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6편 강해
시편 26 편 의인의 삶을 입증해 주시기를 간구함
오늘은 스물 여섯 번째의 시입니다. 지은이는 다윗으로 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본 시에서 자신의 무죄함을 변호하고 그것에 근거하여 구원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앞의 25편의 시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앞의 25편의 시가 자신의 죄에 대한 통회와 죄의 용서를 간구하고 그것에 근거하여 구원을 호소하는 시였다면, 오늘 시는 자신의 무죄함을 근거로 구원을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가 그의 생에 있어 어떤 시점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분명치 않습니다. 다만 그가 죽음의 위험 가운데 처해 있었다는 것과 무고히 모함을 받고 있었다는 점은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겠는데, 먼저는 1절로 7절까지로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신실하게 살아 왔다고 하는 다윗의 자기 변호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8절로 끝 절까지는 이러한 자신을 죄인들과 함께 버리지 마시고 자비함과 구원을 베풀어 달라는 간구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제 26편의 시의 주제를 잡으라고 하면 \"의인의 삶을 입증해 주시기를 간구함\"이라고 잡아 볼 수 있겠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자신의 허물없는 삶을 돌아보시고 그 의의 삶에 대한 확증을 보여주시기를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절입니다. 1\"--------\" 다윗은 하나님께 자신의 의로움을 입증해 달라고, 자신이 흠 없는 자임을 확정해 보여 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의 생이 어떠했기에 그렇습니까? 자신이 흠 없이 허물없이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삶에서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무죄함을, 자신의 의로움을 입증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더 나아가서 2절에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2\"-----------\" 자신을 살피고 시험해 보시라고, 자신의 마음을 한 번 조사해 보시라고, 자신의 마음 깊은 곳까지 살펴보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늘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항상 진리 가운데 행하였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로서는 좀 이해가 잘 안돼는 부분이지요. 늘 죄에 대한 책망 가운데 살면서 도리어 자책감에 익숙해 있는 우리로서는 좀처럼 이해가 안 되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속으로 생각하기를 \"자기가 감히 하나님께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감히 무죄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정말 자신에게는 티끌만큼의 죄도 없다는 말인가, 모든 사람이 죄인인데..\"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마치 다윗의 대적들이 다윗을 공격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 우리는 암암리에 다윗의 대적자처럼 다윗을 판단하게 되는 것일까요? 아마도 그것은 우리가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다\"라고 하는 지배적인 가르침 아래서 살아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원법정에서의 판단\"이라고 하는 다소 치우친 가르침에 익숙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이라고 하는, 절대자와 피조물이라고 하는 존재적 간격 가운데 우리와 우리의 죄의 문제를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발견될 수밖에 없고 여기 이런 기도는 우리로서는 전혀 불가능한 기도가 되고 말아 버리는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이 기도를 하는 다윗의 마음을 의심하게 되고 이런 류의 기도는 오직 죄 없으신 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는 기도로 치부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편들에서 누리는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풍성함을 놓쳐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이 기도는 다윗의 기도일 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노래했던 기도이기도 한데 말입니다. 그럼 구약의 백성들은 이렇게 기도할 수 있고 우리는 불가능한 것인가. 아니면 구약의 백성들이 아무 것도 모르고 깝죽거린 것인가, 모든 사람이 죄인인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 앞에 이런 담대함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까? 우리는 평생에 이렇게 기도할 수 없는 것입니까? 저는 그렇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이렇게 기도할 수 있다고 봅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 앞에 허물없이 살아왔나이다. 하나님의 교회를 섬김에 있어서 조금의 사심도 없이 행하였나이다. 순전하고 정직한 마음으로 교회를 섬겼고 지금도 하나님을 신뢰함에 조금의 흔들림도 없나이다. 저의 마음을 살펴보소서. 저의 마음을 조사해 보소서. 제가 늘 하나님을 바라면서 최선의 진리 가운데로 행하였나이다\" 어떻습니까? 이렇게 기도할 수 없습니까? 바울도 그렇게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노라. 하늘의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시라. 그러나 내가 이것으로 의롭다함을 얻지 못할 줄 아노라\"
우리도 능히 이렇게 기도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존재론적으로 하나님 앞에 서려하지 않고, 언약적 관계 가운데 서고자 한다면 말입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검증하거나 판단하려 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다면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선 양심에 순전하고 정직히 행한다면 말입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우리에게 죄가 티끌만큼이라도 있냐 없냐, 우리가 이것으로 의를 얻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그런 문제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하나님 앞에 흠 없는 언약적 삶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나오는 담대함과 확신에 찬 삶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거리낄 것 없는 순전한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곧 새언약 백성의 능력 있는 삶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하튼 다윗은 이어 하나님 앞에 자신의 삶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4절로 5절의 말씀 볼까요? 4-5\"----------\" 지금 여기는 앞서 3절에서 말한 \"진리 가운데 행했다\"는 것 대한 보충적 설명이겠지요? 자신이 진리 가운데 행하였는데, 사악한 자들과 함께 하지 않았고 음흉한 자들과 교제하지 아니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어울리기를 혐오하였고 나쁜 자들과는 한 자리에 앉지도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지금 다윗이 말하는 순전한 삶이 되겠지요? 그이 생각이 어떠냐, 그 마음 깊은 곳에는 어떤 생각이 있냐,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지요? 앞서 2절에서 \'자신을 살피고 마음을 조사해 보시라는 것\'도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마음을 말하는 것이지, 한 번도 나쁜 생각을 했냐 안 했냐, 그 마음에는 이러 저러한 생각이 한 번도 스쳐간 적이 없냐 하는 그런 말이 아니지요.
성경에서 말하는 의는 언약의 동행으로서 의이지 존재론적인, 영원 법정적인 그런 의를 말하지 않습니다. 앞서 25편의 시에서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라고 노래한 것처럼, 그 가르치신 주의 교훈을 따라서 믿음으로 동행한 시인의 삶 자체를 의로운 삶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치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더라\"라고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노아가 한 번 이라도 죄를 지었냐 안 지었냐 하는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한 번이라도 죄를 범했냐 안 범했냐 하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 동행했는지, 어떻게 나타내신 언약과 뜻을 따라 삶을 살았는지, 그런 문제인 것입니다.
여하튼 다윗은 하나님의 교훈을 따라 사악한 자들과 함께 하기를 거절하였고 그들과 교제하지 않았습니다. 함께 어울리기를 거절하고 심지어 한 자리에 앉는 것조차 싫어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나타내신 뜻을 따라 신실히 그의 삶을 경영하였고, 하나님과 함께 하기를 기뻐하였습니다. 6-7\"---------\" 여기 \'손을 씻고\'하는 것은 성소에 들어가면서 손을 씻는 정결예식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그는 무죄함 가운데 손을 씻고 성소 이곳 저곳을 두루 다녔습니다. 그곳에서 찬양의 목소리를 높이며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을 노래하였습니다. 아마 때로는 혼자 흥얼거리며, 때로는 형제들 앞에서, 때로는 형제들과 함께 주를 노래하였을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상상이 가십니까? 다윗의 삶이 어떠했을지?
그는 하나님의 계신 성전을 지극히 사랑하였고 그곳에서 생활하기를 즐겨하였습니다. 8\"---\" 그는 하나님의 사시는 집을 찾는 것을 즐겨하였고 그곳에 머물기를 기뻐하였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과 함께 대화하기를 즐거워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사시는 곳, 하나님의 영광이 머무시는 곳, 하나님께 친히 그 이름을 두신 곳에 거하기를 기뻐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당신의 사시는 집을 사랑한다고, 당신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진짜 하나님께서 거기와 그 좁은 방에서 사시는 것은 아니지요. 하나님께서 그곳에 자기 이름을 두시고 자기 영광을 두셨다는 의미로 하나님께서는 그 집에 사시는 것입니다. 여하튼 그는 하나님과 함께 하기를 기뻐하고 그 집에 와 거하는 것이 일상 생활이 될 정도로 그것을 즐겨하였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거하고 동행하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그의 삶이 의의 길을 가는 삶이 되었겠지요?
이에 그가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9-11\"---------\" 자신의 영혼을 죄인들과 함께 거두지 마시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살인자들과 함께 거두지 마시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왜입니까? 자신은 의롭고 저들은 불의하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사악한 자들이고 뇌물을 받고 악한 일을 꾸미는 자들입니다. 음흉한 간계로 의로운 자를 모함하고 함정에 빠뜨리는 자들입니다. 돈을 받고 심지어 다른 이의 생명까지도 해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저들과 같은 취급을 받고, 저들과 다를 바 없이 동일하게 죽음의 길을 간다면, 이는 합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의롭게 사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허물없이 주의 뜻을 따라 사는 의미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 주셔야 합니까? 저들은 심판하시고 자신은 구원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는 자비함을 베풀어 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의로움을 입증해 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맞는 말이지요? 악인이나 우리나 똑 같은 취급을 받는다면 의롭게 살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똑 같이 죽음으로 끝나버린다면 굳이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살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생명은 구하시고 악인의 생명은 거두어 가셔야 합니다. 적어도 악인과 함께 다윗의 생명을 거두어 가시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왜냐하면 구약에서 하나님의 의롭다하시는 증거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 나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복이 보이는 가나안의 구체적인 물질의 복으로 나타나야 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의롭다하시는 증거 또한 눈에 보이는 것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사악한 자의 손에서 다윗을 건지시고 살인자들을 심판하시는 것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과연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어떻게 행하셨을까요? 그의 소원하는 뜻대로 그를 건지셨을까요? 그렇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의로움을 입증해 주셨습니다. 그를 악한 자들의 사악한 계획에서 건지셨고 그의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를 평탄한 곳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를 영광의 자리에로 인도하셨습니다. 모든 조롱과 수치를 털고 영광과 존귀로 관 씌워주셨습니다. 이로서 다윗의 의로움은 인정되었고 하나님의 택하신 자로서의 존귀는 천하에 나타난 바 되었습니다. 진정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이, 의인의 하나님 되심이 천하에 증거된 것입니다. 욥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지요? 이에 대한 다윗의 찬양이 무엇입니까? 12\"-------\" 자신의 의를 입증해 주시고 자비로 갚으신 하나님을 찬양하겠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회중 가운데 그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노래하겠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 그는 진정 삶을 통해 \'의인을 변호하시고 은혜로 갚으시는 하나님\'을 뵙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처럼 다윗에게 신실함을 보이시고 그 의를 입증해 주신 하나님께서 이제 아들 안에서 자신을 증거하셨습니다. 의로운 자기 백성의 하나님으로, 자기 백성의 의를 변호하시고 입증해 주시는 분으로 자신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자기 백성에게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만 천하에 확증해 보여주신 것입니다. 무엇을 통해서입니까? 죽은 아들을 살리심을 통해서입니다. 아들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심을 통해서입니다. 그를 지극히 높여 \'만왕의 왕\'의 자리에 앉히심으로서 입니다. 모든 영광과 존귀의 자리에, 영원한 생명의 통치를 베푸시는 권세의 자리에 오르게 하심으로서입니다. 아들이 죽자 세상이 어떠하였습니까? 세상은 그를 조롱하였습니다. 못박히신 주님을 향해 \"저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니 하나님께서 건지실 거야, 저가 의롭다 하니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거야\"하며 비웃었습니다. 예수의 죽음에서 모든 의인의 소망은 무너지는 듯 했고, 자기 백성의 의를 변호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는 사라지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놀랍게도 죽은 아들을 죽음 가운데서 불러 내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권세자로 무덤에서 나오게 하셨습니다. 죽지 않고 썩지 않는 영원한 생명으로 덧입히셨습니다. 하늘 영광의 자리에 오르게 하셨습니다. 이로서 무너지는 듯 했던 의인의 소망은 확정되게 되었습니다. 사라지는 듯 했던 하나님의 공의는 영원히 서게 되었습니다. 의인들의 모든 소망과 희망은 하늘의 것으로 확정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확신 중에 의인의 고난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확정되지 않아 탄식 가운데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인할 수 없는 분명한 증거를 본 자로서,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를 본 자로서 의인의 고난을 말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세상은 그 영광이 나타나지 않았음을 인해 불의함과 죄가 있고, 음흉한 자들의 사특한 계획이 있고, 뇌물을 받고 악을 행하는 악인들이 있습니다.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오는 나라에 대한 어떠한 기대와 소망도 없이 이 땅의 부요함과 영광을 좇아 사는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몇 푼의 돈을 위해서는 도덕과 윤리는 물론이려니와 인격과 자존심까지도 팽개쳐 버립니다. 그들은 우리의 삶에 대해 때로 비웃고 조롱합니다. \'그렇게 산다고 해서 밥이 나오냐, 돈이 나오냐\'는 식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고난이 있습니다. 의인들의 탄식이 있고 하나님을 향한 애타는 호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의를 입증해 주실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이 땅에서는 비참하게 죽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의가 변호 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의가 입증되지 못한 채로 허무하게 쓰러져 갈 수 있습니다. 악인처럼 죽음에 무력하게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우리의 의가 입증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들을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심으로 그 의를 입증하신 것처럼, 그래서 그 의로움을 확증해 주신 것처럼, 그가 우리를 살리심으로 우리의 의로움을 나타내 보여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만 천하에 보이실 것입니다. 그 때에는 우리의 모든 것이 빛 가운데 드러날 것이고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의로움이 진정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과연 그러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낙심치 않는 가운데 의를 따라 살아야 하겠고, 하나님 앞에 신실한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길을 걸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의 순전함을 지켜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의 정직함과 온전함을 지켜가야 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가 든든한 소망 중에 쉼 없이 의를 좇아 행하며 순전한 뜻과 마음으로 주를 섬겨가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