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강 쏟으시고 엎으시고

요한복음
요한 2:13-17, 쏟으시고 엎으시고
 

요한 2: 13-17
 

때는 4월이었고 예루살렘에서는 유대인들의 아주 중요한 명절인 유월절이 일주일 동안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유월절 행사는 출애굽 전날 밤 죽음의 사자가 이스라엘 민족을 뛰어넘어 건너간 사실을 기념하는 유월절 양을 먹는 예식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무교절로도 불리는 이 주간의 행사는 거룩한 해의 첫 번째 달, 일반력으로는 일곱 번째 달에 지키게 되어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양, 소, 비둘기들은 희생제물로 드려질 것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 드리기 위해 먼 길을 여행해서 오는 사람들에게 희생 제물을 파는 것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였을까. 문제는 ‘성전 안에서’ 라는 장소입니다. 이곳은 이방인들이 기도하던 장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 이 일종의 구내매점은 여행자의 편의를 위해 희생 제물을 파는 정도가 아니라 더 나아가서 수많은 수입의 원천이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이 사실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모독이며, 하나님의 집을 모독하는 행위였습니다.

 

요한이 이 사건을 예수님의 사역 시작 부분에 위치시키고 있습니다. 공관복음서 기자들은 성전을 청결케 하시는 사건을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위해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시는 사건과 연결 지어 보도해주고 있습니다(마 20;10-17), 눅 19:45-46).

이에 대해 신학자들은 두 번의 성전청결사건이 있었으며, 요한복음의 성전청결사건은 공생애 초기의 일이며, 공관복음서의 성정청결사건은 두번째로 이어진 것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두번째의 성전청결사건은 유대인들이 보복을 유발하게 된 원인이 될 수 있다고 보기도 합니다. 혹자는 요한이 기록할 때는 예수님의 부활후 시각을 가지고 바라보았으며, 그래서 성전청결사건을 강조하기 위해 공생애 초기 시작에서 강조한 것이라고도 설명합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무엇보다도 성전청결사건을 중요하게 생각하신 것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후,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강림이 있었고, 사도행전 3장에서는 베드로와 요한은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기적을 행하면서 외칩니다. “내게는 은과 금은 없지만 나사렛 예수님이 있다” 구약의 성도들이 칼과 창을 믿었듯이, 초대교회 사람들은 은과 금을 믿었는데, 칼로서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떨어뜨린 적이 있던 베드로가 나사렛 예수님만 있다고 외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성전 문 앞에서 한 베드로와 요한의 말을 넘어선 말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와 요한의 말을 통하여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 초대교회의 힘찬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무엇을 믿었습니까. 그들은 사람의 미래와 운명이 돈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장래와 행복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은과 금은 오늘날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신이 되고 있습니다. 아니 예수님 당시에도 그랬습니다. 돈의 위력이 사람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아시는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재물을 함께 섬기지 말라”

 

하나님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전능한 신이 재물(돈)입니다. 돈이 말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사람의 미래를 결정하는 신이 있다면 그것은 금신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 초창기부터 이러한 세상적인 가르침에 끊임없이 저항하며 살아 왔습니다. 교회는 초기 광야 시절부터 하늘과 땅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인간의 미래와 운명을 결정하시는 구원자 하나님을 그리스도 안에서 믿고 생존해 왔습니다. 이것이 초대교회가 고백했던 신앙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굴곡 많은 역사를 통과하며 이러한 신앙 고백적 전통에서 종종 멀어지곤 했습니다.

중
세 교황에게는 두개의 방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 곳은 성호를 그리면서 신의 축복을 선언하는 방이었고, 다른 하나는 거두어들인 은과 금을 쌓아 두는 방이었답니다. 그는 이 두 개의 방을 오가며 위험한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신성함과 신성모독을 함께 행하는 야누스의 얼굴을 가지고 성직을 수행했던 것입니다. 두 신을 섬기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연상시키는 씁쓸한 모습입니다

 

한 번은 교황이 에라스무스와 함께 바티칸의 문들 바깥에 서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잠시 후 길게 이어지는 마차 행렬이 교황청에 바치는 일년치 은금을 싣고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칼과 창으로 경호를 맡은 군인들이 이 행렬을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교황이 에라스무스를 보고 매우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습니다. ‘더 이상 거룩한 교회(로마 카톨릭교회)는 내게는 은과 금이 없다고 말해서는 안되겠지 ? 그러자 에라스무스가 빙그레 웃으면서 즉시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맞아요 그렇다면 교회는 더 이상 앉은뱅이에게 일어나 걸으라고 말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단순히 중세 교회에만 한정된 것은 아닙니다. 현대 교회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현대 크리스천들의 삶의 방식은 어떠합니까? 자신들의 미래를 보장하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머니가 있어야 한다고 속으로 중얼거리지 않습니까.

 

우리는 종종 신앙 성공은 물질로 환산될 수 있다고 믿는 유물론자들로 바뀝니다. 성경에서는 이런 자들을 가르켜 실제적 무신론자라고 부릅니다. 오늘날의 신앙위기, 교회 위기는 바로 이러한 실제적 무신론자들 때문에 발생합니다.

 

얼마전 강의시간에 어느 교수님이 우스개 소리를 들었다고 하면서 소개했습니다. “요즈음 기업들의 경영상황이 어렵다고 합니다. 그래서 시중에 현금이 없다고 합니다. 기업총수도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외가 있으니 큰 교회의 당회장이라고 합니다. 유학생 중에서 돈을 가장 잘쓰는 사람은 기업 총수 자식이 아니고 당회장 자식이라고 합니다. 씁쓸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했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하고 싶겠지만, 그런 소리 나오는 것 자체가 문제입니다\"

 

금 신상을 섬기는 현대인들과 교회는 이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절망하여 체념가운데 사는 사람들에게 미래를 주는 교회, 그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하여 그것을 주는 교회, 앉은 자를 일으켜 걷게 하는 교회, 이것이 성령 강림을 경험했던 베드로와 요한이 창조하고 있던 교회, 즉 새로운 인류로서의 교회였던 것입니다. 교회는 절망하는 인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고 제공하였습니다. 그들이 믿고 신뢰한 것은 은과 금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라 불리는 하나님의 은혜만이, 불구자된 인간에게 진정한 미래를 제공한다고 믿었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