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학교 부모교육의 실태연구

기독교교육
한국 주일학교 부모교육의 실태연구-유아세례를 근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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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주일학교 부모교육의 실태연구-유아세례를 근거로

 

정희영(총신대 유아교육과 교수)

 

I. 서론

 

기독교교육은 가정과 교회 그리고 학교를 통해 이루어진다. 가정과 교회와 학교는 성령의 불꽃과 하나님 말씀의 기초 위에 굳게 서 있는 교육의 삼각 받침대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기독교교육은 가정과 교회, 그리고 학교 어느 곳에서도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먼저, 한국 기독교학교 교육의 현황을 살펴보면 기독교학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김요셉은 1885년도에 태동된 기독교학교는 민족복음화와 한국 사회의 근대화를 위해 일익을 감당하였으나 이제는 열악하고 귀찮은 존재로 전락해 버린 상황이라고 주장한다. ‘한국 기독교학교 교육의 현황과 그 대안’이라는 논문에서 일반적으로 기독교학교라고 칭하는 미션스쿨이 아닌 기독교철학에 의해 교육의 목적을 설정하고 기독교정신으로 교육과정을 운영하려고 노력하는 기독교학교의 교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학생들의 신앙과 삶을 이어주는 교량역할을 하며 기독교세계관을 가지고 학문을 할 수 있는 잠재력을 배양해 줄 수 있는 예배가 체계적인 교육과정 안에서 조직, 운영되고 있지 않았으며, 성경과 각 교과목의 통합을 묻는 질문에 39.5%의 교사만이 긍정적으로 응답하였다. 이는 교사들이 기독교세계관으로 가르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않음을 시사한다. 또한 각 교과목의 교재개발에 대해 86.1%의 교사들이 그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는 기독교학교에서 학과목을 위한 교재가 개발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처럼 기독교학교에서 하나님말씀에 기초하여 교육을 하는데 있어서 많은 어려움을 지니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가정에서의 신앙교육은 어떠한가? 비교적 단순한 삶을 영위했던 구약시대에는 부모에게 교육적 책임이 부여되었고 보다 복잡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신약시대 역시 부모가 교육적 책임을 지니고 있다. 현대의 부모의 교육적 책임은 교회와 학교에 위임된 상황이다. 교회와 학교에 교육적 책임이 위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녀의 신앙에 대한 첫 번째 책임은 부모에게 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의 그리스도인 부모들의 자녀의 신앙에 대한 교육은 전적으로 교회의 주일 학교 교육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스도인 부모들의 자녀의 신앙교육에 대한 관심은 또한 홈스쿨링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홈스쿨링의 현황과 과제’라는 논문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기독교인 부모 가운데 홈스쿨링을 선택한 동기가 유해한 학교환경과 교육의 부실 때문이 49.1% 였으며 기독교교육 때문이라고 대답한 부모는 38. 2%였다. 이처럼 홈스쿨링을 하는 이유가 기독교교육보다는 다른 이유가 더 많다는 결과는 그리스도인 부모들의 자녀양육에서 신앙보다는 다른 면이 더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에서의 교육 역시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다. 잭 세이모어(Jack Seymour)는 “오늘 교회교육이 학교화 즉, 지식전달형태로 발전함에 따라 기독교교육의 목적과 과정이 왜곡되었고 세속교육으로 꼼짝없이 몰아넣게 되었다”고 교회교육을 비판하고 있다.

이처럼 학교와 가정, 그리고 교회에서의 기독교교육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교회와 가정에서의 교육을 같은 선상에서 살펴봄으로써 하나의 해결책을 찾아보고자 한다. 현대 부모의 자녀에 대한 신앙교육은 교회의 제 1차적 소명인 교육사업과 매우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다. 교회는 부모의 교육적 사명을 자각하도록 깨우쳐 주고 도와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 부모는 항상 교회의 일원이며 교회는 항상 그리스도인 부모와 자녀의 공동체이고, 교회가 그리스도인 부모의 교육적 사명을 감당하게 하기 위해 부르심을 입은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인 부모들에 대해 상반되는 교육적 기능을 지닌 것이 아니라 보완적이고 포괄적인 기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가정과 교회의 교육적 기능을 이원화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교회가 가정에서 부모들의 자녀에 대한 신앙교육의 사명을 일깨워 줄 수 있는 대표적인 예가 유아세례라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인 부모들의 자녀에 대한 신앙교육의 책임은 유아세례문답서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유아세례는 시행되지만 부모들이 그들의 자녀를 언약의 상속자로 인식하고 말씀과 믿음 안에서 잘 양육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에 대해 노만 하퍼(Norman Harper)는 은혜언약의 교리는 언약신학을 고백하는 성도들에게서 조차도 강조되고 있지 못하며 그들이 믿고 고백하는 신조와 실제 그들의 자녀양육의 태도가 매우 다르다고 언급하고 있다. 루이스 벌콥(Louis Berkof) 역시 대부분의 교회에서 이론적으로 언약의 교리를 승낙하는 사람들에게 조차 언약의 교리는 이해되고 있지 않으며 그리스도인 자녀를 위한 교육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교회와 가정에서의 교육적 사명을 다시 한번 자각하고 자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양육하기 위한 방안으로 유아세례의 중요성과 그 의미를 부모교육의 차원에서 살펴보는 일은 매우 가치있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이를 위해 부모교육의 개념, 부모교육의 기원, 그리고 부모교육과 유아세례에 대해 살펴보고, 각 교회의 부모교육의 실태를 조사함으로써 현 교회가 안고 있는 부모 교육에 대한 사명과 책임의 문제를 살펴보고 그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II. 주일학교 부모교육의 이론적 배경

 

1. 부모교육의 개념

일반적으로 부모교육에 대한 개념은 매우 다양하게 정의되고 있다. 교육학용어사전에서는 부모교육이란 교육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부모들에게 아동발달 교육과정 등을 알려 주고 가정에서의 협력을 도모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시작된 교육으로서 부모참여를 위한 프로그램에 통합되기도 하지만 부모로서의 효율적인 양육태도 및 방법을 지니도록 교육하는 것을 말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레퍼, 스키퍼, 위더스픈(Lepper, Skipper, Witherspoon)은 부모교육이란 부모가 자신의 역할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배우는 학습자로서의 역할과 자녀가 다니는 교육기관의 교사로서 직접 참여하여 자녀의 교사로서의 역할을 배우는 것이라고 보았다. 헤스(Hess)와 고든(Gordon) 자녀의 성장과 발달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으므로 부모와 자녀간의 상호작용관계에서의 부모의 효과적인 개입을 강조하였다. 멕코비와 젤너(MacCoby & Zellner)는 부모가 자녀의 교육기관에서 이루어지는 교육프로그램에 관여함으로써 자녀의 교육이 더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훈련시키되 교양교육까지 포함하는 것을 부모교육이라고 보았다. 스티븐스(Stevens, 1978)는 부모가 프로그램의 계획과 실천, 평가, 수정 등 모든 주요 단계에 참여하여 부모로서의 결정권을 행사하며 부모역할 기능을 발달시키는 것이 부모교육이라고 정의하였다.

이상에서 부모교육이란 부모가 자녀의 양육과 발달을 보다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부모가 교육을 받거나 학교의 프로그램이나 교육에 참여하거나 개입 또는 관여하는 것을 의미함을 살펴보았다. 부모가 자녀의 양육과 발달을 보다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수동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반면에 부모가 교사와 동등한 입장에서 상호유대관계를 가지면서 학교의 프로그램이나 제반 상황에 관여하거나 참여, 개입하는 것은 보다 적극적인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이상에서 설명되어진 것을 요약하면, 부모교육이란 부모가 자녀의 양육과 발달을 위해 부모 자신이 교육을 받음으로써 자녀양육과 발달을 위해 보다 효율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할 뿐 아니라 교육기관에서 이루어지는 교육내용을 이해하고 교육프로그램의 전 과정에 참여하여 중요한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교육의 과정을 통하여 가정에서의 자녀를 위한 교육뿐 아니라 가정과 교육기관과의 상호작용을 용이하게 함으로써 교육기관에서의 자녀의 발달을 보다 효과적으로 이루어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부모교육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상의 일반적 의미에서의 부모교육의 개념을 교회교육과 그리스도인 부모와의 관계에서 정의를 하면 다음과 같다. 부모교육이란 그리스도인 부모가 자녀의 신앙적 양육과 발달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교회에서 부모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며 교회에서 실시되는 교육내용을 부모들이 이해하고 그 교육내용에 참여하여 중요한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일반적 의미에서의 부모교육에 대한 정의는 부모를 대상으로 하는 교육이며 그 목적은 부모의 효율적인 자녀양육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 교육전문가가 투입된다. 교육주체와 대상과 목적이 교육전문가, 부모, 자녀양육으로서 모든 것이 자녀의 보다 효율적인 양육과 발달에 집중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성경적인 측면에서 볼 때, 부모교육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맺으신 언약을 보다 효율적으로 이루어 드리며 그것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명하신 부모의 교육적 의무에 순종하는 행위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즉 교육의 주체와 대상이 교육전문가와 부모라는 측면과 부모교육의 목적이 자녀의 효율적인 양육이라는 점에서 일반교육과 다를 바가 없지만, 교육의 목적이 단순히 자녀의 양육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맺은 언약의 신실한 이행을 위한 것이다. 일반적인 부모교육의 초점이 인간에게 맞추어져 있다면 성경적 의미에서의 부모교육은 하나님이 그 중심에 자리 잡고 있으며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의 정립과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부모교육의 주 목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기독교 가정이 언약의 공동체라는 사실에서 잘 나타난다 벌콥은 언약을 기초로 한 기독교 가정에서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부요하며 축복을 상속할 자들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영적인 유산의 위대함을 바라보도록 교육받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적 빈곤 속에서 살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기독교인 부모를 둔 자녀들은 언약에 의해 약속의 축복을 상속할 자들임을 알도록 교육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기독교인 부모들의 자녀양육의 중요성을 언급하는 것이며 한 걸음 더 나아가 교회에서의 자녀를 위한 부모교육의 중요성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부모교육에 대한 성경적 개념은 언약사상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여기에 대해 보다 자세한 것은 부모교육의 기원에서 다룰 것이다.

 

2. 부모교육의 기원

 

부모교육의 기원은 구약시대는 쉐마를 통해서 알 수 있으며 신약시대는 유아세례를 통해 설명되어질 수 있다.

 

1) 쉐마

쉐마는 신명기 6장 4-9 절의 히브리교육의 핵심을 이루는 말씀이다. 자녀에게 부모들이 성경을 어떻게 가르쳐야할 것인지에 대해 매우 구체적으로 그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이외에도 부모교육에 대해 성경의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다. 신 31: 11, 13에서는 “온 이스라엘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그 택하신 곳에 모일 때에 이 율법을 낭독하여 온 이스라엘로 듣게 할찌니......또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을 땅에 거할 동안에 이 말씀을 알지 못하는 그들의 자녀로 듣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게 할찌니라”고 말씀하시므로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하나님 경외하는 법을 가르쳐야 함을 명시하고 있다. 시 78: 5-7에서는 “여호와께서 증거를 야곱에게 세우시며 법도를 이스라엘에게 정하시고 우리 열조에게 명하사 저희 자손에게 알게 하라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후대 곧 후생 자손에게 이를 알게 하고 그들은 일어나 그 자손에게 일러서 저희로 그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라고 말씀하시므로 부모들이 후대에게 하나님을 알게 할 교육적 책임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잠 22: 6에서도 마땅히 행할 길을 자녀들에게 가르치라고 강조하고 있다.

 

2) 유아세례

 

(1) 유아세례와 언약의 관계

유아세례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언약의 개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로벝손(Robertson)는 언약이란 피로 맺은 약속으로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관계를 의미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스프롤(Sproul)은 언약이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맺으신 관계의 기본구조이며 하나의 계약과 같은 것이라고 보았다. 이처럼 언약이란 하나의 약속이나 계약이라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계약이란 계약을 맺은 쌍방간의 지속적인 책임이행이 요구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맺으신 언약은 매우 독특한 특성을 지닌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맺으신 언약은 약속의 대상자인 그의 백성의 의지와 신실함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의 의지에 근거한다. 언약성립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다. 창세기 17: 7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라”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나님 자신을 강조하시므로 하나님이 주도권을 갖고 언약을 체결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이것을 “은혜 언약”이라고 부른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을 때 이것은 단지 아브라함과만 맺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노아와 더불어 당신의 언약을 세웠고(창 6: 18), 이 언약은 이삭(창 24: 8), 다윗(시 89: 3)으로 연결된다.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이 언약백성의 자녀 또한 언약의 백성이 되는 것이며 언약의 참여자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 자신과 그의 자녀들이 언약의 당사자가 된다(렘 11: 10).

언약의 참여자로서 하나님의 백성은 태어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다(창 17: 10-12).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와 혹 너희의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이처럼 할례는 영혼의 언약에 대한 상징이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나타내는 징표이다. 이러한 구약의 할례의식과 전통은 유아세례로 이어지며 이것은 성경 전반을 관통하는 언약사상에 근거하여 무리없이 주장되어질 수 있다.

 

(2) 유아세례의 정당성에 대한 논의

유아세레의 정당성이 언약개념을 통해 무리없이 주장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사를 살펴보면, 개인의 분명한 신앙인식에 근거하여서만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이어져 왔다. 그들의 반대의 이유가 무엇인지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입장에 있는 학자들의 견해를 살펴보고 여기에 대해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며 유아세례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학자들의 견해를 살펴봄으로써 유아세례의 정당성을 입증하고자 한다.

 

① 유아세례 반대론자들

♦ 터툴리안(Tertullian, 160-225)

유아세례에 대해 명백히 언급한 최초의 사람이자 동시에 유아세례반대론자로서는 카르타고(Cartage)의 감독인 터툴리안이 있다. 그는 자신의 세례론에서 유아에게 세례 주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어린아이가 자라서 신앙고백 할 때까지 세례를 기다리는 것이 좋다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세례를 베풀어야 하는 사람들은 세례를 분별없이 주면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너희에게 요청하는 누구에게나 세례를 주라는 것이 적합한 주제이다. 그러나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는 말씀이 고려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각자의 조건과 성격 및 그의 나이에 따라서 세례의 연기가 보다 유익한데 특히 어린 아이의 경우에 그렇다. 왜냐하면 후원자들(Sponsors)이 위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죽음으로 약속을 지키지 못할 수도 있고 어린아이의 악한 성격이 증명됨으로 말미암아 잘못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자란 다음에 오도록 하자. 그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 지 알 수 있게 될 때 그리스도를 아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오도록 하자.

 

♦ 나찌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ianzus, 330-390)

나찌안주스의 그레고리는 아동이 세례문답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세례는 연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세례에 관한 설교에서’ 유아세례의 연기를 호소하였다. 그 때가 A.D 381년경이다.

 

나의 충고는 3살이 끝날 때까지나 혹은 그 전후까지 기다려서 그들이 성례전에 관한 것을 듣고 대답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다. 비록 그들이 그것을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들은 어느 정도 대락은 알 수 있을 것이며…… 그러면 그들의 이성이 성숙한 다음에 그들의 삶을 위하여 책임질 수 있게 될 것이다.

 

♦ 재세례파(Anabaptists, 16세기)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기독교의 부패를 개혁하고 종교개혁이 사회, 경제문제에 지나치게 보수적이라고 판단하여 종교개혁이란 사회개혁까지 동반해야 한다고 주장한 집단으로서 재세례파가 있다. 그들은 “믿고 세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막16:16 말씀을 근거로 유아세례를 반대하고 재세례를 주장하였다. 즉 스스로의 결단에 근거한 세례를 주장하였다. 이들의 유아세례의 거부는 반대파에 의해서 재세례파라는 명칭을 얻게 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유아기에 헌신을 하고 후에 스스로 결단할 수 있는 연령이 되면 세례를 받도록 했다. 세례와 관련한 그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첫째, 회개 및 개심을 경험하고 자기들의 죄가 그리스도에 의해 다 소멸되었다고 진실로 는 이들에게 세례를 베푼다.

둘째, 재세례파들은 세례까지 받은 이들이 실수하거나 죄를 지었을 경우, 비록 부주의의 결과였다고 하더라도 파문시킨다.

셋째, 성례전에 참여하려는 이들은 우선 세례를 받아야 한다.

넷째, 세례받은 사람들은 사탄이 이 세상에 심어놓은 악과 죄악으로부터 스스로를 성별해 야 한다.

 

♦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

바르트는 유아세례론자들이 제시한 유아세례의 성경적 근거와 신학적인 문제들을 분석, 비판하였다. 칼빈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세례에서 받은 것과 같은 영적 약속을 조상들은 할례에서 받았으며 유아들도 이 언약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세례는 할례를 대신하며 유아들도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유아세례론자들이 세례와 할례를 동일시하는 입장을 비판하였다. 바르트는 구약의 할례와 신약의 세례는 그 정의와 의미가 서로 바뀔 수 없다고 주장한다. 구약에서의 할례는 다른 민족들로부터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 자손을 12지파의 자손으로 구별하는 표시였으며 새 계약의 백성은 한 민족이 아닌 이스라엘과 모든 족속으로 자유롭게 부름받아 모인 한 백성이다.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1:12-13). 따라서 바르트는 기독교 세례는 후보자의 육체적 혈통에 근거할 수 없으므로 이스라엘의 할례와 구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바르트는 또한 부모나 후원자, 또는 전체 기독교회의 대리적 신앙이 유아세례의 근거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에 의하면, 세례란 회개와 신앙의 성례전으로서 복음을 믿고 회개할 수 있는 자만이 세례를 받을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후보자 개인의 신앙은 세례에 필수 불가결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복음을 믿고 회개할 수 없는 유아들에게 세례를 준다는 것은 논리성이 없으며 신학적으로 그 근거가 너무나도 약하다고 바르트는 주장한다.

 

② 유아세례 찬성론자들

 

♦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 354-430)

히포(Hippo)의 감독이었던 어거스틴은 이스라엘 백성이 받았던 할례와 유아세례를 동일하게 보았다. 그는 교회가 언제나 유아세례를 가르쳤다고 말했으며 세례받지 않은 어린이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나는 고대의 사도적 전통으로부터 그리스도의 교회는 세례받지 않은 자는 성찬에 참여하지 않게 했으며 세례받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와 구원과 영생에 이르지 못한다고 하는 입장을 자연스럽게 견지하였다고 생각한다. 만약에 그렇다면 세례와 주님의 살과 피가 없는 자는 구원과 영생의 소망이 없으며 그것들이 없는 유아들도 약속이 없다.

 

어거스틴의 위와 같은 견해는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모두에게 교회의 예식에서 유아세례를 보편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종교개혁자 루터는 세례란 우리의 신앙에 매여있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매여 있으므로 부모의 신앙과 헌신의 결단으로 자녀를 하나님께 드리는 표지인 유아세례를 무효화하거나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루터는 세례와 신앙의 관계에서 유아가 세례를 받을 때는 알지 못하지만 장성한 다음에 그 의미를 알게 되었을 때 믿음으로 신앙을 고백하면 세례는 여전히 유효한 것이라고 보았다. 세례란 하나님에 의해 인정되고 제정된 성례전으로서 신적 권위를 가지므로 인간에 의해 파괴될 수 없다고 보았다.

 

♦ 존 칼빈(John Calvin, 1509-64)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유아세례는 그 의미로 보아서 할례에 해당하며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통해 그 정당성이 인정되었다”고 언급하므로써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맺으신 언약이 유아세례의 근거가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 아브라함의 후손을 언약을 통해 자기 백성으로 택하신 후 그 언약을 확증하는 방법으로써 할례를 제정하셨다. 이 할례는 육을 죽이는 표징(신10:16)으로서 마음과 육신의 할례를 의미한다.

세례란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우리의 죄가 깨끗이 씻겨지고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참여함으로써 우리의 육을 죽인다는 것을 가르친다. 이것을 통해 신자들은 중생에서 새로운 생명과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

할례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과 가족으로 선택되었다는 것을 확증하는 표였으며, 그들로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참여하겠다고 고백하는 표였다. 따라서 유대인들에게는 할례를 받는 것이 곧 교회에 처음으로 입문하는 것이었다.

할례와 세례는 하나님의 너그러운 은혜와 사죄와 영생의 약속이므로 내적인 면에서 그 의미는 모두 동일하다. 비록 보이는 의식은 다르다 할지라도 할례에 속한 모든 것이 세례에도 속해 있다. 따라서 칼빈은 할례와 세례를 외적인 형태와 시행방법에 있어서 둘의 모양은 다를지라도 그 실체(substance)는 같기 때문에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할례가 하던 일을 오늘날의 신자를 위해서는 세례가 그 일을 대신한다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는 세례를 통해 하나님 앞에 성별되며 그의 백성으로서 인정되고 우리는 그 세례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온전한 삶을 살 것을 다짐한다. 따라서 세례는 할례를 대신하며 할례가 한 일을 세례가 우리 사이에서 속행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칼빈은 주장한다.

여호와께선 조그만한 유아들에게 행하는 할례가 언약의 약속을 확인하는 인을 의미한다고 분명히 선언하신다. 만일 이 언약이 지금 확고부동하게 유효하다면 구약시대 유대인의 유아들 못지않게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자녀들에게도 적용될 것이다. 표징이 의미하는 것에 유아들이 참여한다면 그 표징에서 그들을 제외시킬 이유는 무엇인가? 그러므로 말씀으로서의 세례가 유아들에게 해당되는 데 말씀의 부속물인 표징을 거부할 까닭이 무엇인가?

오늘날 그 할례가 폐지된 후에도 주의 언약을 확증해야 할 이유는 변함이 없으며 세례가 이것을 대신한다. 따라서 유아세례는 타당한 것이라고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언급하고 있다.

칼빈은 유아세례의 성경적 근거로서 예수께서 어린 아이들은 불러 축복하신 사건을 제시하였다. 유아들을 그리스도께 데려가는 것이 옳은 일이라면 왜 세례도 받게 하지 않는가? 천국이 유아들의 것이라면 왜 표징을 그들에게 주지 않는가?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부르시는 유아들을 우리가 쫒아낸다는 것은 얼마나 부당한 일인가? 라고 물으면서 그리스도께서 어린아이들을 불러 축복하셨으므로 우리도 그들의 세례의 표징과 은혜인 유아세례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칼빈은 유아세례를 예정론 위에 구축하였다. 선악에 대한 지식이 없는 유아들이 어떻게 중생할 수 있는가 하는 재세례파의 질문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세례요한을 모태에서 거룩하게 만드셨으며(눅1:15) 다른 태아들에게도 같은 일을 하실 수 있기 때문에 구원받을 유아들은 주께서 먼저 중생시키신다고 보았다. 따라서 어린아이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할 수 있으며 중생해야 하기 때문에 유아세례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유아들은 회개하거나 믿을 능력이 없다고 하는 재세례파의 주장에 대해 칼빈은 유아는 아직 회개와 믿음이 그들 안에 생기지 않았지만 성령의 은밀한 역사에 의해서 그 씨(Seed)가 그들 안에 숨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유아들의 장래의 회개와 믿음을 위해 유아세례는 필요하다고 보았다.

 

♦ 요아킴 예레미아스 (Joachim Jeremias, )

예레미아스는 구약과 신약에서 “가족공식”(the Oikos Formula)을 추출하여 유아세례의 근거를 제시하였다. 그는 행16:15에서 루디아의 온 집이 세례를 받은 것, 그리고 행16:33에서 빌립보 간수의 온 집이 세례를 받은 것, 행18:8에서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은 것 등에서 온 가족이 세례를 받은 것은 유아에게도 세례를 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온 집이라는 말은 전체, 전부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이것은 아린아이는 물론 종까지도 포함하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예레미아스는 고대사회에 있어서 가족의 결속의 특성을 통해 유아세례의 타당성을 주장하였다. 삼상22:16에서 사울이 아히멜렉을 위협하면서 “네 아비의 온 집이 죽으리라”고 했으며, 놉의 제사장의 성읍이 유린되었을 때 한 사람의 도망자를 제외한 85인이 전멸하였으며 거기에는 젖먹이까지도 포함되었다. 창45:18의 요셉의 가족이 애굽으로 갈 때 이삭의 손자와 손녀들까지 포함되었다. 이와같이 고대사회에서의 가족이란 젖먹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의 구성원들을 의미했다.

그는 이러한 구약의 가족공식은 신약에서도 일찌기 나타난다고 보고 있다. 고전1:16에서 바울에 의해 A.D. 54년에 나타났다고 보았다. 현대의 개인주의적인 사고는 고대의 가족의 연대성의 강력함을 알 수 없으나 고대인들은 상호책임성과 집단의 통일성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만일 가족의 아버지가 그리스도인이 되면 온 가족이 그를 따랐으며, 아버지의 회심은 온 가족의 구원을 의미하였다. 하나의 좋은 예가 사도행전 16장 30-34에 나온다. 예레미아스는 이러한 맥락에서 신약의 온 가족의 세례는 가정의 일원으로서 유아도 포함되므로 유아세례는 타당하다고 보았다.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유아세례에 대한 찬반의 논쟁은 터툴리안이 살았던 시대인 A.D 200년경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어 왔다. 3세까지 유아세례는 연기 되어야 한다고 하는 나찌안누스의 그레고리의 주장은 구약의 할례와 유아세례는 동일하다고 하는 어거스틴의 주장에 의해 소멸되었으며 어거스틴의 이러한 견해는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모두에게 교회의 예식에서 유아세례를 보편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재세례파에 의해 재기된 유아세례의 반대는 막16:16 말씀에 근거한다. 즉, 세례를 받기 전에 믿음이 있어야 하는데 유아들은 믿을 수가 없기 때문에 유아세례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세례란 우리의 신앙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매여 있으므로 부모의 신앙과 헌신의 결단으로 자녀를 하나님께 드리는 표지인 유아세례를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는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빛을 잃게 되었다.

바르트 역시 세례란 회개와 신앙의 성례전으로서 복음을 믿고 회개할 수 있는 자만이 세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복음을 믿고 회개할 수 없는 유아들에게 세례를 준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유아세례를 반대했다. 이에 대해 예레미아스는 가족공식(the Oikos Formula)의 역사적 연구를 통해 사도시대에 이미 유아세례가 실시되었다고 주장함으로써 유아세례의 타당성을 인정하였다. 오스카 쿨만(O. Cullmann)역시 바르트의 세례에서의 믿음의 중요성을 인정하였으나 세례에 선행하는 믿음은 세례사건의 구성적 요소는 아니며 세례는 그리스도안에서의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행위가 아니라 이차적 행위에 속한다고 봄으로써 세례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총의 측면을 강조하였고 따라서 바르트의 유아세례 반대를 거부하였다.

위에 살펴본 바와 같이, 유아세례에 대한 견해는 찬반의 역사를 거듭해 왔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바르트의 주장과 같이 복음을 믿고 회개할 수 있는 자만이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하는 논리는 마치 우리 자신이 믿음의 근거가 된다고 하는 주장으로 비약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비록 우리가 세례를 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믿음을 선물로 주신다면 우리는 구원을 받지 않는가? 따라서 필자는 루터와 칼빈의 주장을 따라 세례는 우리의 신앙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다고 본다. 창세기 17:7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맺으신 언약이 유아세례의 근거가 된다. 칼빈의 주장처럼 유아세례는 그 의미로 보아서 할례에 해당되며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통해 그 정당성이 인정된다고 본다. 마르셀(Pierre Marcell)의 할례는 옛 언약의 표지이며 세례는 새 언약의 표지로서 할례와 세례의 의미는 같다고 하는 주장은 유아세례의 타당성을 뒷받침 해 준다.

 

3. 유아세례와 부모교육

1) 유아세례와 부모의 교육적 책임

앞에서 유아세례는 그 의미로 보아서 할례에 해당되며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통해 그 정당성이 인정됨을 살펴보았다. 이는 언약백성의 자녀는 언약백성이 되며 언약의 참여자로서 언약 가운데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믿는 부모의 자녀들이 언약의 상속자이기는 하지만 구원의 상속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로버트 부스(Robert Booth)는 “유아세례의 교리는 은혜언약의 통일성과 그에 대한 다양한 사역에 근거한다. 그러나 믿는 자의 유아들이 자동적으로 믿는 자가 된다거나 그들이 중생했을 것으로 가정하는 것은 아니다. 믿는 자들의 자녀들은 그들의 부모와 같이 그의 믿음과 회개의 의무를 통해 언약 속에 포함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믿는 자의 모든 자녀들이 언약의 참여자이고 그런 자로서의 특권과 의무를 지니고는 있으나 믿는 자들의 모든 자녀들이 이미 그리스도인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언급하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피에르 마르셀 역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언약 아래서 태어난 아이들은 상속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상속물은 성령께서 그 보증이 되시는 약속이란 의미에서의 상속이다. 이 아이들은 구원이나 영생을 상속받은 것은 아니다. 구원은 상속되지 않는다. 오직 약속만이 상속될 뿐이다.

 

따라서 비록 언약 백성의 자녀가 언약백성이 된다고 해도 그들이 부모들로부터 신앙교육을 받지 못한다면 그 자녀는 언약의 길에서 떠날 수도 있다. 이 말은 아무리 유아세례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 유아가 신앙의 길에서 자랄 수 있도록 교육을 받지 못한다면 구원을 받지 못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부모들이 그들의 자녀를 생애의 초기부터 은혜언약의 참여자들로 알고 그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도록 말씀으로 잘 양육해야 한다. 자녀의 신앙적인 양육의 책임이 일차적으로 부모에게 있음을 알고 그것을 책임있게 수행해야 한다. 이러한 사실은 유아세례 문답에 잘 나타나 있다. 유아세례문답서는 그리스도인 부모들이 자신의 자녀들이 유아세례를 받을 필요가 있음을 고백하며 그들을 주의 말씀으로 잘 양육하겠다고 하는 다짐을 교회의 온 회중과 하나님 앞에서 서약하도록 되어있다. 유아세례 세 번째 문답은 다음과 같이 부모들에게 질문을 하고 있다.

 

이제 당신들은 아무런 주저 없이 당신들이 아이들을 하나님과 그 언약에 맡기고 하나님의 은혜에 겸손히 의지하여 당신들의 자녀 앞에서 경건한 모범이 되며 자녀와 함께 또 자녀를 위하여 기도하며 그(그녀)에게 우리 거룩한 종교의 가르침을 가르치며 하나님께서 정하신 모든 수단을 통하여 그(그녀)를 양육하며 주의 교훈으로 가르침에 전력을 다할 것을 다짐합니까?”

 

위의 질문은 유아세례를 받은 아이들은 그의 부모에 의해서 주의 교훈과 말씀으로 양육 받아야 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유아세례 받은 유아들의 부모가 그들의 신앙에 책임을 져야함을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상에서 유아세례를 받은 유아의 신앙에 대한 교육적 책임이 일차적으로 부모에게 있음을 살펴보았다. 그리스도인 가정에서의 부모의 자녀에 대한 신앙교육은 교회의 계속적인 구성과 존속을 위해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따라서 유아세례와 교회에서의 부모교육과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볼 수 있다.

 

2) 유아세례와 교회의 교육적 책임

유아세례를 베풀 때 교회가 온 회중과 하나님 앞에서 유아세례 받을 유아의 부모에게 교육적 책임을 묻고 그것에 대한 답을 이끌어 내고 있는데, 이것은 부모뿐 아니라 교회 또한 그 유아의 신앙을 위한 교육적 책임을 동시에 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교회의 유아세례에 대한 교육적 책임은 교회사적으로 세례를 받기 전과 후의 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되어 이것에 대한 교육이 실시되어 온 역사적 사실로 입증이 된다. 초대교회와 중세교회, 그리고 종교개혁기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교육적 차원에서 유아세례를 받은 자에 대한 교육이 심도있게 다루어졌다.

초대교회의 신앙교육은 카테큐메나테(Catechumenate)라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카테큐메나테는 처음에는 성인들의 세례를 위한 예비교육과정이었으나, 콘스탄틴 황제의 기독교공인 이후 유아세례를 받은 아이가 성인이 될 때 견신례교육을 받는 속성과로 변질되었다. 5세기 말부터 붕괴되기 시작한 카테큐메나테는 6세기가 되면서 유아세례 중심의 입교교육으로 바뀌게 되었고, 이러한 전통은 중세교회와 종교개혁기를 거쳐 현대까지 내려오고 있다.

중세기에는 유아세례를 받은 아이들의 신앙교육을 위하여 대부(godfather), 대모(godmother)제도가 생겼다. 유아세례 의식에 부모와 대부모가 참여하여 그 아이를 기독교적으로 양육할 것을 약속하고, 대부모는 그 아이가 자라서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신조와 그 의미, 주기도문, 십계명, 그리고 교회가 제정한 일곱 가지 죽을 죄(교만, 질시, 분노, 증오, 낙담, 탐욕, 탐식)와 일곱 가지 덕목(믿음, 소망, 자비, 절제, 인내, 정의, 불굴의 정신)을 가르친다. 이후 그 유아가 청소년이 되면 교회에서 견신례를 행하였다.

종교개혁시대의 유아세례자들에 대한 교육은 루터와 칼빈에 의해 강조, 실시되어왔다. 루터는 그 당시의 교회의 전반적인 교육부재의 현상과 이에 따른 신자들의 신앙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신앙교육서」를 집필하였다. 이것은 일반 평교인과 목사의 교육에서부터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지침서였다. 먼저 가장과 목사가 배워서 2세를 교육하도록 하는 두 가지의 목적을 가진 교리문답이었다. 처음 출판된 루터의 「신앙교육서, 소〮」(Der Kleine Katechismus)에는 가정에 주는 교훈서와 세례자에 대한 안내서가 포함이 되어 있다. 유아세례를 받은 아이들이 하나님의 어린이로서 그들이 청소년기에 이르러 세례의 실제적 의미를 인식하며 그 유익을 알도록 교육시키기 위해 「소요리문답서」가 사용되었다.

칼빈은 제네바교회의 신앙교육을 위하여 「신앙교육서」(Katechismus)를 두 번에 걸쳐 만들게 된다. 첫 번째 신앙교육서는 기독교강요를 요약한 해설서라고 할 수 있으며 두 번째 신앙교육서는 교회의 청소년을 위한 것으로 유아세례를 받은 어린이들이 만 10세에 이를 때에 이 책을 배우도록 하였다. 이 교육은 항상 반복되었고 입교자를 위해서 1년에 4차례 시험을 치루어 그 시험에 통과될 때 입교인으로 영접하였다. 종교개혁시대의 「신앙교육서」는 유아세례를 받은 아이들이 청소년이 되었을 때 신앙의 기본 지식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집중적으로 가르쳐졌다. 이처럼 유아세례를 받은 어린이에 대한 교회의 교육적 임무에 대한 시행은 초대교회 때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전통임을 알 수 있다.

유아세례와 부모의 교육적 책임에서 살펴보았듯이, 유아세례를 받은 아이의 신앙교육은 일차적으로 부모에게 달려 있다. 또한 유아세례자에 대한 신앙교육이 초대교회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 까지 역사적으로 교회에서 이루어져 온 점을 고려하면 부모와 교회의 유아세례자에 대한 교육적 책임은 같은 선상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부모의 자녀교육에 대한 책임은 교회교육의 연장이요, 동시에 교회를 위한 것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이것에 대해 브로밀리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교회와 교역자는 유아세례에 대해 부모들과 함께 책임을 갖는다. 그들은 유아세례를 훈련단계의 첫 번째로 놓아야 한다.... 교회와 목회는 또한 기독교적 양육에서도 책임을 갖고 있다....세례의 필요는 단회적이지만, 세례받은 유아들을 돌보는 것은 예배와 증거를 통해 계속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교회에서의 유아세례자를 위한 교육은 매우 형식적이며 약화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와 부모의 유아세례자를 위한 교육적 책임을 감당하기 위한 답을 부모교육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이유는 첫째, 부모교육을 통하여 부모들이 자녀를 양육해야 함을 깨닫게 하고 실제로 자녀를 양육하게 하는 것은 언약백성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요, 성경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둘째, 전통적으로 교회가 실시해 왔던 교육적 책임을 부모교육을 통해 실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부모교육은 부모 자신의 신앙적 성숙과 개발을 가져 올 수 있기 때문에 교회의 구성원인 부모의 발전을 통해 교회의 발전을 꾀할 수 있다. 넷째, 유아들은 그의 부모와 가정이라는 환경을 통해 가장 쉽게 배울 수 있기 때문에 부모를 교육하여 모델을 제시함으로 교육의 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다.

 

III. 연구방법

 

1. 연구대상

 

본 연구에서는 한국의 교회 주일학교에서의 유아세례를 전 후로 한 부모교육의 실태를 알아보기 위해 서울에 소재한 신학대학으로서 세례교인만을 학생으로 입학시키는 C 대학의 학생들 400명을 대상으로 하였다. 연구대상의 교회에 대한 일반적인 배경(교회의 교단, 크기, 지역 등)은 다음의 <표 1-1>, <표 1-2>, 그리고 <표 1-3>과 같다.

 

<표 1-1> 교회의 교단

 

빈도

퍼센트

누적퍼센트

유효 장로회합동

장로회통합

성결교

감리교

기타

합계

204

39

22

17

46

328

62.2

11.9

6.7

5.2

14.0

100.0

62.2

74.1

80.8

86.0

100.0

 

 

현재 출석하고 있는 교회의 교단을 살펴보았을 때, 대한예수교 장로회합동측에 다닌다고 응답한 사람은 204명(62.2%)으로 가장 많은 수치를 차지하였다. 그 다음으로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통합측에 다니는 사람이 39명(11.9%)이었고, 성결교는 22명(6.7%), 감리교는 17명(5.2%), 그리고 기타에 46명(14.0%)의 순으로 나타났다.

 

<표 1-2> 교회의 크기

 

빈도

퍼센트

누적퍼센트

유효 200명 미만

200-500명

500-1000명

1000명 이상

합계

124

75

33

96

328

37.8

22.9

10.1

29.3

100.0

37.8

60.7

70.7

100.0

 

출석인원을 기준으로 교회의 크기를 살펴보았을 때, 200명 미만의 교회가 124개(37.8%)였고, 200-500명 규모의 교회는 75개(22.9%)이며, 500-1000명 규모의 교회는 33개(10.1%)이고, 1000명 이상의 교회는 96개(29.3%)였다.

 

<표 1-3> 교회의 지역

 

빈도

퍼센트

누적퍼센트

유효 서울

경기도

인천

기타

합계

168

110

28

22

328

51.2

33.5

8.5

6.7

100.0

51.2

84.8

93.3

100.0

 

 

교회가 분포되어 있는 지역을 조사했을 때 서울이 168개(51.2%), 경기도가 110개(33.5%), 인천이 28개(8.5%), 그리고 기타가 22개(6.7%)였다.

 

2. 연구도구 및 자료처리

 

본 연구의 도구로는 교회에서의 유아세례를 전 후로 부모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설문지를 사용하였으며, 설문지는 총 11문항으로서 교회의 일반적 배경에 대한 질문이 3문항, 유아세례 전의 부모교육에 관련된 문항 3, 유아세례 후의 부모교육에 대한 문항 4, 그리고 자녀양육에 대한 교회의 감독에 대한 문항 1로 구성되어 있다.

설문지는 총 400부를 배부하였으며, 이 가운데 13부는 회수되지 않았고 57부는 부분적으로 응답하여 분석대상에서 제외하였으며 제대로 응답된 330부를 분석자료로 사용하였다. 자료분석은 SPSS10.0을 사용하여 통계 처리하였다.

 

3. 연구의 제한점

 

본 연구의 대상은 각 교회가 아니라 학생들이었으며 학생들을 통해 그들의 출석 교회의 상황을 조사한 것이었기 때문에 교회가 중복될 수도 있다. 따라서 통계의 결과에 오차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이 연구의 제한점이다.

 

IV. 연구결과 및 해석

 

본 연구의 결과 및 해석은 다음과 같다.

 

1. 유아세례 전 부모교육의 형태

 

1) 유아세례에 대한 부모교육의 형태

 

 

빈도

퍼센트

누적퍼센트

유효 강의식

책읽기

책읽고 토의

기타

합계

148

42

37

101

328

45.1

12.8

11.3

30.8

100.0

45.1

57.9

69.2

100.0

 

<표 2-1> 유아세례에 대한 부모교육의 형태

 

유아세례에 대한 부모교육의 형태를 묻는 질문에서 148명(45.1%)의 사람들이 강의식이라고 응답하였다. 유아세례에 대해 책을 읽게 한다고 응답한 사람은 42명(12.8%)이고, 유아세례에 대해 설명할 뿐 아니라 책을 택해 읽고 토의한다고 응답한 사람은 37명(11.3%)으로 나타났다. 기타는 101명(30.8%)으로 나타났다. 여기서 기타가 30.8%인 것은 <표 2-2>에서 유아세례에 대한 부모교육기간이 없음이 27.4%인 것을 고려할 때 어떤 형태의 부모교육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이 대부분인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거의 설문 대상의 3분의 1의 교회에서 유아세례 전 부모교육이 없음을 나타낸다고 해석할 수 있다.

 

2) 유아세례에 대한 부모교육의 기간

 

<표 2-2> 유아세례에 대한 부모교육의 기간

 

빈도

퍼센트

누적퍼센트

유효 하루나 이틀

일주일 미만

일주일 이상

없음

합계

107

70

61

90

328

32.6

21.3

18.6

27.4

100.0

32.6

54.0

72.6

100.0

 

유아세례에 대한 부모교육의 기간을 묻는 질문에서는 하루나 이틀이라고 응답한 사람이 107명(32.6%)이며, 일주일 미만이라고 응답한 사람이 70명(21.3%)이었다. 일주일 이상이라고 응답한 사람은 61명(18.6%)이고, 교육기간이 없다고 응답한 사람은 90명(27.4%)이었다.

유아세례 전 교육기간이 없다고 한 응답이 27.4%라는 것은 조사대상 교회의 약 3분의 1에 해당되는 수치로서 교회에서 유아세례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음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교회에서의 유아세례의 중요성에 대해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또한 교육기간이 하루나 이틀이 32.6%로 응답되어 조사 대상 교회의 3분의 1에 해당하므로 이것 역시 유아세례의 중요성에 대한 교육이 충분히 이루어지고 있다고 판단하기 어렵다.

3) 유아세례에 대한 부모교육의 내용

 

 

빈도

퍼센트

누적퍼센트

유효 의미교육

의미와자녀양육

자녀양육

없음

합계

104

147

12

65

328

31.7

44.8

3.7

19.8

100.0

31.7

76.5

80.2

100.0

 

<표 2-3> 유아세례에 대한 부모교육의 내용

 

유아세례에 대한 부모교육의 내용을 살펴보았을 때, 유아세례의 의미만을 교육한다고 응답한 사람은 104명(31.7%)이었고. 유아세례의 의미와 더불어 자녀양육에 대한 제반사항을 교육한다고 응답한 사람은 147명(44.8%)이었다. 자녀양육에 대한 제반사항만을 교육한다고 응답한 사람은 12명(3.7%)이며, 없다고 응답한 사람은 65명(19.8%)이었다.

유아세례의 의미와 자녀양육에 대한 제반사항을 교육한다고 한 응답이 44.8%인 것은 그래도 바람직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위의 <표 2-2>의 부모교육 기간에 대한 질문에서 하루나 이틀에서 일주일 미만이 54%인 것을 볼 때 그 짧은 기간에 유아세례에 대한 의미와 자녀양육에 대한 교육을 과연 얼마나 충실히 시행할 수 있을지는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2. 교회에서의 유아세례 후 부모교육

1) 영아를 위한 교육부서의 유무

 

<표 3-1> 영아를 위한 교육부서의 유무

 

빈도

퍼센트

누적퍼센트

유효 있다

없다

합계

177

151

328

54.0

46.0

100.0

54.0

100.0

 

 

영아를 위한 교육부서의 유무를 묻는 질문에서 영아부가 있다고 응답한 사람이 177명(54.0%), 영아부가 없다고 응답한 사람이 151명(46.0%)으로 나타났다.

200명 미만의 교인 수를 갖고 있는 교회가 37.8%인 점을 감안 할 때, 영아부가 없다고 한 응답이 46%인 것은 그만큼 영아에 대한 교육의 중요성과 언약백성으로서의 자녀에 대한 관심이 없다고 해석할 수 있다.

 

2) 영유아를 위한 부모교육 세미나 및 강연회 횟수

 

<표 3-2> 영유아를 위한 부모교육 세미나 및 강연회 횟수

 

빈도

퍼센트

누적퍼센트

유효 1년에 한번

3-6개월에한번

1개월에 한번

없음

합계

48

60

12

208

328

14.6

18.3

3.7

63.4

100.0

14.6

32.9

36.6

100.0

 

영유아를 위한 부모교육 세미나 및 강연회의 횟수를 묻는 질문에서 1년에 한번이라고 응답한 사람은 48명(14.6%), 3-6개월에 한번이라고 응답한 사람은 60명(18.3%), 1개월에 한번이라고 응답한 사람은 12명(3.7%), 그리고 없다고 응답한 사람은 208명(63.4%)으로 나타났다.

영유아를 위한 부모교육 세미나 및 강연회의 횟수를 묻는 질문에서 1년에 한번이라고 한 응답 14.6%와 없다고 응답한 63.4%를 합하면 78%로 영유아를 위한 부모교육을 거의 안 하는 교회가 3분의 2가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많은 교회들이 영유아의 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더불어 유아세례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잘 안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3) 유초등부를 위한 부모교육 세미나 및 강연회 횟수

 

<표 3-3> 유초등부를 위한 부모교육 세미나 및 강연회 횟수

 

빈도

퍼센트

누적퍼센트

유효 1년에 한번

3-6개월에한번

1개월에 한번

없음

합계

58

64

12

194

328

17.7

19.5

3.7

59.1

100.0

17.7

37.2

40.9

100.0

 

유초등부를 위한 부모교육 세미나 및 강연회의 횟수를 묻는 질문에서 1년에 한번이라고 응답한 사람은 58명(17.7%), 3-6개월에 한번이라고 응답한 사람은 64명(19.5%), 1개월에 한번이라고 응답한 사람은 12명(3.7%), 그리고 없다고 응답한 사람은 194명(59.1%)으로 나타났다.

유초등부를 위한 부모교육 세미나 및 강연회의 경우도 영유아를 위한 부모교육의 경우와 비슷한 수치를 보이고 있다(1년에 한번, 17.7%, 없음이 59.1%, 합하면 76.8%).

 

4) 중고등부를 위한 부모교육 세미나 및 강연회 횟수

 

<표 3-4> 중고등부를 위한 부모교육 세미나 및 강연회 횟수

 

빈도

퍼센트

누적퍼센트

유효 1년에 한번

3-6개월에한번

1개월에 한번

없음

합계

56

66

7

199

328

17.1

20.1

2.1

60.7

100.0

17.1

37.2

39.3

100.0

 

중고등부를 위한 부모교육 세미나 및 강연회의 횟수를 묻는 질문에서 1년에 한번이라고 응답한 사람은 56명(17.1%), 3-6개월에 한번이라고 응답한 사람은 66명(20.1%), 1개월에 한번이라고 응답한 사람은 7명(2.1%), 그리고 없다고 응답한 사람은 199명(60.7%)으로 나타났다.

중고등부를 위한 부모교육 세미나 및 강연회의 경우도 다른 부서의 경우와 비슷한 수치를 보이고 있다(1년에 한번, 17.1%, 없음이 60.7%, 합하면 77.8%). 이러한 현상은 많은 교회에서 주일학교에서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을 하고는 있지만 가정과 연계해서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3. 자녀양육에 대한 교회의 감독

 

 

빈도

퍼센트

누적퍼센트

유효 만족도 조사

의견참고

정기조사

없음

합계

48

64

43

173

328

14.6

19.5

13.1

52.7

100.0

14.6

34.1

47.3

100.0

 

<표 4> 자녀양육에 대한 교회의 감독

 

자녀양육에 대한 교회의 감독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묻는 질문에서 자녀가 속한 주일학교 교육에 대한 부모의 만족도를 조사한다가 48명(14.6%)으로 나타났고, 자녀교육에 대한 부모의 의견을 참고한다가 64명(19.5%)으로 나타났다. 가정에서 자녀의 신앙교육을 위해 어떻게 하는지 교회가 정기적으로 조사한다는 응답은 43명(13.1%)으로 나타났고, 없다는 응답은 173명(52.7%)으로 나타났다.

자녀의 양육에 대한 교회의 감독이 없다고 한 응답이 52.7%로 과반수를 넘는 것은 여기에 해당되는 교회들이 자녀의 양육을 부모에게 떠 맡겼기 때문이며, 이것은 교회가 유아세례를 베풀기는 하였지만 그것의 교육적 의미에 대한 인식의 부족이나 자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양육하고 있는지 부모에 대한 감독을 소홀히 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V. 결론

 

앞에서 유아세례를 언약의 개념과 교회사의 전통을 통하여 이해하였고, 이러한 이해 하에서 부모의 자녀에 대한 교육적 책임과 교회의 교육적 책임을 살펴보았다.

부모의 자녀에 대한 교육적 책임과 교회의 교육적 책임은 동일 선상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배경 하에서 부모교육의 개념을 이해하였다. 또한 이에 따른 교회의 교육적 책임이 얼마나 이행되고 있는지를 유아세례를 전 후하여 교회의 부모교육의 현황을 조사함으로써 분석하였다. 그 결과에 따른 논의와 결론을 내리면 다음과 같다.

첫째, 유아세례 전 부모교육의 기간에 대한 조사 결과 교육기간 없음에 27.4%가 응답하였다. 이러한 결과는 설문 대상 교회의 거의 3분의 1에 해당되는 수치로서 유아세례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언약신학을 고백하는 성도들이 은혜언약의 교리에 대한 무지를 나타내며 이것은 교회에서의 은혜언약에 대한 강조와 이에 대한 교육적 책임의 무지에서 온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교회에서의 언약신학에 대한 강조와 유아세례에 대한 인식의 재조명이 요구된다.

둘째, 유아세례 전 부모교육의 기간이 하루나 이틀이 32.6%로 응답된 것은 유아세례에 대한 인식과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한 교육이 충분히 이루어진다고 볼 수 없다. 따라서 유아세례 전 부모교육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셋째, 유아세례 후의 부모교육의 현황을 조사한 바에 의하면, 영아를 위한 교육부서가 없다가 46%로서 응답한 교회의 거의 과반수에 해당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교회의 일반적 배경에서 200명 미만의 교회의 수가 37.8%인 점을 고려할 때 영아부서가 없다는 응답이 46%인 것은 영아에 대한 교육의 중요성과 언약백성으로서의 자녀에 대한 인식과 그 교육적 책임에 대한 교회의 인식이 낮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교회에서의 언약백성으로서의 성도의 자녀에 대한 교육적 책임에 대한 인식의 배양이 요구되며, 이에 따라 영아부를 구성하여 운영할 수 있는 교회라면(200명 이상의 교회에서는 운영할 수 있다고 봄) 영아부를 두어 성도의 자녀를 아주 어릴 때부터 교육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넷째, 부모교육세미나 및 강연회의 횟수가 1년에 한 번 내지 없다고 응답한 교회가 영유아부가 각각 14.6%, 63.4%로 합계 78%, 유초등부가 17.7%, 59.1%로 합계 76.8%, 중고등부가 17.1%, 60.7%로 합계 77.8%였다. 대개 77-78%에 해당되는 교회의 각 부서에서 1년에 한 번 내지 아예 부모교육을 실시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현상은 가정에서의 자녀에 대한 신앙적 지도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몰이해와 언약백성으로서의 부모의 자녀에 대한 교육적 책임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교회에서의 언약백성으로서의 부모의 자녀에 대한 교육적 책임의 중요성이 새롭게 인식될 필요가 있으며 이를 위한 교회의 교육적 책임이 부모교육을 통해 실현될 필요가 있다. 특별히 영유아기의 부모의 자녀에 대한 신앙교육은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으므로 이 시기의 부모교육에 중점을 둘 필요가 있다. 또한 청소년을 위한 교육 역시 가정과 연계해서 이루어질 때 보다 효율적인 신앙지도가 이루어 질 수 있음을 고려할 때 청소년을 위한 교회에서의 부모교육이 요청된다.

다섯째, 자녀양육에 대한 교회의 감독이 52.7%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는다고 응답자들이 답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베풀기는 하지만 그것의 교회의 교육적 책임에 대한 이행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교회에서의 유아세례가 지니고 있는 교회의 교육적 책임에 대한 인식의 회복과 교육적 책임에 대한 성실한 이행이 요구된다.

이상에서 교회에서 언약신학에 대한 강조와 유아세례에 대한 인식의 재조명, 유아세례 전 부모교육의 강화, 영아부의 활성화, 유아세례 후의 부모교육의 강화, 그리고 자녀 양육에 대한 교회의 감독을 통해 교회에서의 유아세례가 지니고 있는 교회의 교육적 책임에 대한 인식의 회복과 교육적 책임에 대한 성실한 이행이 필요함을 살펴보았다. 이것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목회자들의 인식의 전환이이 요구된다. 언약백성으로서 자신의 자녀를 주의 말씀과 교양으로 가르칠 책임이 누구보다도 부모에게 있음을 유아세례 전과 후의 부모교육을 통해 충분히 인식 시킬 책임이 교회에 있으며 이것은 목회자의 인식으로부터 가능한 것이다.

중세기에 유아세례를 받은 아이들이 견신례를 받기 전 까지 그들의 신앙교육을 위해 대부와 대모제도를 두었고 그들을 통해 그 아이들을 신앙적으로 양육하기 위해 신조와 그 의미, 주기도문, 십계명, 그리고 교회가 제정하는 일곱 가지 죽을 죄와 일곱 가지 덕목을 가르치게 하였다. 이와 같이 부모의 신앙적 양육을 매우 중시하여 실제 교육을 실시하였던 중세 교회의 전통을 본받아 유아세례 전과 후의 부모교육이 강조되어야 한다. 이러한 강조를 통하여 오늘날 약화된 부모의 자녀에 대한 신앙교육이 되살아나고 이를 통해 교회의 다음 세대들이 말씀 안에서 건강하게 자라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