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신학적 기독교 교육학 [3]

기독교교육
성경신학적 기독교 교육학(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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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기독교 교육학의 개관

3. 1. 기독교 교육의 주관자
3. 2. 기독교 교육의 도구적 주체
3. 3. 기독교 교육의 목적
3. 4. 기독교 교육의 소재
3. 5. 기독교 교육의 방법
3. 6. 기독교 교육의 과정
3. 7. 기독교 교육의 장


1. 기독교 교육의 주관자

기독교 교육에서의 주관자는 누구인가? 이는 세속적 교육학과 근본적으로 차별화 되는 기독교 교육학의 특성을 밝히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교육의 주관자를 누구로 보느냐에 따라서 교육의 목적과 방법, 그리고 의미가 완전히 상이하게 드러나게 된다.

1) 교육의 주관자에 대한 세속 교육학의 관점
인간 스스로가 교육의 주관자

교육의 주관자를 인간 그 자체로 간주하는 세속적 교육학에서는 교육의 목적을 인간의 자기 능력과 잠재력의 신장을 통한 인간의 완성에 둔다(플라톤, 공자). 이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철학적 인간관에 기초하는 교육관이다. 즉 서양 철학이든 동양 철학이든 간에 인간 안에는 理性 혹은 良知와 良能과 같은 인간 스스로 자신의 잠재가능성을 실현해 갈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으로 가정한다. 그리고 그러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교과와 방법을 통해서 진리에 도달하거나 혹은 더 성숙한 인격의 완성을 이루어 갈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가 교육의 주관자가 되어 자기 완성에 이르는 길을 걸어 갈 수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바로 인간 죄악의 극치를 보여주는 극적인 사례이다.
성경은 인간을 무엇으로 규정하고 인간의 모든 행위의 의미를 어떻게 밝히고 있는가? 아담은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어둠의 권세의 유혹을 받아 타락했다(창3장). 즉 타락이후 인간은 부단히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유혹 가운데 있다. 타락 이후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된 존재가 되었고 다윗의 고백대로 죄인의 몸에서 잉태되어 죄 가운데 출생한다(시53:). 그런 죄인은 하는 일 마다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여 자기의 원하는 욕망대로 이루려고 노력하며 살아간다. 그런 죄악된 욕망이 최고의 상태로 실현되는 것이 바로 스스로의 힘으로 인격의 완성을 이루어 의인이 되는 일이며 또한 다른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 도와 줄 수 있다고 하는 철두철미 인본주의적인 교육관이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이 스스로의 힘의 신장과 실현을 통해 하나님같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인본주의적인 교육관은 고대 희랍 철학으로부터 현대의 교육관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주장되어 왔다. 그리고 동양의 오랜 전통적 사상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그것을 타당한 것으로 여겨
왔다.

2) 교육의 주관자에 대한 현존 신학의 관점

현존신학은 교사가 교육의 주관자로 간주하는 오류

그렇다면 기독교가 바라보는 교육의 주관자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성경은 철두철미 하나님 한 분만이 진정한 교육의 주관자가 되심을 증거 한다. 그러나 현존 신학에 의하면 이것이 정당하게 주장되고 있지 않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현존 기독교 교육학이 하나님 중심적인 이론 전개가 아니라 제도적 차원의 교회 중심, 혹은 인간 교사 중심의 차원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이는 지극히 인본주의적이고 현상적인 차원에서의 교육이론이며 그것은 근본적으로 기독교 교육학이 전제하는 신학의 취약점으로부터 말미암는다. 그 취약점의 핵심은 바로 신관에 있다. 현존의 신학은 그것이 보수신학이든 자유주의신학이든지 간에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과 예정에 근거하는 절대적인 역사지배의 주권적인 능력을 정당하게 수용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16세기 종교개혁의 전통을 따르는 개혁신학 조차도 성경이 그렇게도 강조하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적인 예정을 증거하기를 두려워하고 있다. 현존 보수신학의 교의신학이나 성경신학에서 하나님의 작정이나 예정은 사라져 버린 지 오래다. 오히려 예정을 말한다는 것은 인간의 존엄과 자유로운 선택을 방해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것은 고전적인 신학자들의 해묵은 관념적 이론 정도로 치부되고 있다. 이런 신학의 사상에서는 정당한 기독교적 하나님 중심적인 세계관의 형성은 불가능하다. 기껏해야 인간의 구원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설명하는 구속사적 세계관의 구축정도에 머무르고 있는 실정이다.
일부 건전한 보수신학자들은 가끔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명제를 언급하기는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지니고 있는 결정적인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들이 하나님의 주권을 성경의 내적 논리를 따라 진정으로 인정하고 밝힌다면 신학의 모든 하위 논리의 전개가 일관되게 하나님 영광 중심적인 방향으로 개진되어야 한다. 특히 기독교 교육의 전개에서 그것이 명백하게 드러나야 한다. 하나님의 역사 지배의 주권과 섭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택한 성도에게 깨닫게 하시려는 데 있는 것이라면 교육의 주관자로서 하나님이 명백하게 강조되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은 주권적인 작정에 근거하여 불택자에게는 못 깨닫게 하실 수 있으며 실제 삶 가운데에서 그렇게 섭리하심을 밝힐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 교육학에서 교육의 주관자로서의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주장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이것은 참으로 아이러니 중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성도가 이 땅에서 하나님을 배우고 깨닫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 일진대 그 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가 기독교 교육이론의 전개에 확인되지 않는다는 것은 신학의 뿌리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음을 명백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현존의 기독교 교육학은 현상적인 보이는 교회의 차원에서 인간 교사가 행해야하는 교육의 원리와 방법들을 강구하는데 치중되어 있다. 즉 어떻게 해야 잘 가르칠 수 있는가하는 인간중심의 방법론적 논리에 철저하게 함몰되어 있다.
하나님의 주권에 근거하는 영원하신 작정과 예정이라고 하는 기독교의 근본 뿌리가 정당하고 취급되지 아니하는 신학은 필연적으로 인간 중심적인 논리가 전개 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보이지 아니하는 영원의 논리가 중시되지 않는 한 보이는 현상적인 차원의 인간 중심적인 논리의 전개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신학의 문제점은 무엇보다도 기독교 교육의 정당한 이해에 치명적인 그릇된 결과를 야기하게 된다. 앞의 세속 교육학에서 언급한대로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모르는 타락한 인간의 모습은 교육이라고 하는 영역에서 그 죄악 됨을 가장 극명하게 노출시킨다. 하나님을 모르는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 자기 행위를 통해서 의롭다 함을 증명하고자 한다. 이것이 모든 철학이 추구해온 바 인간의 자기 정당화 작업이다. 인간은 스스로 의롭다 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자기 성장이라는 교육을 의존한다. 이런 의미에서 철학은 교육이라는 활동을 통해 인간의 자기 의를 증명하고자 시도해 왔다. 이런 인간의 허탄한 시도는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를 성숙시킬 수 있다고 간주할 뿐 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다고 하는데서 오만함의 극치를 드러낸다. 요컨대 하나님을 역사와 교육의 주관자로 인정하지 않는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가 자기 교육을 통해 의로워 질 수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의의 실현을 도울 수 있는 존재로 가정한다. 기독교 교육학은 이런 세속적인 교육학의 인간 중심성의 오류를 폭로하고 근원적으로 비판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존의 기독교 교육학은 오히려 세속의 기독교 교육학의 인본주의적인 이념적인 전제와 논리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성령론의 취약- 교육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분명하게 증거 못함

현존 보수신학의 기독교 교육학이 인본주의화 되는 또 하나의 결정적인 문제점은 성령론의 취약점에 있다. 구속사적 예정론에 치우쳐 있는 16세기 개혁신학은 성령론에 있어서도 인간 구원 중심적인 논리에 함몰되어 있었다. 즉 성령은 예수를 통해 이루어 놓은 인간의 구원을 각 사람에서 적용하는 차원에서 논의되고 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인간 중심적인 성령론에 머무르고 있다. 이 때문에 성령의 사역을 하나님의 영광의 선포라고 하는 하나님 중심적인 차원이 탈락되어 있다. 성경이 말하는 성령은 근본 하나님으로서 자신의 영광의 선포를 위해 일하신다. 인간의 구원의 적용이라는 것은 그 사역의 부분에 해당하는 일이다. 기독교 교육학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서 오시고 진리를 깨달아 하나님을 배워가게 하시는 주권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으신 분이시다. 오순절주의자들의 오해처럼 성령은 인간의 요구에 의해서 오신 분이 아니시다. 언약성취사적 성경신학적 입장에서 보면 성령은 만세전의 작정에 근거하고 구약의 언약과 예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오신 진리의 영이시다.(요) 성령은 약속대로 오시고 성도들로 하여금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통해 하나님이 여호와라는 진리를 배워 깨닫게 하시는 사역을 통해 교회를 세워가게 하시는 절대적인 주권자이시다. 이 점에서 볼 때 기독교 교육의 주관자는 오직 성령하나님 한 분이신 것이다. 기독교 교육학에서 인간이 감히 교육의 주관자에 오르려는 것은 성령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어리석은 일이다.
요컨대 현존 기독교 교육학은 신학의 취약성, 특히 신론의 성경적인 미정립으로 말미암아 교육의 주관자로서의 하나님의 주권을 간과 혹은 약화시키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그로 말미암아 성도의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신앙 교육의 문제에서 신학적인 왜곡과 인본주의적인 관점의 침투를 허용하고 말았다. 따라서 보수신학이 가장 중시하는 교의신학은 신학교에서 삶의 현실과는 무관하게 앙상한 이론으로 전달되고 있으며 삶의 신앙 교육 현장에서는 인본주의적인 교육이론이 난무하게 되는 문제점을 초래하고 말았다. 신학에서 올바른 이론적인 지원을 받을 수 없는 기독교 교육학자들은 이제 일반적인 세속 교육이론을 기웃거리면서 이론적인 근거를 찾아볼려고 하는 기현상을 낳게 되었다. 이것은 최악의 악순환으로 이어지게 된다. 신학의 왜곡과 미정립이 신앙교육이라고 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세속 철학과 교육이론의 침공을 허용하는 문제를 야기하고 말았다. 이제 교회와 삶의 현장에서는 교의신학자의 발언의 입지는 점차 좁아지고 있고 점점 인본주의적인 이론을 끌어 당겨 교육이론을 정립하고자 하는 기독교 교육학자들의 주장과 발언이 강해지고 있는 것이다.


3) 교육의 주관자에 대한 성경신학적 관점

언약 성취의 하나님만이 교육의 주관자

성경신학에 의하면 영원한 작정에 근거하여 언약대로 성취하시는 하나님만이 교육의 주관자이시다. 인간 교사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종속된 도구적인 존재일 뿐이다. 언약 성취사적 성경신학에 의하면 하나님은 만물과 만사의 원인자이시고 섭리자 이시다. 특히 하나님의 섭리의 핵심에 해당하는 인간 교육은 전적인 하나님의 주관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택한 성도의 입장에서 보자면 하나님의 하시는 모든 일이 바로 하나님을 바르게 배워나가게 하시려는 섭리로 귀결된다. 그러므로 교육의 주관자를 말함에 있어서 인간 교사는 하나님의 교육적인 섭리와 활동에 있어서 너무도 지극히 한 부분에 해당하는 도구적인 존재일 따름이며 하나님이 친히 절대적으로 교육을 주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위대한 영광을 가르쳐 주기 위하여 만물을 통해 자신의 신성과 능력을 드러내었다.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라고 한다. 그러나 타락한 인생은 그것을 볼 수 있는 안목을 상실했다. 그것을 타락한 인생에게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기 위하여 언약대로 그리스도를 보내시는 특별계시의 사역을 하신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 교육학의 핵심내용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교육의 주관자가 되셔서 하나님을 택한 백성으로 배워가도록 하시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교육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관하심과 치밀하신 준비 그리고 어김없이 정해진 코스를 거치면서 이루어진다.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교육적인 절대 주관하심을 알게 되면 어느 누가 감히 교육의 주권에 인간이 끼여들려고 하는 허탄한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인간이 교육의 주권을 가지고 있음을 전제하는 세속 교육학은 언약 성취를 통해 교육적 섭리를 이루시는 하나님을 모르는 어둠의 발상으로부터 말미암는다. 그리고 현대 기독교 교육학에서 교육의 주관자로서의 하나님을 중시하지 않는 곳은 그만큼 성경이 증거하는 교육적 주관자로서의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지 못하는 신학의 미숙과 왜곡으로부터 말미암는 결과이다. 성경신학적인 기독교 교육학은 교육의 자리에서 잊혀진 하나님의 교육적인 주권의 회복과 새로운 강조를 통해 성경 전반에 나타난 하나님의 절대주권적인 교육적 섭리를 부각하는데 일차적인 과제가 있다고 하겠다.

(나) 신약에 나타난 교육의 주관자

예수님을 통한 교육적 주관.
예수은 인간의 죄성을 걸머지시고 오신 인간의 아들이시지만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모든 주권을 가지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을 가지시고 그가 하시는 모든 일들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계시하신다. 즉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역 하나 하나가 모두 하나님을 가르쳐 주시려는 의도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예수님은 자신이 속죄의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중풍 걸려 들것에 실려온 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 라고 말하지 아니하시고 “네 죄가 사하여 졌느니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눅 5:). 이런 발언이 바리새인들에게는 분을 일으키실 줄을 알지만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그런 말씀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 오심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이는 더 나아가 하나님이 언약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여호와 이심을 가르쳐 주시려는데 있다.
예수님의 교육의 주관권은 제자들을 부르시는 방식에서도 명백하게 나타난다. 예수님은 교육의 주권을 가지신 분으로서 제자들을 선택하고 버릴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계신다. 어떤 서기관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따라가겠다고 자신의 의지를 표명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것이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그 제의를 거절하신다(마8:20). 반면에 제자 중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라고 말하자 예수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면서 강권적으로 당신을 따라오게 하신다(마8:21-22). 이를 통해 볼 때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하나님의 복음을 들으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전적인 예수님의 주권에 달려 있는 것이다. 오늘날 복음서에서 제자도를 강조하는 학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갖추어야할 자세와 결단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인본주의적인 이해이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제자들의 결단과 자세 달려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전적으로 예수님의 교육적 주권에 달린 것이다.

예수님의 교육 주관권은 마태 복음의 마지막 부분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일반적으로 예수님께서 하신 마태 복음의 마지막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신 복음 전도와 가르침의 지상 명령으로 이해한다. 이때 지상 명령이라는 의미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명령하시고 그 전도의 사역을 받아 수행하는 것은 인간 제자들의 책임으로 부각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의 교육과 전도의 주권을 너무도 만홀히 여기는 인본주의적인 발상이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 것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8-20)
위의 성경 인용문을 잘 분석해 보면 일반적인 이해가 얼마나 잘못 되었는가를 확인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이 말씀이 제자들이 행해야하는 지상 명령으로 간주되는 것은 18절의 말씀 즉 먼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예수님에게 주어져 있다는 것을 철저히 간과하는 오류이다. 지금 우리의 논의와 관련시킨다면 우주 만물과 역사뿐 만 아니라 택한 백성들에게 진리를 가르치고 깨닫게 하는 교육적인 권세가 모두 예수님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나아가서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것은 그들의 능력과 지혜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교육적인 권세에 붙들려 쓰임을 받는 도구적인 존재임에 불과하다. 바울의 표현대로 하자면 그리스도의 종일뿐이다.
이것에 대한 분명한 이해는 기독교 교육학의 정립에 있어서 엄청난 중요성을 가진다. 이는 교육의 주권이 인간에게 주어져 있느냐 아니면 예수님이 가지고 있느냐 하는 심각한 문제이다. 이 지점에서부터 철저히 인본주의적 로만 카톨릭과 올바른 개신교회가 갈라진다. 카톨릭 교회는 이층 교회관으로서 가르치는 교회(교직자들의 교회)와 그로부터 지배를 받는 배우는 교회(평신도 교회)로 양분된 교회관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하나님만이 가지고 있는 교육의 주권과 자리를 찬탈하려는 거짓 음모를 자행하는 자들이다. 올바른 성경적인 교회관은 결코 그러한 이분법적인 계급적인 교회관일 수가 없다. 그리고 인간 교사에게 교육의 주권을 맡긴다는 것이 얼마나 신학적으로 빗나간 발상인지 모른다. 교육의 주권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가지고 계신다. 교회에서의 목사는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교육적 주권아래 놓여져 있는 존재이며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가르칠 뿐이다. 실제 교사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주권자이신 하나님이시고 보이는 인간 목사는 하나님으로부터 가르침의 은사를 부여받아 일하는 조교 혹은 종으로서 쓰여질 뿐이다. 이 점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성경적인 교육을 정당하게 이해할 수 없다.

성령하나님을 통한 교육

교육에 대한 예수님의 주권은 사도행전에서부터 계시록까지는 성령 하나님의 사역으로 이어진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말기에 자신이 제자들과 함께 있는 것 보다 가는 것이 더 났겠다고 하시면서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약속하셨다.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말씀이 기억나고 생각나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은 세상에 속한 육적인 내용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신령한 진리이므로 이것이 깨달아 지는 것은 인간적 육신의 지혜로는 불가능하며 오직 성령의 사역으로라야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승천하신 뒤 하늘의 신령한 가르침을 이루어 가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보내주시기로 약속하신 것이다.
오순절 때 성령은 약속한대로 오셨다. 그 이전 제자들은 예수님으로 부터 하늘의 신령한 진리를 듣기는 했으나 참으로 확신에 이르는 믿음을 가지지 못했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고난받고 십자가에 죽으실 무렵 모두 예수를 부인하고 흩어져 버렸다. 부활하신 후 그들에게 찾아갔었으나 여전히 의심을 하는 자도 있었다(마28:17) 그러나 성령이 오신 후 상황은 완전히 역전된다. 의심이 확신으로, 두려움이 담대함으로 바뀌게 되었다. 성령이 오신 이후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깨달아 지기 시작한 것이다. 복음서에 나타나는 제자들의 모습과 사도행전에 나타난 제자들의 모습은 전혀 다르다. 일종의 교육적인 혁명인 셈이다. 모름지기 교육은 사람을 바꾸는 일이다. 미숙한 자를 성숙한 자로, 땅의 것만을 생각하는 자를 하늘의 것을 소망하는 자로 변화시키는 것이 기독교 교육의 구체적인 내용이다. 도대체 이 일을 누가 주관하셔서 이루시는가?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드로의 놀라운 변화, 그리고 사도 바울의 극적인 개종 사건은 인간의 사역에 의한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약속대로 오신 성령 하나님께서 진리를 깨닫게 함으로 이루시는 교육적인 사역의 결과이시다.
만약 성령 하나님의 주권적인 교육의 사역을 전제하지 않으면 사도행전 이후의 바울 서신은 모두 인간적인 서신에 다름 아닌 것이 된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기록하게 하실 뿐 아니라 기록된 성경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사역을 하신다. 이것이 성령의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사역인 것이다. 신약의 전체 흐름을 보면 성령 하나님께서는 세우신 교회를 스스로 성장하도록 버려 두시지 않는다. 성령은 교회를 설립하도록 하실 뿐 만 아니라 세워진 교회가 성장해 가도록 인도해 가신다. 이때 교회의 성장이란 외형적인 성장이 아니라 속사람의 성장이다(엡3:). 속사람의 성장은 인위적인 방법에 의해서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성령께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진리의 말씀을 먹여 키울 때 가능하다. 또한 성령은 양육받아 성장해 가는 교회로 하여금 무장케 하여 비진리와 더불어 투쟁하게 하시며 마침내 승리하도록 역사하시는 것이다.

논의의 결론

이 절의 논의와 결론을 정리해보기로 한다. 이 절은 기독교 교육의 주관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라는 심각한 질문을 답하려는 것이다. 세속 교육학은 인간 자신을 교육의 주관자로 간주하며 스스로 자기 교육을 통해 인간 삶의 존재의미와 가치를 확보할 수 있다고 하는 그릇된 가정을 가지고 있다. 특히 이 절에서 소개 분석한 포스트 모더니즘의 선구자인 니체와 듀이에게서 엿보이는 교육 사상은 철두철미 반기독교적이다. 즉 신이 없이도 인간은 자기 치유와 성장의 가능성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음을 변증하고 있다. 이들의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은 현금의 인본주의적 세속 학문과 사상, 그리고 삶의 방식의 근원적인 뿌리와 원천이 되고 있고 특히 최근 부상하는 동양사상과 잘 동조하면서 반기독교적 연합 전선을 구축하는 중이다.
그렇다면 현존 기독교 교육학은 이런 세속적인 교육사상을 본질적으로 비판하고 성경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가? 문제는 전혀 그렇지 않는다는데 그 심각성이 있다. 현존 기독교 교육학은 그것이 토대로 하는 신학의 혼미와 지엽성으로 말미암아 마땅히 주장하여야할 교육 주관자로서의 하나님에 대해 체계적으로 밝히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하나님보다도 인간 교사의 교육 주관을 더 강조하고 있는 실정이다. 구속사적 신학이나 자유주의 신학에 토대를 두고 있는 현존 기독교 교육학은 이제 일반 교육이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이중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는 성경적인 기독교 교육학이 올바르게 정립되고 있지 못하다고 하는 가장 결정적인 증거이다. 신학의 정체 혼미는 이제 일반 세속학문의 침공을 허용하고 만 것이 된 것이다. 일반 세속학문을 근원적으로 비판하고 기독교적 정체성과 우월성을 드러내어야 할 신학이 오히려 일반 학문의 논리와 방법론을 차용하는 거지학문이 되고 만 것이다. 철학의 음모와 타락성을 비판하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장 고상하게 생각한 바울의 놀라운 긍지와 신앙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오늘날 신학의 현주소이다. 이런 빈곤하고 왜곡된 신학에 근거하는 현존 기독교 교육학은 교육의 주관자로서의 하나님 증거에 실패함으로 기독교 교육학의 정체성에 근본적인 문제를 지니고 있다.
이런 문제점을 성경신학적인 기독교 교육학은 예리하게 의식한다. 그리하여 이론의 성경적인 정립을 위하여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교육의 주관자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집요한 강조와 새로운 자리매김이다. 인간 교사는 결코 신앙 교육으로서의 기독교 교육의 주관자가 결코 될 수 없다. 히브리서의 논법을 빌리자면 자신의 죄문제만으로도 허덕이는 존재가 어찌 타인을 신앙을 성장시키는 영적 교육을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기독교 교육의 핵심은 하나님을 배워가게 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 일은 도무지 인간이 주관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인생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인 하나님을 배워가게 하는 일은 전적인 하나님의 사역이시다. 이 점에서 교육의 주관자가 언약성취의 사역을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강조하는 것이다. 인간 교사는 바울이 그렇게도 강조한대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교육사역에 쓰임을 받는 도구적인 실행자일 뿐이다. 다음절에서는 하나님의 교육적 주권의 장중에 붙들려 있는 교육의 실행자로서의 의미와 자리매김을 검토하고자 한다.




2. 기독교 교육의 도구적 주체: 인간 교사

2.1 세속적인 교육관과 근본적인 차별화

인간이 교육의주체

기독교 교육에서의 인간 교사는 어떤 존재이며 그의 위상은 어떻게 자리매김 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의 교육적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세속 교육학이 상정하는 교육의 주체로서의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과는 근원적으로 달리 이루어 질 수 밖에 없다. 세속 교육학은 인간 그 자체를 교육의 주체로 상정한다. 이는 하나님의 역사 지배와 교육적인 주권을 모르는 필연적인 결과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속의 모든 교육 실제에서는 인간의 교육 가능성을 전제하고 인간 스스로 자신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인도해 갈 수 있음을 가정하였다. 불교에서는 모든 인간에게 진리를 터득할 수 있는 불성이 있어서 스스로의 노력과 수련에 의해서 욕망으로부터 해탈의 가능성을 주장해 왔다. 이 점에서 불교는 철두철미 인간을 교육의 주체로서 상정한다. 불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바람직한 변화 과정으로서의 교육을 인간의 인간에 의해 인간을 위한 작업으로 간주해 왔다. 인간 스스로가 자기의 바람직한 변화를 도모할 수 있다고 하는 인본주의적인 교육관의 극치이다. 인간의 자기 완성을 목표로 삼는 유교 역시, 불교와 방불한 교육 원리와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 공자는 인간의 자기교육의 가능성을 무한히 신뢰하였다. 소인으로서의 인간이 부단한 자기 극복의 교육적 수련에 의해서 예법과 포괄적인 실천 능력을 구비한 군자로서의 인간으로 변화 될 수 있음을 역설하고 평생에 걸쳐 교육적인 사업에 투신했다. 공자 역시 두말할 나위 없이 인간이 교육의 주체임을 천명하는 인본주의적인 교육관을 가지고 있었다.
서양으로 눈을 돌려 교육의 주체를 고찰해 보아도 과정적인 설명의 방식이 다소 상이할 뿐 인간 자체를 교육의 주체로 상정하는 인본주의적인 성격은 동일하게 드러난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이 보편적인 진리를 파악할 수 있는 이성을 가진 존재로 간주하였고 그 이성의 계발을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았다. 이른바 서양 합리주의 교육관의 아버지가 된 것이다. 소크라테스 혹은 그의 충직한 후계자 플라톤이 상정하는 이성의 본질은 단순히 계산적인 의미의 기술적인 이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이성관은 대단히 종교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도덕적인 실천 능력까지 함축하고 있다. 인간의 이성은 그 자체로 자기 구원의 능력을 지니고 있는 종교적인 의미를 포함한다. 즉 이성의 계발을 통해 전 우주의 원리의 터득과 더불어 인간의 진정한 자기 발견과 성장이 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그런 이성의 능력의 계발과 도야를 위해 교육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이때의 교육은 철두철미 본질적으로 자기 교육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부단한 자기 성찰을 통해 이루어 진다고 보았다. 여기서도 교육의 주체로서 이성을 가진 인간이 부각되는 것이다. 이로써 서양 철학의 대부격인 그들 역시 인간의 자기 교육은 인간 스스로의 잠재적인 가능성인 이성의 작동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하는 인본주의적인 교육관을 견지하고 있었다.

인간은 과연 교육의 주관자로서의 주체인가? 성경적인 입장에서 볼 때 이는 어불성설이다. 성경에 의하면 인간은 타락한 이후 자신의 진정한 존재이유와 목적인 하나님의 영광을 알지 못하는 죄인이 되었다. 인간이 죄인이라는 말은 어둠의 권세아래 놓여져 있다는 것이며, 따라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자기 구원과 계발의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는 것은 뜻한다. 타락한 죄인으로서의 인간은 하는 일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지 못하고 자기영광과 자기자랑을 위한 어리석음만을 추구하는 존재인 것이다. 성경은 이를 일컫어 죄의 종노릇하는 존재라고 한다. 종은 자유로운 주체가 아닌 것이다. 종으로서의 죄인은 전적으로 어둠의 권세의 장악아래 놓여져 있으며 스스로의 의식으로 자신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실상은 어둠의 권세가 배후에서 조종하는 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죄인으로서의 인간 존재의 실상이다. 이러한 점에서 세속적인 교육관이 가정하는 자율적인 존재로서의 인간관과는 전적으로 상이하다.
이런 인간의 존재를 사실로 받아들이게 되면 인간을 교육의 주체로 설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부당하다. 좀더 근원적으로 말하자면 타락한 죄인에게는 진정한 의미의 교육이라는 말을 쓰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물론 이때 진정한 의미의 교육이라는 것은 기독교적인 의미를 말하는 것이며 이는 하나님을 배워감으로써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의 성숙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의 기독교적 교육의 수행은 타락한 인간으로는 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를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를 분명히 하는 것은 기독교 교육학의 성경적인 정립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며 이 지점에서 세속적인 교육학과는 완전히 갈라지는 분기점이 된다. 세속 교육학은 인간 스스로 자신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형성시켜갈 수 있음을 가정하지만 기독교 교육학에서는 그런 가정을 부정한다.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인간은 아담 타락이후 하나님을 배워가는 바람직한 교육성을 완전히 상실했다고 본다. 타락한 인간은 기독교적으로 볼때 철두철미 반교육적인 존재가 되고 만 것이다. 즉 하는 일 마다 하나님을 부정․배반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2.2 교회 절대주의적 교육관의 오류

교회의 직임자를 교육의 주관자로 간주하는 카톨릭의 오류

기독교 교육에서 교육의 주체를 고려함에 있어서 또 하나 밝혀야 할 중대한 그릇된 관점이 있다. 그것은 기독교 교육의 주체를 교회의 직임자로 보는 경우이다. 특히 교회 직임자 중 목사나 교사들을 교육의 주체로 간주하는 오류이다. 이것의 대표적인 경우가 카톨릭 교회에서 보여진다. 즉 카톨릭 교회에서는 교회의 직임자인 교황이나 신부에게 교육의 주권을 완전히 위임한다. 이 글에서는 교회의 직임자 혹은 전문 사역자들을 기독교 교육의 주체로 간주하는 입장을 ‘교회 절대주의적인 교육관의 오류’ 라고 부르고자 한다. 이는 앞 절에서 밝힌 세속적인 교육관과는 달리 그 문제점을 지적하기가 그리 쉽지 않기에 더욱 주의를 요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노골적으로 인본주의적인 성격이 노출되는 세속적 교육관과는 달리 하나님의 영광 혹은 교회를 위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교육의 주권을 사용하기 때문에 그 문제점을 밝혀 내기가 그리 용이하지 않다. 성경은 이런 현상을 두고 말하기를 사단이란 언제나 광명한 천사의 모습으로 등장한다고 하는 것이다.
카톨릭 교회가 성경의 가르침과는 전적으로 배치되는 비진리의 허구 집단임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오랜 기간 동안 무너지지 않고 공고한 조직과 일사 분란한 통솔의 면모를 유지해온 비결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카톨릭 교회가 나름대로의 진리성과 그 진리에 기초하는 세련된 조직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간주한다. 그러나 그것은 참으로 오해에 불과하다. 카톨릭 교회의 지배력의 원천은 진리의 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변질된 복음 즉 도덕주의화된 교리를 주입시켜가는 교육의 방식에 있다. 인간을 지배하는 최고의 방법은 물리적인 힘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정신을 사로잡는 교육의 방식을 통해 이루어진다. 즉 절대화된 신념체계나 도덕 관념을 교육의 방식을 통해 주입하는 것이다. 물론 이때의 교육은 원칙상 교육이 아닌 세뇌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들은 교회를 계급적으로 이분화한다. 즉 가르치는 교회와 배우는 교회로 양분하고 가르치는 교회 즉 교회 교육의 주체를 사제집단(priesthood)으로 간주하고 나머지 평신도(layman)를 배우는 교회라고 명명했다. 교육 주체인 신부들에게 권위가 부여되고 배우는 자들에게는 비판이나 의심이 허용되지 않는다. 이는 얼핏 보면 그리 문제가 없어 보인다. 바울도 얼마나 성도들을 가르치는 일에 종사 해 왔으며 그의 제자 격인 디모데에게 늘 배우라고 권면해 오지 않았던가? 성경의 이런 내용을 하나님 중심으로 깊이 있게 읽어 내지 못하면 카톨릭 교회의 이층 교회관, 즉 가르치는 집단과 배우는 집단의 계급적인 구분이 지니는 논리의 허구를 밝혀 낼 수가 없다.

교회 자체를 절대적 가치로 간주하는 오류에서 기인됨

교회에서 직임자 인간을 교육의 주체로 간주하는 오류에 빠지는 것은 바로 교회 자체를 절대적인 가치로 보는 교회절대주의의 매우 그릇된 가치관 때문이다. 이 가치관은 명분상 매우 그럴 듯해 보이기 때문에 그 오류를 밝혀 내기가 쉽지 않고 그 만큼 그 영향력이 교회사에서 오랬동안 지속되어 왔다. 교회 절대주의자들은 교회를 위한다는 미명아래 그 교회를 통해서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려는 것이다. 이는 가장 교묘한 인간의 자기 영광의 추구 방식이다. 카톨릭 교회와 모든 종류의 이단적 교회를 보라. 그들은 언제나 신의 영광과 교회를 위한다는 명분을 지니고 있고 그 명분아래 자신들의 실리와 유익을 도모한다. 교회를 위한다고 하는 그럴 듯한 명분을 이용하여 자신들을 교육의 주체 자리에 슬거머니 올려놓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으로 교회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되신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교회를 유린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교회란 무엇인가? 성경이 말하는 교회는 그것 자체가 목적으로서의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계시하는 방편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관아래 있다. 모름지기 절대적인 가치는 하나님 영광 그 자체 뿐 이다. 그러므로 성경신학적인 입장에서는 볼 때 신앙인에게 유일하고 절대적인 가치는 교회의 설립과 성장 그리고 투쟁과 승리의 전과정을 거치면서 드러나고 있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영광을 배우고 깨달아 경외하는 것이다. 이처럼 교회 생활이라는 방편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배워가도록 주권적으로 이끌어 가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신 것이다. 이런 영광스럽고 가치로운 일을 어찌 인간 교사가 주체적으로 할 수 있단 말인가? 성경신학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교회의 설립과 성장도 그 자체로서 목적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성경적인 교회관을 전제로 할 때 그런 교회를 세워가도록 쓰임을 받는 인간 교사는 당연히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교회를 섬겨가게 될 뿐 교회의 성도들위에서 군림하는 교육의 주체가 결코 될 수 없는 것이다.

머리되신 그리스도에 대한 무지로부터 말미암음

또 하나 교회 절대주의자들이 교육의 주체를 인간 직임자로 간주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가 직접 머리가 되어 교회의 지체들을 다스리고 인도하고 있는 신령한 교회를 모르는 무지로부터 말미암는다. 그들은 제도적인 교회를 교회의 전부로 간주한다. 그리고 제도의 직임자가 제도로서의 교회를 다스려가는 것으로 간주하고 그때 직임의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그러한 대표적인 예가 전술한대로 카톨릭 교회이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교회를 가르치고 다스리는 권위를 위임받았다고 간주한다. 이로부터 교회 직임자를 교육의 주체로 간주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교회 타락과 탈선의 근원이다. 성경은 가르치고 다스리는 권위를 인간 직임자에게 위임해 주었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성도를 절대적으로 가르치고 다스리는 권위와 힘은 하나님 자신 혹은 말씀 그 자체에 영원히 있다. 따라서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의 직임 자체에 권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직임자가 전하는 말씀이 권위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만약 직임자가 말씀을 올바르게 증거하지 않는다면 그 직임은 정당화 될 수 없다. 이 점을 분명히 하지 않을 경우 현상적으로 볼 때 교회의 지도자로 자처하는 직임자들이 교육의 주체로 부각되거나 스스로 교육의 주체로 착각하기가 너무도 쉽다.
카톨릭주의자 혹은 교회제도주의자들의 그릇된 발상은 다음과 같은 명제로 요약된다. 즉 “인간이 말씀을 가지고 교회를 가르치고 다스려 간다” 이다. 이 명제에 의하면 인간이 교육의 주체이고 말씀은 주관자로서의 인간의 손안에서 요리되는 교육의 자료로 전락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주객이 완전히 전도된 오류이다. 로고스로서의 말씀은 인간의 수중에서 요리될 수 있는 도구가 결코 될 수 없다. 로고스로서의 말씀은 본질적으로 하나님 자신을 의미하는 것으로서(요한1:1-2) 그것은 영원한 생명과 빛을 소유하고 있다. 도무지 이러한 말씀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하게 될 때 교육에 대한 교회제도주의자들의 이해가 얼마나 그릇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실제 교회제도주의의 대표격이 되는 카톨릭주의자들은 말씀의 내용을 변질시킨 교리를 피교육자인 평신도들에게 주입시킴으로써 말씀을 자신들의 통치와 교육의 도구로 사용한다. 그러나 그러한 말씀에 대한 이해는 이미 성경의 가르침을 전적으로 벗어난 것이다. 다시 확언컨대 영원한 생명이신 말씀은 인간들의 작위적인 이용물이 결코 될 수 없다. 그 말씀은 만물을 창조하고 지금도 섭리하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으며 말씀의 능력이 교회를 다스리고 주관하신다. 그러므로 인간이 말씀을 가지고 교회를 가르치고 다스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역으로 “그 말씀 즉 하나님이 인간(말씀의 사역자)를 종으로 삼아 교회를 가르치고 다스려간다” 라고 말해야 한다. 이 점에서 교회제도주의자들은 성경의 가르침과는 정반대의 잘못된 사상을 가지고 있다.

이원론적 사고방식으로 말미암음

교육의 주체를 교회의 직임자로 간주하려는 시도와 관점은, 기독교 교육을 보이는 제도적인 교회의 틀 안에서만 생각하는 교회중심주의의 편협된 시각으로부터 말미암는다고 위에서 이미 지적했다. 이 문제점을 다른 측면에서 좀더 밝혀 보기로 한다. 교회 중심주의자들에 의하면 교회와 세상은 이원적으로 구분되어있고 교회는 선을 대표하고 세상은 악을 상징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배워가는 신앙 교육은 교회 안에서 이루어 지는 것으로 간주하고 세상은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는 곳이라는 부정적인 가치평가를 한다. 제도적인 의미의 교회를 기독교 교육의 중핵 혹은 유일한 근거지로 삼는 이른바 교회중심주의적 시각에서는 당연히 교육의 주체로서 보이는 인간 지도자가 교육의 주체로 등장하기가 너무도 쉽다. 그러나 진정한 기독교 교육은 교회중심주의의 편협성을 넘어선다. 물론 이 말이 교회의 중요성이나 혹은 교회 교육의 중요성을 조금이라도 훼손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져서는 안된다. 성경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배우며 더 나아가서 같은 진리의 깨달음안에서 이루어지는 성도의 교제를 통한 교회 교육이 우리의 신앙 교육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함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교회당에서의 교육이 하나님께서 성도를 교육하시는 유일한 방식이 아님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교육의 주체라는 말은 하나님의 모든 통치 영역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고 그 모든 만물과 만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르치고 계신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교육적인 섭리의 중핵에는 교회가 놓여져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교회의 성도들을 교회 안에서만 교육하시는 것이 아니시다. 하나님의 교육은 제도적 교회를 포함하는 모든 세상의 전영역에서 자기 백성들을 교육시키고 훈련시켜 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교육에 있어서 교회당은 온실, 혹은 피난처와도 같은 위로와 격려가 있는 이론적인 수준의 교육 장소인 반면, 광야 같은 세상의 삶은 거칠고도 강인한 훈련이 이루어지는 실제적 수준의 교육장소이다. 둘다 하나님을 배워감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하다. 이런 삶의 전 영역에서의 기독교 교육을 생각하게 되면 자연히 교육의 주체는 제도적 교회의 직임자가 될 수 없음이 자명해 진다. 요컨대 삶의 전 영역을 포괄하는 기독교 교육의 명실상부한 교육의 주체는 하나님 자신이시다.


2.3 성경신학적 입장에서 본 인간교사: 교육의 도구적 주체

기독교 교육학을 포함하는 신학의 어떤 하위 주제이든지 간에 성경신학적인 관점에서 조명한다는 것은 그 하위 주제를 언약과 성취라는 하나님의 기본 계시적인 구도 안에서 자리매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될 때라야 신학의 어떤 주제에 대한 의미나 성경의 사건 혹은 인물에 대한 의미의 해명이 하나님 중심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신학의 모든 하위주제와 성경의 사건과 인물들은 모두 하나님이 언약대로 성취해 가시는 여호와이심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적인 방편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그 모든 방편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선포하려는 것이 목적이다. 목하 검토하고자 하는 인간 교사의 신학적인 의미해명도 마찬가지의 원리 안에서 이루어 진다. 기독교 교육에서의 인간 교사는 하나님의 언약 성취의 신실하신 역사 섭리 안에서 사용되는 도구로 이해되어진다.

이런 성경신학적인 입장에서 본 인간 교사의 의미는 두 가지 차원으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첫째, 인간 교사는 교육의 주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종 혹은 도구적 주체라는 사실이다. 둘째, 인간 교사는 궁극적으로 가르치는 일을 통해 하나님을 배우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이하에서는 이 두 가지 의미를 상세하게 밝히고자 한다.

2.3.1 하나님의 종과 도구로서의 인간 교사

성경신학적인 입장에 의하면 기독교 교육의 유일한 주관자로서의 주체는 두말할 나위 없이 하나님 여호와 한 분이시다. 인간이 기독교 교육의 주체가 결코 될 수 없다. 인간은 교육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로서의 주체가 될 뿐이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들을 가르치시되 인간 교사 혹은 목사를 부르셔서 자신의 영광을 선포하시는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이다. 인간 교사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주권적인 장중에 붙들여 있는 종으로서 쓰여질 뿐이다. 그것도 자신이 지혜가 있거나 능력이 있기에 하나님이 쓰시는 것이 아니다. 아담 타락이후 모든 인간은 철저히 자기 중심적인 욕망에 사로잡힌 죄인이다. 본래 죄인으로서의 인간은 다른 사람에게 진리를 가르칠 만 한 조건과 자격도 그리고 능력도 있을 수 없다. 그런 죄인을 하나님은 부르시고 은사를 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의 실현을 위하여 변화시켜 사용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교사는 현상적으로 보아 다른 성도들을 가르치는 주체로 등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교육의 ‘주관자로서의 주체’ 가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이 붙들어 쓰시는 ‘도구로서의 주체’ 일 따름이다.

구약의 설명

구약 역사를 통해 신약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인간 교사의 위치와 의미가 무엇인가를 간접적인 방식이지만 분명하게 시사받을 수 있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기 섭리의 도구로 사용하시되 결코 인간의 조건이나 지혜를 보시고 사용하시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인물은 근본적으로 말해서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며 또한 죄악으로 말미암아 결정적인 약점들을 가지고 있도록 하나님은 섭리하신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인간 교사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룩하신 교육적인 사역을 수행함에 있어서 자신의 능력이나 조건으로는 결코 가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증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가 자기 의분으로 애굽사람을 쳐 죽인후 40년 광야에서 낮아질 대로 낮아지게 하신 다음 그를 들어 쓰시는 것이다. 막상 하나님이 불러 쓰시고자 할 때 모세는 자신은 할 수 없음을 고백한다. 그런 철저하게 낮아지게 하시는 과정을 거치게 한 다음 하나님은 모세를 들어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들어 사용하시는 원리이시고 신약시대에 있어서 인간 교사를 교육의 도구적인 주체로 사용할 때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신약에 나타난 인간 교사

신약은 구약과는 달리 인간 교사의 위상과 본질에 대해서 자세하게 증거한다. 신약 역시 성도들을 다스리고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 아버지 한 분으로 증거한다. 영원하신 하나님은 자신을 인간들이 손으로 만지고 확인할 수 있는 방식으로 보여주시기 위하여 구약의 언약대로 그리스도를 인간의 모습으로 보내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일체의 사역은 하나님을 택한 성도들에게 가르쳐 알려주시기 위한 위대한 교육의 사역으로 수렴된다. 말하자면 그리스도는 기독교 교육의 유일하고 위대한 교사인 셈이다. 위대한 교사이신 그리스도는 자신의 복음을 전하게 하기 위하여 제자들에게 교육시키고 구비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복음서의 제자들의 모습은 구약의 인물들에서 나타나는 대로 한결같이 세속적이고 나약한 모습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약속대로 성령이 오신 이후로 그들은 담대한 신앙인으로 변모된다. 그리고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두려움 없이 전하게 된다.

기독교 교육학의 입장에서 정립할 수 있는 성경의 중요 사상은, 인간 교사란 하나님의 주권을 전제로 하는 철저한 종으로서의 자기 정체성 확립이다. 이는 세속에서의 인간의 자기 확립의 방향과는 정반대의 길을 간다. 진리를 모르는 세상은 모두 인간의 주체성을 내세우고 특히 교육에서의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기독교 교육에서는 그와 정반대의 사상 즉 인간의 철저한 종됨을 주장하고 그 안에 진정한 자유와 무서운 신앙의 저력이 담겨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2.3.2 하나님을 배우는 존재로서의 인간 교사

가르치는 사역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배우는 일

이상의 논의를 통해 인간 교사는 기독교 교육의 주체가 결코 될 수 없으며 도구적인 주체로 자리매김됨을 확인 할 수 있다. 여기서 인간 교사의 위치와 의미를 밝힘에 있어서 보다 중요한 차원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인간 교사는 가르치는 사역을 통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를 배워가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교육의 도구적 주체로서의 인간 교사는 주되신 그리스도의 주권에 사로잡혀 가르치는 일을 수행하는 존재로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배우는 존재로서 자리매김 된다. 이 점에서 완전히 세속 교육이나 교회 중심주의 교사관과 완전히 차별화 된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만이 진정 포괄적으로 인간을 가르치는 자이시며 인간 교사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를 통해 부분적으로 가르치는 사역을 수행하지만 그 역시 그 가르치는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도우심을 발견하고 더욱 하나님의 주권적 영광을 배워가게 되는 것이다. 이 점이 기독교 교육의 독특성이며 인간 교사의 위상과 의미를 밝히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이다.

가르치는( 모든) 은사는 하나님의 은혜를 절실하게 배우는 방편

모든 택한 백성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며 하나님을 배워 경외하게 되는 존재이다. 이때 인간 교사도 예외적으로 제외되지 않는다. 모든 성도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배워가기 위해 존재한다고 볼 수 있으며 하나님은 성도로 하여금 그 배움을 갖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지체로 부르시고 교회를 세워가게 하신다. 즉 교회를 세워가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배워가게 되는 것이다. 교회가 세워지기 위해서는 성도 각각의 은사의 발휘를 통해 가능하게 되는데 인간 교사에게는 가르치는 은사를 주심으로, 장로에게는 다스리는 은사를 통해, 또한 집사에게는 봉사하는 은사를 통해 하나님을 배워가도록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의 발휘는 인간의 자아실현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를 세워가기 위한 수단이며 그 수단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더욱 발견하고 경외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부단히 배워가는 바울의 본됨

이렇게 볼 때 인간 교사에게는 가르치는 것이 근본 목적이 아니라 그 가르치는 일의 수행을 통해서 하나님을 배워가는 것이 근본 목적이 된다. 바울은 복음 진리를 많이 깨달은 사도로서 가르치는 일에 헌신하면서도 그는 그 일을 통해 언제나 더욱 하나님을 배워갔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본받으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 빌립보서의 증거는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빌3: 12-17).

배우는 태도는 근본적으로 자신이 죄인임을 알 때 가능

인간 교사로서 바울의 건전성과 진지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바울은 객관적으로 보아 누구보다도 많은 복음진리를 터득한 교사였지만 자신은 언제나 교사로서의 사도 직분의 은혜를 감당하기 어려운 죄인임을 알고 있었다(고전 15:9). 그의 말년에 쓴 편지인 디모데 전서에서는 자신이 사도의 영광스런 직분을 갖게 됨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임을 밝히고 자신은 죄인 중의 괴수임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겸허했고 감격을 잊어버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알면 알수록 더욱 그리스도를 사모하고 배워가는 성장의 과정 중에 있는 자신으로 자리매김함으로써 그를 통해 배운 자들에게 참된 교육적인 귀감이 되었다.

본됨의 성경적 의미--그리스도를 부단히 배워가는 존재

위의 인용한 성경의 본문에서 바울이 자신을 본받으라고 했을 때 바로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를 올바르게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바울 서신 여러 곳에 등장하는 본받으라는 말은 세속 교육에서 말하는 본의 내용과는 천양지차가 있다. 같은 용어를 사용하는 것 같지만 그 용어가 포함하는 개념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 이 점을 예리하게 구분하는 것은 기독교 교육학의 정립에 있어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결국 교육이라는 것은 후진이 선진의 모습을 본받아 닮아가려는 활동을 정의상 한 부분으로 내포한다고 볼 때 그 본받음의 내용과 의미가 무엇이냐가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인간 교사로서의 자기 자신을 추종하라는 말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자신도 여전히 그리스도를 향해 배워가고 있는 존재임을 말하는 것이며 그런 그리스도를 향해 치열하게 달려가고 있는 자신을 본받으라는 것이다.

배우고자하는 열정의 원동력--- 언약 -성취의 성령의 사역

여기서 우리는 다시 언약 성취사적 성경신학의 중요성을 재확인 할 수 있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바울의 치열한 복음 증거와 부단히 진리를 추구하려는 배움의 열정이 예수님의 약속대로 오신 성령 하나님의 전적인 인도에 있다는 사실이다. 성령은 약속의 영이시자 진리의 영으로서 오셔서 성도들로 하여금 진리를 깨달아 가게 하심으로 교회를 세워가신다. 이때 어떤 구체적인 과정을 통하여 교회가 세워지게 되는가 이다. 그것이 바로 진리를 치열하게 가르치고 배워가는 과정이다. 이것 외에는 교회가 세워질 수 없는 것이다. 이때 진리를 배워가고자 하는 갈증과 열망이 필요한데, 이런 고귀한 진리에의 열망를 약속대로 오신 성령 하나님이 주시고 강화시켜 나가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서신에서 무수하게 나오는 진리의 가르침과 배움에 대한 언명들은 모두 인간적인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약속대로 오신 진리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의 성취내용인 것이다.

배워가는 본을 통해( 부단한 성장을 통해) 제자들을 지도하게됨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는 그리스도를 부단히 배워가려는 바울의 그러한 삶의 태도는 그에게 배우는 제자에게 본이 되었고 그러한 본된 삶이 그의 제자 디모데를 올바르게 지도할 수 있었다. 여기서 기독교 교육의 중요한 일면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진리를 이론적으로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본을 통해서 가르친다는 것이다. 교사 자신이 부단히 그리스도를 배워가는 삶이 아니고서는 다시 제자들에게 그런 하나님을 배워가라는 신앙 교육적인 삶을 권면할 수 없는 것이다. 이론적으로 한다고 하더라고 그것은 지속력과 설득력을 가질 수가 없음이 분명하다. 바울은 자신이 평생을 치열하게 하나님을 배워온 여정, 즉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친 삶(딤후4:7) 을 근거로 하여 최후의 유언서와도 같은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부단히 배워갈 것을 힘있게 가르쳤다.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3:14-15)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배움과 가르침은 언제나 상호 연결되어 있어서 올바르게 배우고 확신한 만큼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 교사를 포함한 모든 성도는 하나님을 배움이 근본적인 목적이며 하나님의 인도따라 올바르게 진리를 배워가노라면 진리의 가치를 수호하고 가르칠 수 있게 될 것이다. 바울은 위의 인용문에서처럼 부단히 배워갈 것을 권면한 이후 바로 다음과 같이 말씀을 전파해갈 것 즉 복음을 가르칠 것을 권하고 있다. 즉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진지한 배움의 방식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신앙만이 고난을 동반하는 치열한 가르침을 두려움 없이 해갈 수 있다는 것을 시사받을 수 있다. 요컨대 부단히 그리스도를 배워갔던 바울은 그렇게도 치열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고 더 나아가서 그의 제자 디모데를 올바른 방향, 즉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나아갈 것을 권면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인간 교사는 가르침을 통해서 하나님을 배워가는 존재이며 그런 배우려는 태도와 삶이 가장 강력한 본이 되어 다시 제자를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가르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장의 결론

가르치는 일--놀라운 은혜의 자리

이상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인간 교사로서의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르치는 영광스러운 사도와 교사의 직분을 가진 것이 인간의 조건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줄 알고 있었다. 실제 바울은 여러 서신에서 자신의 인간적인 조건으로는 교사 직분의 수행과 감당이 불가능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교사직분의 수행이 결단코 인간의 조건과 덕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요 또한 인간의 자아 실현의 자리는 더더욱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자리야 말로 너무도 크신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더욱 배워갈 수 있는 복된 자리라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

가르치는 교사--위험한 자리, 그래서 근신하는 자리


그러나 그 자리는 때로는 야고보 사도가 예리하게 지적하는 것(약 3:1) 처럼 자칫하면 매우 위험스런 자리임에 분명하다. 따라서 교사의 사역은 더 큰 심판이 있을 줄 알아 근신과 성찰을 필요로 한다. 말하자면 인간 교사의 자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스럽고도 영광스러운 직임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의 깨달음으로만 가능한 사역이며 은혜의 감격으로만 가능한 자리이다. 그 어떤 인간의 인간적인 지혜나 인위적인 기교와 장난이 통하지 않는 하나님의 엄위로우신 영광이 임재하는 곳이다. 동시에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가장 인간의 죄악과 어리석음이 드러나는 자리이다. 즉 교육을 이용해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하려는 시도가 부단히 있어온 자리이다. 교사의 타락을 통해 드러난 2000년의 교회사가 이를 웅변으로 증거하고 있다. 여기에 인간 교사의 올바른 자리매김에 대한 기독교 교육학적 정립의 중요성이 있다.

가르치는 교사--영광스런 고난의 길, 해산의 수고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가르치는 인간 교사의 사역, 이는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실감있게 배울 수 있는 복된 자리가 아닐 수 없다.!! 여기에 고난의 길을 가게 되는 인간 교사의 보람과 기쁨이 있다. 성령 하나님에게 이끌려 생겨나는 복음의 치솟는 감격만이 인간 교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즐거이 동참하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해 인간 교사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성취의 위대하신 영광이 드러날 것이다. 그 안에 하나님에게 절대적으로 붙들린 도구적인 주체로서의 인간 교사 사역의 의미가 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딤후 1:1)



3. 기독교 교육의 목적


3.1 자아 성장을 위한 세속교육의 인본주의적 성격


세속의 교육---인간의 자기 행복과 영광을 위한 자기성장과 자기완성에 둔다.




3.2. 교회 성장을 위한 교회중심주의의 오류

교회의 영광과 성장을 목적삼는 중세기 교회중심주의의오류

종교 개혁자---이들을 정면에서 비판하고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

재---하나님 중심사상

신학교육---특정 교회 지배 엘리트의 전유물로 변질

기독교 교육의 핵심----신학 교육---신학은 모든 성도의 보편적인 일

그러나, 교회중심주의---기독교교육이 교회자체의 성장과 안전, 교회체제의 유 지와 강화---그 안에 인간의 자기영광이 도사리고 있음

3.3 하나님을 깨닫게 하는 것이 기독교교육의 목적

여기서부터 진정한 자아성장과 교회 성장이 가능
하나님 아는 지식의 풍성함 없이 인간성장과 교회 성장 불가능

1. 인간(신앙) 성장

상상을 초월하는 부요한자--바울---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자, 많은 사람을 부 요케하는자

2. 진정한 교회의 성장

1. 속사람의 강건한 성장--감사와 평안

2. 진지한 동지적인 교제의 풍성함---“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3. 고난가운데 혹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방식(자발적
인대가 지불)을 통해 진리 보수와 전파

4.. 기독교 교육의 소재

하나님 해석이 없는 일반 계시에 국한되는 세속 교육




철학에 근거한 일반 학문(진리) 도덕( 선), 예술( 미), 그리고 삶 일반



기존 신학의 이원론적 입장( 교회 중심주의)


구속사적 해석으로 축소된 성경의 진리


일반 계시의 교육적 가치, 즉 만사와 만물에 드러난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함



성경신학

근본 소재---성경

하나님이 여호와이심-----모든 지식과 지혜의 근본



보조 소재-----일반 계시로서의 학문(진리) 도덕(선), 예술( 미),---비판적인 승화 작업의 필요

학문---세계에 대한 이해를 통해 세계 지배의 어리석음

도덕---인간의 자기 의에 기초하여 행위를 통한 자기 의의 실현 기획

예술---인간의 주관적인 미적 기준에 의한 창조 행위를 통한 자 아 실현



삶 일반---교회적인 삶과 일반적인 삶 전부가 포함됨




5. 기독교 교육의 방법


세속 교육의 방법

주지주의적 방법과 낭만주의적인 방법이 대립


주지주의적 방법----지식을 통한 이성의 발달--지적 개념을 통해 세계 이해하기

객관적인 지식의 추구


낭만주의적인 방법---경험과 감정의 확인을 통해 성장하기

객관적인 지식 보다는 주관적인 경험의 강조


기존 신학의 방법

율법주의

인간 교사가 도덕적인 규범으로 잘못 해석된 율법의 기준에 의해 거룩하게 하려
는 인위적인 방법이 동원됨

예) 영성 훈련


제도주의자( 교권주의자)

제도적인 권위의 동원을 통해 모종의 주장을 주입하려고함


자유주의신학

성경말씀 보다는 타락한 인간 이성에 호소하여 진리를 가르치려는 허탄한 시도


성경신학---하나님 교육 방법

1. 죄악 가운데 가두어 놓으시고 구원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깨닫게 하심


2. 지 정 의의 인격적인 요소를 종합적으로 활용하게 하셔서 성장하게 하심


3. 인간 교사는 객관적인 진리의 권위에 의해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을 거쳐 배우 는 자가 진리의 권위에 설복되어감

4. 객관적인 제도의 과정을 통해 상호 교육이 일어남


6. 기독교 교육의 장


세속 교육

학교 교육에 경도됨


기존의 신학

교회당에 집중됨------삶의 다른 영역의 교육적 의미가 무시됨

성경신학

교회당을 핵심으로 하여 삶의 전 영역에서 이루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