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의 설교
사도행전강해(24)
사도행전 10:34~48
사도행전은 여러번의 설교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설교는 기사와 이적 못지 않게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의 설교는 사도행전 2장의 설교와 더불어서 기독교 복음의 진수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설교는 전하는 자와 듣는 자가 다 중요합니다.
더 나아가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성령의 역사가 더욱 중요합니다.
목회자는 설교를 해 보면 그 교회 성향을 대충은 알 수 있습니다.
말씀 듣는 태도에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회중들이 열린 마음으로 열심히 경청하게 되면 말씀이 가슴에 가서 꼿히는 역사를 강하게
감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회중들이 말씀을 잘 듣지 아니하면 그렇게도 설교하기가 힘들 수가 없습니다.
오늘의 설교현장은 하나님께서 만남을 주선하셨습니다.
듣는자는 열심을 가지고, 진지한 자세로 준비해서 듣고 있습니다.
전하는 자는 성령이 충만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런 뜻에서 훌륭한 설교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좋은 회중은 열린 마음으로 듣는 회중, 말씀을 사모하는 회중, 기도로 준비한 회중이 좋은 설교자를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참으로 은혜가 넘치는 상황에서 베드로는 감격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합니다.
베드로는 입을 열어 첫 번째로 한말이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하나님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사람은 외모를 중시합니다.
속보다는 겉에 더 관심을 가집니다.
하나님은 속을 보시고, 중심을 보십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사람은 정성어린 기도, 예배, 찬양을 기쁨으로 받으십니다.
특별히 이 말은 고넬료를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이방인이요, 싸움하는 군인이지만 그 중심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 믿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구원의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해 주신 일은 교리입니다.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셨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우리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가로막혔던 담을 허시고
하나님과 우리를 화해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죄는 십자가에 보혈로 용서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우리, 그리고 우리 모든 인간들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되고,
가까워졌다는 화평의 복음을 가르칩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하셔서 착한 일을 하셨습니다.
병든자를 고치시고, 상처 받은 자를 위로하시고, 죄인들의 친구가 되십니다.
마귀에게 눌린자를 고치셨습니다.
악한 세력에게 억압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이 사실을 목격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여기에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힘이 없어 굴욕적으로 죽은 것이 아닙니다.
가장 강한 자로서 가장 영광스러운 분으로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가장 고통스러운,
가장 부끄러운 십자가에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믿는 우리를 의롭게 하셨고 구원의 역사를 완수하셨습니다.
부활의 증인은 모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주의 사명을 감당할 사람들에게 선택적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후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라인 것을 증거하게 하셨고>
그래서 주의 복음을 전할 전도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복음의 최종적인 목적은 43절 말씀인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예수 믿는 목적은 사죄의 은총을 힘입는 것, 죄 용서함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 외에 다른 것이 예수 믿는 목적이 되면 복음이 변질되고, 훼손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되는 가운데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그 곳에서 일어납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는 오늘의 사건을 가리켜서 「이방인의 오순절」사건이라 말합니다.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성령의 역사는 말씀의 역사입니다.
성령이 역사하면 말씀을 사랑하게 되고, 말씀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바른 하나님의 영의 역사가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는 기도와 말씀을 균형있게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확실하게 계시하여 주십니다.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방언을 말하며, 사도행전의 방언, 고린도 교회 방언, 오늘의 방언은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말씀을 통하게 하는 역사였습니다.
사도행전의 방언은 말이 서로 통하는 역사입니다.
차별화가 아닙니다.
하나됨에 있습니다.
방언을 통해서 서로 자기의 말로 복음을 듣게 됩니다.
고린도 교회의 방언과 오늘의 방언은 말이 서로 안 통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 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줌을 금하리요 하고>
세례를 받습니다.
세례는 성만찬과 더불어 개신교가 인정하는 성례전입니다.
세례를 받음으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 받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습니다.
믿음은 신앙고백 후에 세례를 줍니다.
그러므로 세례 주는 방식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침례해야만 구원의 효력이 있고, 이마에 물을 찍어서 주는 세례는 효력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 때문에 얼마나 교회가 서로 싸웠는지 모릅니다.
세례는 결혼식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합니다.
결혼함으로써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결혼식 자체는 의미가 없는가?
아닙니다. 결혼식도 중요합니다.
결혼식 하고, 부부생활하면 사는 삶의 자세가 다릅니다.
세례 받는 것은 내가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하고 공적으로 선포하고 신앙생활하는 것이기에 더 바른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사건은 오순절 사건과 비교할 때 중요한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함께 모였을 때, 은혜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말씀을 듣는 가운데 성령께서 역사합니다.
한 두 사람 체험한 것이 아니라 모인 모든 사람이 함께 은혜 받습니다.
여기에 교회의 중요성이 있습니다.
혼자 묵상하는 가운데 주관적으로 은혜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더불어 하나님께 예배하는 가운데 큰 은혜를 체험한 공동체가 중요합니다.
찬양+모음] 부활 찬양 메들리 (예수부활했으니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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