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족 목요일[Maunday Thursday, 부활절 전 목요일로서 그리스도께서 최후의 만찬 때에 사도들의 발을 씻으신 것을 기념하고, 또 성체와 서품(敍品)의 성사(聖事)를 그리스도께서 정한 것을 기념하는 로마카톨릭의 날]에 교황의 견책을 받고 처음으로 고소를 당한 마틴 루터는 부활절이 지난 후 곧바로 웜즈(Worms)로의 여정에 박차를 가했으며, 그곳에서 황제와 독일의 모든 나라들 앞에 모습을 나타내어 끊임없이 진리를 고수하고 자신을 방어하며 대적들에게 답변해 주었다.
루터는 숙소를 정해 융숭히 대접을 받았으며, 수많은 백작들과 남작들, 수도원 기사들, 신사들, 사제들, 평민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아 그들은 그의 숙소에 밤늦도록 모여들었다.
그는 많은 이들, 그러니까 그 밖의 사람들뿐 아니라 그의 대적들의 예상을 깨고 웜즈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의 친구들은 함께 머리를 싸매고 신중히 검토했고, 그 중 많은 이들이 철썩같이 믿었던 기존의 약속들이 시작부터 깨진 걸 염두에 두고서 그에게 현재와 같은 위험에 목숨 걸지 말라며 설득해 들어왔다. 그러나 그들의 설득과 충고를 모두 귀담아 들은 그는 이렇게 대꾸했다. “나에 관해서라면, 난 이미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웜즈에 들어갈 것을 분명히 결심했고, 이는 누구도 뒤집을 수 없소이다. 비록 거기에 나를 대항하는 마귀들이 웜즈의 지붕들을 덮고 있는 기왓장들만큼이나 득실거린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참으로 그리 결심한 것이오.”
다음 날, 왕의 사자가 그를 숙소에서 왕궁으로 데려왔는데, 군주들이 중대한 협의에 몰두하고 있었는지라 거기서 6시까지 머물러 있었다.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던 그는 그들 때문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후 군주들이 자리에 앉고 루터가 등장하자, 종교 재판소 판사인 에씨우스가 이렇게 입을 열었다. “이제 황제의 질문에 답변하시오. 당신은 당신이 인정한 모든 책들을 그대로 간수하고 있을 테요, 아니면 그 중 어떤 걸 파기하고 순순히 굴복할 테요?”
마틴 루터는 점잖고 겸손하게 답변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뚝심과 그리스도인의 절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황제 폐하와 여러 각하들께서 명백한 답변을 원하신다는 것을 고려해 볼 때, 저는 이것을 어떤 의심이나 궤변을 늘어놓지 않고 최대한 단호히 입 벌려 고백하는 바입니다. 제가 만약 성경의 증거들로 납득하지 못한다면(이는 제가 교황도, 수도 없이 잘못을 범하고 스스로에게도 모순을 일으켰던 그의 총공회들도 믿지 않는다는 말씀인데), 저의 양심은 이 성경들과 하나님의 말씀에 꽁꽁 묶여 완전히 사로잡혀 있는지라, 전 어떤 형태의 것도 철회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그럴 가능성도 없을 것입니다. 양심을 거슬러 무슨 일을 한다는 것이 경건하지도 합법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사료해 볼 때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이에 관해 저의 입장은 단호하며,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기에 증언을 마치는 바입니다. 하나님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옵소서!”
군주들은 루터가 발설한 이 답변에 대해 함께 의논했다. 그들이 그것을 부지런히 검토하고 나자, 의장이 다음와 같이 그의 심기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황제 폐하께서는 당신에게서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간단한 답변을 요구하고 계시오. 당신은 당신의 모든 저작들을 기독교적이라고 옹호할 거요, 아니면 그러기를 꺼려할 거요?”
그러자 루터는 황제와 귀족들에게 몸을 돌리면서 말하길, 제발 그의 대적들이 명백한 반증을 내세우지도 못하면서 자신을 강요하거나 억지로 떠밀어서 거룩한 성경으로 확증을 얻고 있는 그의 양심을 거슬러 굴복하게 하지 못하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왜냐하면 전 성경으로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웜즈 의회가 해산되기 전, 샤를 5세는 5월 8일자로 한 칙령을 작성토록 하여 다음과 같이 포고했다. 향후 마틴 루터는 교황의 판결에 따라 로마카톨릭에서 분리된 회원, 즉 교회 분리론자요 고집불통의 악명 높은 이단으로 간주된다고 말이다. 샤를 5세에 의해 집행된 레오 10세의 교서가 전 제국에 뇌성처럼 퍼져 나가는 사이, 루터는 비텐베르크 성 안에 안전하게 보호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은거 생활에 신물이 난 그는 1522년 3월 6일, 그러니까 열 달 남짓 숨어 지낸 끝에 비텐베르크에 다시 공개적으로 모습을 나타냈다.
루터는 이제 교황과 주교들을 대적해 노골적으로 싸움을 벌였다. 그는 사람들이 되도록이면 많이 그들의 권위를 경멸하도록 하기 위해 교황의 교서를 대적하는 책과 “주교들의 위계(The Order of Bishops)라고 그릇되이 불려지는 그 성직위계에 대항하는 또 다른 책을 각각 한 권씩 집필했다. 그는 또한 독일어로 번역된 신약성경을 출간했는데, 이것은 후에 그 자신과 멜랑크손(Melancthon)에 의해 교열되었다.
사태가 독일에서 매우 혼란스럽게 돌아가고 있었고, 그것은 이탈리아에서도 만만치 않았는데, 이는 교황과 황제 사이에 싸움이 벌어져 그 사이 로마가 두 번이나 탈취되고 교황이 투옥되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군주들까지도 서로 간에 물어뜯는 일에 이처럼 동원되어 있는 동안, 루터는 교황주의자들을 대항하면서 개혁 작업을 수행해 나갈 것을 고집했다.
1527년, 루터는 심장 부위의 혈액이 갑자기 응고되는 바람에 하마터면 숨이 끊어질 뻔했다. 독일의 혼란에 끝이 없는 듯하자, 황제는 성가시게 구는 터키인들을 대항해 제국의 군주들의 도움을 구하기 위해 1529년에 스피레스(Spires)에서 의회를 소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4개의 도시들, 즉 스트라스부르크(Strassburg), 누렘베르크(Nuremberg), 울름(Ulm), 콘스탄스(Constance), 레틀링겐(Retlingen), 윈드샤임(Windsheim), 메밍겐(Memmingen), 린도우(Lindow), 켐프텐(Kempten), 하일브론(Hailbron), 이스니(Isny), 와이셈부르크(Weissemburg), 노틀링겐(Nortlingen), 성 갈(S. Gal)이 의회의 법령에 ‘항의’(protestation)해 손을 잡았고, 이것은 글로 기록되어 1529년 4월에 공표되었다. 이것이 독일의 개혁자들에게 “프로테스탄트”(Protestants)라는 이름을 안겨 준 그 유명한 항의였다.
이 일이 있고 난 후, 프로테스탄트 군주들은 견고한 연대를 이루기 위해 애를 썼으며, 그들은 색소니 선거후와 그의 동맹 세력들이 의회가 결의한 것을 승인하는 일을 차단했다. 그러나 의회의원들은 상소문을 작성했고, 프로테스탄트들은 후에 그들의 “신앙 고백”(Confession), 즉 중용을 지키는 멜랑크손이 또한 해명할 구실로도 작성한 저 유명한 신앙 고백에 대한 해명서를 제출했다. 이것들은 여러 군주들에 의해 서명되었고, 루터는 그저 가만히 앉아 그가 마무리지은 강력한 과업을 묵상하는 일 외에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다. 아닌게아니라 한 수도승이 혈혈단신으로 로마 교회에 참으로 갑작스런 충격을 줄 수 있었다는 것, 그래서 그것을 완전히 전복시키기 위해 그와 같은 또 한 차례의 충격만이 필요할 뿐이라는 것을 두고 볼 때, 그 일이 강력한 과업으로 여겨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1533년, 루터는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Augsburg Confession, 1530년에 루터가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발표한 신조)을 고수한 연유로 고난을 겪은 오스차쯔(Oschatz) 시민들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냈으며, 1534년에는 그가 독일어로 번역한 성경이 처음으로 인쇄되어 그로부터 1년 후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또한 그는 이 해에 <미사와 사제들의 화체설에 대한 반론, Against Masses and the Consecration of Priests>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1537년 2월, 종교 문제를 둘러싼 회합이 스말칼드(Smalkald)에서 열렸는데, 여기에 루터와 멜랑크손이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이 모임에 참석한 루터는 몹시 심한 병에 걸려 다시 회복될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병원으로 옮겨지는 동안 남긴 유언에서 로마카톨릭에 대한 자신의 증오를 그의 친구들과 형제들에게 전해 주었다. 이렇게 그는 죽기 전까지 자신의 일에 몰두했으며, 이 일은 1546년에 일어났다.
그 해에 그는 멜랑크손을 데리고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고국을 방문했다가 안전하게 돌아왔다. 그러나 얼마 안있어, 그는 맨스펠트(Mansfelt)의 백작들에 의해 그쪽으로 다시 부름을 받았는데, 이유는 그들의 경계선을 두고 일어난 분쟁을 조정해 달라는 것이었다. 거기서 그는 100명 이상 되는 기병대의 영접을 받아 매우 영예롭게 인도되었지만, 그와 동시에 그가 너무도 심히 아파하는지라 그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는 이 발작적인 병들이 그가 큰 일을 맡을 때면 종종 찾아온다고 이야기했지만, 이번엔 전과 달리 회복하지 못하고 2월 18일 예순셋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숨을 거두기 조금 전에 그는 자신을 에워싼 사람들에게 복음 전파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왜냐하면,” 그가 말했다, “두세 번 열린 적이 있는 트렌트 공회(the Coucil of Trent)와 교황이 그것에 거슬러 이상한 것들을 고안해 낼 것이기 때문이오.” 오전 9시가 되기 전, 자신이 죽어야 할 시간이 다가오는 걸 느낀 그는 다음과 같이 경건한 기도로 스스로를 하나님께 의탁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영원하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시여! 주께서는 주의 사랑하는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저에게 명백히 보여 주셨나이다. 저는 그분을 알았고, 전 그분을 저의 생명과 저의 건강과 저의 구속으로서 사랑했지만, 그 사악한 자는 그분을 박해하고, 욕하고, 상처를 입히며 괴롭혔나이다. 제 혼을 주께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이후 그는 세 번 연달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 저의 영을 주의 손에 의탁하나이다. 오 진리의 하나님이시여! 주께서는 저를 구속해 주셨나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자신의 기도들을 여러 번 되뇌이고서 그는 하나님께로 부름을 받았다. 그렇게 기도하던 중, 그의 순결한 영은 그 속세의 몸을 평온히 떠났던 것이다.
- <폭스의 순교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