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순절 성령운동 과 이용도 목사 [1]

       
오순절 성령운동과 이용도 목사(1)
이상윤

지난 학기 4월 7일 협성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이용도 목사 기념사업회와 협성대학교 신학대학이 공동 주최한 이용도 목사 연구논문 발표회가 있었다. 이 모임은 이용도 목사 사상연구회와 양립되어 있는 이용도 목사 기념사업회가 주관한 논문 발표회였다. 이용도 목사 기념사업회(회장 유승훈 목사)는 교회와 신학대학 그리고 학문 세계에서의 이용도 목사를 기념하고 그의 영성과 목회사상을 발굴하여 학술적으로 연구하고 널리 전파하자는 취지로 시작한 조직이다. 이번에도 목원대학교 당국과 기념사업회 측이 서로 합의하여 공동으로 주최하자고 했다.  이번 연구의 주제는 ‘오순절 성령운동과 이용도 목사’이고 불초 교제가 발제했다. 오늘 감리교회는 어떤 영성적 위치에 서 있으며 21세기 나눔과 섬김의 시대를 교회가 어떻게 수용하고 실천할 것인지를 묻고자 한다.

이용도 목사 연구는 과거에도 그랬지만 장래에도 한국교회 내에서 개신교 영성의 형성과 지도력 개발에 도움이 된다. 특히 감리교 입장에서 고유한 자기 정체성을 설정하고 신학교육은 어떻게 되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직면해있다.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시대적 과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지 찾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감리교회는 깨어난 영성에 기초하는 교회부흥과 개혁 그리고 세계 선교를 위한 도전을 받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나간 1930년대에 살았던 감리교 이용도 목사를 파헤치고 연구하여 오늘의 감리교 신학을 새롭게 조명해야 한다. 돌이켜보면 감리교는 이용도 목사를 통해서 많은 은혜를 받았다. 수많은 영적 제자들이 배출되어 목회를 하고 지금도 교회를 새롭게 부흥시켰다. 1920년대 당시 협성신학교 동료들로는 우원 이호빈 목사 이환신 감독 등이 있었고 제자들로는 김광우· 박재봉·조신일·조경우 목사 등이 계셨다. 특히 일제로부터 해방된 직후 무너진 감리교를 다시 세우는 부흥사로 박재봉 목사가 유명했다. 그는 이용도 목사와 같이 금강산에 들어가서 기도하던 제자로서 전국적으로 큰 부흥의 불길을 부치기도 하였다. 특히 전화의 잿더미 속에 있던 감리교회를 재건하고 기도하여 능력을 받은 사명자들이 활동하던 시기였다. 그중에는 이용도 목사 예수교회에서 성장한 청년 소설가 박계주 선생도 있었다. 그는 당시 순애보라는 시대소설을 발표하여 큰 인기를 끌었다. 순애보는 기독교적 사랑의 진수가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시무언 이용도 목사 측근으로는 단연 우원 이호빈 목사를 꼽는다. 그는 예수교회 초대 선도감을 지냈고 그로 인해서 감리교회를 떠났다. 그는 60년대에는 농촌운동을 하였고 이어서 중앙신학을 이끌었다. 그는 당시의 기성교회가 무능하고 알량한 목사들에게 실망하여 평신도 신학을 추구하면서 한국교회의 사회복지 운동을 이끌어 가는 수많은 사회복지 전문가들을 배출하였다. 이환신 감독은 연세대 신과 대학를 창설하였고 이대에서 교목으로 계시다가 총리원에 와서 일하면서 마지막으로 4.19 혁명 직후 감리교 감독이 되었다. 

이용도 목사 전집을 쓰고 출판했던 변종호 목사도 특이한 인물이었다. 본인의 말대로 하자면 쭈그렁 밤 송이 삼년 매달린다고 참 오랫동안 이용도 목사 주변에서 살았다. 그는 일찍이 연희전문을 나와 일본 성공회신학교와 릿쿄 대학을 나오고 귀국 후에는 병약한 상태였지만 그 몸을 이끌고 이용도 목사연구와 사상전파에 헌신했다. 60년대 와서는 서대문에서 복십자 교회를 개척하여 이용도 목사의 큰 아들 이영철 장로와 함께 목회를 하기도 하였다. 이런 저린 배경과 이유 때문에 초기 이용도 목사 연구자료 구축에는 변종호 목사의 공적이 확실하게 나타나 있다. 이는 한국교회 어떤 인물보다도 자료가 풍성하였다. 특히 이용도 목사의 육필 서간문편집과 일기문집 그리고 변종호 목사 자신의 독보적인 이용도 연구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잘 정리되어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장로교회의 김인서 장로도 이용도 목사연구에는 한 편을 차지하고 있다. 그는 당시 월간 신앙생활 지를 편집하면서 장로교적인 입장에서 한국교회 신앙정서와 신학적 경향성을 대변하는 자리에 있었고 박학다식하고 장로교인답게 능수능란한 교리신학 사상을 구사하는 몇 안 되는 유능한 인사였다. 한국일보의 김창렬 고문이 그분의 자제분이다. 김인서 장로는 초창기 이용도 목사의 정열적 활동에 반해서 은밀하게 연대하기를 제안하기도 했으나 결국은 장로교 측에 제시하는 이단논쟁에 불을 댕기고 필봉을 휘둘러 이용도 목사의 마지막 가는 길을 공격했다. 그는 특히 한준명과 원산기도원 일파들을 매도하면서 이용도 목사의 최후 8개월을 고발하였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당시 평양 장로교회의 영적 부친이었던 길선주 목사는 시종일관 이용도 목사의 행적에 시비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특이한 경우다. 물론 여기에는 장로교, 감리교라는 교파 장벽도 개입되어 있었고 평양 장로교회에 대한 이용도 목사의 공개적인 비판에 대한 반작용도 묵과 할 수 없는 요인이었지만 더 중요하게 작용한 것은 한국교회 전체에 대한 영적 헤게모니 쟁탈전으로 비화하면서 적대적 감정이 깊이 개입하게 되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평양의 기도단은 평양의 장로교 바닥에서 이용도 목사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장로교 출신인사들의 활동상에 반발하여 더욱 더 강하게 비판하고 나선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이런 저런 연유로 인해서 30년대를 통과하면서 한국교회의 두 축인 장로교와 감리교회는 이 문제에 관하여 말없는 긴장 관계를 형성해 왔고 한국동란 후 가속된 사회불안과 혁명적 상황에 처한 한국교회가 이단 사이비 문제로 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용도 목사를 둘러싼 신학적 정체성에는 서로 서로가 손쉽게 접근할 수 없는 무거운 침묵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하여 상당히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서로간의 무거운 분위기는 하나, 둘 벗게 된다. 실제로 감리교도 이용도 목사를 재론하는데 상당기간 이 필요로 하였고 실제로 조심스러웠다.

이용도 목사가 장로교로부터 이단정죄를 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더욱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변종호 목사의 이용도 전집은 감리교회뿐 아니라 뜻있는 장로교인들도 많이 읽었다. 그리하여 1970년 정확하게 그 해를 맞던 해에 연세대 신과대의 민경배 교수는 대학 학술지에다가 이용도 목사를 신학적으로 평가해보는 획기적인 연구논문을 내놓았다. 민경배 목사는 이 논문에서 이용도 목사의 측근들로서는 다분히 감정이 날만한 자료로 받아들이는 신앙생활 지의 주요 논문을 가지고 김인서 장로의 후예답게 이용도 목사의 이단성을 논구했다. 참으로 지금 읽어보아도 이용도목사의 이단성은 분명하게 지적되어 있다. 그러나 1966년에 이미 유동식 교수는 자신이 편집하고 있던 ‘기독교사상’에 뜬금없이 이용도 회상기를 발표한 적이 있었다. 연속성이 있는 행동은 아니었으되 분명한 사실은 감리교 신학의 특성상 자유주의적 입장에서 1930년대의 이용도 목사 위상에 대한 회상을 시도하면서 한국교회의 일방적인 매도는 지나친 행위가 아니겠느냐 하는 뜻을 포괄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 시점은 1970년대로 옮아갔다. 시대가 변한 것이다. 70~80년대 한국사회는 도시화와 산업화의 영향으로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는 혁명적 격변을 경험하고 있었다. 특히 도시 산업화 상황에 처한 가난하고 소규모의 한국 개신교는 도시의 인구집중 덕분에 부흥의 불길을 당기기 시작하였다. 산업화는 이농민들을 도시변두리로 내몰았고 이들은 자연스럽게 도시빈민으로 전락하였으며 노동 대중은 급격하게 증가하면서 민주화와 인권 그리고 산업평등을 요구하는 민주적 참여자로 성장하고 있었다. 여기에 도시화에 따른 목회 서비스의 요구가 폭발하면서 도시목회에 성공한 대형교회가 등장하였고 양극화된 현대 사회에서 기독교 영성의 혁명적 봉사는 민중을 만나고 접촉하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적극적 사고방식도 나오고 전통적인 기복신앙도 있었지만 도시화의 그늘 속에 포로가 된 잃어버린 영혼들은 교회 공동체 안으로 흡수 통합되면서 교회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다. 공동체를 향하는 한국인의 정서를 사로잡고 민주화와 인권투쟁은 노동자 농민 빈민 학생 청년들을 한자리에 모으게 하였고 정치의식을 함양시켰다. 기독교는 사회정의뿐 아니라 조직화되고 참여성과를 나눌 수 있는 강력한 운동성을 띠게 되었다. 개신교 일부 세력들은 반정부 투쟁과 민주화와 인권과 통일로 가는 에큐메니칼 운동으로 합류하였고 대형교회는 현실 안주에 덧붙여 기복 신앙적 퇴행성을 조직화하는 성과를 내세우게 되었다. 극단적 대립 각을 세우기도 하고 친정부적 행태를 띠기도 하면서 한국교회는 최종적으로 한국사회가 직면한 시대적 좌표를 제시하였다. 의식화되고 전투적인 기독교인과 복음주의적 확신과 헌신에 익숙한 개신교회는 내면적 질서를 향한 희구에서 하나가 되어 기독교 영성과 윤리의식을 고양하고 교회 지도력의 도덕성이 무엇인지를 찾아보게 하였다. 여기에 목회 일선에서 당장 필요로 하는 기도하고 설교하고 교인 훈련시키고 헌신케 하는 목회적 실천력을 제고하는 길은 한국교회의 영성적 유산을 재 발굴하고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으로 나갔다. 여기에서 과거 한국교회를 빛냈던 교회영성들을 하나 둘 발굴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장로교회에는 길선주·김익두·주기철 목사 들이 재 발굴되어 나왔으며 감리교회에서는 이용도 목사가 나왔다. 그렇게 되어서 시무언 이용도 목사는 다시 태어났다. 

이용도 목사 연구에는 먼저 교회적인 측면에서 그의 부흥운동이 주로 연구의 대상이었다. 동시에 목회적으로는 설교연구에 흥미를 더했다. 모두가 이용도목사의 유산이 무엇인지 주목하였다. 일종의 연구 붐이 일어났다. 연구자들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한국교회 영성의 핵심인물인 이용도 목사를 깊이 이해하고 평가하여 오늘에 되살릴 것인가 하였다. 여기에는 장로교 길선주 목사 김익두 목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서 한국 감리교회는 ‘5000 교회 100만 신도 선교운동’을 전개하면서 양적 성장에 버금가는 질적 성장의 새로운 차원이 있다는 도전을 받으면서 이것의 내면을 채우기 위하여 좀 더 깊이 있고 내용 있는 영성을 찾아 나섰다. 이 시기에 감리교는 호헌파와 갱신파가 교회를 둘로 갈라 대립하였었고 1978년 3년 만에 합동에 합의하게 되었다. 바로 그해에 감신대는 신학과 세계 여름호 특집으로 이용도 목사 연구를 냈다. 1930년대 졸업생이었으나 까맣게 잊어버렸던 협성신학교 출신의 이용도 목사를 다시 살리려는 노력의 하나였다. 장로교의 일방적인 이단시비에 휘말려 순식간에 변명 한마디 해주지 못한 채 죽어 간 젊은 목회자 이용도 목사를 을 다시 평가하자는 작은 뜻이 있었다. 감신 교수들은 ‘신학과 세계’ 여름호에서 이용도 목사를 집중 분석하고 전공에 따라서 교회사 조직신학 기독교 윤리 등 순으로 시무언 이용도 목사의 신학을 다루었다. 특히 눈에 띠는 것은 ‘십자가 신비주의나’ 독일 라인 강변의 영성 ‘마이스터 엑크하르트’ 에 빗대어 쓴 논문들이 나온 것이었다. 십자가 신비주의 측면에서 바라본 이용도 목사는 분명 이단이 문제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