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강 오직 하나님께 난자들이니라

요한복음
요한 1:9~13 ,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자들이니라
 

요한 1:9~13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자들이니라

 

 

세계 역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것이 무엇일까요? 처음에는 불의 발견이라고 했고, 바퀴의 발견, 인쇄술, 최근에는 컴퓨터, 반도체 라고 할 지도 모릅니다.

 

그리스도인이 대답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전능하신 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하여 인간 역사에 들어오신 일일 것입니다. 그 사건과 비교해 보면 다른 모든 사건은 무색해 집니다.

 

1:9,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세상에 와서’는 예수님의 성육신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참된, 순전한 빛입니다. 참으로 번역된 알레디노스는 두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알레데스는 거짓과 반대되는 참입니다. 둘째는 부분적인 것과 대조되는 전체 진리, 오직 진리입니다. 즉 진정한(real)이나 순전한 이라는 단어를 사옹하는게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빛은 불완전하고 오도하는 다른 모든 빛과는 달리 진정한 빛이었다고 말해야 합니다.

 

세상의 빛들이 전부 거짓은 아닙니다. 하지만 불완전한 빛입니다. 그것들은사람들의 영혼의 내적 굶주림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제공하지 못합니다.

 

요한은 사람들이 자신들과 전능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사는 인생에관하여 바른 조명을 얻을 수 있는 곳은 바로 예수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빛은 ‘각 사람’에게 비취입니다. 요한은 사도시대가 끝날 즈음에 이 글을 썼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결로 야기된 여러가지 갈등을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은 헬라인이나 로마인이나 유대인이나 다 당신의 나라에 들어올 수 있도록 모든 각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기 위해서 오셨다고 쓰고 있습니다.

 

1: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예수님이 구체적인 역사 현장에 나타나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지음을 받은 세상은 그를 알라보지 못했습니다. 왜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첫째는, 세상이 그를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날 때 마리아와 요셉이 나사렛에서 베들레헴으로 갔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관주인은 그들을 원치 않아서 영광의 주께서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2년쯤 되었을 때 동방의 현자들이 찾아와서 경배했지만 예루살렘의 지도자 헤롯은 예루살렘의 어린아이들을 전부 죽였습니다. 자기의 지상의 왕좌를 노려보는 잠재적인 경쟁자를 제거시켜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3: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셨습니다. 그가 세상에 오셨을때, 그 빛은 사람들의 어두움울 향하여 비추었고, 그 흑암이 어떠하다는 것을 드러냈습니다. 사람들은 그 때문에 그를 미워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영광의 주님이라고 인정치 아니하였습니다.

 

둘째로, 세상은 그를 알아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볼 수 없는 소경이었습니다. 세상은 요한이 빛이 있다 라고 외칠 때까지 자기 일에 바빴습니다. 빛이 비추고 있다는 말이 들렸을 때, 세상은 보이지 않는 어두운 눈을 껌벅거리며 웬 빛이냐 라고 물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사람들에게 세상의 빛을 가르쳤을때, 사람들이 그 빛에 대하여어떻게 했느냐고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않으면 안되었을때, 땅에 엎드려 경배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타락한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을때, 이스라엘 백성은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구약 전체를 볼 때 선지자들이 백성들에게 배척당한 것은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노예에서 끌고 가나안을 향해 갈때, 그 백성들은 물이나 먹을 것이 떨어지면 금방 반역합니다. 차라리 노예가 나은데 왜 끌고 왔느냐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유다에서 말씀을 전할 때, 백성들은 듣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아모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을때, 역시 똑 같은 경멸과 멸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그의 사역이 끝나갈 무렵 집주인과 포도나무 비유에서 그들의 반응을 마태복음 21:33~43에서 설명하셨습니다. 그리고 45절에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오신다는 예언의 말씀을 알고 있었습니다. 시편 22편,이사야 53장에 그러한 예언이 발견됩니다. 하나님께서 메시야가 어떻게 할 것인가를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이적들과 모든 일을 행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에게 제자들을 보내서 질문합니다. “오실 이가 당신이니이까 아니면 또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하리이까(눅 7:20)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역이 보면, 앉은뱅이가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눅7:22,23)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에게 제사장과 지도자들이 메시야냐고 물어보았지만, 요한이 뭐라했습니까?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신 이 그가 나보다 앞섰다.” 다음날 그는 예수님을 보고,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한의 증거를 따라서 예수님을 영접해야 했습니다.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권세를 주셨으니

 

영접한다는 것은 완전히 주인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것을 그분의 이름으로 하는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특권이 있습니다. 특권이란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겠다고 한 것입니다. 즉 양자 됨을 의미합니다. 본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수 없는 형편이지만, 이제 믿음으로써 양자되는 것입니다. 양자가 된다는 것은 상속권을 의미하면 또한 자유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죄의 노예였고 악마의 노예였으며 세상의 노예였는데 이제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모든 것에서 자유하게 된 것입니다. 자녀와 종은 아주 다릅니다. 종은 의무적으로 일하고 아들은 특권으로 일합니다.

 

농장에서 일하는 아들은 자기 일이니 기쁘지만, 종은 억지로 하니 고역입니다.

 

그런데 자녀라고 해서 즐거움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고통이 있을수 있습니다.

 

자녀로서 일하는 것은 특권입니다. 그리고 이 특권에서 생기는 고통은 자녀에게 속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모든 여건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주어진 것으로 저주나 죄의 결과가 아닌 사랑이라고 소화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 됨의 세계관입니다.

 

그런데, 이 12절의 말씀이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13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자들이니라

 

이것은 유대 사람들의 의식에 대한 반박입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자랑하고 특권을 가졌음에 교만하여 심지어는 이스라엘인은 아무리 가난하여도 모두가 귀족이고 이스라엘 사람 중에는 지옥 갈 사람은 하나도 없다라고 말하는 랍비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라고 당당하게 말하지만, 성경에서는 분명히 하나님의 자녀됨은 민족관이나 전승이나 우연적인 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영접하고 믿는 자들에게 한해서 개인적으로 이루어짐을 밝히고 있습니다.

 

육정으로 나지 않았다는 말의 뜻은 인간의 노력이나 의지, 수양에 의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어느 누구나 결심이나 적극적인 사고방식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아들이 아들이 된 것은 의지나 교양을 갖추기 전에 태어났기 때문에 아들이 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있는 것입니다.

 

믿으면 권세도 지식도 하나님의 자녀 됨의 자아의식도 주십니다. 신비로운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3~4,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사도바울이 하나님이 택하신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그 이유는 오직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인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으면 이럴 것이다. 저렇게 될 것이다. 라고 미리 추축할 것 없이 믿으면 그 순간 상상 밖의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된 자아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신비로운 것으로서 여기에는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온통 사랑의 관계로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그 이름을 영접하고 믿는 자에게 이런 특권이 주어짐을 알고 이 특권을 누리는 생활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믿는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여러분 안에 자기 신적 생명을 먼저 심어 놓으신 이유 때문에 믿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른 말로 말해서, 만약 하나님께서 그런 식으로 작용하지 아니하시면 사람은 한 발자국도 하나님을 향하여 움직이지 못하며, 어떤 사람도 구원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배워야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