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강 행 14:8-18절 강해

능력


(사도행전 14:8-18)



기독교를 표현하는 상징으로 대표적인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란 예수님이 죽었다는 것의 상징으로도 중요하지만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은 주님을 따르려면 십자가를 져야하고 또한 그 십자가에 주님과 더불어 죽어야 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성경에서 핵심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란 단순히 책임을 지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고난을 받고 죽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이야기를 자주하고 많이 했습니다. 아니 매주일 십자가 이야기를 하지 않은 때가 없었습니다. 모일 때마다 십자가 이야기를 했습니다. 십자가 이야기를 많이 했다는 것은 그만큼 고난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는 것입니다.

자주 말하는 것만큼 우리는 지금 이 십자가의 진리에 대하여 무디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결혼을 해서 자식이 있는 아들에게도 출근할 때에는 부모님이 \'차 조심하고 잘 다녀오너라\'고 당부합니다. 그러면 그 말을 들은 아들은 하루종일 다니면서 \'부모님이 차 조심하라고 했으니 항상 조심해야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저 그냥 으레 하는 말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다 교통사고라도 나면 부모님이 한 말이 실감나게 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십자가에 대해서 너무 자주 말하기 때문에 또한 너무 쉽게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현실입니다. 과거 2000여년 전에 있었던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내가 고난을 받고 죽어야 하는 자리입니다. 오늘 내가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내일 되면 또 죽어야 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현실에 부딪히면 십자가는 우리에게서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아니 애써 없애려고 하는 것입니다. 실제적인 이익과 결부되기만 하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소원한 문제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급할 때에 찾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에 모일 때마다 고루한 창고에서 끄집어내어 다시 생각해 보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정신, 십자가의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5-8의 말씀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는 말씀은 사람은 십자가에 죽어야 한다는 것을 대표상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셔서 하신 일은 종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죽는 것이었습니다.

이 마음,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는 그 마음을 품으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십자가의 정신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종의 모습으로 날마다 십자가에 죽는 심정으로 사는 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사도행전의 핵심은 앞에서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예수님은 살아서 계속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하심이 어떤 정신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는가 하는 것 또한 사도행전에서 보여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주의 성령께서 장악하시는 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그 마음으로 살더라는 것을 많은 인물들을 등장시켜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루스드라에 갔습니다. 거기서 한 앉은뱅이를 만나서 고쳐주었습니다. 여기서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이 나옵니다. 8절에 보면,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통 이 구절을, 앉은뱅이가 구원받을 만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고침을 받고 구원받았다는 식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닙니다. 27절 말씀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바울 사도가 다시 안디옥 교회에 와서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하고…\" 즉 하나님 자기 백성들로서 구원받아야 할 자는 사람이 가기 전에 앞서서 이미 믿음의 문을 열어서 믿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가 확인을 했다는 뜻입니다. 바울 사도가 전하는 복음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주님 되심에 이미 굴복하게 된 것을 서로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확인의 절차가 바로 앉은뱅이가 고침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앉은뱅이가 일어설 수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믿음을 허락하신 결과로 인간들이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보여주신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주님의 능력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들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까? 11절에 보니까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면서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고 하면서 바나바는 쓰스(제우스/쥬피터), 바울은 허메(헤르메스/머큐리)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앞에서 제사를 하고자 했습니다.

그때 바울과 바나바는 사람들을 향해 앉은뱅이를 고친 이적으로 인해 놀랄 것 하나도 없다고 알렸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행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오래 전부터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을 증거하시고 나타내신 것을 죄인들이 알아보지 못했을 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17절). 하늘에서 비를 내리시고 결실에 때맞추어 열매를 얻을 수 있는 것이나 앉은뱅이를 고친 이적이나 동일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나면서 앉은뱅이가 되었던 사람이 고침을 받아 일어나면 그것은 굉장한 일이고, 놀라운 일로 받아들이면서 그저 평범하게 주를 찾고 살면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합니다. 농사지어서 열매를 얻는 것은 이적으로 보지 않고 우리가 현실적으로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루어진 것을 가지고 우리는 기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두 가지는 동일한 것입니다. 주의 은혜가 아니면 베풀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알고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산다는 것 자체가 늘 이적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날 주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죄 때문에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죄로 가리워져 있어서 주님의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혜택은 모든 사람이 누리고 있지만 하나님의 하나님되심, 주님의 주님되심을 믿는 것은 모든 사람이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을 만한 믿음은 주님께서 주시게 되어 있습니다. 앉은뱅이는 그것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섬기려고 하는 자들은 그 믿음을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여기 루스드라에서 그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앉은뱅이를 고치는 이적을 통해 인간의 죄성을 고발하고 동시에 주님의 은혜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믿음을 주신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만남으로 주님이 일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하는 것입니다.

15절에 보면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누구든 동일한 사람입니다. 특별히 스스로 능력이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주님의 손에 붙잡히기만 한다면 이렇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열성적인 유대인들이 이고니온에서부터 여기까지 따라와서 바울과 바나바를 돌로 쳐서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죽은줄 알고 성 밖으로 끌어내었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과 바나바는 거기서 복음 전하는 것을 마감하지 아니하고 다음날 더베로 가서 계속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것이 능력입니다. 돌에 맞아도 끄떡없이 일했기 때문에 능력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런 고난과 죽음의 위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을 중단할 수 없었던 그 무엇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대단한 사람이구나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살아 계셔서 계속해서 자기 백성들을 붙잡고 일해나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고난과 죽음의 위협을 통해 더욱 분명하게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22절)고 증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현실입니다. 단순히 십자가를 지자 라고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면 당장 내 앞에서 나를 신처럼 모시려고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나를 잡아죽일 듯이 공격하고 위협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자를 만나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상대방을 어떻게 판단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여러모로 역사하시면서 자기 백성들을 만들어 가시고 그들을 한 형제로 받을 수 있도록 만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확인하면서 삽시다. 그 모든 것들은 내가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것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무엇든지 눈에 보이는 특별한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종교적 틀을 삼고 자신의 경건의 요소로 만들고자 하는 죄성이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신앙이란 아무 것도 믿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믿는 것이 불신앙입니다. 눈에 보이는 예배당을 믿고, 교회조직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책이나 십자가가 귀신을 물리칠 수 있는 부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교회란 주님의 몸입니다. 교회가 주님의 몸이라고 할 때에는 무엇을 한다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교회가 주님의 몸이니까 주님을 머리로 모시고, 주님과 더불어 참신한 모임을 만들어 조직을 이루고 큰 일을 한 번 해 보자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주님의 몸이라면 주님의 지체된 자로 몸에 붙어 있는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능력입니다. 몸에 붙어 있는 지체가 새삼스럽게 몸을 위해서 무엇을 하자 라고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는 성도가 어디에 붙어 있고, 어디에 속해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어떤 상태에 어떤 영역에 담겨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주님께 속해 있고 주님께 붙잡혀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조직)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 속해 있어서 주님의 몸, 즉 교회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새롭게 교회로 모인다고 해서 교회가 아닌 것이 교회가 되는 것 아닙니다. 구원받을 만한 믿음을 얻은 자가 교회입니다. 구원받을 만한 믿음으로 사는 자는 십자가 정신으로 사는 자입니다.

타협이나 회피는 십자가의 정신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마음, 그 십자가가 정신으로 좌절하지 아니하고 복음만을 위해 살아지는 삶이 능력입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예수께서 사시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살아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놀라운 이적이요 주님의 능력입니다. 이런 주님의 은혜가 우리 모두를 장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1997.11.30)

찬양+모음] 부활 찬양 메들리 (예수부활했으니 外)
    예수 부활했으니 할렐루야 만민 찬송하여라 할렐루야 천사들이 즐거워 할렐루야 기쁜 찬송부르네 할렐루야 대속하신 주예수 할렐루야 선한 싸움 이겼네 할렐루야 사망권세 이기고 할렐루야 하늘문을 여셨네 할렐루야 길과 진리 되신 주 할렐루야 우리 부활하겠네 할렐루야 부활 생명 되시니 할렐루야 우리 부활하겠네 할렐루야 주님께 영광 다시 사신 주 사망권세 모두 이기시었네 주님께 영광 다시 사신 주 사망권세 모두 이기시었네 흰 옷입은 천사 돌을 옮겼고 누우셨던 곳은 비어 있었네 주님께 영광 다시 사신 주 사망권세 모두 이기시었네 주님께 영광 다시 사신 주 사망권세 모두 이기시었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 할렐루 할렐루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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