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 상담학 서론

목회상담
목회상담학 서론
2006/10/08 오후 4:10 | 목회상담 | [HEA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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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론

많은 다른 목회자들과 같이 저자도 신학교에서 상담에 관하여 조금 배웠기 때문에 아무런 실제적인 지식도 없이 상담을 시작했었다. 그랬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저자의 첫 목회생활 초기에 이런 일이 있었다. 저녁 예배를 마치고 모든 성도들이 다 돌아간 후에 한 남자만이 머뭇거리며 남아 있었다. 저자는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싶어 하면서 어색하게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갑자기 눈물을 흘리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자는 그때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저자는 그에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가 없었다. 그날 밤에 그는 마음의 짐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그의 목사인 저자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후 한 달이 못되어서 그는 죽었다. 저자는 그때야 비로소 그의 의사가 그에게 임박한 죽음을 알렸다는 사실과 그래서 그가 저자에게 상담하러 왔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저자는 그를 돕는데 실패했다. 그날 밤 저자는 하나님께 유능한 상담자가 되도록 도와달라는 기도를 드렸다.
저자는 향상하기 위한 첫번째 노력으로서, 가능한한 상담에 관한 많은 정기 간행물들을 사기도 하고 빌리기도 해서 열심히 읽었다. 그러나 이러한 책에서 별 도움을 얻을 수가 없었다. 거의 모든 책들은 로저스(Rogers)의 비지시적(non-directive)인 방법을 추진하거나 프로이드(Freud)의 원리들을 주장하고 있었다.
저자는 읽은 것을 해석하려고 노력했었지만 목사인 저자에게는 죄라고 보여지는 것을 ‘질병’이라고 해석해서는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가 없었다. 저자는 그것이 쓸데없는 행동이며 성경적인 방향이 없기 때문에 받아들이기에 적합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저자는 곧 이러한 과정으로 서는 거의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고 귀중한 시간을 낭비할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저자는 EH한 교과서에 제시된 충고의 대부분은 막연한 일반화(一般化)에 불과한 것이며 이러한 것은 구체적인 상담 상황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면 실제로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한 경우의 많은 해석들은 환상적이거나 터무니 없는 것같이 보이는 문학에서 인용되었으며 많은 저자들은 그들의 책이 오직 극소수의 피상담자들에게만 도움을 주었다는 것과 그것도 수개월 후에나 심지어는 수년에 걸친 상담 후에야 그것이 도움이 되었다고 분면하게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저자는 어떻게 그 성과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바른 목회자는 어떻게 상담을 위하여 그토록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었는가? 그것은 시간을 잘 활용한 선한 청지기였는가? 상담자는 과연 그렇게하여 유능한 상담자가 될 수 있겠는가?하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저자는 곧 심각한 문제들을 가지고 있는 거의 모든 피상담자들을 정신과 의사에게 의뢰하거나 주립 정신병원에 맡겨서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시도하는 이러한 상담학 책들에 대해서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결국 이것은 정신건강이 가르치는 것에 맡기는 방법이었다. 실제로 정신적으로 상처를 받은 사람들보다는 더욱 심각한 어려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상담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대한 엄격한 경고가 정신건강 협회(Mental Health Association)에서 출판된 서적들과 팜플렛에 기록되어 있었다.
목회자들은 만일 정신과 의사에게 의뢰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을 크게 해칠 가능성이 있다는 위협을 받아왔었다. 그러나 이 편리한 해결방법이 가지고 있는 한 가지 곤란한 점은 위탁된 사람들이 자주 더욱 나빠지거나 좋아지지 않고 되돌아 오는 일이다. 바로 여기에 중생하지 않은 정신과 의사들에 의해서 실시되는 불신자들의 상담의 문제가 있다. 이것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는가?
저자는 신학교 졸업반때 실천 신학을 공부하면서, 큰 대학 병원의 외래교수로 일하면서 개업도 하고 있는 정신과의사가 가르치는 목회상담 코스에 등록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저자는 그때 자기 자신에게 “자, 드디어 인간의 내면적 심리를 생생하게 파헤치게 되겠구나”라고 말했다. 그러나 2학기 말에 정신과 의사는 그 학급에서 강의를 받는 사람들(거의 모두가 교회의 목회자들이었다) 보다도 상담에 관해서 더 많이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혼란에 빠졌다.
그는 프로이드의 원리에 관하 지식에 철저했으며 그것을 우리에게 열심히 가르쳤다. 그는 학생들이 강의실에 가지고 온 상담 사례를 축어적(逐語的)으로 비평함으로써 프로이드가 한 대규모의 처방을 아낌없이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그의 ‘통찰(洞察)이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이 거의 증명되었으며 그가 단순히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것이 그가 주는 최선의 충고였다.
점차적으로 저자는 맞든 안맞든 상담의 유형에서 벗어나서 즉석에서 성경적인 교훈을 적용시켜 보는 습관에 빠지게 되었다. 놀랍게도 저자는 그 어느 때 보다도 더욱 성공적인 상담자가 되었다. 물론 거기에는 연령과 경험이라는 몇가지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러나 저자는 단순히 하나님이 피상담자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그들에게 말해주는 입장이라는 것을 보다 직접적으로 알려주는 것이 보다 많은 사람을 돕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면 구원을 얻게 되고 열매를 맺게 된다고 하는 성경적인 행동유형(行動類型)을 간단하게 설명하고 추천하라. 사람들이 문제를 일으키기 전에 그들과 마주 앉아서 정직하게 여러 가지 문제를 놓고 상의 하는 것이 목회자인 저자의 입장에서 볼때 매우 중요한 행동이라고 생각된다. 이것은 특히 마태복음 5:23, 24과 마태복음 18:15-18에 비추어 볼 때 그러하다.
상담을 하면서 저자는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같은 충고를하기 시작했는데 어떤 사람들은 보다 많은 도움을 받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런 방법을 사용하든지 저런 방법을 사용하든지 간에 보다 성경적인 목표와 방법은 우연한 양식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저자는 대단히 미숙한 상담자였다.

그런데 갑자기 모든 문제를 보다 정확한 방법으로 직면해야만 하도록 강요를 받았다. 그것은 곧 웨스트민스터신학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실천신학을 강의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이다. 저자가 부탁받은 실천신학 과목 중의 하나는 목회학이었다. 이 과목의 한 부분으로 목회상담에 관한 개론적 내용을 강의해야만 되었다. 저자는 이 문제를 놓고 생각하며 강의를 준비하는데 일년이 조금 못걸렸다. 어디에서부터 강의를 시작해야만 하는가? 절망적인 상태에서 저자는 그 주제에 관련된다고 생각되는 모든 성경 귀절을 주석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거대한 작업이었다.
저자는 성경이 개인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상담하는데 관래서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귀신에 사로 잡힌 미친 사람과 귀신의 관계과 같은 어려운 문제도 있었다. 저자는 시편 31편과 38편, 그리고 51편에 묘사되어 있는 죄악이 정신과 신체 양면에 미치는 영향의 배후에 있는 역동성(力動性)에 관하여 연구하기 시작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야고보서 5:14-16은 어떤 신체적인 질병을 낫게 하기 위해서는 약을 사용하는 것과 꼭같이 죄를 고백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처럼 보였다.
저자는 자신에게 “만일 야고보의 가르침과 같이 사람의 죄악된 행동이 적어도 때때로 신체적 질병의 원인이 된다면 정신적 질병에 관한 비슷한 원인의 가능성은 어떠한가?”하고 자문했다. 야고보는 저자에게 소위 정신적 질병에 직면하는 목회자의 의무에 관한문제를 제기했다. 야고보는 환자들이 적어도 그들의 어려움 중 어떤 것들이 죄로 인하여 생기는지 아닌지에 관하여 심사숙고해서 스스로 질문해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상 이 문제는 곧 야고보가 신체적, 정신적 질병에 관하여 분명히 말하고 있지 않은가?
얼마되지 않아서 저자는 스스로 “정신적 질벼으 즉 대체로 질병이라고 부르는 병이 많은가?” 하고 반문했다. 이 질문은 주로 성경이 죄와 같이 동성애와 음주를 묘사하고 있는데 반하여 정신건강에 대한 문헌의 대부분은 그것들을 “병” 혹은 “질병”이라고 부르는 것에 주목해서 나온 것이다.
성경이 진리라고 믿는 저자로서는 정신 건강에 관한 견해가 알코올 문제와 성(性) 문제의 근원을 법률적인 요인이나 사회적인 요인에서 찾으며 죄와는 거리가 먼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실에 대해서 분명히 잘못된 견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견해와는 정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한 문제의 근원을 인간의 타락한 인간 본성의 부패에 두고 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러한 사상을 확대시켜보면 매우 자연스럽다.
우리는 만일 정신 건강에 대한 문헌이 우울증이나 신경증이나 심지어는 심한 정신병과 같은 다른 문제들을 비슷하게 질병이라고 잘못 분류하는 것은 그릇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일종의 정신병적인 이단이 저자의 머리를 어지럽히기 시작했을 때 저자는 크리스챤 심리학자가 한번 언급한 적이 있는 저서들을 집필한 한 사람의 이름이 떠올랐다. 그 사람은 바로 오 호발트 모러(O.Hobart Mowrer)였다.

저자는 모러가 간행한 「정신의학과 종교의 위기」(The Crisis in Psychiatry and Religion)와 「새로운 집단 치료」(The New Group Therapy)라는 책을 포함한 그의 책 몇권을 읽었다. 이러한 책들은 저자를 놀라게 했다. 모러는 저자의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에 까지 깊은 연구를 하고 있었다. 그는 제도화된 정신의학에 팽팽하게 맞선 도전자였다. 그는 현재의 정신의학적인 도그마가 잘못되었다고 믿는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그는 정신의학이 크게 실패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를 인용했다.
저자는 모러(Mowrer)의 너무나도 분명한 논점에 의견을 같이 했다. 이러한 의견의 일치로 인해서 모러는 그가 심리학 교수로 봉직하고 있는 일리노이대학교(University of Illinois)에서 실시하고 있는 그의 엘리 릴리 펠로십(Eil Lilly Fellowship) 프로그램에 참석하도록 저자를 초청했다. 저자는 일리노이대학교에 가서 여름 기간 동안 모러 교수 밑에서 일했다. 이것은 참으로 저자가항상 감사해야할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두달 동안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저자에게 꼭 필요한 상담 문제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1965년 여름에 우리는 일리노이주 켄카키(Kankakee)에 있는 주립 정신병원가 게일스벅(Galesburg)에 있는 주립 정신병원에서 일했다. 이 두 개의 정신병원에서 우리는 모러와 함께 하루 7시간씩 집단치료(group therapy)를 실시했다. 다른 다섯 사람을 따라서 저자는 한 주일에 5일간씩 그들과 함께 비행하고 드라이브했으며 함께 식사하고 상담하며 토론했다. 저자는 그때에 많은 것을 배웠으며 자신을 모러 학파의 한사람으로 분명히 분류하지는 않지만 그때의 여름 프로그램이 사상의 전환점이었다고 생각된다.
위에서 말한 두 개의 정신병원에서 모러의 방법을 따라서 우리는 “신경증 환자, 정신경증 환자, 정신병 환자”등의 라벨이 붙은 사람들을 보고 이탈된 행동을 고백시키고 개인적인 책임을 지게 함으로써 돕기 시작했다. 모러의 책임에 관한 강조는 그의 방법의 핵심이었다. 모러는 사람들에게 잘못한 사람들(하나님에게가 아니라)에게 ‘고백하고’ 가능한한 배상하는 것을 권고하고 있다.
모러는 크리스챤이 아니다. 그는 심지어 유신론자(有神論者)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해 여름동안 휴머니즘의 문제를 토론했다. 그때 저자는 양심에 관해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하는 특별한 질문과 함께 상담에 관한 성경적인 자료를 연구했다. 그해 여름의 경험은 저자에게 몇가지 커다란 확신을 갖게해 주었다.
첫째로, 저자는 정신병원에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왜 그곳에 있는가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참으로 많은 시간을 보내므로 그들을 알고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어TEk. 왜냐하면 저자가 일리노이주에 있는 두 병원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가 그들 자신의 삶의 문제에 실패한 사람들이었으며 두뇌 손상과 같은 신체적인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단순히 그들의 용서함이 없고 변화되지 않는 죄악된 행동에서 기인된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둘째로, 모든 경험은 저자로 하여금 다시 한번 “성경은 그들에 관해서 어떻게 하라고 말하며 그들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라고 하는가?”하고 묻도록 성경으로 인도해간다. 저자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정신의학과 종교의 위기」(The Crisis in Psychiatry and Religion)라는 모러의 책을 읽고 땅이 흔들이는 것과 같은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모러는 이 책에서 특별히 학습 이론으로 비약적인 발저을 했으며 미국 심리학회(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회장을 역임했던 조사 심리학자를 언급했으며 정신의학 분야 전반에 걸친 도전을 했다. 그는 EH한 정신의학의 실패를 선포했으며 근본적인 프로이드 학파의 전제를 논박하려고 노력했다. 용감하게도 그는 보수적인 크리스챤들에게도 역시 도전했다. 그는 “복음주의적 종교가 자기의 기득권을 심리학적인 죽 한 그릇에 팔았는가?”라고 반문했다.

특히 정신병의 개념이 유래된 의학적 모델(medical model)을 반대했다. 「위기」(crisis)라는 책에서 모러는 이 모델이 피상담자들에게서 어떻게 책임을 제거시켜 주는가를 보여주었다. 독감에 걸린 것이 비난할만한 사실이라는 것을 생각하기 이전에 그의 가족들은 동정적인 이해로 그를 대하며 그를 고려해준다. 이것은 그들이 그가 자기의 병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는 아무런 잘못도 없이 밖으로부터 병의 침입을 받은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는 그를 잘 도울 수 있는 전문가에게 의지해야만 한다.
모러는 즉시 의학적 모델이 개인적인 책임감을 빼앗아갔다고 주장했다. 과거를 조사해야 되는 심리치료(Psychotherapy)는 다른 사람들(부모와 교회와 사회와 할머니 등)을 비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프로이드의 심리치료는 이러한 범인들이 불행한 질병의 희생자가 되도록 사회화(社會化)했던 지나치게 엄격한 초자아(양심)을 보다 더 관대하고 여유있게 조절해서 현실에 잘 적응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모러는 반대로 ‘책임의 도덕적 모델(moral model)’을 제안했다. 그는 피상담자의 문제들은 도덕적인 문제이며 의학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 피상담자는 생생한 되 때문에 고통을 받는 것이지 죄책감(잘못된 죄) 때문에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감정적인 것이 아니라 행동적인 것이다. 피상담자는 그의 양심의 희생자가 아니라 양심의 모독자이다. 그는 다름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을 중지하고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만 한다. 문제들은 감정의 통풍작용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죄를 고백함으로써 해결된다고 모러는 주장한다.
케카키에 있는 정신병원과 게일스벅에 있는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는 환자들과 오랫동안 접촉한 후에, 저자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의 대부분이 질병으로 인한 환자들이 아니고 죄로 인한 환자들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상담을 통해서 우리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주된 문제들은 모두 그들 자신이 만든 문제라고 하는 놀라운 공통점을 발견했다. 다른 사람들(할머니와 기타의 사람)이 그들의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들 자신이 그들의 가장 나쁜 적수였다. 어떤 사람은 부도 수표를 발행했고 또 다른 사람은 부도덕한 생활의 결과로 혼란에 빠졌으며 또 다른 사람은 소득세를 탈세했다는 것등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그릇된 행동의 결과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병원으로 도망했다. 어떤 사람은 어려운 결정의 책임을 피하려고 했다. 우리는 또한 이러한 문제들을 정면에서 부딛침으로 극적으로 회복하는 사람도 보았다. 모러는 인도주의 적인 그의 방법을 사용해서 많은 경우에 수년에 걸쳐서도 할 수 없었던 심리치료를 불과 몇주간에 걸쳐서 성취시켰다.
저자는 기독교 목사로서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결론, 즉 “정신적질병”에 걸려있는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자에 의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도록 간접적으로 이끌어준 모러에게 큰 은혜를 입고 돌아왔다. 저자는 그때부터 계속해서 그렇게 하려고 노력해왔다.

모러에 관해서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첨가하겠다. 저자는 모러나 윌리암 글라써(William Glasser)의 제자가 아니라고 딱 잘라서 분명하게 말하고 싶다. 윌리암 글라써는 「현실 치료」(Reality Therapy)라는 책을 출판함으로 최근에 와서 인기를 얻게된 모러의 전통을 이어받은 학자이며 이 책은 다른 문맥으로 모러의 논쟁을 강화시켰다.
저자는 그들의 견해와는 거리가 멀다. 그들의 체계는 처음부터 RmxRK지 사람에게 두고 있다. 모러와 글라써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고려하는데 실패했으며 하나님의 법을 부정하며, 성령의 능력은 중생과 성화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들의 전제론적(presuppositional) 입장은 전적으로 거부되어야만 한다.

크리스챤들은 하나님의 섭리로 ‘정신병’에 걸려있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깨우쳐 주시기 위해서 모러와 다른 사람들을 사용하신 것을 감사해야한다. 그러나 크리스챤들은 하나님(모러가 아니라)이 어떻게 그들을 도울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가를 알기 위해서 성경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상담에서 사용하는 모든 개념과 용어와 방법들을 성경적으로 재시험 할 필요가 있다. 그 어느 것도 성경적인 보증이 없이는 과거나 현재의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성격적인 상담은 성경에 관한 모러와 글라써(혹은 저자)의 견해를 이용할 수 없다. 모러와 글라써는 우리에게 많은 옛 견해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프로이드가 책임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을 폭로했으며, 우리에게 해담을 얻기 위해서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도전했다. 만일 우리가 그들의 메시지를 기독교적인 안목으로 본다면 그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모러나 글라써도 책임의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책임이 상대적인 것이며 인간의 책임이란 변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것은 프로이드와 로저스의 무책임과 같이 충분하게 거부되어야만 하는 불신자가 보는 책임이다. 기껏해야 모러의 책임에 관한 견해는 보통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환경은 더욱 더 변화하며 사람에 따라서 최선이라고 말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모러는 마침내 각 사람에 따라서 표준이 다르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는 주관주의(subjectivism)에 빠지게 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이 신적으로 부과하신 객관적인 표준인 성경을 떠나서는 아무런 표준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튀디(Tweedie)의 견해가 바람직하다. 그는 죄의 문제를 “격렬한” 방해와 같이 보는 모러의 ‘투사된 해결’을 거부한다.

그후 수년 동안 저자는 성경적 상담을 연구하는데 열중했으며 많은 중대한 성경적 원리들을 고찰해 왔다. 성경이 상담에 관해서 얼마나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는가. 그리고 성경저긴 방법이 얼마나 새로운가 하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사람들이 취급하는 성경의 완전한 신뢰성은 증명되어 왔다. 이것은 저자가 일리노이주에서 본 것 보다는 더욱 극적인 결과였다. 사람들의 당면한 문제들이 해결되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장기간에 걸친 문제들도 역시 똑같이 해결되었다. 저자가 봉사하는 분명하게 복음주의적인환경에서 개최된 상담집회에서는 회심이 일어났다.
아마도 당신은 “좋은 일이지만 나는 전에 어떤 이야기, 즉 그것은 항상 동일한 절충주의를 가지고 기독교라는 옷을 입혀놓은 것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저자는 여러분에게 저자 자신은 이 문제를 알고 있으며 이러한 종류의 사실을 분명하게 거절하려고 노력해왔다는 것을 확신시키고 싶다.
「불안을 해소하는 몇가지 방법」(Some Help For the Anxious)이라는 팜플렛은 무시해야만 하는 일종의 절충주의와 적응에 대한 좋은 실례이다. 빈센트(Vincent)는 3페이지에서 프로이드 학파가 불안은 주로 내적인 갈등에서 일어난다고 보고 있다고 특별히 언급하고 있 다. 그래서 그는 보다 상호인격적 문화적 접근(相互人格的 文化的 接近)을 사용하는 제2의 정신의학 학파를 언급하고 있다.
그는 이 학파의 대표자들은 카렌 호니(Karen Horney)와 에릭 프롬(Erich Fromm)그리고 헤리 스택 설리반(Harry Stack Sullivan)이라고 말한다. 호니는 불안정감이 불안의 근거라고 말했다. 그러나 프롬은 인생의 목적은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설리반은 불안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방해되는데서 생긴다고 가르쳤다.
제2의 학파가 이렇게 부분적으로 분리되는 것을 보면서 실존주의자의 사상을 반영하는 제3의 학파가 있다고 말한다. 그는 또한 이 제3의 학파로는 루드윅 빈스완거(Ludwig Binswanger)와 롤로 매이(Rollo May)를 대표자로 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견해를 하나씩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5페이지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즉, “요약하면 불안은 우리 자신에 대한 위협에서 오며 위협은 내적으로나 외부로 부터 온다. 불안은 우리의 과거나 현재나 미래로부터 온다. 과거로부터 오는 불안이란 과거에 해결되지 않는 갈등, 경험, 기억 등으로 인한 것이다. 우리는 불안을 몰고 오는 돈과 마감일과 시험 그리고 조롱거리가 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직면하고 있다. 미래에도 우리는 목적이 없기 때문에 불안을 느끼게 될 것이면 마지막으로는 보다 의미없는 삶을 만들 것처럼 보이는 죽음을 의식함으로 오는 불안을 갖게 될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는 이렇게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견해들을 요약했으며 비록 각 견해들이 여러 가지 국면에서 서로 반대된다고 할찌라도 그들의 주된 주장을 옳다고 추측했다.
이 팜플렛의 나머지 부분에서 기독교는 사람들이 프로이드와 호니와 설리반 등의 진단에 따르려는 필요성을 충족시켜 주어야 한다고 해설했다.
그 예를 10페이지에서 보면 다음과 같다. 즉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내적으로부터 오는 과감한 변화이다. 인간의 본래 상태에 대한 그리스도의 진단은 프로이드의 진단과 비슷하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견해나 프로이드의 견해 중 어느 한 가지를 전적으로 잘못 이해하였거나 아니면 이 두 견해를 모두 잘못 이해한 조잡하고도 지나친 간소화이다. 이러한 세속적인 인류학적 견해를 자주 기독교 상담이라고 불리워 왔는데 우리는 이것을 거부해야만 한다. 크리스챤들은 이러한 견해들을 반박해야만 하며 그들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불신자적인 전제들을 이해해야만 한다.
본서의 결론은 과학적인 발견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저자의 방법은 전제론적인 것이다. 저자는 모든 신앙과 행위의 표준인 정확무오한 성경을 분명히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성경은 저자가 모든 판단을 하는 기초이며 기준이다.
두 가지의 경계를 제시해야만 하겠다. 그 첫째는 저자의 해석과 성경적인 적용이 전혀 잘못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둘째로는 저자가 과학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저자는 설명하기위한 목적으로 과학을 부가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환영하며, 독특성을 가진 일반화를 위해서, 또한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학생들이 성경을 재연구하도록 하기 위해서 과학을 부가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환영한다. 그러나 정신의학 분야에서는 과학이 크게 인간적인 철학과 조잡한 사색적인 방법을 제공해 준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아직도 성경적 상담의 충분하고 조직화된 체계를 건설하는 많은 일이 남아있지만 저자는 이 책에서 성경적 상담의 충분하고 조직적인 체계를 건축하는 준비행위로서 윤곽을 기리려고 노력할 뿐이다.

1970년 필라델피아에서 제이 E.아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