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생활 /시23:1-6 지난 주 설교말씀제목은 ‘주예수영접이야기’이었지요. 그리고 지난 주간에 꼭 우리가 시작할 엑소더스 운동 다섯번째를 말씀드렸지요. ‘믿음의 마음열기(활짝신앙)’운동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제목은 ‘교회생활이야기’입니다. 제가 우리 교회에 전도사로 있을 때 교회에서 사택으로 지금 교회 뒷마당이 되는 곳에 집이 있었는데 그곳을 정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제 딸이 그 때 3,4살 되는 때인데 이 곳 뒷마당에서 놀곤 했습니다. 요즈음 부목사님 아이들이 뒷마당에서 노는데 아주 재미있게 놉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저 아이들도 목사님의 자녀들로 태어나서 교회가 집이 되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제가 1984년에 홍콩으로 선교사로 나간 후 3년 지났을 때 홍콩에서 북쪽인 사틴이란 곳으로 교회를 옮기게 되었는데 그 곳 예배당에서 아이들은 지냈습니다. 물론 사택이 따로 있었지만 주일을 비롯해서 교회에 집회가 많으니까 아이들이 교회당에서 지내는 일이 많았지요. 아이들에게는 그곳이 생활하는 장소였지요. 아들 아이가 그 때 유치원을 들어갔다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인데 교회당 안을 돌아다니며 놀곤 했지요. 그러다가 저한테 야단도 맞곤 했어요. 그런데 그 후 홍콩을 떠나고 나서 그 때 일을 얘기하곤 할 때 아들이 한번은 그 당시 교회당 내부를 그리는데 너무 정확하게 그립니다. 그리고 그 예배당을 그리워하는 겁니다. 가보고 싶어하는 것이지요. 어렸을 때 개구장이 같이 돌아다닌다고 야단맞기도 하던 그 예배당에 정이 들고 그 생활이 추억이 된 것이지요. 목회자의 자녀로서 교회생활은 그냥 집의 생활과 같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 모두가 다 교회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입니다. 우리에게는 가정생활도 있고 직장생활도 있고 사회생활도 있지만 그러나 생활의 중심 센터는 교회입니다. 가정이 중요하고 그래서 가정을 중심으로 하는 가정목회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 중심은 여전히 교회, 라는 곳입니다. 교회하면 그냥 이곳 본당이 있는 이 곳의 교회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들로서 주님의 몸된 공동체를 이루고 서로 교제하며 사는 그 교회를 말합니다. 이런 점에서는 교회는 이곳 왕십리를 근거로 하는 우리 교회 성도님들의 모든 모임들, 그 활동 자체를 말합니다. 그래서 구역도 교회요 두세사람의 삼인의 교회도 교회입니다. 삼인의 교회로 모이시는 성도님들은 제가 한번씩 만나서 같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자체가 교회로서 우리의 작은 교회생활입니다. 축복할 일이지요. 그래서 여러 성도님들께서 서로 연결하여서 삼인의 교회를 만드시면 한 번 저와 같이 기도하고 축복하면서 또 새로운 삼인의 교회를 낳고 개척하는 기쁨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전도회도 주일학교도 다 우리는 교회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교회 속에 있고 교회가 내 안에 있는 그런 생활을 하게 되는데 이 생활을 우리는 교회생활이라고 부릅니다. 교회생활이 우리의 중심에 서면서 우리는 모든 생활의 기준을 잡게 됩니다. 그 기준이 복된 기준이 됩니다. 이런 교회생활을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교회생활’이라고 했습니다만 글쎄 달리 어떻게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있을지요.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하시더군요. 설교자들이 설교제목을 이렇게 잡으면 어떻겠는가고요. 예컨대 만약에 모기를 쫓는 약을 선전한다고 하면 ‘모기퇴치법’, 이라고 하?대신 ‘모기를 슬프게 하는 것들’, 이라고 한다면요. 또 다윗과 요나단, 이렇게 설교제목을 잡으면 금방 사람들 선입관에 그 얘기지 뭐, 할텐데 만약에 이렇게 잡으면요, ‘요나단의 남자’. 글쎄 교회생활을 어떻게 그런 식으로 쉽게 표현할 수 있을지요. 하여튼 우리는 교회생활을 잘 이야기할 그런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보통 익숙하게 표현하는 말을 쓴다면 먼저, 교회생활은 목장과 같습니다. 넓고 넓은 푸른 초장이 펼쳐진 목장, 그 곳에 목자와 함께 있는 양들. 그런 목장의 풍경을 생각해 봅니다. 그렇다고 ‘오케이 목장의 결투’, 같은 그런 거친 모습이 아니라 사랑과 평안이 가득한 그런 목장을 생각해봅니다. 우리 교회가 금년부터 구역을 목장으로 여기는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시작이지만요. 그래서 구역장님을 목자라고도 부릅니다. 구역을 목장으로 부릅니다. 그리고 구역을 부흥시키는 가운데 새로운 구역을 만들 수 있고 또는 구역을 돕는 목장을 만들 수 있습니다.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서 새로운 목장 새로운 구역이 탄생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이제 9월부터 다시 구역예배를 드리실 때 또는 그 동안 구역예배를 못 드린 구역들도 아주 작은 삼인의 교회를 통해서 목장을 시작하실 수 있습니다. 구역을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목장은 두 마리의 양들이 있어도 목장이니까요. 제가 영국에 있을 때 인상깊은 일의 하나는 넓은 초장, 즉 목장이 죽 펼쳐있는데 그 넓은 목장에 양들 소들이 몇 마리 정도 한가하게 있으면서 풀을 뜯어 먹기도 하고 또는 그냥 엎드리고 누워서 쉬는 모습을 자주 본 것입니다. 얼마나 평화로워 보이는지요. 아, 교회가 저렇게 작은 무리라도 주님은 그 분의 큰 품을 열어주시는구나, 라는 깨달음을 갖게 됩니다. 우리는 한 두 사람, 두세 사람을 작게 보고 그들을 위해서 넓은 공간, 많은 금액을 지원하는 것을 아깝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아이를 위해서 큰 투자도 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기도하는 분을 위해 넓은 본당을 열어드릴 수 있습니다. 이런 곳에서 기도생 활을 하며 마음에 쉼을 얻는 곳, 이런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그런 점에서 진정 우리들의 목장이어야 합니다. 예수님, 나의 목자와의 생활 목장인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목장인 교회는 먼저 목자가 계셔야 하는데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목자십니다. 그래서 목장은 먼저, 목자이신 그 분과의 생활이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그 분, 목자와의 생활에서 부족함이 없는 그런 만족을 느끼는 곳이 교회입니다.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3: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우리의 목자이신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곳이고 그 분 때문에 만족을 누리는 곳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 제가 영국에 있을 때 어느 날 목장에서 양들을 가까이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저와 또 같이 있던 분들이 양들을 가까이하려고 하니까 다가가는 것만큼 물러서더군요. 그리고 저쪽에 있는 자기들의 목자에게로 가더군요. 이른 바 양들에게 ‘나의 목자’가 있더군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교회는 여호와, 예수님이 나의 목자이신 곳입니다. 구약성경에 여호와, 라는 이름이 많이 나옵니다. 여호와, 라는 말씀은 물론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그러나 여 러분께서 성경에 특히 구약성경에 여호와라는 이름이 나올 때 하나님 아버지만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구약 성경에서 여호와, 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 때로는 성부께서 때로는 성자가 중심이 되어 나타나시고 때로는 성령께서 나타나시는 삼위일체의 이름입니다. 그리고 대표적으로는 아버지 하나님의 나타나심입니다. 그러나 사실 여호와라는 이름 속에서 예수님이 나타나시는 경우를 학자들은 많이 제시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적이 있지요. 창세기18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상수리 수풀근처에 장막을 치고 살고 있을 때 여호와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보니 사람 셋이 맞은 편에 섰습니다. 창18:1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문에 앉았다가 창18:2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사람 셋’, 이라고 했는데 아브라함이 그 분들을 처음에 사람으로 보았지요. 그러나 보통 분들이 아니구나, 라고 알고 곧 그분들을 대접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두 사람은 소돔 고모라를 심판하기 위해서 가는 천사들이었고 그 중 한 분은 바로 여호와셨습니다. 이 분은 누구실까요. 바로 구약시대에 사람의 모습을 띄고 나타나신 성자셨습니다. 그리스도셨지요. 이런 경우가 구약성경에 여러 곳에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형상으로 지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같은 사람의 모습으로 하나님께서 그리고 천사들도 나타나실 수 있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 앞에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분의 한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세 분 중에 두 사람으로 나타났던 천사들이 소돔 고모라를 향해 간 후 남은 한 사람 같으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바로 성자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께서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시면서 만일 의인 열명이 소돔에 있어도 그 성을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출애굽 때에도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활동하신 것만 생각하면 안됩니다. 여호와라고 나타나신 분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울러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셨습니다. 다만 그 때는 아직 예수,라는 이름으로 나타나신 것은 아니었지만 그 분의 모습을 뒷모습만 모세에게 나타내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 분의 뒷모습을 보이신다는 약속을 먼저 하신 적이 있었지요. 출33:2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곁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섰으라 출33:22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출33:23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등을 볼 것이요, 라는 말씀을 하셨지요. 얼굴을 보면 그 영광으로 인해 사람이 감당을 할 수 없어서 죽을 것이기 때문에 등만 보이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 때 등을 보이신 분은 성자셨습니다. 등을 보이신 것은 또한 그 분이 이스라엘의 목자, 광야교회의 목자로서 그들 앞서 가신다는 뜻도 있습니다. 목자이신 그 하나님, 성자께서 외치십니다. 출34:6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예수 그리스도는 그러므로 그 때도 여호와셨습니다 그 여호와의 이름은 예수와, 즉 구원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났고 예수와, 라는 이름에서 여호수아가 나왔고 그 이름을 신약에서 헬라어로 음역한 것이 바로 예수, 라는 이름입니다. 구약이 히브리어로 쓰였고 신약이 헬라어로 쓰였고 그리고 우리는 한국말로 또 읽는 이름이니 좀 복잡하지요? 그래도 우리 한국인들은 이런 다양한 언어도 잘 소화하는 민족이지요. 동시에 3개국어를 한다고 하더군요. 차를 운전할 때 급할 때 하는 말, ‘핸들 입빠이 꺽어’. 동시에 영어, 일본어, 한국말을 다 하잖습니까. 여호와, 예수와, 예수. 이 말들은 사실 한 말입니다. 물론 하나님 아버지이신 여호와가 계시지만 예수와, 예수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도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다같이 여호와로 표현되기도 하다는 말씀이지이요. 그러므로 구약의 여호와라는 이름은 신약의 예수라는 이름으로 나타나면서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나타나실 때 그 안에 예수님이 감추어져 있으셨 고 신약에서는 예수라는 이름으로 나타나실 때 그 안에 하나님 아버지가 감추어져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늘 두 분께서는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바울사도가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출애굽 때의 일을 이야기하면서 그 때 나타나신 하나님 여호와, 그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나타나신 하나님 안에는 예수님이 계셨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10장4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전10: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따르는 신령한 반석은 그리스도 예수셨습니다. 따라서 스데반이 사도행전7장38절에서 광야교회라고 했던 출애굽의 백성들을 인도하시던 분, 따르시던 분은 바로 예수그리스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생명의 말씀, 생명의 도를 모세에게 전해 주셨던 것입니다. 행7:38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및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생명의 도를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 중심으로 출애굽이야기를 완전히 다시 읽어야 합니다. 출애굽의 백성을 책임지신다 예수님은 우리의 목자시면서 우리 출애굽하는 백성들을 책임지십니다. 지금도 우리가 출애굽, 엑소더스를 하는 삶을 살면서 세상에 붙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면서 살려고 할 때 예수님이 목자가 되셔서 그 생활을 책임지시는 것을 체험합니다. 먼저 예수님은 우리를 반드시 찾아주시고 곤경에서 우리를 건지십니다. 우리는 출애굽기3장7,8절을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출3:7 예수(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출3:8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구약의 출애굽 때에도 따르는 반석이셨던 예수님이 든든히 받쳐주시는 손을 펴시고 자기 백성을 구하시려고 애굽을 찾아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애굽을 심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홍해를 가르시는 일을 주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만나를 내리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셨습니다. 예수님이 여리고를 무너뜨리셨습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40년간을 함께 하시며 그 백성, 광야교회를 목양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도 이렇게 읽어야 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라는 말씀을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 나의 목자시고 예수님이 나의 목자시니,” 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셨지요. 요10: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안다(아는 것이…) 선한 목자 예수님, 우리 예수님은 오늘 시편23편의 목자시기도 하십니다. 그냥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라고 하니까 예수님은 좀 멀리 느끼는 그런 이름이 아닙니다. 신약적으로 읽으실 때는 이 시편23편1절은 바로 예수님은 나의 목자시니, 라고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는 한 군데도 여호와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제 예수, 라는 이름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은 그 이름으로 나타나시기를 기뻐하신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예수 이름으로 행하기를 기뻐하여야 합니다. 이런 찬양대로 말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예수 이름으로 승리를 얻었네 예수 이름으로 예수 이름으로 승리를 얻었네. 예수 이름으로 나아갈 때 누가 나를 대적하리요 예수 이름으로 나아갈 때 승리를 얻겠네’ 교회생활의 핵심은 예수님 부흥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생활의 가장 큰 중심에 예수님이 계시면서 예수님이 나에게서 부흥되는 일이 가장 중요함을 알아야 합니다. 나 뿐 아니라 사람들, 예수님을 믿다가 낙심한 분들 또는 아예 예수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분들에게도 사실 예수님의 형상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 속에 있는 예수님의 형상, 모습을 일깨우는 일이 이른바 부흥입니다. 예수님 꼭 닮은 내가 태어나고 일어나는 일, 예수님이 가장 소중한 인생이 되어서 예수님, 예수님이 나에게서 부흥되는 것이 부흥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군대생활을 얘기하시는데 이렇게 표현하더군요. 별 둘을 단 사단장님이 대위인 중대장님에게 전화를 하셨답니다. 대위인 그 분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단결!’, 하고는 전화를 받는데 예, 예, 알겠습니다, 하는데 온 힘을 다해서 전화를 받더랍니다. 그 옆에 있는 사병들은 쥐죽은 듯 하고요. 그런데 우리는 주님한테 전화가 와도 얘, 없다고 그래라, 없다고 해, 라고 한다는 것이지요. 예수님, 만왕의 왕이시요 우리의 구주신 분, 목자이신 하나님. 그 분이 저와 여러분을 감동하시며 나의 사랑하는 양아, 내가 너를 원한다, 라고 하실 때 우리는 자다가도 TV 연속극, ‘주몽’을 보다가도, ‘열아홉살 순정’을 보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예, 예, 알겠습니다, 라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마음에 내 삶에 예수님 부흥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부흥이 곧 나의 부흥, 교회부흥입니다. 성령께서 이 일을 도우시지만 근본은 예수님이 나에게서 새롭게 깨달아지고 감동이 되고 감격이 되며 완전히 예수님과의 새생활에 들어서는 이것이 바로 부흥입니다. 나의 영혼은 그 때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23: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예수님을 처음 만난 때이든지 다시 예수님을 만나든지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 때 내 영혼은 소생됩니다. 새 힘이 솟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삽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찬미하며 사는 것은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높이고 증거하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에 내 인생을 거는 삶이 시작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했고 예수님 이름으로 전도하며 선포하며 천국을 이야기합니다. 교회를 자랑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른 바 의의 생활입니다. 찬송가496장, 후렴이지요. ‘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 요단강을 건넌 후 무한 영광일세’.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이 의의 생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다,고 선언하는 것, 그리고 그 십자가를 믿으라고 권고하는 것이 의의 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사랑의 희생을 하는 것도 의의 길입니다. 그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서 모든 헌신으로 하며 구제하며 베푸는 것이 의의 길입니다. 우리는 믿음과 사랑, 희생과 구제, 도움과 나눔의 삶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그렇게 예수님을 증거하는 길을 걷게 됩니다. 예수님이 부흥되어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출애굽운동을 하는 교회생활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생활은 그 중심에 예수증거,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는 전도생활이 있습니다.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예수 예수 귀한 예수 믿음 더욱 주소서.’ (찬송가340장 후렴) 사나 죽으나 예수님 예수님 그 분 이름으로 살고 그 분 이름 전하며 사는 것, 이것이 교회생활입니다. 교회생활은 승리와 상급의 생활 교회생활은 또한 승리생활입니다. 그리고 상급의 생활입니다. 예수님이 부흥된 사람, 주님 중심 교회중심의 삶이 시작되면 때때로 고난이 옵니다. 그러나 반드시 승리가 오고 상급이 옵니다. .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23: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교회생활은 이 재미로 합니다. 교회생활, 교회중심의 생활이 되면 여기서 진정으로 가정중심이 됩니다. 가정이 선교의 센터요 교회를 심장으로 하는 새사람들의 모임이니 너무 소중합니다. 교회생활을 제대로 하시는 분, 예수님이 제대로 부흥된 분들은 가정생활을 제대로 합니다. 사업도 일터도 선교적인 센터로서 늘 교회를 생각하며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조심도 하고 빛과 소금이 되기를 힘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교회의 영광과 묶어 주십니다. 그리고 고난도 상급도 같이 주십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양떼들을 인도하여 통과케 하시는 것은 더 나은 목장이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사망의 골짜기를 통과하는 것은 천국이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일에 주님의 인도, 보호가 있기 때문에 반드시 승리합니다.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처음에 사탄이 비웃습니다. 봐라 예수 믿더니 꼴 좋다. 그러나 어느 날 놀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 원수의 목전에서 놀라운 잔치를 열어 주시고 우리를 기름부어 구별하듯이 성령의 충만한 삶으로 기뻐하면서 내 머리에 주님의 면류관이 씌워지게 합니다. 영화롭게 하십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이기신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권세로 사망을 이깁니다. 사망의 걱정, 두려움도 이깁니다.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인 절망을 이깁니다. 184장 찬송가 가사대로입니다. 1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다시 성케 하기도 예수의 피밖에 없네 4 평안함과 소망은 예수의 피밖에 없네 나의 의는 이것뿐 예수의 피밖에 없네 5 영원토록 내할말 예수의 피밖에 없네 나의 찬미 제목은 예수의 피밖에 없네 (후렴) 예수의 흘린 피 날 희게 하오니 귀하고 귀하다 예수의 피밖에 없네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의심에서 구합니다. 미움에서 해방시킵니다. 믿음을 일으킵니다. 용기를 줍니다. 그리고 일으켜 세웁니다. 성령께서 예수의 피권세로 우리를 붙들어 주고 세워주십니다. 보혈의 권세와 성령으로 인해 우리는 이제 탁월해지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십자가를 향해 마음을 여는 일이며 성령을 받는 일이 되고 성령께서 부어지시면서 우리는 연단을 받기도 하나 결국 성령의 도우심으로 탁월하게 됩니다. 교회도 성령을 사모하고 성령의 역사에 문을 여는 교회와 성도들, 목회자들은 비웃음도 받고 비판도 받지만 결국 대단한 상급을 받으면서 잘 되는 것을 봅니다. 교회생활은 따라서 때가 되면 영화롭게 되는 면류관생활 입니다. 면류관을 쓰게 되는 생활. 성령의 역사에 문을 활짝 열고 그 충만함을 받게 하시는 예수님. 사도들이 별 볼일 없어보이는 분들인데 그러나 때가 되니 예수님이 친히 마가다락방에 모인 양떼들,제자들에게 성령을 부으시니 놀라운 부흥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 앞에서 120문도는 영화롭게 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며 엎드리는 상급을 받았습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교회는 부흥하고 잔치하면서 온 땅에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120문도는 오늘날까지 수많은 교회들의 본이 되고 자랑이 되는 면류관을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가 부흥된 사람들에게 그리고 성령을 환영하는 분들에게 반드시 승리와 상급의 면류관을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23: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제 사랑의 나라, 사랑의 목장 교회생활을 꿈꿉시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교회생활은 무언가 넘치는 생활입니다. 무엇이 넘쳐야할까요. 바로 사랑입니다. 교회생활의 중심은 사랑의 예수님이십니다. 그 뜻은 예수님의 목자심과 그 분의 십자가의 사랑이 중심이라는 뜻입니다. 교회는 사랑이 넘치는 사랑의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그분은 무엇보다도 선하십니다. 인자하십니다. 교회생활의 중심에는 이 선함과 인자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생활을 거칠게 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마치 교회를 세상의 어떤 깡패들이나 할 수 있는 그런 말투로 사람들을 제압하고 위협해서 무엇을, 어떤 의를 이룬다, 정의를 이룬다, 하는 곳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눈을 부라리고 금방 말을 험하게 하는 그런 사람들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교회에서 그러면 일단 교회에 통하기도 합니다. 저 사람은 저런 사람이야, 라고 생각하며 사람들이 조심을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 하면 아이구 무서워합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23:4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양떼를 평안하게 하기 위해서 거친 것은 징계하십니다. 주님은 목자로서 양떼를 건지기도 하지만 괴롭히는 것을 때리는 것이 지팡이요 막대기입니다. 목자가 징계합니다. 양들은 힘이 없어서 그냥 있지만요. 그러므로 교회에서 절대로 여러분들은 세상의 방법, 즉 거친 말, 힘, 등으로 생활해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그 중심에서 선하고 인자해야 합니다. 주님은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목자가 되십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우리는 영원히라도 교회에 있고 싶고 천국에 있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천국이 어떤 곳인가를 보이시는 예수님의 작은 목자들입니다. 23:6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그러므로 여전히 우리는 교회를 사랑의 나라로 만들어야 합니다.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우리 도서관이 사랑의 문고, 라는 이름을 가진 것도 우리 지역을 사랑의 마을로 만들자는 뜻입니다. 사랑의 나라, 사랑의 마을. 사랑의 가정 사랑의 일터, 우리는 사랑의…라는 운동을 해야 합니다. 히12: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싸우는 사람은 주님을 보지 못합니다. 미움과 분노는 눈을 가립니다. 선함과 인자함으로써 이 미움과 분노, 거친 신앙을 벗어나는 것, 이것이 출애굽입니다. 지금까지 애굽의 거친 습관을 가졌다면 출애굽하십시요. 그리고 인자와 진실이 가득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나라로 옮겨지십시요.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가득한 주님을 목자로 삼고 우리도 그렇게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절대로 남을 헐뜯는 그런 방법을 써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이제 우리는 옛 것을 청산하십시다. 그리고 새 일을 합시다. 인자한 언어 행실로, 선함과 인자함으로 할 일이 있습니다. 전도해야지요. 사랑해야지요. 그런데 이 일을 위해 할 일이 주위를 위해 기도해드리는 것입니다. 찬송가383장3절. 성도의 신앙 본받아 원수도 사랑하겠네 인자한 언어 행실로 이 신앙 전파하리라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 아멘 이 신앙 따라서 죽으면 가정이 화목할 줄 믿습니다. 이웃과 화목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 출애굽운동의 할 일은 바로 여러분의 주위를 위해서 중보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따라 기도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집, 교회는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56장7절을 인용하시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막11:17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교회는 두세 사람이 모여도 기도하는 집입니다. 먼저 우리 자신이 교회이니 기도하는 마음의 집을 가져야 합니다. 이웃을 위해 주위를 위해 기도하는 집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두 세 사람, 삼인의 교회로 모여서 서로를 위해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상징적으로 아직도 이곳 교회당, 우리가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주위를 위해 기도해드려야 합니다. 여러분이 어디서나 앉으실 때 일어나실 때 이렇게 기도하십시요. ‘주님, 제 주위에 복을 주옵소서’. 늘 ‘제 주위에 복을…’, 이란 기도를 드리십시요. 이것이 출애굽운동입니다. 미움을 벗고 무관심을 벗으며 선하시고 인자하신 목자를 모신 교회생활을 즐겁게 하게 되는 비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교회생활은 서로를 위해 기도해드리고 이웃을 위해 기도하며 찾아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랑의 목장생활입니다. 이제 우리 기도 속에서 예수님이 부흥되게 합시다. 오늘 오후 성도교회에 모여서 기도해드리는 것도 이웃을 위한 기도부흥 예수부흥운동입니다. 다함께 모입시다. 그리고 그 곳에서 기도해드립시다. 주님은 우리의 기도를 따라서 우리에게도 그 분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나타내 주실 것입니다. 기도하는 마음의 집, 우리 집부터 복을 주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 기도 속에서 이웃에게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체험되게 합시다. 이제 우리 교회가 사랑의 목장운동을 합시다. 사랑의 나라에 사랑의 목장이 두 세사람만 모인 곳에서도 느껴져서 온 교회, 가정, 일터가 사랑의 나라 교회가 되고 사랑의 목장 교회생활 이야기로 가득해 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