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31편 강해 [2]


여기 피난처가 있습니다/시31:1-15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고 또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상처 받은 사람, 곤경에 처한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동네 술집에 가서 아픈 마음, 괴로운 마음을 달랩니다.
동네 술집은 우리 주님께서 교회에 주시고 싶어 하시는 따뜻한 사랑의 모조품일 것입니다. 은혜대신 술을 나누어 주고, 현실 도피적이기는 하나 얼른보면 푸근하고 평안하고 포용적인 분위기입니다. 비밀을 얘기할 수 있고 우정을 나누고 오해를 풉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술집에 몸을 맡깁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곤경에 처했다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지금 막 형무소에서 나왔다면? 파산직전에 이르렀다면?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는 피난처가 필요합니다. 나를 도와주고, 나의 말을 들어주고, 다시 한번 나를 \"모든 환난 중에서 위로하사…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에게 소개시켜 줄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1. 피난처가 필요한 사람들
정말 우리에겐 피난처가 필요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시편 31편은 인간의 처참한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다윗은 붙잡을 곳이 없었습니다. 말할 수 없이 곤란한 처지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피난처가 필요했습니다.
1-2절을 보세요.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원히 부끄럽게 마시고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 내게 귀를 기울여 속히 건지시고 내게 견고한 바위와 구원하는 보장이 되소서.\"
다윗이 이런 피난처를 찾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9, 10절에 \"여호와여 내 고통을 인하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근심으로 눈과 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내 생명은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해는 탄식으로 보내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절실하고 솔직한 말입니다. 위선이 없는 진실한 고백입니다. 그는 울어서 눈이 붉었다고 합니다. 그는 그의 삶이 슬픔으로 보내지고 있음을 시인합니다. 모든 것이 암담하고 희망이란 거의 없으며 내일이라고 해서 상황이 달라지리라는 기대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럴때 절망과 고독을 느낍니다. 슬픔은 쉽게 물러가려 하지 않습니다. 함께 식사할 사람도 내 농담에 웃어줄 사람도, 내 불평을 들어줄 사람도 오늘을 함께 기뻐하며 잘했다고 해 줄 사람도 없이 외로움에 흐느끼고 있습니다.
여러분,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어떤 대우를 받나 보세요.
본문에 \"내가 욕을 당하고 내 이웃에게서 심히 당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모욕을 당한다는 말입니다. \"내 친구가 놀라고\"는 친구가 나를 비난합니다. \"길에서 보는 자가 나를 피하였나이다. 내가 잊어버린바 됨이… 파기와 같으니이다\"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이 나를 거부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무리의 비방을 들으며\"는 사람들이 모여서 나를 험담합니다. \"저희가 내 생명을 빼앗기로 꾀하였나이다\"는 위협한다는 말입니다.
아마 우리 가운데 상처 받은 분이 바로 그럴 것입니다. 슬픔과 싸우고 죄의식으로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괴롭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한 것은 다른 사람의 비난, 괴롭히는 말들, 쏘아보는 눈총입니다. 이런 상처 받은 사람에게는 안도의 장소와 피난처가 필요합니다.

2. 피난처의 기원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피난처를 찾았습니까?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간 이스라엘 백성들의 순례 이야기를 쓴 구약성경에는 이들이 세운 피난처에 관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이 가나안 땅을 성공리에 점령한 다음 이스라엘 백성은 서로 자기 종족의 땅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여호수아 13-19장에 이에 대한 과정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지도자들에게 따로 \'도피성\'을 만들어 보호와 안위의 장소로 삼으라고 지시했습니다.
여호수아 20장 2절이하에 보면 \"내가 모세로 너희에게 말한 도피성을 택정하여 부지중 오살(誤殺)한 자를 그리로 도망하게 하라 이는 너희 중 피의 보수자를 피할 곳이니라\"고 했습니다.
구약의 사상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것이기 때문에 동기야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이를 상하게 했으면 같이 이를 부러뜨리고, 죽였으면 같이 죽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의 아니게 실수로 다른 사람의 생명에 손해를 끼쳤을 때 이런 사람의 피할 곳을 마련한 곳이 도피성입니다.
율법학자들에 따르면 도망하는 사람을 돕기 위해 도피성으로 통하는 길을 최대한 편리하게 수리해 놓는 것이 산헤드린의 임무였다고 합니다. 언덕은 하나도 없게 하고 모든 강에는 다리를 설치하고 도로도 넓게 했습니다. 모든 길 모퉁이에는 \'피난처\'라고 쓴 표지판을 세워서 눈에 띄어 쉽게 찾아가도록 했고 두 율법 학생이 만약의 경우 복수하려는 자가 도망자를 덮칠 때 막을 수 있도록 도망자와 동행하여 보호하도록 하는 법을 정해 놓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도망자를 괴롭히기 보다는 도와주기 위해서 모든 성의와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곤경에 처해 있는 사람들은 적의 잔인한 폭력을 당하지 않도록 보호되어야 했습니다.
피난처의 주 목적은 죽은 사람의 원수를 갚기 위해 좇아오는 사람들로부터 도망하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것 이었습니다. 여호수아서 20장 5절에 \"피의 보수자가 그 뒤를 따라온다 할찌라도 그들은 그 살인자를 그의 손에 내어주지 말찌니 이는 본래 미워함이 없이 부지 중에 그 이웃을 죽였음이라\"했습니다.
보다 상세한 설명은 민수기 35장에 고의적인 살인자와 비고의적인 살인자의 차이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철 연장이나 사람을 죽일 만한 돌을 들고 사람을 쳐죽이면 이것은 고의로 살해한 것으로 인정하고 사람을 죽일 만한 나무 연장을 손에 들고 쳐죽였어도 고의로 살인한 자로 인정해 반드시 죽일 것이요, 원수를 갚는 자가 친히 원수를 갚을 수 있게 했습니다. 그러나 원한이 없이 우연히 사람을 밀치거나 돌로 사람을 쳐죽였다면 이것은 원한도 없고 해하려한 고의적 살인이 아닌 만큼 회중이 원수 갚으려는 사람의 손에서 살인자를 건져내어 도피성으로 돌려보낼 것이고 그는 대제상이 죽기까지 거기에 거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본의 아니게 실수를 해서 사람을 죽였다고 해도 이 사람은 도피성에만 있으면 언제든지 안전했습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사실은 대제사장의 죽음으로 살인자는 영원한 용서를 받게 됩니다. 비로소 그때 그는 아무런 두려움이 없이 도피성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3. 피난처로서의 교회
그러면 도피성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민수기 35장 24-25절에 보면 \"회중이 친 자와 피를 보수하는 자간에 이 규례대로 판결하여 피를 보수하는 자의 손에서 살인자를 건져내어 그가 피하였던 도피성으로 돌려 보낼 것이요. 그는 거룩한 기름 부음을 받은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거기 거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회중 또는 단체를 이룬 사람들의 세가지 특별한 참여를 봅니다. 조금 전에 읽은 말씀을 자세히 보세요. 그리고 교회의 회중인 우리는 그 역할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회중이 판결하여…\" 하는 말이 나옵니다.
\"회중이 건져내어…\" 하는 말이 나오고,
\"회중이 돌려보낼 것이요…\"했습니다.
\"판결\"이라고 번역된 원래의 말 뜻은 논쟁의 해결을 말합니다. 전국 어느 법정에서나 죄를 지은 사람에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호수아 시대에는 레위인이 이 일을 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피고에게 원수를 갚으려는 사람으로부터 \"건져내는\"일입니다. \"건져내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의 기원은 회중이 피고의 살아날 길을 마련해 주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피고의 말을 끝까지 듣고 무죄를 확인한 다음에는 적극적으로 그를 놓아주기 위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행동에는 긍정적이고 확실한 면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회중은 그 사람은 완전히 \'돌려보내기 위해서\'힘을 합했습니다. 직접 사건에 관여한 것입니다. 완전히 용서를 받고 그가 풀려난 것을 볼 뿐 아니라 개인적인 가치와 명예를 회복하도록 도와주기까지 했습니다.
여호수아 20장 7-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무리가 납달리 산지, 갈릴리, 게데스와 에브라임 산지의 세겜과 유다산지 기럇 아르바 곧 헤브론을 구별하였고 또 여리고 동 요단 저편 르우벤 지파 중에서 평지 광야의 베셀과 갓 지파 중에서 길르앗 라못과 므낫세 지파 중에서 바산 골란을 택하였으니 이는 곧 이스라엘 모든 자손과 그들 중에서 우거하는 객을 위하여 선정한 성읍들로서 누구든지 부지중 살인한 자로 그리고 도망하여 피의 보수자의 손에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며 그는 회중 앞에 설때까지 거기 있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우리 귀에 익지 않은 여섯 도시의 이름이 있습니다. 게데스, 세겜, 기럇 아르바, 베셀, 길르앗 라못, 골란등입니다. 우리가 들어보지 못한 도시의 이름들입니다. 우리 귀에는 오히려 서울, 대구, 광주, 마산, 인천, 전주가 귀에 익습니다. 그런데 이 중에 하나라도 우리가 피할 곳이 있습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에 다친 사람들을 돌보아 주고, 객관적으로 들어주고, 살 수 있도록 도와주고, 본래의 상태로 회복시켜 줄 만한 단체가 하나라도 있습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도시는 피난처가 되고 있습니까?
그러나 이 땅에도 피난처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우리 한국에는 3만이 넘는 교회가 있습니다. 우리 강남구만도 400이 넘는 교회가 있습니다. 과연 이 교회들이 피곤하고 지친 심령들, 아니 불안과 공포에서 어찌할바를 모르고 있는 사람들에게 영혼의 안식과 평안을 줄 수 있는 피난처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이 각박한 도시에 피난처로 서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이 곳에 교회를 세우셨습니까? 그것은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소망을 안겨주며 피난처가 되기를 바라서 입니다. 공포에 싸인 심령이 참된 영혼의 평안을 얻기를 바라서 입니다. 상처받은 심령을 싸매주는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3장 16절 이하에서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오직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 중에는 곤경에 처한 사람을 찾아가는 사랑, 궁핍한 사람에게 사랑의 동정을 보여주는 태도, 비인간화 되어가는 사회에서 인간의 존재를 필요로 하고 중요한 사람으로 느끼게 하려는 열의가 있습니다.
이제는 주님의 교회가 바로 피난처를 만들때입니다. 용서의 등불을 밝히 켜고 은혜의 횃불을 높이 들 때입니다. 이제 만세반석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상처받은 심령이 고침받고 구원받을 수 있는 피난처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리십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 피난처가 있습니다. 환난을 당한 분, 상처받은 분, 두려워하는 분, 절망에 빠진 분, 모두 나아와 구원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