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강 예수님은 누구신가?

23. 요한복음
요한 1:1~3, 예수님은 누구신가
 

요한 1:1~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누구신가?
이것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질문이 될 것입니다.

 

복음서가 4개가 있습니다. 학자들은 마가복음이 AD 60년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이어서 기록되었고, AD 90년대에 요한복음이 기록된 것으로 보고 있으니, 요한복음이 성경에서 가장 늦게 기록된 것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의 복음은 공통된 관심사를 기록했다고 해서 공관복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공관복음이 기록한 내용을 거의 생략하고 새로운 시각에서 예수님 말씀위주로 기록하였습니다.

 

오래 전부터 예수님의 초상으로 4가지 생물이 그려지곤 했습니다. 이것은 에스겔 선지자가 부름을 받고 본 환상(겔 1:4-29)과 사도 요한이 하늘 보좌의 뭄이 열릴 때 본 환상(계4장)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에스겔과 사도 요한의 환상에서 하나님의 보좌를 에워 싼 생물들은 사람의 얼굴, 사자, 황소, 그리고 독수리라는 네가지 형상을 지닌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복음서도 마가는 사자, 마태는 사람, 누가는 황소, 요한은 독수리로 표현되곤 합니다.

 

독수리는 높이 날수 있고 매우 공중을 선회하면서 예리하게 내려다 볼 수 있습니다. 달빛 아래서 1마일 아래 땅에서 움직이는 토끼를 볼수 있는 시력을 가졌습니다. 요한복음의 예수님은 독수리인 반면, 저자 요한은 독수리 발톱에 움켜잡힌 채 주님에 의해 높이 들려 나르는 환상가입니다. 다른 복음서들이 교향곡이나 오페라와 같다면, 요한은 음악에 흠뻑 젖어서 모든 주제들이 청중들에게 들릴 수 있도록 노력하는 위대한 지휘자와 같습니다.

 

복음서들이 시작할 때 내용을 보면, 마가는 평이하게 예수님의 세례로 그의 복음서를 시작하고, 마태는 예수님의 공적인 위치를 드러내기 위해 그 복음서를 예수님의 탄생과 그를 경배하기 위해 멀리서 찾아온 동방박사들의 방문으로 시작합니다. 누가는 좀더 일찍이 시작하는데,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기로 되어 있는 세례 요한의 기적적인 잉태와 출생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시간에 있어서 훨씬 앞섭니다. 예수님을 때와 장소와 족보에 관한 인간적 기원으로 설명하려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시간 이전부터 계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에 오신 사실을 사람들이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이 예수님을 성인 정도로 접근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로서만 접근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분은 분명 인류의 구원자이십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보통 사람이라면 결코 인류의 구원자가 될 수 없습니다.

 

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태초에’란 말로 시작합니다. 시간적인 개념을 지닌 이 문구는 요한복음을 다른 복음서들과 구별짓는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태초에’란 아르케는 처음, 시작이란 의미이며, 기원으로도 사용됩니다.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가 나오는데 히브리어로 ‘베레쉬트’입니다. 이 단어는 우주와 만물, 시간과 인간의 시작 등을 나타내는 시간적 개념입니다. 반면에 본문의 엔 아르케는 시간과 공간이 창조되기 이전의 초시간적 개념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여기서 우리의 시선을 창세 이전의 알 수 없는 시점으로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의 태초는 창세기 1장 1절을 넘어선 테초입니다. 말씀은 영원 전부터 존재합니다. 예수님의 선재성은 예수님 자신의 진술 도처에서 반영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말씀을 소개합니다. 이 말씀이란 단어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은 헬라어로 로고스입니다.

 

그러면, 이 복음을 듣는 유대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 말씀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아마 창세기에 나오는 말씀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태초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고 모든 만물이 말씀하신 대로 존재했다고 말합니다. 즉 유대인의 생각에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창조의 권능과 관계를 갖고 계시고 창조를 통한 하나님의 자기 노출과 관계된 분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말은 구체적인 한 사건이나 한 행위로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창 1:3)’ 라 했습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은 말씀은 무언가 삶 속에서 그 말씀의 효력을 낼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끔 준비되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이 헬라인들에게는 무슨 의미가 있었을 까요?

 

주전 6세기경에 에베소에 살던 헤라클리터스라(Heraclitus)는 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같은 강물에 두번 몸을 담그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였습니다. 강물이 흐르니 같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모든 인생이 변화의 상태에 있음을 뜻한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존재하는 모든 것이 영구적인 혼돈의 상태에 있지 않는 것은 어떻게 된 것인가? 헤라클레이터스는 대답하기를 인생이란 혼돈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는 변화는 아무렇게나 그냥 변화되는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질서 있는 변화라는 것이지요. 이 말은, 인생을 조정하는 신적 ‘이성’, 또는 ‘말씀’이 있음에 틀림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로고스입니다. 요한이 자기 복음서 1장1절에서 사용한 말이 이것입니다.

 

그러나, 이 로고스라는 말은 헤라클리터스 보다 더 많은 것을 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생각하는대로 입을 통제하는 원리가 하나님의 로고스입을 발견한 다음에 그가 그것을 역사의 모든 사건과 사람들의 생각을 다스리는 정신적인 질서에 적용하는 일은 조금 밖에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헤라클리터스에게는 그 로고서라는 말이 이 세상과 모든 사람들은을 통제하는 신적 이지로만 이해되었습니다.

 

요한이 이 복음서를 쓸 때는 헤라클리터스의 시대로부터 700년 가까이 되는때였습니다. 그러나 헤라클레이터스의 개념들이 헬라 사상을 형성하는 데에 대단한 영향력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개념들은 그 자신의 철학뿐 아니라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나 스토아 학파들의 철학에도 살아남아 있었습니다. 헬라인들은 로고스에 대해 다 알았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천재적인 총명을 가지고 이 말을 포착했습니다.

 

요한은 이 말을 통해서 “너희가 수세기 동안 사용해왔던 로고스, 이것이 사람처럼 땅에 왔고 우리는 그를 보았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헬라 문화의 황금기에서 플라톤이 아덴에서 제자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엔가는 신으로부터 한 말씀, 한 로고스가 올지도 모른다. 그 로고스는 모든 신비를 밝혀 주고 모든 것을 확연히 드러낼 것이다.” 지금 요한은 “그렇다, 그 로고스가 왔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믿습니까? 요한은 헬라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 중세에 숨겨진 하나님, 20세기에 침묵하는 하나님이 알려지지 않거나 숨었거나 침묵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 안에 온전히 계시되었습니다.

 

14절을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라 했습니다. 말씀이 예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육신은 헬라어 사륵스인데 사륵스는 혈육을 가진 인간이란 의미로 사용됩니다. 사륵스의 히브리어는 빠샤르인데 이 빠사르는 짐승의 근육 조직을 가르키고 사람의 몸이라든지 혈연 관계, 생명 그 자체 등으로 폭넓게 쓰였으며, 신적인 생명과 대조되는 창조된 생명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 단어들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똑같이 혈육을 가진 인간이 되셨음과 그분에게도 육체적 제한성이 따랐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 주장은 신과 그의 세계를 분리시키는 헬리니즘 철학과 영지주의인 이원론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로고스는 인간 역사 속에 들어온 말씀 즉 환영이 아니라 실제 인간 육신을 입은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1절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세가지 사항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태초에 존재하셨다는 것입니다. 시간전에 예수께서는 선재하셨다는 것입니다. 만물이 있기 전에 계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말합니다. 이는 그리스도가 구별되는 독특한 위격이심을 확증하는 매우 섬세한 진술입니다. 삼위일체의 교리가 관계되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이 완전한 하나님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리라’ 이것은 성부 하나님에 관해서 말할수 있는 모든 것을 성자 하나님에게 그대로 적용시킬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2절,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이란 단어를 살펴보기로 한다. 창세기 1;1절에서 하나님을 의미하는 엘로힘이 사용되었다. 엘로힘은 복수형으로서 고대 근동의 보편적 경향에서 비롯된 위엄의 묘사인 장엄 복수적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헬라어로 세오스라 하는데, 요한은 예수님에게 이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요 1;18, 20:28). 하나님은 한 분이지만, 그 안에 세 위가 계십니다. 우리는 이 세위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부르는데, 이 세분은 동일 본질에 속합니다.요한이 여기서 부각시키려는 사실은 바로 예수님도 세 위 가운데 한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즉 예수님은 성자의 위를 갖고 게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3절,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만물이’는 헬라어로 ‘판타’인데 이 단어는 창세기 1:1-31 에 나오는 6일 간의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통하여 만들어진 일체의 것들을 가르킵니다.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는 창조의 완전성을 가르킵니다. 과거라는 시간속에서의 동작의 단순한 일회적 발생을 나타냅니다. 로고스로 말미암아 만들어진 것은 이미 과거에 발생한 일회적인 사건이지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는 그를 통하여란 뜻입니다. 모든 창조가 성자와 더불어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것이 만들어질 때, 그리스도께서 관여하셨고 하나님과 공동으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기원이 로고스임을 분명하게 선언하는 것입니다.

 

창조는 하나님을 계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의 대리자였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3절을 말할 수 있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체험 속에서 만난 일들을 통해서 이 구절의 힘을 압니다.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을 볼 때, 충동적인 힘으로 나뭇잎이 저절로 떨어진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 나뭇잎 뒤에 나뭇잎을 떨어지게 하는 어떤 힘이 그 나뭇잎으로 움직이게 한다고 단정합니다. 우리는 그 힘을 바람이라고 합니다. 자연입니다. 하지만, 이 자연으로는 충분히 설명을 하지 못합니다. 어느 누구도 자연을 통해서 창조의 하나님을 믿음으로 순종하게된 사람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예로서는 자연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의 계획의 차원에서 볼 때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인격적인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계시하는 일을하고 계셨습니다.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존재와 능력을 나타내셨다는 것은 진리입니다. 그러나 자연을 통해서 나타내신 것은 그것이 전부라고 말하는 것도 역시 진리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을 알려면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아덴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그 아덴 사람들은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었지만 그 하나님이 누군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아덴의 어느 제단에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쓰여져 있었습니다. 그 제단들은 그것이 누구에게 관계되든지 라고 말합니다. 그 전에 어떠한 사람도 이러한 형태의 연설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성경을 통해서 헬라인들이 알지 못하고 무식하게 경배하는 하나님을 배운 바울은 선언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행 17:23)” 바울은 계속해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맹목적으로 예배를 받으시는 눈이 먼 신이 아니라 모든 사람으로 조화를 이루며 하나님을 알고 경배하라 하신 인격적인 하나님임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행 17:30)”라고 진술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성육신을 통해서 가장 탁월하게 하나님을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격적으로 알려진 것도 바로 그 성육신을 통해서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간접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을 통해서는 직접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놀라운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람에게 인격적으로 알려지셨습니다. 예수님은 타락한 사람들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최선 최대의 말씀입니다. 만일 우리가 창조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알고 성경을 통해서 그의 계획을 안다면, 우리는 그 알들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인격을 압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볼 때에 하나님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무한하게 사랑하시고 완전히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자기를 배역한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기에 충분할 만큼 놀라운 소원과 그에 합당한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이제 알 수 있다고 말하는 셈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사역을 마칠때쯤 되어서 제자들을 떠나 그들을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갔다가 어느 날 다시 올 것이라고 주의 깊게 설명하였습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떠나신다는 것을 생각하고 깊은 시름에 잠겨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게속 해서 만일에 제자들이 자기를 진정으로 안다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요 14:8~9)

 

둘째,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예수님 같으셨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이 죄를 미워하셨고, 또한 죄인은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는 반드시 속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인류를 구속할 방식을 계획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셋째, 십자가 위에서 그의 죽으심이 의미있음을 뜻합니다. 그것은 그의 죽음을 통해서 그 자신이 사람의 죄를 위한 한 충분하고 받으심직한 희생제물이 되셨음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데도 다른 사람들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그는 자기를 믿는 모든 사람들의 죄짐을 영원히 옮기셨습니다.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니, 예수님은 여러분의 마음의 모든 필요를충족시킬수 있다는 뜻입니다.

 

자 다시 한번 질문해 봅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요?

 

이것은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 기간 동안 내내 제기되었던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종려주일에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실때, 사람들은 서로를 향해 ‘이 이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마 21;10). 예수님이 갈리리의 호수에서 일어난 폭풍을 잠잠케 하셨을때도 제자들은 서로 말하며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막 4:41)’ 라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중풍병자의 죄를 용서하였을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서로 의논하며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라 서로 자신들에게 물었습니다.(눅 5:21). 바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믿으시겠습니까?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충만을 발견하셨습니까?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면 예수님은 아버지의 제일되고 가장 중요하고 모든 것을 함축하시는 말씀일 뿐만 아니라 역시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이기도 하다고 경고해 드립니다. 그를 떠나서는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으면 여러분이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마지막 말씀이 여러분을 심판하는 말씀이 될 것입니다.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가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자요.. 처음이요 나중이니(계 1:8,9). 또한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마 25:34)’ 고 말씀하시거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고 선언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입니까? 사람이라면 그를 잊어도 무방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입니까” 하나님이라면 그분은 여러분의 믿음을 요구하시고 여러분의 총체적인 중요성을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습니까?

 

에수님이 부활하신후 도마가 예수님의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에 자신의 손가락을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여드레 지나서 제자들이 모였을 때, 이 의심많은 도마가 예수님의 옆구리와 손에 난 상처에 손가락을 넣어보고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 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이 우리의 입에서 나와야 합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영생으로 들어가는 셈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