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강 말씀이 유신이 되어

요한복음
요한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요한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요한복음 전체의 주제라고 할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을 한 구절로 요약한 핵심적인 말씀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신학자 칼바르트는 “Dogmatics”에서 이 말씀을 해석하면서 책 한 권으로 기록했습니다.

 

‘말씀’은 헬라어 로고스를 우리말로 번역한 것입니다. 원래 ‘로고스는 현상계 안에 내재해 있는 만물의 원리’이지만, 사도 요한이 로고스라고 하는 것은 그 의미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기 위해서 헬라적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에게 알맞은 언어와 문화적 현실을 감안하여 이 용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헬라 사람들에게는 로고스, 히브리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 이방인들에게는 주(Lord)라는 말로 그리스도를 표현한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는 신학적인 용어로서 incarnation이라고 합니다. Carnal은 육체라는 뜻이고 incarnate는 육신을 입었다는 뜻으로서, incarnation은 성육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성육신은 무슨 의미일까요?

 

첫째,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사람이 되어 오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높은 보좌를 내놓으시고 사랑으로 우리들에게 직접 오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어 인간의 몸으로 찾아 오셨습니다. 내가 처한 형편, 이 현실 속에서 나를 만나 주시기 위해 나와 같은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듣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둘째, 성 육신은 하나님이 인간 역사에 오셨다는 뜻입니다. 죄악 많은 세상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인간 역사에 오셔서 인간 역사의 의미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우리가 쓰는 연대기는 예수님이 탄생한 시간을 기준으로 기원전과 기원후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셋째, 성육신은 우리의 문화권에 오셨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였고, 사람들은 자기들의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만든 문화권에 들어가서 살기 때문에 문화권이 다르면 서로 커뮤니케이션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시면 한국말을 하실 것입니다. 히브리어나 아람어로 하시면 우리가 알아들을 수가 없겠지요? 우리를 위해서 우리 말을 사용하실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 문화의 옷을 입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신 것을 믿는 믿음이며,특별히 나를 위하여 사람되어 오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육신은 인간의 몸을 가르킵니다. 그러니 사람이라는 의미인데, 왜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육신이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당시 하나님이 사람의 육신이 될수는 없다는 사상이 있었으므로, 예수님이 완전한 인간 되심을 전하기 위해서는 사람이라는 육신이라는 단어가 훨씬 더 강한 표현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헬라어의 의미는 천막을 친다는 말입니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장막안에거하다” 입니다. 장막은 히브리 민족의 진영에서 가장 중요한 곳입니다. 장막은 하나님의 거하시는 처소입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만나 계시를 하시는 장소입니다. 또한 제사가 드려지는 장소입니다. 예배처소입니다.

 

이제 두번째 장막인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의 중심으로서,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나셨으며, 그 예수님 안에서 아버지를 봅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만나 말씀하시는 곳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의 육체의 장막 속에서 자신을 갈보리위에서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완전한 제사를 드렸습니다. 우리의 죄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십니다. 그의 제사를 근거로 우리들이 이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오직 예수님으로 말미암습니다.

 

천막이란 영구적인 집이 아니라 임시거처하는 장소인 것처럼 하나님이 인간 세상에 오시어 임시로 천막을 치시고 그 천막 안에서 우리를 만나주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임마누엘의 교리로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의 언어 속에, 우리의 생각 속에 항상 함께 계셔서 내가 당하는 사건 속에서 역사하고 계심을 믿는 것이 바른 신앙입니다. 혹 실패했거나 병상에 있다고 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졌다고 생각을 하면 안됩니다. 사건을 당한 현장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가운데 장막을 치신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보고 나서 하나님임을 알게 하려 하심이었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관찰하고 그 점을 지적했습니다.

 

요한은 문자 그대로 그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육체를 입고 있는 동안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19절부터 2:11까지 세례 요한이 예루살렘에서 온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파견단을 맞은 그날로부터 시작하여 예수님이 제자들이 보는 자리에서 갈릴리 가나에서 물을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하셨던 그날까지의 7일 간의 중요한 이적을 기술합니다. 그 혼인 잔치의 이야기가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공생애 첫 주간의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끝을 맺는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느니라(요 2:11)

 

바로 이를 위하여 주께서 오신 것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영광을 보고믿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그 당시의 초대 제자들의 체험은 오늘날도 영광의 주를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체험에 관하여 이렇게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면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이라(고후 3:18)”

 

여러분의 체험이 그러합니까? 여러분은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고 거하시며 성령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에게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의 영광을 보셨습니까? 그렇다면, 요한이나 다른 제자들처럼 여러분은 그를 증거할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분이 여러분을 위해서, 여러분의 삶 속에서 행하신 일에 만족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참된 신자의 체험입니다. 우리 각자는 그렇게 증거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광경입니까?

예수그리스도의 영광!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흑암에 갇힌 죄악된 세상에 그를 알리는 것입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은혜의 반대는 공로입니다. 우리는 내 공로나 내 의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오직 은혜로 구원받음은 잘 아는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은혜의 본체이시므로 요한은 예수님으로부터 충만한 은혜를 보았습니다. 상징적으로 표현하면 은혜는 어딘가 모르게 따뜻하게 느껴지고 진리는 차게 느껴집니다. 그러므로 은혜는 있는데 진리가 없거나, 진리는 있는데 은혜가 없으면 안됩니다.

 

본문에서는 은혜와 진리가 함께 충만하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은혜를 찾는 자도 예수를 만나면 만족하고 진리를 찾는 자도 예수를 만나면 충만해진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말씀이 있는데, 영어 성경에 보면,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라고 길과 진리와 생명에 정관사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곧 진리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32,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를 알면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한다는 말씀인데, 그 진리는 예수이므로 곧, ‘예수님을 알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전서 2:21,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베드로전서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입었나니”

 

이것이 진리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기 위하여(요 3:16)’,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믿습니까? 그러한 진리는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습니다. 사람들을 위하여 그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의 영원한 운명은 여러분이 그 진리에 대해서 어떠한 반응을 나타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위탁하시겠습니까?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정말 은혜로우심을 배우는 것입니다. 또한 진리와 건전한 도덕성에 유일한 참된 기초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3년 따라 다니면서 창조자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성난 파도를 잠재우고, 물로 포도주를 만든 이적을 보았지만, 요한이 예수님에게서 더 충격적인 것은 예수님이 사람의 죄를 스스로 짊어지신 그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모습이 오늘 우리에게도 찾아오고 있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