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강 빛이 어두움을 비추되

요한복음
요한 1:4~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요한 1:4~5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본문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생명은 헬라어로 ‘조에’입니다. 고대에서 사람과 동물이 함께 가지고 있는 자연적인 생명을 칭했습니다. 기계적인 움직임에 대조되는 의미에서 스스로 움직이는 현상을 지칭했습니다.

 

그리고 신약에 와서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신약에서 260번 정도 사용됩니다. 모든 생명은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러나 육체적, 영적, 영원한 생명 등 다른 의미의 조에가 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모든 종류의 생명은 오직 예수님의 능력을 통해서만 가능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즉 우리 안에 생명이 있고, 이 생명은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수 있는 생명은 아닙니다. 창세기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생령은 산 몸을 말합니다. 죽지 않고 살아 숨쉬는 살아 있는 몸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은 그렇지 않습니다. 죽은 자를 살릴수 있는 생명입니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고전 15:45)” 아담은 산 영이었지만, 그리스도는 살려주는 영입니다. 그의 몸 안에는 영원한 생명이 있어서 누구든지 자신이 원하는 자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주시는데 이 생명은 빛 안에 있는 생명입니다.

 

빛은 헬라어로 ‘포스’라고 합니다. 신약에서 72번 사용됩니다. 그 가운데 거의 반이 요한복음에 등장합니다. 사단은 어둠을 대변하며 예수님은 빛을대변합니다. 종지 않은 소식은 우리가 어둠의 세상 속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좋은 소식은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빛에 대한 아주 중요한 말씀을 예수님께서 직접 해주셨습니다.

 

그러면 사도 요한은 무슨 뜻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의 빛이라고 할까요?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기 전에 세상은 어둠 속에 있었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그리스도의 빛이 사람들 앞에 비취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을 얻게 되었습니다.

 

구약과 신약에서 하나님을 빛으로 묘사한 사실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시편 27:1, ”주는 나의 빛이시요 나의 구원이시라”

시편 36:9,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고 말합니다.

요일 1:5,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으로 어둠이 드러났습니다. 세상을 비취는 빛이 어둠을만들지 않습니다. 그 빛은 어둠을 느끼게 만듭니다. 만일 태양이 가리워져 있으면 그림자 뿐입니다. 물론 태양 빛이 있을 때 그 태양 빛과 대조하여서 그림자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명암은 그 전에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두드러지게 드러나 보이게 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바로 그 일을 하셨습니다. 그는 완전히 깨끗하신 분으로 세상 앞에 서십니다. 우리는 그가 오시기 전에 사람들이 느낄수 없었던 이른바 세상의 불완전함과 불순함을 느껴야 합니다. 그 구분선은 영원히 그어져 있습니다. 사람들의양심은 그것이 바르게 그어져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것을 알든 모르든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빛은 선과 악을 더 뚜렷이 분별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고 있습니다. 그의 오심은 하나의 심판입니다. 우리 속에서는 빛과 어둠이 서로 섞이어 의심스러운 견해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빛과 어둠이 섞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으로 세상의 어둠이 드러났습니다. 사람들은 그 세상의 어둠 가운데서도 자기들은 가장 밝은 빛을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을 보면 하나님의 모습을 찾아볼수가 없습니다. 미움과 두려움과 질투의 무서운 모습입니다. 거짓과 기만으로 어떻게 하든지 승리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을 비추고자 만든 인간에게서 보여지는 것은 무서운 마귀의 모습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모습이 얼마나 왜곡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바로 이 때문에 오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의 모습을 찾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띠끌로 만드셨습니다. 금 같은 귀한 것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가장 흔하고 보잘것없는 것으로 아름답게 만드셨습니다. 우리가 이 티끌의 겸손으로 하나님께 복종해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인처럼 지내셨으며 자신을 버려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뜻을 알고 거기에 복종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 앞에 겸손입니다.그런데 인간은 한번 교만해 지면 절대 겸손해 지지 않습니다. 수많은 심판을 목격했으면서도 기회만 있으면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하지만, 죄없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았을 때 고개가 숙여지기 시작합니다. 그 십자가 앞에서 자기의 교만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빌때, 성령이 그 마음에 오셔서 완악한 마음을 새롭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입니다. 이것이 빛 안에 있는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나에게 비추어져서 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회개할 줄 모르는 완악한 인간인가 하는 사실을 발견하지 못하는 자는 절대로 이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가장 다행스러운 사람인가 하면,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낮아질 대로 낮아셔 스스로도 비참해 하고 있는데 말씀이 비추어져서 자기가 정말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자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생명을 얻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천국 가기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 어렵다고 하셨을까요? 부자는 자기를 완전히 비참한 자로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돈이 있는한 자기 힘으로 자꾸만 무엇인가를 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차라리 사마리아인이나 이방인으로 생각하기를 바랐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을 그렇게 비참한 자로 생각하려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낮아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정말 이 생명을 가지기 원한다면, 자신을 초신자로 생각하지도 말고 아예 죄인으로 생각하십시오. 오직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없이는 도저히 한순간도 살수 없는 철저히 망한 죄인으로 생가하십시오. 이것이 이 생명을 얻는 길이요 빛이 제대로 비추어진 것입니다.

 

사람들은 설교를 들으면서도 나쁜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적용합니다. 자기는 그렇게 나쁜 죄인으로 생각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남의 아내를 범하여 그가 임신하자 남편을 가장 격렬한 전장에 투입하여 적의 손에 죽게 했습니다. 그는 선지자가 찾아 왔을 때에도 전혀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선지자가 비유하기를,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자기는 양 일백 마리를 가졌으면서도 손님이 오니까 자기 앞집에 있는 가난한 자의 양 한 마리를 빼았아 손님을 대접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다윗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그를 잡아서 죽이라고 말했습니다. 선지자가 “그 죽일 사람은 바로 왕 당신입니다.” 라고 말했을 때,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거꾸러졌습니다. 선지자가 직덥 “이 죄는 바로 당신이 지은 죄요” 하기까지 다윗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미련한 자들인지 아십니까? 우리는 죽을 죄인은 바로 너야” 하고 코 앞에서 지적해 주기까지 깨닫지 못합니다.

 

빛 안에 있는 생명은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집니까? 이것은 먼저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저 깊은 곳에 있는 불신과 교만을 지적해 냅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하여 애통하게 하십니다. 그 죄를 자백하고 세례를 받을때,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성령을 주셔서 새롭게 하십니다. 이것이 주님이 주시는 생명입니다. 그 사람 안에 있는 성령은 그 사람의 병든 심령을 치료하기 시작합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받은 여러가지 상처들과 두려움들을 담대함으로 바꿉니다. 어느 누구도 그를 죄로 책잡을 수 없도록 의의 두루마기를 입혀 줍니다. 그는 빛안에서 걸어가기 시작합니다.

 

우리 모두가 초신자요 이방인이요 사마리아인 같은 심령으로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무엇인가 좀 안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은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교만에 대해 가슴 아파하는 것이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우습게 압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러 번 찾아 오셨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다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러면 구원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주시면 나의 모든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5절 “깨닫지 못하더라”

 

이기지 못하더라 입니다. 빛이 어둠에 비취니까 모든 사람들이 놀랐습니다.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핍박했습니다. 처음에는 회당에서 설교하게 했는데 나중에는 못하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 차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고 끝내는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할수만 있다면 빛을 소멸시켜서 드러나지 못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모두 이 빛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빛을 싫어합니다. 우리도 바르고 분명한 설교를 싫어합니다. 우리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어둠으로 빛을 가리는 것입니다. 이 핑계 저 핑계대지만 이유는 하나입니다. 아직도 계속 어둠 가운데서 살고 싶은 것입니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둠은 빛을 이길수 없습니다. 어둠은 빛이 약할때는 강하지만 일단 진리만 비취면 다 잃어 버리고 맙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 빛 안에서 걸어가는 것이 두렵고 부담스럽습니까?

계속 자기 자신을 감추고 죄짓는 생활을 하고 싶습니까?

그러면, 영원한 삶, 생명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둠에 있어서는 안됩니다. 빛 안에서 걸어다녀야 합니다. 자신의 약한 부분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치료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사람들은 이런 사람을 미워합니다.

 

여러분들은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아시겠습니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그를 세상의 빛삼고 그리스도를 반사시킬 때만 세상의 빛이 될수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사람들에게 쓴 것과 같습니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추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 4:6)

 

여러분이 예수님의 빛입니까? 만일 빛이 아버지로부터 나올 때 언제나 행하는 일을 예수님이 여러분을 위해서 하신다면 예수님은 여러분의 빛입니다.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빛은 혼돈을 없애 줍니다. 창세기 1장에서 우리는 그 모습을 발견합니다. 세상이 있기 전에 하나님은 혼돈 가운데 운행하시며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빛이 어둠을 물리치고 생명과 질서를 낳았습니다. 예수께서 여러분의 삶의 빛이라면 역시 어둠을 물리치고 여러분의 삶을 질서 있게 하실 것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빛은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어둠울 밝혀 그 어둠 속에 언제나 존재하던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줍니다. 만일 주 예수님의 빛이 여러분 속에서 이러한 효력을 발생한다면, 여러분은 더 이상 외식자의 편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 경우 여러분은 자신의 마음을 보게 될 것이고, 이사야 처럼 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

 

또한 베드로 처럼 말할수 있을 것입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

 

또는 바울처럼 “나는 죄인 중에 괴수로다(딤전 1:15)고 말할수 있을 것입니다.

 

끝으로 만일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빛이라면 여러분은 어둠 속에서 안내자를가지는 셈이며,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