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5 편 주 안에 거할 자 오늘은 시편 15편의 말씀입니다. 오늘 시편은 하나님 앞에 의인이 어떤 자인가를 노래하므로 의의 삶을 권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전체 구조를 보면 먼저 1절에 하나님의 장막과 성산에 유할 자가 어떤 자이겠는가를 묻고 이에 자신이 신앙고백적으로 대답하는 내용이5절 상반절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5절 끝에서 이런 자는 영영히 요동치 않는다고 그런 식으로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론에 해당되는 2-5절의 내용은 긍정형과 부정형이 반복되는 식으로 일정한 패턴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곧 2절은 주의 성산에 거할 자는 어떻게 하며, 어떻게 하며, 어떻게 하며, 이렇게 되있고, 3절은 주의 성산에 거할 자는 이러지 아니하고, 이러지 아니하고, 이러지 아니하며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패턴이 4절과 5절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는 독특한 시적 운율을 살리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이 시는 여호와께 묻는 것으로 시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1절을 볼까요? 1\"-----\" 지금 무엇을 묻고 있습니까? 주의 장막에 유할 자가 누구인지, 주의 성산에 거할 자가 누구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법은 병행적인 반복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비슷한말을 반복하므로 강조하는 표현법입니다. 주의 장막에 유한다 하는 말과 주의 성산에 거한다 하는 말은 거의 같은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의 장막에 유하는 자가 곧 주의 성산에 거하는 자이겠지요. 여기서 주의 장막은 성막을 가리킵니다. 곧 \'누가 주의 성소에 거하겠는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 성산은 어떤 산을 말하겠습니까? 시온산을 가리키겠지요? 하나님의 영광스런 다스림의 처소로서 시온산을 가리킬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장막에 유한다\' 또는 \'성산에 유한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언약에 거하는 것, 그 은혜 아래 거하는 것, 하나님과의 동행을 묘사하는 말들이 될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자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겠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누구겠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의 법을 따라 사는 자이겠지요? 왜냐하면 언약의 법은 곧 하나님과의 동행의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언약의 법을 따라 사는 자가 주의 장막, 주의 성산에 유할 것입니다. 그럼 왜 이렇게 주의 장막, 주의 성산을 이렇게 강조하는 것입니까? 옛질서에서 하나님께서 거기에 그 이름을 두시고 자기 백성과 함께 하셨기 때문이지요? 거기가 하나님의 영광스런 임재의 처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 아래 거하는 것, 그의 품안에 거하는 것을 \'장막에 유한다\', 또는 \'성산에 유한다\'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는 존재적으로 아니 계신 곳이 없지만 그가 특별히 그곳을 교제의 처소로 구별하여 그곳에 이름을 두셨다는 의미로 하나님과의 동행을 묘사할 때 그렇게 묘사하는 것입니다. 여하튼 하나님의 장막에 유할 수 있는 자는 어떤 자입니까? 하나님의 언약의 법을 따라 사는 자입니다. 그럼 당연히 뒤이어지는 내용은 언약의 법을 따르는 삶에 대한 내용이겠지요? 그 언약의 법을 따라 사는 자의 모습을 2절 이하에서 말해 주고 있습니다. 2\"-------\"\"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이렇게 해서 한 단위를 이루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모두 긍정형의 문장을 쓰고 있고 서로 같은 가치의 말들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정직, 공의, 진실 모두 다 같은 가치의 말들입니다. 그리고 이 정직과 공의와 진실은 하나님의 의의 법이 요구하는 바 율법의 근본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들은 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의지요 요구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나타내는 대리자의 요구되는 성품입니다. 정직과 공의와 진실 이 모든 것은 과연 그가 하나님의 백성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표지들 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정직하게 행하는 자, 공의로운 자, 진실한 자 그런 자가 주의 장막에 유하며 주와 함께 동행할 수 있습니다. 또 3절에 보면 어떤 자가 주의 장막과 성산에 유한다고 되어 있습니까? 3\"--------\"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는 자, \'참소한다\'는 말은 남을 모함하는 것을 말하지요? 곧 남을 모함하지 아니하는 자, 그리고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는 자,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는 자, \'훼방한다\'는 말은 해를 끼치는 것을 말합니다. 바로 그런 자들이 주의 장막에 유하게 될 것이고 주의 은혜로부터 끊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는 주로 부정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혀와 관련된 것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곧 입을 놀려 형제에게 해를 가하는 그런 악행을 행하지 않는 자, 바로 그런 자가 주와 함께 유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벗에 대한 행악이나 이웃에 대한 훼방은 남을 모함하고 헐뜯으므로 발생하는 죄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하튼 그 혀로 형제를 모함하고, 없는 말을 지어내며, 형제에 대해 악을 해하는 자는 주의 장막에 함께 유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4절에서는 또 어떤 자가 주의 장막에 유한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4\"--------\"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망령된 자는 어떤 자를 가리키겠습니까? 시편 14편의 표현대로 하면 \'하나님이 없다\'하는 자\',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 \'하나님을 멸시하는 말과 행위를 두려움 없이 말하고 행하는 자\' 그런 자를 의미할 것입니다. 그런 자를 멸시하는 눈으로 바라보는 자가 주의 성산에 유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약의 이해로 하면 조금 어리둥절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원수까지 사랑하라 했는데, 여기서는 그런 자를 멸시하는 눈으로 바라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은 구원역사적인 차이 때문에 그렇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이제 주님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의의 경영, 새로운 의의 역사가 왔기에 새로운 의의 요구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구약 때에는 원수를 향해 분노 가운데 달려들어 그 목을 베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를 동일하게 멸시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고 원수라도 이제 멸시의 눈초리가 아닌 긍휼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 이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섬기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구원역사적인 상황을 늘 염두에 두고 성경을 보아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구약때에는 망령된 자를 멸시해야 하는 것이고 반대로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 법에 순종하여 사는 자를 존귀히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자가 하나님 앞에 의인이요, 주의 곁에 유할 수 있는 자입니다. 그 다음 4절 하반절로 5절 상반절을 보면, 다시 \'아니하며 아니하며\' 하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4하-5상\"---------\" 서원을 변치 않는 자, 변리로 대금치 않는자, 변리로 대금치 않는다는 말은 이자를 받기 위해 돈을 빌려 주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소위 사채업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치 아니하는 자, 바로 그러한 자가 의인으로서 하나님의 장막에 유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말하는 것들입니까? 언약의 법을 순종하여 사는 것을 말하지요? 언약 공동체를 지켜 가는 것을 말하지요? 율법이 규정하는 법규를 지키므로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를 지키고 보존하고 세워 가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규정하기를 서원은 하나님과의 약속이어서 반드시 갚도록 규정하고 있고, 이스라엘 백성은 한 형제와 같아서 돈을 꿔줄 때 금리를 받지 않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뇌물을 주어서 치리자의 눈을 어둡게 하는 자는 하나님의 통치를 무너뜨리는 것과 같아서 사악한 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의의 법을 존중하고 순종하여 살아가는 자, 하나님의 언약공동체를 아끼고 보존하는 자, 율법에 나타내신 뜻을 따라 형제에 대한 모든 의무를 이행하는 자, 바로 이와 같은 자들이 주의 장막, 주의 성산에 유할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 아래 거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영영히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동치 않는다는 말은 시편 1편에서 그리고 있듯이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은 상태를 말합니다. 시냇가의 나무가 극심한 가뭄 중에도 마르지 않듯이 하나님의 심판 중에도 견디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가 심판을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하튼 주의 내신 법을 따라 사는 의인들은 영영히 주와 함께 동행하며 요동치 아니할 것이고 주를 향해 마음을 높이고 주의 법을 멸시하는 자는 망하고 말 것입니다. 자 그럼 우리는 이 시편을 어떻게 읽어야 하겠습니까? 늘 구원역사적인 프리즘을 통해서 읽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지요? 왜냐하면 우리의 역사적인 상황은 이전 역사와 달라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적대적인 방식으로 골리앗을 향해 달려들 듯이 원수에게 달려들어서는 아니됩니다. 기드온이 바알과 아세라상을 도끼로 찍었다고 해서 우리도 도끼들고 산으로 갈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에게 직접 적용될 수도 있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가령 3절에 정직, 공의, 진실등은 바로 적용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이러한 것들까지라도 그리스도의 새로운 복음의 빛 가운데서 조명해야 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가령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했을 때, 똑 같은 계명이 구약의 계명에 나와도 그 의미가 전혀 달라지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했을 때는 그것은 다른 말이 아니라 율법에서 규정한 이웃에 대한 의무를 다 이행하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공의를 이야기 해도 율법이 정한 공의지 그 이상의 공의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에게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하신 계명은 전혀 새로운 계명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몸을 주신 사랑이 나타났거든요. 그러므로 이 계명 앞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는 새로운 수식어를 우리는 유의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 이웃을 사랑하라 했을 때도 신약에 와서 그 의미가 전혀 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그렇듯이 비록 여기 나오는 정직과 공의 진실함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직접 적용될 수 있다 할지라도 늘 구원역사적인 새로운 빛 가운데서 바라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3절에 나오는 혀로 참소치 아니하는 것도 우리가 당연히 형제를 무고히 모함해서는 안되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단순히 형제를 해하지 않았다는 것에서 그쳐서는 안되는 것이고 더 적극적인 선에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형제를 모함한 일이 없으니까\' 하고 있어서는 안되고, 혹 어떤 형제가 다른 형제에 대해 오해를 사고 있다면 적극 그것을 해결해 주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와는 관련이 없으니까\' \'나는 적어도 말을 옮기지는 않았으니까\'하고 방관하고 있는 것은 새백성의 태도가 아닌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적극적으로 형제의 보호자가 되어야 하고 형제의 아픔을 감싸주며 치료해주며 고쳐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관계는 구약의 형제관계와는 달라서 이제 주안에서 한 지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 생명의 연합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형제됨이 법적인 의무로서의 형제됨이었다면 우리의 형제됨은 주님이 교회와 함께하시는 것과 같은 형제됨이어서 그 격이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격이 다른 만큼 우리의 형제에 대한 태도도 달라야 하는 것입니다. 또 5절에 보면 \'변리로 대금치 말라 하였으니 나는 아예 돈을 안 빌려 주어야 하겠다\' \'또는 이자만 안 받으면되니까, 저당은 잡아야 하겠다\' 이것은 구약백성의 태도입니다. 물론 우리가 돈문제에 있어서 지혜롭게 해야겠지만 우리가 형제를 위해 줄 수 있는만큼은 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방인은 거래 관계지만 우리의 관계는 더 이상 거래 관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 아버지를 부르는 형제 관계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부요하심으로 그들을 채워 줘야 합니다. 우리는 한 몸, 한 떡에 참예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자 안 받았으니까\'하고 스스로를 자위하고 있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구약때는 어린아이 법이어서 이렇게 법으로 규정해서 그들의 완악함을 제어하고 법을 따라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나타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새로운 상황 가운데서 새로운 의의 요구를 받고 있습니다. \'그가 몸을 주셔서 우리 가난한자를 하늘의 부요하심으로 부요케 했으니 형제들아 너희들도 너희 풍성한 것으로 형제를 위해서 그 부요하심에 참여하도록 해라.\' 이것이 바울이 교회를 권면하는 방식입니다. 단순히 돈을 이자받고 꿔줄 것이냐 안받고 꿔줄 것이냐 하는 그 정도의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옛 경륜은 휘장으로 가리운 어린아이의 법이었고 그들의 마음에 완악함에 조절된 의의 법이어서 종의 법이었고 그것은 죄의 권세가 지배하는 시대였기 때문에 법을 따라 형제의 관계를 이루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어떻게 주님 앞에 진실하며 부활하신 주님의 몸으로서 어떻게 생명의 공동체를 이룰 것인가? 그런 관계에서 새 계명을 주셨기 때문에 옛 계명을 그대로 우리에게 문자적으로 적용하고 그것만 확대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 가운데서 여기 있는 한계성과 어두운 점들과 완악한 점들을 제거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속사적으로 성경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빛, 새로운 질서를 통해 옛 어두움과 어리석음 완악함을 벗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적인 방식으로 그것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아무리 그 적용이 깊어도, 어린아이가 말 잘 듣는 수준이고 약혼한 사람들이 사랑하는 그런 수준일 뿐입니다. 우리들은 장성한 아들로서 아버지를 나타내는 의가운데 행해야 하고 전혀 새로운 빛 가운데서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원이라는 것은 오는 역사에 참여하는 것만이 아니라 현재 우리가 역사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동행은 그냥 서로 단순한 동행, 그런 문제 보다도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기능을 감당하며 능동적으로 하나님을 나타내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며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하셨던 일을 계속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구원은 역사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의 대리자로 서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언약 아래 거하는 것이요, 은혜 아래 거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표현을 빌리자면 주의 장막에 유하는 것이요, 주의 성산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여호와여 누가 주의 장막에 유하며 주의 성산에 유하겠습니까?\' 이렇게 물을 것이 아니라 \'주여 주님과 함께 보좌에 앉을 자 누구오며 주와 함께 하나님 안에 살자가 어떤 자이겠습니까?\'하고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임한 새로운 질서와 빛을 따라 더 나은 의의 삶을 이루어야 합니다. 더 나은 정직과 공의와 진실, 더 나은 새언약 공동체의 삶, 더 온전한 의의 행실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 자는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도 견고하여 요동치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때에 기쁨으로 주를 맞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자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생에 들어갈 것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가 더 온전한 의의 삶 안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주와 함께 동행하실 수 있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