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51편 강해

부흥을 주소서①회개와 갱신 / 시51:1-15

독일에 한 어린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의 꿈은 목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노래에도 천부적인 자질이 있어서 전혀 음악공부를 하지 않았지만 수도원 합창단원이 되었습니다.
역사, 철학, 예술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즐겨 읽었습니다.
동물들을 대단히 사랑했습니다.
군대에 있을 때 주인을 잃은 강아지 한 마리가 참호 속으로 왔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정성을 다해 강아지를 돌보아 주었습니다.
어느날 강아지가 없어지자 정신을 잃은 사람처럼 몇 일간 밥도 먹지 않고 슬픔에 잠겨있었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사랑과 관심이 있었습니다.
어린 꼬마가 의자에 부딪혀 울자 자신도 그 의자에 머리를 부딪히며 위로할 만큼 자상하고 사랑스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음악을 좋아하고, 자상하고, 사랑으로 가득했던, 훌륭한 목사를 꿈꾸던 자였습니다.

누가 이 젊은이가 광기어린 모습으로 600만 명의 유태인을 학살한 주인공이 되리라고 상상했겠습니까?
온 유럽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2차 세계대전의 도발자, 저 악명 높은 아돌프 히틀러가 되리라고 생각했겠습니까?
악마 같은 삶을 살았던 히틀러의 인생의 전반전에는 그렇게 아름다운 한 인간의 선한 모습이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우리 인간은 극단적인 양면성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겉으로는 선하고 착하고 아름다운 모습인데 속은 악한 생각과 추악한 욕심의 발톱을 감추고 있습니다.
우리 내면에는 인간의 힘으로 끊을 수 없는 죄악의 뿌리가 깊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위대한 사도바울도 이렇게 탄식합니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3-24)

마음으로는 선한 일을 행하기 원하지만 실제의 삶 속에서는 악을 행하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자신을 사로잡아 자기가 원치 않는 악한 길로 끌고 가는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죄라고 고백합니다.(롬7:17, 20)

죄는 우리의 인생을 사로잡아 악한 길로 끌고 갑니다.
멸망의 길로, 파멸의 길로 이끌어 갑니다.

오늘 우리는 죄악의 수렁에서 신음하며 부르짖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은 성경에 800번이나 그 이름이 등장할 정도로 위대한 신앙의 인물입니다.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가장 존경받고 신뢰받는 믿음의 주인공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소년시절 물맷돌을 가지고 골리앗 앞에 나갔던 용기 있는 사람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였던 믿음의 사람입니다.
부당하게 10년이 넘게 사울 왕에게 쫓겨 다녔지만 한 번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든지 사울왕을 죽일 수 있었지만 하나님이 기름부은 왕을 죽일 수 없다고 거부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모든 사랑을 아름다운 찬양과 시로 올려드린 찬양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여 성전을 짓기 위해 모든 준비를 한 사람입니다.
다윗의 인생의 전반전을 보면 도저히 넘어지지 않을 사람처럼 보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평생 동안 믿음을 지키며 순결한 모습으로 살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언제 다윗이 넘어졌습니까?
그가 왕이 되고, 태평성대가 찾아옵니다.
나라가 부강해 지고, 강한 군대를 가지고 세상을 호령하던 순간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자기의 부하들은 전쟁터에 나가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데 그는 자신의 자리를 이탈하여 한가롭게 왕궁을 거닐고 있었습니다.
그의 눈에 목욕을 하고 있는 아름다운 한 여인이 보였습니다.
인간의 죄는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할 때도 보는 것으로부터 죄가 들어왔습니다.
사탄의 유혹을 받고 선악과를 보는 순간 어떻게 보였습니까?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였습니다.
이미 하나님과의 관계의 자리에서 이탈한 다윗의 눈에 비쳐진 여인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왕궁으로 그 여인을 끌어들여 동침을 합니다.
그런데 얼마 뒤에 그 여인이 임신을 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왕으로서 체면을 구긴 다윗은 자신의 죄를 합리화시키고 변명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전쟁터에 나가있는 요압 장군에게 친서를 보냅니다.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아를 즉시 집으로 돌려보내라는 것입니다.
영문도 모른체 우리아는 집에 돌아옵니다.
그런데 충성스런 신하였던 우리아는 집에 들어가서 아내와 잠을 자지 않습니다.
자기의 동료들은 목숨을 걸고 전쟁터에서 싸우고 있는데 한가롭게 아내와 잠을 잘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충성스럽고 믿음직한 부하입니까?
그러면 다윗이 깨닫고 돌이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죄를 지은 사람은 변명을 하고, 합리화를 시킵니다.
그것은 인류의 조상 아담이 그랬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이 찾아오셨을 때 아담은 변명하며 자신을 합리화합니다.
하나님이 짝지워 주신 아내 하와가 주어서 먹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은 잘못이 없다고 발뺌을 하며 합리화합니다.
이것이 아담의 후예인 우리들의 모습 속에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죄를 덮으려고 했던 그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다윗은 더욱 악한 생각을 합니다.
다시 요압 장군에게 친서를 보내 우리아를 최전방의 전쟁터에 보내 죽게 하라는 것입니다.
죄에 한 번 빠지면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몰고 갑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위험성입니다.
결국 우리아는 전쟁터에서 전사하고 맙니다.
상황이 종료되었다고 판단한 다윗은 밧세바를 자신의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고백하지 않은 죄는 언젠가 밝히 드러납니다.
아무도 모르게, 교묘하게 숨기려고 했지만 그것은 곧 밝혀집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간음죄를 저질렀습니다.
고의적으로 사람을 죽게 만든 살인죄를 저질렀습니다.
자신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거짓말을 했습니다.
여기서 다윗의 인생이 끝났다면 그는 성경에 등장하는 불행한 주인공이 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단이라는 선지자를 보내십니다.

어느 동리에 큰 부자 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부자의 집에는 소와 양과 다른 재산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집에는 아무 것도 없고 그저 조그마한 암양 새끼 하나만 있었는데, 얼마나 사랑하는지 한 상에서 먹고 한 자리에서 자고 딸처럼 아꼈습니다.
그런데 부자집에 손님이 오니 이 부자는 자기의 양과 소를 잡는 것이 아까워서 가난한 사람의 양 새끼를 빼앗아 그것을 잡아 손님을 대접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다윗이 흥분해서 말합니다.
‘내가 사는 나라 안에 이런 놈이 있다니 그놈은 마땅히 죽을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양에 대해 모세의 율법대로 네 배나 갚아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때 나단이 손가락으로 다윗을 가리키면서 이같이 말했습니다.
“당신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다윗의 인생의 후반전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오늘 봉독한 시편 51편은 다윗의 참회록입니다.
다윗이 기록한 시편에는 일곱편의 회개시가 있습니다.
시편 6편, 32편, 38편, 51편, 102편 130편, 143편입니다.
이 가운데 51편은 가장 대표적인 참회시입니다.
어떻게 해서 다윗이 그렇게 엄청난 죄를 짓고도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로 내 뜻을 다 이루게 할 자(행13:22)라는 최고의 칭찬과 축복을 받았을까요?
그것은 바로 철저한 회개입니다.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들은 다윗은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무릎을 꿇고 회개합니다.
왕의 체면과 체통을 무릅쓰고 회개합니다.
그의 손에 막강한 권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힘없는 나단 선지자의 힐책을 받고 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다윗은 칼을 든 자였으나 말씀의 칼을 든 자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보통 우리는 죄를 짓고 본래 자신은 의로운데 실수로 죄를 지었다고 변명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내가 죄악 중에 잉태하였고 죄 중에 탄생하였다’(5절)고 고백합니다.
그는 본질적으로 죄인이요, 본래 의를 행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시편 32:3-5절에서는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뭄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고백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 전의 상황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사랑했던 다윗이 그 엄청난 죄를 짓고 얼마나 마음이 괴로웠겠습니까?
그는 종일 신음하였고, 뼈가 마르는 고통을 느꼈습니다.
주님의 손이 자신을 누르는 것 같은 중압감 속에서 몸의 진액이 여름 가뭄에 논이 갈라지는 것처럼 메말라 가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시편 6편 6절에서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고백합니다.
회개의 눈물로 침상을 적시며 그 눈물이 주야로 음식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다윗을 통해 깨달을 수 있는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죄를 짓고도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라고 칭찬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의롭게 행하고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책망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차이가 무엇일까요?
바로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깨닫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오늘 1-3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여 주이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여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5절에서는 죄악 중에 출생한 자임을 고백합니다.
7절에서는 우슬초로 자신을 정결케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9절에서는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는 자신의 패역한 모습을 바라보며 통회하고 자복합니다.

아돌프 히틀러가 나와는 전혀 질이 다른 특별히 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간음죄와 살인죄를 저지른 다윗과는 나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이라고 교만하지 마십시오.
우리 속에도 히틀러가 저지를 수 있었던 죄의 가능성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윗과 같이 더럽고 추한 성적 유혹과 죄악의 씨앗이 우리에게도 숨어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한순간 방심하면 언제든지 우리도 넘어질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순결함과 거룩함을 잃어버리기 시작할 때 엄청난 죄악의 쓰나미가 우리 인생을 덮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땅에는 수많은 부정부패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당장이라도 하나님이 심판의 칼날을 뽑아 악한 자들을 없애버렸으면 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우리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못합니다.
과연 우리들도 그런 자리에 있을 때 유혹을 물리칠 수 있겠습니까?
내가 그런 입장에 있었다면 나는 과연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까?
입술로는 남을 손가락질하며 정죄하지만 그 무리들 속에서 숨어서 더 추한 모습으로 서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혀 온 여인을 돌로 치려할 때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어쩌면 우리는 간음하는 여인을 향하여 독설을 퍼부으며, 돌맹이를 들고 서 있는 군중 속의 한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면서 흥분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서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죄를 드러내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가장 위대한 점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드러낸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를 사하실 때 먼저 원하시는 것은 자신의 죄를 자백하는 일입니다.
요한1서 1장 9-10절에 말씀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우리의 자를 자백하고 회개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용서해 주십니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처절하게 피흘리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피뿌림을 통해 우리의 모든 죄악을 도말하시기 위함입니다.
아무리 악한 죄라도 주님 앞에 드러내 놓고 고백하면 용서를 받습니다.
용서받지 못할 죄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고백하고 드러내지 않는 죄는 결코 용서받지 못합니다.

다윗은 사죄의 은혜를 알고 있습니다.
자신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긍휼을 베푸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는 시편 32편 5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그리고 32편 1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사랑하는 여러분!
누가 복있는 자입니까?
엄청난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죄를 가리워 주시고 덮어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받은 자가 바로 복있는 자입니다.
죄사함의 은혜와 용서를 체험한 자가 복있는 자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과거의 죄책감에 시달리고 계십니까?
십자가 달리신 주님 앞에 온전히 드러내 놓으십시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여러분의 모든 죄를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용서를 구하십시오.
사도바울이 깨달은 최고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그가 두 마음을 품고 곤고함 속에서 죄짐에 시달릴 때 그를 자유케 한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십자가의 능력, 보혈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찬송가 202장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을 보십시오.
예수 어린 양의 피가 우리를 자유케 하십니다.
또한 우리는 이렇게 찬양하며 주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보혈을 지나 아버지 품으로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네 존귀한 주 보혈 내 영을 새롭게 하시네 존귀한 주 보혈이 내 맘을 새롭게 하네♬

다윗은 위대함은 철저한 죄의 회개 뿐만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능함을 뼈저리게 깨달은 것입니다.
10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하나님 앞에 넘어졌던 다윗은 자신의 마음조차도 이제는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철저하게 깨닫습니다.
아무리 정결하고 순결하게 살고자 할지라도 이미 더럽혀진 마음은 악하고 더러운 생각으로 가득차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내 속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해 주십시오.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만들어 주옵소서.”
진정한 회개는 자신의 의지와 결단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11절에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자신에게서 성령을 거두어가시면 자기는 주님 앞에 쫓겨날 수 밖에 없는 죄인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성령님의 역사하심 속에 회개의 영을 불어 넣어야 합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갈망하며 주님 앞에 겸허하게 긍휼을 구할 때 주님께서 우리 안에 새로운 마음을 주시고, 정직한 영으로 채워주십니다.

기독교 역사상 모든 부흥의 역사는 한 사람의 회개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740년 조나단 에드워드의 회개는 미국의 대 부흥을 이끌었습니다.
1904년 이반 로버츠의 참회는 영국 웨일즈 지방의 놀라운 부흥을 주도했습니다.
1903년 원산에서 하디 선교사의 참회는 1907년 평양의 대 부흥 운동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평양의 부흥운동은 길선주 장로의 죄의 고백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자기 친구가 죽으면서 재산을 정리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자기가 재산의 얼마를 착복했노라고 울면서 회개했습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곳에 남아있던 600여명의 사람들 가운데 성령의 불이 임했습니다.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났습니다.
밤새도록 교회 바닥을 구르며 울며 기도했습니다.
그 다음날 술집이 문을 닫았습니다.
쌀집 주인이 회개하고 부정한 방법으로 속였던 것을 되돌려 주었습니다.
평양 시내가 새롭게 변화되었습니다.
그 회개의 불길이 전국을 휩쓸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1907년의 대부흥운동입니다.

올해는 평양 대부흥의 역사가 일어난 지 꼭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속에 이런 부흥의 역사를 꿈꾸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 가운데 이런 부흥이 일어나기를 기대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민족 가운데 다시 한번 놀라운 부흥의 불길이 임하기를 갈망해야 합니다.
그 부흥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죄에 대해서 절망하며 참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죄에 대한 절망은 새로운 부흥의 기회입니다.
회개의 눈물 속에 우리의 희망이 있습니다.
회개의 눈물 속에 우리의 미래가 있습니다.
회개의 눈물 속에 우리의 부흥이 있습니다.
회개의 눈물 속에 성령의 기름부으심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회개의 눈물 속에 치유와 회복이 임합니다.
회개의 눈물 속에 새로운 사명이 주어집니다.
우리 함께 <정결한 마음 주시옵소서> 찬양하며 주님의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경배 찬양] 주님과 담대히 나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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