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믿습니까
(사도행전 16:19-34)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모르는 교인은 없을만큼 유명한 구절입니다. 전도지에 항상 등장하는 말씀입니다. 교회에서 전도용으로 세운 정류장이나 공공시설물이 있다면 어김없이 새겨져 있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흔하게 많이 인용되고 있는 성경 구절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말씀을 흔하게 자주 또 많이 인용하고 있는만큼 이 말씀에 대한 오해도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보통 이 말씀을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 하는 전도용 말씀으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미 신자가 된 우리들에게는 전혀 해당이 없는 말씀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어떤 계층이나 신분에 따라 서로 다르게 주신 말씀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소위 말하는 모태 신앙이나 오래 믿은 신자에게 다른 말씀이 있고 초신자에게 다른 말씀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다시 의미있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본문은 바울 사도가 옥을 지키던 간수에게 한 말입니다. 밤에 지진이 났습니다. 옥문이 다 열렸습니다. 잠자던 간수가 놀라서 깨어 달려와 보니 옥문이 열려 있습니다. 그것을 본 간수는 곧바로 자결을 하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간수가 죄수를 놓치면 그 죄수의 죄 값을 간수가 대신 치러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본 바울 사도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죄수들이 모두 도망을 간줄 알았는데 그대로 있자 간수는 놀라서 바울에게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바울 사도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구원의 의미를 정리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쉽게 구원이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 즉 미래적인 문제로만 생각합니다. 이것은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왜곡되어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미래에 천국에 간다고 하는 사실 때문에 현실에 대해서 너무나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도피하고자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을 너무 크게 생각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한마디로 신앙은 현실입니다. 그러나 그 현실이라고 하는 말 속에는 미래를 위한 도피도 아니고 현실만 생각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천국이란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참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가는 그 삶이 바로 천국이라고 여기고 사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간수가 자결하려고 한 것은 앞으로 자신에게 닥칠 고난을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즉 죄수를 놓친 이 심각한 책임을 벗어날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의 일행이 도망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감옥에 다 있었습니다. 간수가 생각하기에 참으로 이상한 현상이었습니다.
자신의 가치관을 가지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도망을 가야 상식적인 것인데 도망을 하지 않은 것은 간수의 상식으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즉 간수가 가진 가치관과 도망하지 않은 바울 사도 일행의 가치관과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간수의 가치관과 바울 사도의 가치관이 전혀 다른 차원이었습니다. 이 쪽의 가치관은 죄수들이 도망하고 간수가 자결하는 가치관입니다. 그러나 저 쪽의 가치관은 옥문이 열렸는데도 불구하고 도망하지 않는 이상한 가치관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상식을 벗어난 가치관입니다.
간수가 도전받았던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생각에 혼란이 온 것입니다. 참으로 두려웠습니다. 29,30절에 보니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하고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라고 했습니다.
간수는 바울을 통해 전혀 다른 세상을 보았기에 참으로 두렵고 떨렸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실라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따로 모셨습니다. 그들이 알고 있고 그들이 살고 있는 다른 세계에 대하여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이것이 간수의 물음이었습니다.
이처럼 신자의 삶은 세상의 사람들에게 기존에 가진 가치관의 혼란을 초래하게 하는 자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에 도전을 던지는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검을 주고 불을 던지러 오셨듯이(마 10:34-39)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 역시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세상에 도전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세상의 가치관과 상식에 매여 산다면 결코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알릴 수 없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간수의 집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31,32절).
간수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라는 물음에 바울 사도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대답을 한 것은 예수를 믿으면 네가 자결하려고 하였던 골치 아픈 문제들이 다 해결된다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 자들이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예수로 전하는 경우들을 많이 봅니다. 복음은 결코 우리의 현실 문제를 해결해 주는 도깨비 방망이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냉소주의도 아니고 현실을 도피하고자 하는 염세주의도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기독교,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의 개인적인 문제, 현 상황에서의 어려운 문제 등으로 인해 문제를 문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모습으로 주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현실적인 문제는 현실로 그대로 다 떠 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현실의 골치 아픈 문제로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문제 의식 속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자신이 보여지기 때문에 더욱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간수에게는 세상이 전부였습니다. 세상이 전부인줄 알고 있었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바울 사도가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한 것은 간수 네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전혀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간수가 생각하는 것은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죽음 저 너머에 다른 세계, 다른 삶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자는 죽음을 넘어선 세계를 바라보고 그 속에서 사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상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것, 현재를 바라보고 절망이 아니라 또 다른 주님의 세계에서 주는 기쁨을 누리면서 사는 것, 세상의 절망 속에서 십자가가 보이는 것, 그것이 곧 구원인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는 말씀은 단순히 지금 세상에 사는 불신자들에게 전도하기 위해서 하는 말씀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에게 예수 믿는다고 하는 나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한번 예수 믿었다고 끝이 아닙니다. \'어릴 때부터 믿어왔기 때문에 내게는 예수 믿으라는 말을 하지마!\' 그런 말은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자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넘어지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담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2,13).
여기서 피할 길이란 결코 그 시험이 우리에게 닥쳐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감당할 시험으로 주셔서 능히 그 시험을 감당하도록 일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일어난 어려운 일로 말미암아 도피하거나 그 시험이 제거되도록 기도하고 그것 때문에 예수 믿는다는 것은 성경에서 말씀하지 않는 사이비 종교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항상 나는 예수 믿고 있다는 자만심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넘어질까 조심하는 마음으로 우리 자신을 향해 \'예수 믿는가? 나를 위한 예수가 아니라 성경에서 말씀하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믿는가?\'라는 물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주님의 세계에 살고 있는가?\'라는 물음을 가지고 항상 자신을 주님의 십자가와 견주어 볼 줄 아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찬양+모음] 부활 찬양 메들리 (예수부활했으니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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