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에서 자행된 박해들[2]

네덜란드에서 자행된 박해들 (2)    

    A.D. 1568년 세 사람이 안트워프에서 체포되었으니 그들의 이름은 스코블란트(Scoblant), 휴즈(Hues) 그리고 쿠만즈(Coomans)였다. 감금되어 있는 동안, 그들은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에 하나님의 손길이 나타났음을 고백하고 주님의 보좌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굉장히 꿋꿋하고 쾌활하게 처신했다. 그들은 몇몇 덕망있는 프로테스탄트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자신들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위해 고난받고 주님의 복음을 위해 박해당하는 것이 전능하신 분의 뜻이기에, 우리는 인내하며 복종하고 또 그런 일을 당할 때면 마음이 즐겁습니다. 비록 육신은 영을 거슬러 대적하여 그 옛 뱀의 종교회의에 귀를 기울인다 해도, 복음의 진리들은 그런 충고가 받아들여지는 것을 막을 것이고, 그리스도께서는 그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에겐 믿음이 있기에 갇혀 있어도 위로를 받습니다. 우리에겐 희망이 있기에 고통이 두렵지 않습니다. 우리에겐 사랑이 있기에 우리의 원수들을 용서합니다.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우리는 갇혀 있어도 행복하고, 우리의 족쇄를 자랑으로 여기고,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기에 합당히 여겨진다는 사실에 기뻐 뜁니다. 우리는 풀려 나기를 원치 않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꺾이지 않고 견뎌 내어 복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유를 구하지 않고 인내력을 구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들의 처지가 바뀌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머리에 순교의 면류관이 씌워질 그 날을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스코블란트가 제일 먼저 재판석에 끌려 왔는데, 그때 그는 그의 믿음의 고백을 굽히지 않아 사형을 선고받았다. 감옥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그 어떤 수사도 자기에게 가까이 오는 것을 허락하지 말라고 간수에게 부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들은 나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하면서 나의 맘을 심히 분란케만 할 겁니다. 나는 내 구원이 이미 하늘에 인쳐져 있기를 바라고, 내가 확고히 신뢰하는 그리스도의 보혈이 내 죄악들로부터 나를 씻어 냈기를 소원합니다. 난 영원한 영광으로 옷 입기 위해 이제 이 흙 싸개를 벗어 던지려고 합니다. 그러면 난 그것이 지닌 천상의 찬란함으로 인해 모든 오류들로부터 자유로워질 테니까요. 난 내가 교황의 폭정에 순교당한 마지막 사람이 되고, 이미 흘려진 피가 교황주의자들의 타 들어가는 잔인한 갈증을 해소하는 데 충분한 걸로 드러나서, 주님의 종들이 장차 누릴 그 안식을 그리스도의 교회도 이곳에서 누릴 수 있게 되기를 바라 마지않습니다.” 처형이 있는 날, 그는 동료 죄수들에게 가슴 아픈 작별을 고했다. 화형대에 묶인 그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뜨겁게 암송하고서 시편 40편을 노래했다. 그후 그는 자신의 혼을 하나님께 의탁하며 산 채로 불살라졌다.
    휴즈도 얼마 안있어 감옥에서 죽었다. 쿠만즈는 이 일에 관해 그의 친구들에게 다음과 같이 글을 썼다. “난 지금 내 친구들과 동료들을 빼앗겼다네. 스코블란트는 순교했고, 휴즈는 주께서 데려가셨지. 그런데 내가 혼자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아는가? 내게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께서 늘 함께하고 계시니 말이야. 그분은 내 위로자시고, 내 보상이 되어 주실 것이네. 이제는 이 진흙 집에 거할 시간도 한시간 한시간 사라지리란 생각이 드니, 나를 끝까지 강건케 해주시라고 하나님께 기도해 주길 바라네.”
    자신이 재판받을 차례가 되자, 그는 개혁 신앙을 가지고 있음을 떳떳하게 고백했고, 자신에게 가해진 모든 비난에 대해서는 남자답고 꿋꿋하게 대답했으며, 복음에 따른 그의 답변들을 성경이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성경으로 증명해 주었다. 재판관은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신앙 포기와 죽음 둘 중에 하나라고 일러 준 후 다음과 같이 말하며 재판을 마무리지었다. “당신은 당신이 고백하는 믿음을 위해 죽고자 하는가?” 이에 쿠만즈가 답변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난 죽는 것도 마다 않고, 가장 고통스러운 고문들도 기꺼이 당할 것이다. 이 일이 있고 나면, 난 그것의 확실한 증거를 영원한 영광 가운데서 하나님께로부터 친히 받을 테니 말이다.” 그는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형장으로 가는 그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그리고 그는 가장 남자답고 꿋꿋하게, 참된 그리스도인의 인종(忍從)을 보이며 죽음을 맞아들였다.


    낫소(Nassau)의 윌리엄(William)은 배반의 제물이 되었는데, 그의 나이 쉰한 살에 프란체 꼼프테(Franche Compte) 태생의 벨타자 게라드(Beltazar Gerard)에 의해 브루군디(Brugundy)에서 암살당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살인자는 스페인 국왕의 대적과 카톨릭 종교의 원수를 죽여 현세와 내세에서 받을 보상에 눈독을 들이며 오렌지 공작(duke of Orange)을 죽이는 일에 발벗고 나섰다. 소형 화기를 몸에 지닌 그는 그가 저녁 식사를 위해 그의 관저의 커다란 현관을 통과해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다 출입증을 요구했다. 그 암살자가 알아듣기 힘든 흐리멍덩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던 오렌지 공작부인은 그의 차림새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그가 누구인지를 물었고, 공작은 이 때 반드시 거쳐 가야 할 출입증을 요구하는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저녁 식사 전에는 별 다른 일이 없었지만, 사건은 식사를 마친 공작과 공작부인이 앞서 말한 현관을 지나 돌아갈 때 일어났다. 한 기둥 옆에 최대한 몸을 숨기고 서 있던 암살자가 공작을 향해 총을 쏘자, 탄환들이 왼편 옆구리를 관통해 오른편으로 빠져 나가면서 위장과 급소들에 상처를 입혔던 것이다. 부상을 입자마자 공작은 “주여, 저의 혼에 자비를 베풀어 주옵시고, 이 불쌍한 사람들에게도 그리하여 주옵소서.”라는 말만을 내뱉고 이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오렌지 공작의 죽음으로 인해 연합 주(州)(United Province) 전역에 큰 슬픔이 일었다. 현장에서 붙들린 암살자에게는 경종 차원에서 본때를 보여 주기 위해 사형이 선고되었지만, 그는 열정이라 해야 할지 어리석음이라 해야 할지 모를 그것이 너무도 지독한 탓에 시뻘겋게 달궈진 펜치로 살점이 뜯겨져 나가는데도 다음과 같이 뻔뻔스럽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만일 풀려났다면, 난 그런 짓을 또다시 저질렀을 것이다.”
    오렌지 공작의 장례식은 로우 컨트리즈(Low Countries)에서 그 때까지 가장 엄숙하게 치러진 것이었으며, 아마도 그의 죽음에 대한 슬픔 또한 가장 진지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참으로 그에게 돌려져 마땅한 인격, 곧 백성들의 아버지로서의 인격을 뒤에 남겨 놓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플랑드르의 여러 다른 지역들에서 살해되었는데, 특히 발렌스(Valence) 시에서는 하루 동안 57명이나 되는 주요 거주자들이 로마카톨릭 미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짐승처럼 학살당했으며, 수없이 많은 이들이 고통을 당하도록 감금되어 혹독한 지하 감옥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 <폭스의 순교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