주님의 말씀의 본 뜻인데, 베드로는 자기 연민에 빠져서 그 말씀을 오해했습니다. 그래서 형제들에게 “나는 죽을 것 같고, 사도 요한은 죽지 않을 것 같아!”라고 잘못 전했습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일찍 순교했고, 사도 요한은 오래 장수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의 말씀의 본질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의 초점은 “내가 어떤 결정을 하든지 상관 말고 너는 너의 길을 가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 말씀의 본 뜻을 오해하고, 형제들에게 잘못 전했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 말씀을 잘못 받아들이고, 잘못 전해서 어려움이 생기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들을 때 어떻게 듣느냐 하는 것이 신앙생활에서 아주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들을 때 어떤 자세로 들어야 합니까?

1. 열린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은 위로를 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수술 칼이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의 속성을 깨닫고 때로 내 약점을 건드려도 열린 마음으로 받아야 말씀은 내게 능력이 될 것입니다.

재작년에 교인 중에 한분이 큰 시험에 들었습니다. 그 일을 수습하느라 묵상 시간이 없어서 어느 수요일에는 말씀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할 수 없이 부끄러운 마음으로 옛날에 했던 창세기 90편 설교 중에서 어떤 설교를 할까 찾아보았습니다. 속으로 “내가 이제 무슨 짓인가? 설교를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를 찾고 있나?”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90편의 설교 중에서 한 편의 설교도 찾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한 설교도 그때 시험에 든 분에게 찔리는 말씀 부분이 없는 설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말씀을 그대로 전하면 “나를 겨냥해서 그 말씀을 했다!”고 오해할 수도 있어서 참 조심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준비하는 것도 아니고 말씀을 찾다가 더 지쳐버린 기억이 있습니다.

말씀에 마음 문을 닫으면 어느 말씀도 나를 찌르는 말씀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마음 문을 열어야 합니다. 그래야 말씀이 내게 축복의 도구가 될 것입니다.

2. 잘 경청하며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사람이 전하는 것이고 사람이 듣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 말씀을 전하는 사람의 의도와 전혀 다르게 전달될 수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오해될 수 있기 때문에 말씀을 잘 듣고 수용하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한 연인이 있었습니다. 그 둘이 처음에는 열렬히 사랑을 나눴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첫사랑의 짜릿함이 없어졌고 그럭저럭 사귀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자매가 꽃다발을 들고 “이 꽃 어때?”하고 묻자 형제가 “꽃이 참 많네.”하고 대답했습니다. 얼마 후에 자매가 다시 “이 치마 어때?”하고 묻자 형제는 “치마가 짧네.” 하고 대답했습니다. 다시 얼마 후에 자매가 “이젠 날 사랑하지 않지?” 하고 묻자 형제는 “늦었으니까 빨리 집에 들어가!”라고 대답했습니다.

얼마 후에 그녀는 그의 곁을 떠났습니다. 그는 날벼락을 맞은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꽃은 많은 것이 아니라 아름답다고 대답하는 것이고, 치마는 짧은 것이 아니라 예쁘다고 대답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격이십니다. 우리가 말씀을 대충 들으면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 곁을 훌쩍 떠나갈 것이고, 말씀에 귀 기울여 잘 들으려고 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계속 우리 곁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3. 객관성을 가지고 들어야 합니다.

가끔 보면 말씀을 자기 편의대로 이용하고, 자기 잘못을 변명하는데 말씀을 갖다 붙이는 선수들이 있습니다. 남의 뺨을 때려놓고 “성경에 용서하라고 했잖아!”라고 하는 태도는 잘못입니다.

양 100마리 중에 목자를 잃지 않으려고 한눈팔지 않는 99마리의 양에 속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런 양이 되지 않고, 항상 한눈을 파는 1마리의 양이 되면서 “주님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다녔다”는 성경 말씀을 가지고 자기만 찾아주기를 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자기 자리를 이탈하고 “어디 나를 한번 찾아봐라! 용용 죽겠지.” 하면서 목자의 사랑을 시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이유가 어찌 되었든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의 처지가 얼마나 서글픕니까?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이유를 대도 목자는 그 한 마리 양의 아픔을 최대한 감싸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목자가 “주님은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는데 저렇게 반항하는 양은 내 양이 아니야! 염소야!” 하면서 그 양을 왕따 시키려고 교회 내에서 정치를 하면 그것은 더욱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자기 편의대로 적용하는 것은 3계명인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계명을 범하는 전형적인 행동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자기 편의대로 이용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자기 입맛에 맞게 주관적으로 받지 말고 객관적으로 분별하고 수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4. 순종하는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본문 23절 하반부 말씀에서 주님께서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고 말씀하신 것은 주님의 말씀과 뜻에 지나치게 상관하려고 하지 말고 오직 순종하려고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토기가 토기장이에게 “나를 왜 이런 그릇으로 만들었느냐?”고 힐문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롬 9:20-21).

가끔 교회에 동냥하러 오늘 분들이 있습니다. 그때 2천 원을 주면 대부분 잘 돌아가는데 어떤 분은 적다고 따지고 화를 냅니다. 그러면 기가 막힌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처럼 우리가 어떤 일로 하나님께 불평하면 아마 하나님도 기가 막히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가장 공평하게 모든 상황을 허락하셨다고 믿고 오직 감사하고 순종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실 모든 자연만물은 하나님의 프로그램대로 철저히 순종합니다. 그러나 유독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인간만이 반항합니다. 그러나 만약 사람이 자연만물처럼 100% 순종을 위해 애쓰면 성경에 나오는 무수한 기적이 우리들의 기적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돈의 유무(有無)나 배경과 인맥의 유무보다 말씀에 순종하는 삶의 유무가 가장 큰 축복의 관건입니다. 물론 우리가 순종하는 마음을 가졌다고 내일 당장 역사가 일어나고 상황이 바꿔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순종하는 마음으로 묵묵하게 가다 보면 신명기 28장에 약속하신 대로 하는 일마다, 있는 곳마다 축복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5. 증거자가 되려는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본문 24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 말씀생활의 가장 최종적인 단계는 말씀을 증거하는 자가 되는 것에 있습니다. 증거자가 되려면 자기를 철저히 죽이고 감추어야 합니다. 본문 24절을 보면 사도 요한은 자신이 요한복음을 기록했으면서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그처럼 자신을 죽여야 하나님의 증거자가 될 수 있습니다.

주후 313년 기독교가 공인되고, 그 뒤 주후 325년에 니케아에서 제1차 교회회의가 열렸습니다. 그때 로마 전 지역에서 318명의 대표들이 왔는데, 그 대표들을 보고 당시 콘스탄틴 대제는 깜짝 놀랐습니다. 사지가 멀쩡한 사람이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갖은 고문으로 눈을 뽑혀 장님이 된 사람, 손이 잘린 사람, 다리가 없는 사람들이 모여 마치 장애인 올림픽 대회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복음의 증거자들이 되어야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특별히 말씀의 증거자가 되려면 말씀을 실천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분은 성경을 읽으면서 복 받고 형통한다는 구절에 형형색색으로 밑줄을 그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진짜 복을 받으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구절들에 밑줄을 그어야 합니다.

요새 저희 요삼일육선교회에서 사랑매거진 사역을 시작하면서 육신적으로 많이 힘들어졌습니다. 사람들은 쉽게 생각합니다. “목사님은 원래 글 쓰는 분이면서 왜 그렇게 힘들어하세요?”

인터넷을 통해 수많은 글들이 홍수처럼 돌아다니니까 글 쓰는 것이 쉬운 줄 알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백학의 노래’라는 30줄도 안 되는 글을 쓸 때, 그 중에 러시아 베슬란 어린이 참사에 관한 15줄도 안 되는 글을 쓰는 데만도 250편의 신문기사와 관련 글을 보고 다듬고 또 다듬어서 글을 썼습니다.

사랑매거진을 보면 대개 1-2개의 스토리가 나옵니다. 그 스토리도 그냥 베낀 스토리는 하나도 없습니다. ‘뷰티풀 마인드’에 관한 스토리를 쓰기 위해 100편 이상의 평론을 본 후에 처음에 원고지 40-50매 분량의 글을 쓰고, 그 분량을 20매로 줄이고, 다시 10매로 줄이고, 다시 5매로 줄이고, 최종적으로 2-3매로 줄이고 그 스토리를 소개하면서 삶의 도전하는 글을 단어와 어휘는 물론 심지어는 단어의 리듬적 요소와 어감까지 고려해서 글을 썼습니다.

이솝 우화나 어린이 동화 하나를 인용해도 원고지 10매 이상의 원래 글을 5매의 줄거리로 요약하고, 그것을 다시 3매로 축약하고, 그것을 다시 1-2매로 정선해서 다듬는 작업을 통해서 글을 쓰니까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는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얼마 전에는 “이러다가 죽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하면서도 사랑매거진 사역을 계속하는 이유는 믿지 않는 사람에게 ‘복음의 접촉점’을 마련하기 위해서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사랑매거진을 통해서 사랑과 따뜻함과 남을 생각하는 삶을 전달받는 것도 소중한 일이지만, 그 중에서 몇 사람이라도 저의 사이트에 들어와 말씀이라고 읽게 되면 자연히 복음과 접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처럼 사랑매거진 사역을 하는 최종목적은 ‘복음전파’에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힘든 때이기 때문에 저는 사랑매거진 사역을 중요하게 봅니다. 어차피 저희 요삼일육(요316)선교회가 “요한복음 3장 16절에 나오는 주님의 사랑을 만방에 나누어주자!”는 비전을 가지고 사역을 하기 때문에 그 일을 위해서라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기쁘고 보람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믿음의 궁극적인 목적은 ‘얻는 것’이 아니라 ‘증거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얻으려고 하기 전에 먼저 사람이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얻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입니다. 얻으려고 하면 적이 많아지지만, 되려면 하면 나 자신만 이기면 됩니다. 내가 바로 되면 사는 길도 무수히 열리게 됩니다. 신앙이란 얻는 작업이 아니라 되는 작업입니다. 진짜 사는 길은 ‘많이 얻는 삶’에 있지 않고 말씀을 따라 ‘바로 되는 삶’에 있습니다.

우리가 내 뜻을 포기하고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 가장 복된 인생이 되겠지만 내 뜻만 고집하면 불행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가룟 유다의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예수님의 12제자 중 유일한 도시 출신으로 공동체의 회계를 담당할 정도로 가장 똑똑한 사람이었지만 자기 뜻이 주님 뜻보다 강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진다고 하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참을 수 없어서 예수님을 팔아버렸습니다.

때로 주님의 하시는 방법이 우리의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아도 나중에 보면 그것이 최선의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과 관계없이 주님의 뜻에 복종해야 합니다. 만약 가룟 유다가 자기 뜻을 버리고 주님의 뜻을 따랐다면 그는 누구보다 훌륭한 일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앞세우는 마음입니다. 그처럼 말씀을 앞세우는 삶을 통해 ‘말씀이 주는 축복’을 여러분들의 소유로 만들지 않겠습니까?

찬양+모음] 부활 찬양 메들리 (예수부활했으니 外)
    예수 부활했으니 할렐루야 만민 찬송하여라 할렐루야 천사들이 즐거워 할렐루야 기쁜 찬송부르네 할렐루야 대속하신 주예수 할렐루야 선한 싸움 이겼네 할렐루야 사망권세 이기고 할렐루야 하늘문을 여셨네 할렐루야 길과 진리 되신 주 할렐루야 우리 부활하겠네 할렐루야 부활 생명 되시니 할렐루야 우리 부활하겠네 할렐루야 주님께 영광 다시 사신 주 사망권세 모두 이기시었네 주님께 영광 다시 사신 주 사망권세 모두 이기시었네 흰 옷입은 천사 돌을 옮겼고 누우셨던 곳은 비어 있었네 주님께 영광 다시 사신 주 사망권세 모두 이기시었네 주님께 영광 다시 사신 주 사망권세 모두 이기시었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 할렐루 할렐루 아멘
			


	
※ 이곳(http://www.ccmscore.co.kr)에 가시면 악보를 구입하실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