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6편 강해

시 16 편 주를 향한 신앙고백


다윗의 이 시에는 그의 하나님을 향한 깊은 신뢰와 감사가 녹아 있습니다. 주께로부터 나오는 진정한 평안과 기쁨이 녹아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향해 또 성도들을 향해 갖는 간절하고 애틋한 마음이 녹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악한 세상을 향해 갖는 결연한 의지와 다짐이 어려 있습니다. 그가 이처럼 하나님과 성도들을 향해 갖는 마음,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감사, 평안과 기쁨들이 어떠하였고 그거들은 과연 어디에서 연유된 것인지를 이 시간 본문을 읽어 가며 확인하였으면 합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다윗의 이러한 절절한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먼저 다윗은 하나님을 향해 도우심을 호소하는 것으로부터 그의 시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께 피하겠으니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켜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우리가 알지 못하는 큰 곤경과 어려움에 처해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그가 그러한 곤경과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그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는 그가 의지할 수 있는 다른 것들이 있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어떠한 것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겠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는 사람을 의지하는 것도, 자신이 가진 어떤 것을 의지하는 것도 다 어리석은 것임을 깨닫고 있는 것같습니다. 그는 성도들이 유일하게 의지할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심을 삶을 통해 배워 알고 있는 것입니다.



2절과 3절은 뭐랄까, 다윗이 갖는 가치철학이라 할까요, 또는 인생철학이라 할까요 여하튼 그런 내용입니다. 곧 다윗의 사고와 삶의 방식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2절과 3절을 읽어볼까요? 2-3\"-------\" 그는 하나님에 대해서 주님이시라고 말하고 하나님만이 자신의 유일한 행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성도들에 대해서는 존귀한 자라고 말하고 성도들은 자신의 기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에게 있어 하나님과 성도들은 생의 전 의미요 행복이요, 기쁨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만이 자신의 행복이라고, 성도들만이 자신의 기쁨이라고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게 해 줍니다. 곧 우리의 생을 무엇을 중심으로 또는 누구를 중심으로 이루어가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생에 있어 하나님은 얼마나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까? 또 여러분에게 있어 곁의 성도들은 얼마나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진정 여러분은 \'하나님은 나의 생의 유일한 행복, 성도들은 나의 큰 기쁨\'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까? 혹여 하나님과 성도들이 삶에 있어 지극히 작은 한 부분만에 자나지 않는 것은 아닙니까? 어떻습니까? 지금 다윗의 가슴에는 온통 하나님과 성도들에 대한 생각뿐인 것 같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을 하나님과 교회를 중심해서 경영해 가는 것이 하나님 앞에 최선의 생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는 진정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다윗만이 아니라 우리의 생 또한 이런 생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과 성도를 중심으로 자기 삶을 이루어 가는 것, 그것이 진정 아름다운 인생이 아닐까요? 여하튼 다윗은 하나님을 자신의 행복으로 성도를 자신의 기쁨으로 고백하며 노래하고 있습니다.



4절은 하나님 외의 것 또는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자신의 결연한 의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4\"----------\" 자신은 하나님 외에 어떤 다른 신도 섬기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름조차도 입에 올리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거짓 신이요, 피의 전제를 받는 신이요, 우리에게 행복과 기쁨과 자유를 주는 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런 신을 섬기는 자들과는 결코 함께 하지 않겠으며 그런 자리에는 참여하지 않겠노라 결연한 의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러한 다른 신을 섬기는 것에 대한 거절은 곧 하나님만을 향한 순전한 사랑을 고백하는 것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어떤 것에도 내 자신을 주지 않겠노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 거짓 신들의 이름조차도 입에 올리지 않겠노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은 여전히 어둠의 \'세상신\'을 섬기고 있습니다. 탐욕의 신, 피의 전제를 받는 신, 죄악과 죽음을 제물로 받는 신, 자유와 기쁨과 평안보다는 좌절과 고통과 허무를 안겨다주는 신, 섬김의 대가로 결국 죽음을 던져주는 악독한 신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신을 섬기는 자는 결국 큰 고통을 당하고야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자유와 기쁨과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죽음의 가혹한 고통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 어둠의 세상신을 섬기지 않겠노라고, 그의 전에 어떠한 제삿술도 바치지 않겠노라고 다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다윗의 주님을 향한 고백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시편은 이러한 형식이 특징인데, 하나님을 향한 고백과 자신의 다짐과 의지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5절과 6절을 보겠습니다. 5-6\"---------\" 다윗이 지금 자신의 기쁨의 원천으로 고백하고 있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자신이지요? \"주님이야말로 제가 받을 유산 그 자체이십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주님께서 받을 유산 그 자체이십니까? 주님께서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지요. 자신의 운명이 전적으로 주님의 손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바로 이 주님으로부터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을 유산으로 받는 것은 모든 것을 받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우리는 모든 것을 받은 것입니다. 주님 자신을 우리의 생명의 선물로 받았으니 모든 것을 받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의 살과 피, 주님의 생명, 주님 자신을 우리가 받고 있으니 우리는 모든 것을 받은 것이고, 그 안에서 우리의 영원한 생명의 유업이 확정되었으니 우리가 하늘의 기쁨으로 기뻐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가나안 땅의 유업 정도가 아니라 하늘의 이 영원한 생명을 유업으로 받았으니 우리가 다윗 안에 넘쳐나는 기쁨, 그 이상의 기쁨으로 사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과연 우리 안에 이런 기쁨이 있습니까? 다윗은 땅의 기업을 받고 그 땅은 기쁨을 주는 땅이라고, 빛나는 유산이라고 그 기쁨을 노래하고 있는데, 과연 우리 안에는 그런 기쁨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왜 우리는 하늘의 유업을 받고도 기쁨 중에 살아가지 못하는 것입니까? 왜 그럴까요? 그것은 아마도 당장 그 기업이 눈앞에 보이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 하늘의 유업이 약속되어 있다한들 자신의 기쁨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당장 눈앞의 생계가 더 걱정인 것이지요. 하늘의 유업보다는 눈에 보이는 땅 한 평이 더 아쉬운 것입니다. 때로 우리가 하늘의 것을 보지 못하고 땅에 우리의 시야를 두게 될 때, 우리는 기쁨을 상실하게 됩니다. 땅을 보자 말자 걱정과 근심과 염려가 우리 마음을 차지하게 됩니다. 주님을 바라보면 세상을 이기는 평강과 샘물처럼 솟아나는 기쁨이 있는데, 세상을 바라보자 말자 우리는 가득한 염려와 근심 가운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믿음의 눈을 들어야 하겠지요? 눈을 들어 영광의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을 이기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약속하신 하늘의 유업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그 유업은 눈만 떠서 하늘을 본다고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계속 상상한다고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의 눈을 떠야 합니다. 믿음의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께서 이루신 영광의 일이 무엇인가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우리 안에 이루신 크고 놀라운 일이 무엇인가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약속하신 하늘의 유업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럴 때 우리는 가난한 주에도 기뻐할 것이며, 큰 기쁨으로 이 땅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그렇게 기도했지 않습니까? \"하나님 저희의 눈을 밝혀 주십시오. 그리하여 하나님의 부르신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 주십시오. 성도들에게 약속하신 그 기업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를 알게 해 주십시오. 우리에게 베푸사 우리와 함께 하게 하신 능력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여러분도 이것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이것 주십시오. 저것 주십시오. 이런 것보다 이미 우리에게 주신 하늘에 간직된 유업이 무엇인지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은 세상에 매이지 않고 자유한 기쁨 중에 이 땅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여하튼 우리 모두가 주님 자신을 유업으로 받은 자로서 다윗보다 더한 기쁨으로 이 땅을 사실 수 있기 바랍니다.



이제 7절과 8절입니다. 다 같이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7-8\"----------\" 자신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결코 흔들리지 않겠노라고 의지를 다지고 있습니다. 그가 찬양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날마다 자신을 일깨우시고 교훈하시니 자신이 이 하나님을 찬양하겠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언제나 함께 계시고 자기 곁에 계시니 자신이 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흔들리지 않겠노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와 멀리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늘 우리를 일깨우시고 교훈하시며 우리로 의의 길을 가도록 인도하십니다. 다윗은 이런 하나님을 깊이 느끼며 감사하고 마음으로 이 하나님을 찬양하겠노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아는 하나님은 언제나 자신과 함께 계시는 분이십니다. 늘 그의 곁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어려서 목동으로 있었을 때나, 왕으로 세움을 입었을 때에도 하나님은 늘 한결 같이 자신과 함께 하셨던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유명한 한 예화가 있지요? 어떤 사람이 훗날 주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나 온 발자취를 더듬어 보게 되었습니다. 그 발자취를 더듬어 본 순간 그는 이상한 것을 한가지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발자국이 항상 자신의 발자국과 같이 나 있었는데 자신이 가장 힘들고 어려웠을 때를 보니 발자국이 하나 뿐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물었지요. \'주님 왜 이 때에는 발자국이 하나 뿐입니까? 제가 가장 힘들고 어려웠을 때 주님은 저와 함께 하지 않으셨군요?\' 주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그 때 발자국이 하나뿐인 것은 그 때 내가 너를 업고 그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주님은 결코 우리 곁을 떠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다윗의 말처럼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시는 분, 늘 나의 곁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흔들림 없이 주의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다.



9절과 10절에서는 다시 다윗의 주님을 향한 고백이 나오고 있습니다. 9-10\"--------\" 그는 큰 위험 중에도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하고 아무런 두려움도 위험도 느끼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그가 죽음의 위험 앞에 서 있습니다. 그의 생을 늘 그러하였습니다. 사울왕에게 쫓길 때에도, 아들 압살롬에게 쫓길 때에도 그는 늘 생명의 위협 앞에 살아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노래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평안과 기쁨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싶을 정도로 그는 평안하고 아무런 두려움도 느끼지 못합니다. 속된 말로 경지에 이른 것이지요. 그, 까닭이 무엇입니까? 10절에 주님께서 보호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결코 죽음의 세력에 내주시지 않을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세계에 자신을 버리지 않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믿음 가운데서 그는 평안하고 고요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의 마지막 고백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11\"---------\" 주께서 자신에게 생명의 길, 영생의 길을 보이시고 생명의 주로 곁에 계시니 죽음 앞에서도 그 삶에 기쁨이 넘치며 큰 즐거움이 영원토록 이어질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고백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는 하나님 나라의 대리왕으로서 탁월한 믿음의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하심 안에서 그 나라가 영원하고 무궁할 것을 보았고, 그 안에서 생명의 길, 영원토록 이어질 큰 즐거움의 길을 보았습니다. 죽음을 넘어선 나라를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생명의 나라를 이루실 것을 보았습니다. 자신 안에서 생명의 주관자로 일하신 하나님께서 영원한 생명의 나라를 이루실 것을 보았습니다. 바로 그 안에서 그는 죽음이 앗아갈 수 없는 평안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이처럼 신약백성과 비견될 탁월한 은혜를 누리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 나라가 메시야 왕국의 특성을 나타내는 나라이기 때문이지요. 메시야 왕국을 선취적으로 품는 나라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하튼 그가 소망했던 나라, 영원한 생명의 나라, 큰 즐거움이 영원토록 이어질 평강의 나라가 우리 주님 오심으로 말미암아 임하였습니다. 사망이 그 권세를 시행할 수 없는 영생의 나라가 그의 오심 그리고 죽고 부활하심 가운데 세워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이 성취된 나라를 사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죽음이 힘없이 우리 주님을 그 가운데 내어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죽음의 세력이 거룩한 자를 삼키지 못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로서 우리는 참 생명의 길을 알게 되었고 기쁨으로 그 길을 가는 자 되었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부활의 주님을 모시고 사는 자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 삶에는 기쁨이 넘치고 큰 즐거움이 영원토록 이어지는 당연합니다.



여러분에게 그런 기쁨과 즐거움이 있습니까? 하늘의 기쁨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함이 있습니까?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가 환란 중에도 기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뻐할 수 있다고 말하고 기뻐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부활 생명의 나라가 우리 안에 확정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보았던 영생의 나라가 이미 우리 손안에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제게는 그런 기쁨이 없는데요\' \'아무래도 저는 부족한 사람인가 봐요\' 물론 우리가 이런 기쁨으로 늘 충만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기쁨과 즐거움을 전혀 맛보지 못하는 사는 것은 신약시대의 풍성함과 영광스러움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미 주어진 것도 누리며 살지 못한다는 것은 신약백성으로서 비참한 일입니다. 다윗조차도 그 승리를 보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데, 그 승리를 사는 자로서 이런 기쁨이 없다면 그것은 아무래도 이상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다윗이 거짓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기쁨도 즐거움도 평안도 없는데 억지로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지요. 그는 지금 충만한 기쁨 중에 이 시를 쓰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이 시를 읽으면 그것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다윗이 환란 중에 기뻐할 수 있다면 우리 또한 그런 기쁨 중에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능력의 시대가 오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에게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이루신 큰 구원의 일을 듣고 믿음으로 화합하는 일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듣고 깨닫고 믿음으로 화합할 수만 있다면 이 은혜는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넘쳐나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 그 기쁨을 나눌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곁에 있는 형제와 주님을 모르는 이들에게 그 기쁨을 나눌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오늘 여러분은 다윗의 시를 보면서 무엇을 생각하셨습니까? \'다윗이나 되니까 이런 시를 짓지\'라고 혹 생각하시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이보다 더 탁월한 내용의 시를 지을 수 있습니다. 시를 짓는 솜씨가 없다면 최소한 이보다 더 탁월한 믿음의 고백만큼은 가능한 것입니다. 아무쪼록 여러분이 이를 여러 번 더 읽어보고 개인적으로 묵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실 수 있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