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 강 하나님의 어린양

요한복음
요한 1:29~34, 하나님의 어린양
 

요한 1:29~34

 

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0.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31.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32.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34.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가 되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게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분에 대해서 무언가 알아야 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한 메시지를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첫째, 우리는 예수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증거해야 합니다. 

요한이 다음과 같이 말할 때 바로 그 일을 행한 것입니다.


30
절,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34절,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바로 여기서부터 우리의 증거를 시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교리는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로부터 그 의미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가 사람만 되신다면, 그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일은 우리에게 선행을 격려하는 한 모본이나 수단에 불과하였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전부라면, 그의 죽으심은 어떤 의미에서든지 속죄는 아닙니다. 그는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신 것도 아니고,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정죄아래 있으며 진노의 자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같은 방식으로 만일 그가 하나님이 아니라면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경배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증거를 시작할 때 바로 그 점에서부터 시작해야 된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에 대해서 하신 주장들로부터 시작하십시오.

 

요한복음 5:18,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셨다” 그는 “나와 내 아버지는 하나라(요 10:30)” 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요 14:9)”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거의 모든 사람들은 사실상 이 진리의 외침을 대면한 적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 진리를 들어 본적도 없습니다.

 

둘째, 우리는 예수그리스도께서 행한 것을 증거합니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참 엄청난 요점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라면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 또 행하시고 있는 모든 일을 그리스도께서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창조의 사역에서 활동하셨습니다. 구속의 역사를 이끄셨습니다.

 

우리에게 구약 성경을 주시고 오늘날 우리가 시험받을 때 우리를 도우시고 다른 범사에 있어서도 우리를 도우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은 훨씬 더 제한적인 어떤 일에 초점이 모아져 있으며, 그래서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말해 주기기 훨씬 더 쉽습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의 초점은 그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에 관해서 말하려 할 때, 그의 죽으심의 의미를 함께 나누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셋째, 사람이 어떻게 그를 개인적으로 알게 되는지 증거합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 때에 유대의 제사 제도를 언급함으로써 그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보라 그리스도이시다’라고 하지 않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는 말은 독특한 표현입니다.

 

이 분은 온 세상의 죄를 감당하실 그 어린양이라는 것입니다. 이분은 온 세상의 죄를 치워 버리기 위하여 희생을 당할 하나님의 어린양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할 때 내린 마지막 재앙이 장자가 죽는 재앙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나흘 동안 어린양을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집집마다 어린양이 묶어져 있었습니다. 어린양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자를 대신해서 죽은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정치적인 기대로 들떠 있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고 합니다. 왜 저 분이 오셔서 묶여야만 했는지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왜 저분이 십자가에 달려야만 했는지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라신 주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왜 하나님의 어린양이 준비되었는지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 분에 대하여 깊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유대인들이 해야 할 일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을 너무나도 천박합니다. 자기는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는 기대에 부풀기 시작합니다.

 

아파트 큰 평으로 이사를 가게 해달라? 그리고 부자로 살면 축복받았다고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심지어 목회자도 그렇게 말합니다. 오직 제 욕심에 부풀어 올라 있습니다. 새벽마다 교회에 나와서 복을 달라고 합니다. 복! 복!

온 세상이 복타령입니다. 세속적인 목회자들은 이를 이용하여 설교때마다 축복을 선언합니다. 예수 믿으면 복받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을 우리에게주시고 싶지 않아서 주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의 중심이 아직도 너무나 썩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썩은 중심이 치료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에서 다 드러납니다. 얼마나 교인들이 탐욕스러운지 아십니까? 그러나 중심은 치료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습니다. 찌꺼기 같은 것으로 얼마나 좋아하고 그것을 얼마나 바라보는지 모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런 것을 바라보지말고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는 것입니다.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한 흠없는 어린양을 보라는 것입니다.

요한이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유대인들로부터 죄의 자백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은 전부 요한 앞에 나와서 자기 죄를 자백하고 물에 잠겼습니다. 사실 우리 개신교에는 고해성사가 없습니다. 그리고 만일 제사장을 강조하여다른 사람에게 죄를 고백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우리는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하지 않아도 되니까 구렁이 담 넘아 가듯이 죄를 숨깁니다. 분명히 죄를 짓고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털면 다 죄가 드러나니 좋은 게 좋다고 덮자고 합니다. 네 죄를 덮어줄 테니 내 죄를 거론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 것을 지켜보는 목회자도 덮어주면 충성하겠다고 하니 덮어줍니다. 그러니 의가 없습니다. 제대로 된 사람은 실망해서 떠나고 거짓된 사람만 남게 됩니다. 죄는 공적으로 고백하고 회개하면서 치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때, 그 무리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넘칩니다. 세례요한이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푼 것은 자기들의 죄를 분명히 드러내어 놓고 치료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물로 세례를 주는 또 다른 목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31
절,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요한은 누가 그분인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한으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분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로 세례를 주는 가운데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 누구인지 드러나게 되기 때문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는 일을 계속하였습니다.

요
한이 정말 예수님을 전혀 몰랐을까요? 요한은 여러 경로로 예수님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요한의 어머니와 예수님의 어머니는 친척이었습니다. 그리고 출생할 때 그 놀라운 일들을 생각한다면 요한은 분명히 예수님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례 받으러 오셨을 때, 요한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말리셨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그러나 그에게는 확증이 없었습니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으나 과연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구나 하는 확증이 없었습니다.러나 물로 세례를 주는 가운데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하나님의 성령이 이 분 위에 임하셨습니다. 너무나도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바로 이분이야, 바로 이분’이라고 할수 있는 명백한 증거가 나타났습니다.


  32
~33절,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이제는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른 것을 보고 확실히 알게 된 것입니다.

 

   마 3: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와서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예수님은 잉태될 때 성령으로 잉태되셨음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개인에게 역사하는 성령입니다. 그리고 이제 세례 받으면서 임하는 성령은 공적인 역사로 끌어내는 의미에서의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를 개인적인 입장에서 설명해 보기로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구원을 받고 감사하는 생활이 성령의 첫 열매입니다. 다음은 내 마음이 뜨거워지고, 복음을 전하고 싶어지는 공적인 생활로 들어갑니다. 이것이 성령의 두번째 열매입니다.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주면서 비둘기 같은 환상이 나타난 것을 본 사실을증거하고 있습니다.

 

  34 절,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세례 요한이 예수가 메시야 이심을 확실히 알고 증거하게 하기 위하여 이 같은 기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예수님의 얼굴을 보았어도 세례 요한이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비둘기 같은 성령인가 하는 의문이 나올 수 있습니다. 이 상징은세례 요한을 위한 것이므로 그가 알아 듣고 이해할 수 있는 상징적 의미로 비둘기가 나타난 것입니다.

 

제사장 입장에서 비둘기는 제물의 뜻입니다. 또한 비둘기는 예수님 말씀에서도 알수 있듯이 깨끗하고 순진하고 유순하고 부드러운 동물로서 제물의 대표입니다. 비둘기와 어린양은 상통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비둘기 같은 성령의 역사가 상징으로 나타나 비로소 세례 요한은 그가 메시야이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제 세례 요한의 마지막 증거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어린 양에서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제 본문의 결론은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어린양이신 그는 우리 죄를 대신하는 대속물로 오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오신 목적입니다. 흔히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복받을 생각하고 출세할 생각을 합니다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를 위하여 피를 흘리셨다는 제물로서의 관계를 알아야합니다. 그것은 곧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동일시 되어 일체감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제물이 죽어지는 것을 보면서 내가 죽는 체험을 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내가 십자가 안에서 죽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 가운데 근심이 있습니까? 죽어져야 합니다.

두려움이 있습니까? 한번 더 죽어져야 합니다

내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가 있습니까? 또다시 십자가 앞에 죽어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라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마틴 루터는 예수 믿는 다는 것을 매일 세례받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매일매일 죽고, 매일 다시 살아나는 작업을 계속해 나갈때, 부활의 능력을 시간시간 새롭게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