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28편 강해
찬송하며 삽시다/시28:1-9
찬송하며 삽시다/시28:1-9
이미 봉독한 본문 가운데서 7절 말씀을 다시 읽겠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니,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저를 찬송하리로다\"
이 말씀은 치열한 전쟁터에 선 병사가, 잠시 무엇인가 깊은 상념에 잠겨있는 모습을 연상케 하는 시입니다. 무서운 대포 소리가 땅을 진동하고, 여기 저기서 부상한 군인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오는데, 이 병사는 싸움도 잊은 듯,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사실, 자신의 무능과 나약함을 돌이켜 보면, 막강한 적군과의 싸움에서, 승리란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인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내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실 것이니, \'승리는 내 것이라\'고, 여호와의 깃발을 흔들며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무시무시한 전쟁터 한복판에 서 있으면서도, 두려워 떨기는커녕, 그처럼 침착 장중하고 태연할 수 있을까요?... 이 사람이 이처럼 담대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오직 하나, 그가 여호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극렬한 전쟁의 와중에서도 임마누엘 하시는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그의 마음에는 평화가 깃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쁨으로 찬송을 부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성도 여러분! 인생은 매일같이 치열한 전쟁의 연속입니다. 사업하는 분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요사이 사업이라는 것이 가히 \'전쟁터\'와 같다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학생들도 경쟁이 지나쳐 \'입시전쟁\'이란 표현을 쓰기 시작한지 벌써 오래 됐습니다.
사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도 마귀와의 영적인 전쟁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선한 싸움\'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영적인 전쟁이 아무리 치열하더라도, 주의 전에 나와있는 이 시간만은, 잠시 눈을 돌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며, 찬송을 부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이 험한 세상을 살면서, 왜 찬송을 부르며 살아야 하는지?... 어떤 성도가 찬송을 부르면 살 수 있는지?... 그 비결을 깨달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1. 확신이 있는 성도는 절로 찬송을 부르며 살 수 있습니 다.
오늘 주신 말씀 7절 상반에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니라\" 했습니다. 여기 보면 \'나의\' 라는 말이 두 번 반복하여 나옵니다. 그것은 구원의 하나님을 두 손으로 받들고 있는 모습입니다. 시인은 두 손으로 하나님을 받들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손끝으로만 만질 수 있어도,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혈우병으로 12년 간이나 고생하던 어떤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모하던 예수님이 마침 자기 동네를 지나가신다는 소문입니다. 그래서 군중들 가운데 썩여 기다렸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 일행이 자기 앞을 지나자, 누가 볼세라, 부끄러운 마음을 이기지 못한 채,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서, 예수님의 옷자락에 살짝 손을 대었습니다. 그녀에게는 주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병이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열두 해나 혈우병으로 고생하며, 용하다는 의사, 효염있다는 처방을 다 받아보았지만 백약이 무효이던 이 여인에게,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는 순간, 깨끗이 나음을 입는 기적이 발생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 손만 내밀어도, 아니 하나님께 나오기만 해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손만 내미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까?... 야곱이 얍복 강나루에서 하나님을 사정없이 붙잡고 늘어졌던 것처럼, 우리도 기왕이면 이 두 손으로 하나님을 웅켜 잡으실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야곱처럼 \"하나님! 진정 저에게 축복하지 아니하시면 저는 절대로 놓지 않겠습니다\" - 이런 악착같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리기만 하는 성도들 되지 마시고, 믿음의 두 손으로 꽉 붙잡으시는 성도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얼마나 확신에 찬 신앙고백입니까?...
본문은 하나님을 \'나의 힘, 나의 방패\'라 고백했습니다. 시인은 객관적으로 \'여호와는 힘과 방패시니라\' -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힘과 방패가 되시는 여호와가, 개인적으로 나의 힘이 되고 나의 방패가 되어야만, 나에게 진정한 위로와 힘이 되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이란 이론이 아닙니다. 믿음은 경험을 먹고 자라고, 성령을 통해 힘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도우심이 없으면, 신앙생활에 관한 한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니라\" - 무슨 말씀입니까?... 여호와 하나님께 나의 모든 것을 맡길 때, 남이 아니라, 2,000년 전의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모세나 다윗이 아니라, 바로 나의 힘이 되시고 나의 방패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시편 23편에 있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말씀도 같은 의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목자라는 확신에 찬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부족함이 없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니\" - 비록 두 마디밖에 되지 아니하는 짧은 말씀이지만, 이 선언은 어떤 웅변가의 열변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장엄한 맛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피타고라스나 아리스토텔레스나 또는 소크라테스의 철학에서 오늘 주시는 이 말씀과 같은 힘을 발견할 수가 있겠습니까?... 상상도 할 수 없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는 확신에 찬 신앙을 가진 사람은, 세상적으로 볼 때는 혹 약해 보일런지 몰라도, 그가 진정 주안에서 강하고 담대한 사람이요, 인간적으로는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보일런지 몰라도, 그런 사람이야말로 모든 것을 풍성히 가진 자인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여호와가 과연 나의 하나님이라는 확신이 있습니까?... 우리는 보통 \"저는 약한 사람입니다\"라고 스스로를 평가절하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의상, 겸손을 떠는 것일 뿐, 우리는 내가 나를 평가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너 자신을 알라\' 했는데,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를 아는 것조차, 성령께서 도와 주시지 않으면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우리가 연약함을 잘 아시기에, 우리가 무엇을 하나님께 구하여야 할지 모르는 순간에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 대신 하나님께 간구하신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자신의 연약함을 스스로 인정하는 자리에까지 나가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니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약하디 약한 인간이지만 \"여호와가 나의 힘이시니\"라는 확신을 가지는 순간, 우리는 상상할 수 없는 힘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내가 가장 낮아지고, 내가 가장 약해질 때, 하나님이 진정으로 나의 힘이 되심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배후에 계심을 확신할 수 없다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만일 어떤 사람이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어\" - \'나의 사전에는 불가능이 없어\' - 이렇게 말한다면, 그는 교만한 자의 극치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죽하면 예수께서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느니라\" 하셨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면 그 순간 포도나무 줄기에서 잘라진 가지와 같은 신세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줄기에서 잘라진 가지가 모여 이처럼 아름다운 꽃꽂이로 강단을 장식하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잠시일 뿐, 일주일이 안 돼 곧 시들어 버리는 안타까움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뿌리 되시는 하나님, 줄기 되시는 예수님께 꼭 붙어있는 인생은,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생명의 풍성한 진액을 받아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때 아름다운 꽃과 주렁주렁 맺힌 열매를 보면서 찬양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2. 체험이 있는 성도는 찬송하며 살수가 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7절 중간에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했으니, 여기서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란 말씀은, 우리들의 심령 안에서 이루어진 내적인 체험을 표현한 말씀이고, \'도움을 얻었도다\'는 말씀은, 받은 은혜를 외적으로 공개하는 표현입니다.
사실 우리가 늘상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암송하지만, 입술로 만의 신앙고백일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리고도 \"주여 믿습니다. 주여 믿습니다\"라는 말을 앵무새처럼 뇌까린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말입니까?... 믿음은 마음 속 깊은 중심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럴 때 심령의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실 어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의지하며 찬송을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여유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힘든 현실에 직면한다 할지라도, 전혀 동요 없이 용기 있게 살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원하는 모습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전정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는 담대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찬송을 부리며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것들을 의지하고, 사람을 의지하며 산다면, 그는 세상 풍랑의 요동침에 따라, 인생살이도 같이 요동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갈대 같은 애굽을 의지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구약시대의 애굽은 세계를 지배하던 초강국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는 마치 건들면 부러지는 갈대 같은 존재에 불과했습니다. 사람이 볼 때는 굉장한 것처럼 보이는 것도, 실상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입니다.
시편 118편8절에 보면, \"여호와께 피함이 사람을 신뢰함 보다 낫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을 신뢰하면 실망할 때도 많으나,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기대 이상의 확신과 풍성함을 갖게 됩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도, \'하나님을 의지하므로 내가 도움을 얻었도다\' 했습니다. 내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했더니, 외적으로 도움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체험이 있는 자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신앙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세상을 의지하고 기대하던 사람에게서 나오는 공통적인 말은, \"내가 그만 속았어\" 라는 말입니다. 상황을 좀 이해하려는 자세로 말하는 사람도, \"내가 속은 것은 아니야, 단지 그가 나를 도우려 했지만 도울 힘이 없었어\"라고 자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이런 후회나 자위가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기에, 한 번 약속하신 다음에는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도 이런 체험 - 하나님을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의지하였더니 정말 상상치도 못한 일로 나를 도와 주신다는 체험을 해 보셨습니까?... 신앙 생활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이 체험입니다.
우리가 왜 신앙생활을 우왕좌왕하고 있습니까?... 아직도 진리에 대한 내적인 체험을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가 체험한 은혜를 일일이 다 표현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그것을 마음 속 깊은 곳에 오래오래 간직할 수는 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그 사람을 보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실로암 못에 가서 씻었더니 어떻게 됐습니까?... 광명천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주님의 성호를 찬송했습니다.
이때 보는 사람마다 \"저 사람이 전에 여기 앉아서 구걸하던 그 소경이 아니야?\" 했습니다. 그런데 게중에는, \"아니야 그와 비슷할 뿐, 저 자는 소경 거지가 아니야\" 라고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눈을 떴다는 이야기를 그들은 들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어떻게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눈을 뜰 수 있어?...\"라며, 변론이 일어났습니다. 그것도 가장 신앙이 좋다는 유대교 지도자들 속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래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눈 뜬 당사자에게 듣는 것이 좋겠다 하여, \"네 눈이 어떻게 떴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 서슴치 않고 대답하기를 \"예수라는 분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를 핍박하여 그를 죄인으로 만들어 몰아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예수가 소경의 눈을 뜨게 했다면, 예수를 몰아내려는 계획은 상당한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눈을 뜨게 된 소경에게 다시 묻기를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다고 하니, 너는 그를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웬만하면 분위상으로 볼 때 어느 정도 알만도 할텐데,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는 하나님의 선지자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사람은 신학이 무엇인지?...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자기가 소경된 자였는데, 나음을 입었다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때문에 \'내\'노라 하는 유대교 지도자들이 앞에서, 그것도 예수를 비판하고 있는 자리에서, 담대하게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소경된 자의 부모는 또 달랐습니다. 그들은 자기 아들의 눈을 뜨게 해 준 분이 누구인지 잘 알았지만, 다그쳐 묻는 유대교 지도자들의 심문에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이고 앞을 보지 못했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가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또는 누가 그의 눈을 뜨게 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 일은 당사자에게 물어 보세요. 그도 다 컸으니 자기의 일은 자기가 알아서 대답할 수 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아들의 일이지만 자기들이 체험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란 이처럼 체험한 자 다르고, 체험한 것을 본 자가 다르고, 체험한 것을 들은 자가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똑같은 사안을 두고도 체험한 사람은 찬송이 나오는가 하면 체험하지 않은 사람은 저주가 나오고, 똑같은 예배를 드리고도 체험이 있는 사람에게는 복음이 되는가 하면, 체험이 없는 사람에게는 사이비가 되는 것입니다.
\'지구는 지금도 돈다\'는 갈릴레오의 이야기처럼, 눈 가리고 아옹한다고 진리가 가려지겠습니까?...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방침을 세웠습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저희를 무서워했습니다.
그래서 날 때부터 소경 되었다가 눈을 뜨게 된 사람에게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예수란 사람이 죄인인 줄 안다\"고 언질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소경되었다가 눈을 뜬 사람은, 단호하게 그들의 강요를 거부하면서, \"그가 죄인인지 아닌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그 분 때문에 보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얼마나 확신에 찬 대답입니까?...
그래서 유대 지도자들이 다시 묻습니다.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했느냐?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느냐\"고 물으니까, \"내가 여러 번 말씀 드렸는데도 듣지 아니하고 왜 다시 듣고자 하십니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고 하십니까?\"라고 되물었습니다. 참 기가 막힌 대답입니다.
오늘 아침 여러분에게도 이와 같이 확신이 찬 신앙고백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체험이 넘치는 신앙처럼 강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3. 감격이 넘치는 성도는 찬송하며 살수가 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7절 하반 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저를 찬송하리로다\" 했습니다.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두 가지 측면은, 내적으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니\", \"노래로 찬송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믿지 않는 사람들도 기뻐할 때 있고, 기쁘면 노래가 나오기는 마찬가지입니다만, 엄격히 말하면 그들의 기쁨은 피상적인 것이요, 그들의 웃음은 찰나적일 때가 많습니다. 입에는 웃음이 있는 것 같지만 그 마음 속에는 허탈함이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피상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크게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잔이 콸콸 넘치는 듯한 기쁨이요, 너무 좋아서 덩실덩실 춤을 출 정도의 기쁨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기쁨이 있어야 하고, 이런 기쁨이 있는 사람은 아무리 어려운 지경에 빠지더라도 찬송이 나올 수 있습니다. 이것이 참 기쁨입니다.
바울과 실라를 보세요. 빌립보에서 억울하게 매를 맞고 착고에 채워져 감옥 싶은 곳에 갇힌 적이 있습니다. 정말 기가 막힌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억울한 처지까지도 그들의 기쁨을 빼앗아 가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밤중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다른 사람이 들을 정도로 힘껏 찬송을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넘쳤으면, 하나님께서 나의 힘이요 나의 방패이심을 얼마나 감격스럽게 체험했으면, 그처럼 기쁜 마음으로 찬송을 부를 수 있었겠습니까?...
이런 기쁨과 찬송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상한 일이지요. 결국 바울과 실라는 지진으로 옥문이 깨지는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내게 기쁨이야!\' - 그런 감격을 느껴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럴 때 찬송하세요. 큰 소리로 하나님께 찬송을 부르세요. 그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예배드릴 때 부르는 찬송이 일주일 동안 드리는 유일한 찬송인 분들이 있지요?... 그래서 그것으로 만족하고 있습니까?... 언제나 찬송을 불러 보세요.
성도가 함께 모이면 세상의 다른 이야기하는데 시간 보내지 말고 찬송하세요. 찬송을 부르면 걱정이 없어집니다. 찬송을 부르면 외로움이 사라집니다. 찬송을 부르면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찬송을 부르면 힘이 생깁니다. 찬송을 부르면 감사가 솟아날 날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장15절에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했습니다. 이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마음이 기뻐서 부르는 찬송은 듣기에도 좋습니다.
바랍건데, 주님을 마음으로 의지하여 힘을 얻고, 주님을 방패로 삼아 능력을 체험하므로, 항상 감격이 넘치는 가운데, 하나님을 크게 기뻐하며 찬송하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