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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도 목사는 이호빈 형님이 없었더라면 예수교회마저 세울 수가 없었다. 마지막 가는 입장에서 훗날을 책임져준 이가 바로 이호빈 목사였다. 그래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이호빈 목사는 아가서를 가지고 이용도를 추모하고 아가서를 가지고 신비신앙의 진수를 전하였다. 이것이 이용도 목사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더군다나 평화주의자 이호빈 목사는 서울연합교회마저 감리교에 뺐기고 말았다. 비폭력 무저항으로 살았던 이호빈 목사는 다시 찾으려 하지 않았다. 탐욕적인 저질들이 판치는 현실에서 비현실적인 대응으로 일관하였던 분이 우원 이호빈 목사였다. 오순절 성령운동의 강력한 카리스마와는 사뭇 다른 이런 측면들은 예수교회 목회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작은 교회를 지향하는 대안적 공동체가 바로 지금의 예수교회다. 성직자들의 지나친 대우를 거절하고 평신도 중심의 자립자전의 원칙을 지키고 있다. 기성교회에 대항하는 대안적 공동체교회로서의 자기정체성이 분명한 예수교회는 봉사와 헌신을 주무기로 삼는다.
피터스 선교사의 글 ‘한국의 신비주의 크리스천 시무언 이용도’는 피선교지 한국에서 만난 한 무명의 전도자 이용도 목사가 어떻게 성장하였으며 신학교육을 받았는지 그리고 목회현장에 들어가 어떤 경로를 통해서 성령 받고 설교하고 부흥운동을 주도하다 갔는지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특히 이용도 목사의 가난과 아픔과 좌절을 그들의 성령운동 과정에 숨겨진 진실을 증언한다. 1919년 3·1운동 초기부터 학생의 신분으로 4년간의 투옥생활을 겪었고 항일민족의식을 가지고 투쟁적 삶을 시작한 그는 체질적으로 가난하고 억눌린 민중적 삶의 후예였고 그 속에 뿌리 내린 민중설교자로서 자기 위치가 확고한 그리스도의 제자였다. 그러나 그는 민족해방과 인간구원의 이중적 혁명과정에서 자기정체성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찾았고 인간구원과 해방을 교회 안에서 전파하는 한계 안에서 살았다. 강동 회심 사건이후 그는 전적으로 회심의 설교자로서 교회부흥의 불길을 부쳤고 성령 안에서 맛보는 기쁨을 가지고 가난한 설교자로서 한반도와 부속도서를 전전하고 북만주로 진출했다. 19세에 장가가서 가정을 이루고 가난하고 고달픈 살림살이에서 찌들지 않는 젊음을 가지고 복음 전도자의 삶을 살았으나 언제나 그는 송봉애 사모와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숨 막히는 것 같은 가난의 고비 고비를 넘어야 했다. 전하는 말에 의하여 이용도 목사와 사는 동안 송봉애 사모는 12번도 더 가출했다고 한다. 그러한 비참한 생활고 속에서도 기개 높은 이용도 목사는 미국 선교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기 주변의 인물들을 바라보면서 적개심을 불태웠고 속 좁은 기성교회와 맞섰다. 그런 와중에 치명적인 시대의 질병인 폐결핵(TB)으로 죽었다. 이것이 일제 강점기 하에서 미국의 식민지나 다름없는 목회와 교회 현실 속에서 희생되었다. 피터스 선교사의 증언은 이용도 목사와 나누었던 깊은 신뢰가 기반을 이루는 것이었지만 기실 이들 둘 사이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넘어 설수 없는 어떤 질적 차이 곧 일제강점기를 사는 미국 출신 선교사와 한반도 식민지 출신으로서 이중적 식민지배 하에 살아남고자 몸부림치던 식민지 출신의 가난했던 설교자였다는 현실적 차이가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그렇다면 오늘의 오순절성령은사운동은 어떤 관계인가. 일찍이 순복음신학교 강단에도 섰던 변종호 목사는 이용도 목사의 은혜 줄기에 순복음의 대명사 조용기 목사도 넣었다. 그것은 오순절성령운동과 이용도목사의 성령운동 사이에는 일맥상통하는 무엇이 있다는 것이었는데 실제로 이용도 목사는 오순절성령운동이 오기 이전에 먼저 성령운동을 했고 그것이 너무 짧은 시기에 이루어지는 바람에 영적추수를 이루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남긴다. 목회와 성령운동은 철저히 조직적이어야 한다. 구역장 제도를 두고 교인관리를 철저히 하는 현대적 목회기법에서 보자면 간헐적이고 즉흥적인 부흥설교로는 경쟁 심한 오늘날 현대목회에서는 기본조차도 지키지 못하는 것이다. 조직 없는 카리스마는 상상할 수 없으며 기독실업인회(CBMC)가 재정지원을 하지 않는 성령운동은 존립조차도 불가능하다. 그런 면에서 성령운동교회는 재정적 기반을 든든히 하면서 교권을 강화시킨다. 시무언 이용도 목사는 가난하고 스스럼없는 자유로운 혼을 가지고 살았다. 이것이 현대적 성령운동하는 오순절 성령은사운동 교회들과는 현실을 달리하는 측면이다. 실제로 오순절 교회 중에 성공적인 목회를 구축한 이들은 철저히 기도하고 조직화된 평신도 사역자들을 동원하여 조직의 기반을 다진다. 그러니까 예수교회와는 처음부터 다른 조직이다. 카리스마로 다져진 철저한 조직과 통제를 모토로 삼는다. 이처럼 경향성이 다른 다르고 전도를 강조하며 조직 관리의 기법이 다르다. 그러니까 원시적 성령운동가 집단들은 사람을 모으고 돈을 모으는 대신 은사를 나누고 사랑을 실천했지만 현대의 카리스마 설교자들의 조직을 세우고 통제를 가하고 재정기반을 다지는 쪽으로 목회를 했다. 이점에서는 통일교 문선명도 같은 방식으로 목회를 했다. 설교를 강력하게 하되 사업기반을 다져서 돈도 마음대로 쓴다. 이런 전략적 특성 때문에 지금은 초기의 메시지의 진실성은 상실했어도 조직들은 가동되고 세습을 하게 되었고 엄청난 재화와 이권을 쥐고 있다.
이용도는 평생 가난을 등에 지고 살면서 부흥회 인도하러 전국을 다녔지만 언제나 가난하고 무력하게 동가숙, 서가숙 하면서 살았다. 더군다나 당시의 시대상황은 일제의 식민지였고 기독교 인구도 적었다. 교세도 작을 뿐 아니라 종교적 편견도 심했다. 이용도 목사는 그러한 제한적 삶의 제한적 조건 속에서 산 기도로 힘을 얻고 굶기를 밥 먹듯 하면서 고생했다. 부흥회를 해도 사례비를 안받았고 교인들의 대접도 신통치 않았다. 부흥회 인도는 자원봉사 수준이었다. 그는 부흥회 운동의 게릴라였는지도 모른다. 이 목사는 부흥운동의 정규군이기를 거부하고 어렵고 힘든 일선 교회에서 무상으로 집회를 인도하였다. 게다가 폐결핵을 앓고 있었으니 언제까지 견딜 수 있었겠는가. 지금은 유명설교자가 되면 벤틀리도 타고 골프도 치고 비서도 두고 건강 관리하랴, 웰빙하랴 비행기타고 세계를 메주 밟고 다니는 세상이 되었으니 무엇으로 이런 세태를 비교할 수 있으랴. 이것이 당시 일제강점기 식민지 청년으로 가난하기만 하였던 복음전도자 이용도 목사는 결국은 치명적인 질병에 시달리면서 짧고 굵은 생애를 갔다. 그러니까 실제로는 오순절성령운동의 은사운동이라고 하지만 현대적 의미의 조직체계를 갖추고 관리를 철저히 하는 부흥운동은 아니었다. 실제로는 그런 의미로 해석하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것보다는 그의 삶의 스타일이 좋았고 기도하였고 주님임재를 체험하고 은사를 행했고 십자가 신비주의를 체험한 영적 최고봉에 도전하였다.
그렇게 본다면 이러한 여러 문제점들을 극복하면서 새로운 연구 주제를 제시하여 이용도 목사 논구의 한 단초를 풀어가는 길목을 어떻게 설정해야 할까.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우선 지난 1998년 10월 제23회 정기 총회에서 이용도 목사 명예회복을 총회에서 결의한 바 있다. 그러나 총회 결의만 있었지 후속 조치는 전혀 없었다. 말만 나왔던 것이다. 그래서 화양교회 김종순 목사는 당시 총회의 대표적인 서명자의 한 사람으로서 여러 동료 후배들과 예수교회 지도부를 함께 받아서 이용도 목사 기념사업회를 조직하였다. 앞으로 이용도 목사 기념사업회는 연구모임뿐 아니라 대중 집회도 하고 장학생도 배출하고 세계적인 신학 교육기관과 연구 및 교수 학생 목회자 교환사업도 벌이고 교단의 대표자로배출되어서 감리교회 전체가 참가하는 영성계발과 신학교육 프로그램이 합류하는 계발사업을 펼칠 수 있을 것이고 두뇌집단을 초청하여 한국교회의 영성신학을 세계적인 수준의 프로그램으로 개발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이용도 목사의 영성은 한국교회의 목회 일선에서 당장 사용할 수 있으며 신학대학 교과과정에 반영하여 학부 과정의 신학생과 대학원생들을 상대로 하는 목회전문개발 코스를 만들어 운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교단 산하 3개 대학의 학부와 대학원에 한국교회 영성개발을 위한 연속 강좌를 해보고 일선 목회자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목회자의 인성개발 과정을 설치하고 해외연수 등 영성개발에 필요한 각종 프로그램을 제공할 수 있을 때가 곧 올 것이다. 덧붙여 기도생활이 자꾸 침체되고 있는 교회현실을 전환시키기 위하여 기도생활을 공동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대학원 학위과정 학생들에게 합숙도 시키고 직접 산기도도 가고 기도원을 찾아 가는 순례 프로그램도 만들어서 전국을 답사하고 전국적으로 영적으로 건강하고 활기찬 목회자 중간집단을 육성하여 감리교회를 앞세워 나간다.
또 하나 중요한 과제는 WCC-Pentecostal Dialogue 프로그램을 통해서 오순절성령 운동을 정교회 다음으로 세계교회운동에 참가시킨다. 그것이 2007년 11월에 동부 아프리카 케냐 레무르에서 모인 제4차 글로벌 크리스천 포럼이 있다. 여기에는 비 가맹교단 특히 오순절 계통의 영적 지도자들을 한 300명 정도 초청하여 앞으로의 지구촌 전체를 상대로 하는 교회일치와 연합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기독교·이슬람 간의 문명충돌을 해결하고 역내의 평화를 진작시키는 운동을 전개하려는 구상이 실현되고 있다. 지금 지구촌에는 4억 8000명에 달하는 오순절계 교회 교인이 있다. 이들의 영성적 영향력과 일치된 힘을 통하여 글로벌 크리스천 포럼을 확산시켜 나간다. 오순절 성령운동의 추진력을 만나면서 세계교회운동의 장래를 새롭게 개척한다. 실제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에는 오순절 성령운동을 하는 기하성교회가 가입되어 활동하고 있다. 앞으로 여의도순복음교회는 북한도 도와야 하지만 사회봉사 분야를 개발하겟다고 선언하고 있다. 긴급구호 활동만 아니고 소외된 이웃들을 위한 서비스 프로그램개발이 시급하다. 나눔과 섬김의 시대를 함께하는 성령운동의 동반자들을 오순절 성령운동 안에서 찾아나가야 한다.
또한 실제로 한국교회의 목회현장을 돌아보면 과거의 장 감 성 구분은 의미가 없다. 순복음 스타일의 열띤 기도로 개회하고 통성기도의 위력을 발산한다. 물론 열린 예배 형태를 띠는 이러한 예배 특성은 장로교나 오순절 교회나 감리교회가 차이가 없고 성결교와 매 한가지다. 한국교회는 이미 목회적 특성에서는 통합을 이루었고 융합의 시대를 경험하게 한다. 특히나 경배와 찬양 분야에서 대중적 의미에서 이미 오순절 신앙화 되어 있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대중성을 감안하면 오늘 논의하는 오순절 성령운동과 이용도 목사 주제는 다소 뒤늦은 감이 있다. 그만큼 한국교회 목회의 현주소는 성령 임재로 가득 채워져 있다. 한번 생각해 보라. 예배시간에 ‘주여 삼창’을 하고 시작하는 영락교회 예배와 간편한 옷차림으로 강단에 나와서 찬양을 인도하는 장로교 목사들과 부흥사들을 그 누군가 상상인들 했겠는가. 예배시간에 찬양 끝나면 박수치고 설교자에게 은혜 받았다고 박수친다. 지금 장 감 성 구분은 무의미할 뿐 더러 이제 일선교회들의 주된 관심은 공동적인 기반위에 사람을 모으고 교회를 키우는 것인데 실제로는 교회의 도덕성이 무너지고 이제 와서 가당치나 한 소린가 말이다. 부흥운동의 촉발점 곧 성령 은사를 맞고 은사를 체험하는 만남의 정점에는 그리스도가 계시다. 삶에 고통당하는 인간 삶 속에 개입하여 성육신하시는 위로자로 나타나는 성령 하나님은 바로 인간 삶의 꼭지 점에서 예배와 찬양 봉사와 헌신이 통일적으로 나타난다. 여기에는 순복음도 장로교도 성결교회도 감리교도 예외는 없다. 지금 이렇게 하나로 융합하고 있고 또 하고자 한다.
지난 1968년 스웨덴 업살라 총회의 위임사항으로 개시된 오순절 성령 은사운동을 조사하는 프로젝트가 영국 버밍엄대학교 선교학 교수였던 독일인 월터 홀렌버거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때부터 모은 월터 홀렌버거의 연구 자료는 무려 17권의 책으로 출판되었다. WCC는 지난 1998년 아프리카 짐바브웨 제8차 총회에서 결의한 대로 6년 동안 WCC-Pentecostal Dialogue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포르트 알레그레 제 9차 총회에 보고한 바 있다. 이런 토대위에 2004년부터 글로벌 크리스천 포럼을 구성하여 기존의 WCC 회원 교회뿐 아니라 오순절 계통의 교회들의 대표적인 신학자들과 교회 우두머리들을 초청하여 모임을 갖고 있다.
이러한 세계적인 흐름에서 볼 때 이용도 목사 연구는 토착적인 영성연구를 포함하여 부흥운동 연구 식민지 지배체제 하에서의 선교운동 연구 등으로 외연을 확대할 수 있고 동시에 산 기도를 통하여 알 수 있는 입신과 방언 예언과 및 비성경적 이단성향도 연구할 수 있는 문호가 활짝 열려야 한다. 여기에서 오순절 성령운동의 기존 연구를 덧붙이고 이용도 신학사상의 한계 상황인 신비주의 연구를 넘어선다면, 이것은 오순절 성령은사운동으로 설교 및 상담학을 보탤 수 있고 현대교회가 필요로 하는 목회 전문분야에 도달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그런데 여기에 비하여 지난 1978년 감신대 신학과 세계에서 보여주는 연구 분위기는 일정하다. 그것은 이용도 신비주의에 대한 감리교 신학의 연구 주제인 ‘십자가 신비주의’ 또는 ‘신비신앙의 내면화’ 안에서 소화할 것으로 믿는가. 이것은 전문적 이단 감별사들이 난무하는 장로교회에서는 밥으로 안다. 이단분별에 관용적인 감리교회에 비하여 이단 사이비 문제에 혈안이 되어있는 장로교회와는 불을 보듯 뻔하다. 이 문제 저 문제가 서로 상충되고 대립되면 그것이 동기가 되어 잠재된 분쟁과 현실적인 장애를 동시에 몰고 오게 된다. 따라서 여기에서 제안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다. 1907년 한국교회 대부흥 운동에서 경험한 회개운동과 30년대 부흥운동의 모티브가 되는 은사운동의 융합이 현대적인 21세기 상황 하에서 오순절 성령 은사운동과 성결운동과 합체된 지구촌 성령운동으로 가야하겠고 이것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여 인간심령의 완전한 파악과 구원과 신비와 신앙훈련으로 얻어진 신학적 융합을 이루자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것이 지난 세월동안 이용도 목사의 이단적 신비신앙에 대한 교회들의 의구심을 잠재우는 것이며 앞으로 신비신앙 체험의 새로운 대중화의 활로를 찾아나가는 주님의 주권을 세우고 있다. 여기에는 하나의 선험적인 실제 사례로서 1930년대 아시아라는 대륙에서 동시적으로 활동했던 인디아의 신비주의 영성 선다 싱의 유산도 크게 작용한다. 이 흐름에서 보자면 성령역사의 신비주의적 차원 곧 주님임재로 귀착된다. 복음주의에서 한 단계 진전이 있는 것을 은사주의로 보면 그것은 신비주의의 일파일 따름이다. 그렇게 되면 기성교회의 두터운 목회 장벽에 걸려서 이단적 비판을 당한다. 의심의 눈초리만 받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인디아의 사두 선다 싱이 겪어야만 했던 이단시비와 다를 것이 없다. 이것을 십자가 신비주의라고 부른다. 아니다. 오순절 성령 은사운동은 미 대륙에서 꽃이 피었는데 반하여 한반도에서는 십자가 신비주의로 매장 당하였다. 이것이 이용도 목사 신앙 활동에 대한 한국교회 기성권력의 가해행위였다. 사도 선다 싱도 결국은 독일 가톨릭 교회의 신학자들에 의하여 카일라쉬 산중에서 만났던 프란시스 하비에르 시대에 활동하였던 인디아 십자가 전도자 마하리시를 만난 것과 티베트 선교 문제로 인하여 이단시비에 휘말렸다. 이것이 성령 은사운동이라는 한계상황이었다. 이런 문제는 금촌 처녀부활 설교와 휴거 소동으로 인하여 제기된 여의도 순복음교회도 장로교의 이단시비에 걸렸다. 결국 순복음교회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총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한국교회를 상대로 하는 기독교 신학 변증과 교리신학의 논리를 개발하는데 필요한 재원 염출과 인재 영입 그리고 대중매체인 국민일보를 창간하고 세계 신학연구원을 창설하게 된다. 그렇게 했어도 초반에는 장로교의 공세에 밀려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말도 못한다. 결국은 막대한 돈을 들이고 맘 고생하면서 이단 시비를 벗어났다. 이번 2008년 6월부터 여의도순복음교회의 후계자가 된 이영훈 목사는 조용기 목사의 사도 바울이 되었다. 그는 세계 신학연구원을 통하여 문제가 된 이단 시비를 가리기 위하여 소위 말하는 ‘3박자 구원 5중 복음’의 교리를 한국교회에 새로 조명하는 한편 사차원 영성의 리더십을 제시하여 한국교회 신흥 주류 교회로서의 자기 위상을 제시하였다. 이제는 한걸음 더 나가서 사회구원의 서비스 시대로 선언하고 성령 방언으로 출발한 거대교회를 사회봉사의 공동체로 새롭게 전환시키겠다는 방향을 설정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핵심은 이용도 목사에 대한 논구는 오순절 성령은사와 신비주의적 신앙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경험하고 나눌 수 있는 구속사역의 증거를 완비하여 성령 하나님의 유일한 주권에 대한 논의를 심화시키고 영적 싸움판을 벌리자는 것이다. 공중의 권세 잡은 세력들이 악한 영을 전파하고 있으며 공교회의 영적 권위에 도전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신비신앙에 심취하게 되는 초보들은 하나같이 성령과 은사를 받고 방언하면서 꿈 해석과 개인에 대한 예언 기도로 가고 결국은 입신, 영서쓰기, 개인 예언을 중심으로 하는 주님임재 현상까지 나가고 있다.
이 문제는 일찍이 코리아 미션필드에 이용도 목사에 대한 글을 쓴 피도수 선교사의 글에서도 민감하게 지적되어 있었다. 특히 이용도 목사의 최후의 8개월은 원산 광석산 기도원 생활을 주로 다루면서 이단적 혐의가 어디에 있는지를 찾았다. 입신의 중심에 있었던 원산감리교회의 유명화 씨의 문제를 포함하여 한준명의 영류 현상(Influx)과 어린양 혼인 잔치가 중심에 있었다. 변종호 목사를 이를 흑마 한준명이라고 불렀고 순진하고 애매한 이용도 목사는 한준명 씨 때문에 죽게 되었다고 통탄하였다. 검은 악마로 지칭된 한준명 목사는 결국은 어린양 혼인 잔치를 주도하면서 이단성을 나타냈다. 이것은 해방 후 정득은 여인을 통하여 피가름으로 실행에 옮겨졌고 혼음현상으로 정착되었다. 통일교는 피가름을 무차별 산포하면서 무지몽매한 남녀들을 조직화하였고 혼음은 세상법정에 가서 큰 문제점을 남겼다. 그러나 그 후에 통일교는 이것을 가지고 조직을 다지고 관리하는 의식으로 발전시켜서 비밀스럽게 전수되었다. 그런데 왜 이 문제가 이렇게까지 강력한 파급 효과를 가지고 있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악한 방법으로 행사하는 강한 조직력을 발휘하도록 하는 방법이다. 즉 인간관계의 최종적 접촉 방식의 하나인 성적 행위를 매개로 하는 악랄한 방법으로 인간 공동체 안에서 얼마든지 예상할 수 있는 남녀 관계를 매개로 삼아서 조직을 확대하고 내밀한 관계성을 구축하려는 신흥 종교들의 조직 확산 방법에 다름 아니다. 이것은 최종적으로 교주의 카리스마에 굴복 당하게 만드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1950년 한국동란을 겪으면서 안게 된 사회적 혼란과 불안 심리에 편승하여 새로운 조직형태를 시도하여 기성교회를 허물어내고 신흥종교의 교주로 하여금 돈과 조직과 카리스마를 행사하도록 출구를 튼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혼음 파티를 열고 성적 수치심을 배면에 숨긴 채 조직을 확산하고 재화를 약취하여 여성들을 노리개 감으로 삼아 기업도 일으키고 비밀조직도 확산시켜나간 극악무도한 방식이었다. 그중에 문선명의 통일교는 초창기에 6명의 여성들을 접촉하여 ‘6 마리아’라고 하면서 재화를 강탈하고 은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자파 조직을 확대해 나갔고 이것이 기화가 되어 종교조직이 기업으로 진출해 재화를 얻게 되었다. 당시 통일교는 예화, 산탄, 공기총 공장을 창업하면서 일화석재도 만들었다. 이것이 후에는 대형 기업으로 성장하여 종교 활동을 하면서 동시에 기업 활동도 하였다. 일화를 창업하고 이제는 세계적인 건축기업인 엄 건축연구소와 평화자동차가 있고 영가목회 곧 심령술의 예전의식을 장악하여 7대조의 영적 포로를 청산하고 헌금하라는 쪽으로 갔다. 현재는 가평 청심 빌리지를 통하여 다양하게 이끌어가고 있다. 물론 조직의 비리도 있고 암투도 있으며 이권을 둘러싼 숙청도 있다. 그러나 조직 체계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상상도 못할 조직원 간의 통제방식과 카리스마 리더십의 행사가 훨씬 정교해졌고 치밀해졌다. 이용가치가 없다고 판단될 때에는 거침없이 숙청해버리는 사악함도 체계화되었다. 초창기 유효원 선생을 숙청하고 방기한 것은 약과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집단들은 국외자들 입장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내면적 갈등이 폭발 직전까지 간다 한들 아무 소용이 없다. 분명한 것은 이들의 내면에는 밀교 형태를 띠고 있으며 재화와 통치기술의 교묘한 측면에서는 기업적인 생리도 띠고 있다. 조직의 현실과 일반적인 교회공동체 관리 기법과는 전혀 다른 전략적 측면에서 다루는 목회 생리가 이들 집단의 로지스틱스 라면 과언일까. 결국은 조직 초기 넘치는 조직과 통제의 힘을 발휘했던 원리강론의 핵심 교리인 이성 합일과 탕감복귀 교리는 결국은 하나의 종교의식으로 자리 잡았으며 조직의 밑바닥에서 정형화의 길을 열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시무언 이용도 신비주의의 진수가 무엇인지’와 동시에 ‘기성 교회가 기피하는 신비 신앙을 목회 현장에 적용하는 데 어떤 문제점이 없겠는가’하는 것이다. 종교의 신비적 요소는 어떤 신앙 집단이든 갖게 마련이지만 문제는 이러한 은밀한 형태를 띠는 조직의 경우는 비인간적이고 인권유린의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공동체의 덕을 파괴하고 조직을 카리스마 일인에게 의존하게 된다는 문제점을 낳는다. 이것이 신흥종교의 조직내부의 비인간적인 모순이다. 지상 천국의 환상을 주면서 조직 내의 잔인한 인권유린은 제거하지 않는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자면 신흥 종교의 본질적 특성인 광신적 공동체의 속성상 1인 지배하의 카리스마 공동체로 변질되고 따라서 다수 대중들의 눈을 속여가면서 서로 서로를 속이고 조직 장악을 위해 연약한 지체를 희생시킨다. 이러한 조직들은 조직 내의 모든 사항을 협의하지 않고 이너서클에서 처리하고 폐쇄적인 재정 운용과 독재적인 관리방식을 고수한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역동적인 성령은사를 가지고 시작하였어도 무조적 일하고 봉사하는 분위기를 이용하여 착취하고 통제하는 한편 성령운동의 은사를 외면한다. 반면에 이용도 목사의 예수교회는 성령운동의 진정성을 담보로 삼아 초대교회의 조직처럼 자발적인 봉사 체제를 통하여 은사를 개발하고 전도하는 사도행전적인 원시 공동체를 지향하였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평신도 신학이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목하는 핵심적 과제는 무엇일까. 그것은 성령 역사의 현재성 바꾸어 말하면 성령 임재를 체험한 이들이 기성교회의 무기력함을 떨쳐 버리고 의문의 율법에서 벗어나 영에 속한 혁명을 체험하는 것이었다. 피터스 선교사의 전언에 따르면 이용도 집단은 여기에 덧붙여 당시 기성교회가 믿는 성탄절의 기원을 12월 마지막 주간으로 보지 않고 러시아 정교회가 주장하는 1월 중순의 성탄절로 셈하였고 18세기 영국 복음주의 성령운동의 일파였던 어빙파의 주장과 흡사한 성령은사를 채용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성교회의 관행을 깨부수고 새로운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암시다. 이런 일들은 영국감리교회에서도 일어났다. 성공회가 무기력하여 일어났던 비국교도 운동의 감리교회는 캠프 미팅 운동을 통하여 서민 대중의 요구에 응답하는 Free Methodist 운동을 일으켰다. 이들은 웨스트 미들랜드 지역에서 머시사이드 전역에 걸쳐서 일어난 민중 성령운동가들로서 주로 맨체스터와 리버풀이 들어가는 머시사이드 유역까지 확대된다. 이들 Free Methodist 운동 세력들은 민중중심의 성령은사 운동을 강력하게 펼치면서 마음껏 기도하고 찬양하고 싶어 천막을 치고 산중에 들어갔다. 이들은 성령 받고 은혜 받고 기도하고 설교하면서 후기 퀘이커교가 그랬듯이 회중 출신들이 주도하는 집회를 하면서 설교권마저도 대중들에게 공개하는 집회운동을 전개했다. 여기에 참여한 이들은 주로 웨스트 미들랜드 지역에 몰려든 노동자와 농민과 교사와 학생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이들은 찬송과 기도 설교와 개인 예언 기도가 한데 어울리는 역동적인 신앙공동체를 구축하였으며 민중 신앙적 특성을 간직하고 있다. 여기에 1738년 5월 회심사건을 경험한 요한 웨슬리 목사도 이와 유사한 집회를 경험한다. 그것은 웨스트미들랜드 지역 위쪽 인 더비 주의 뉴캐슬 업 폰 타임에서 체험 한 것이다. 그것은 은사 체험의 일종으로 충격적이었다. 70명이 한데 모여 기도회를 하다가 입신하고 방언하고 밤을 샜다. 연속적인 집회를 통하여 기적의 은사를 체험한 것이다. 1907년의 웨일스 성령운동과 인디아 카시 힐의 기적 그리고 한국 대부흥운동도 그때 일어났다. 이것도 성령역사였다. 1907년 미국 L.A. 아주사 거리에서 감리교 전도사인 펀햄(Furnham)이 주도한 24시간 연속집회도 방언 받고 찬양하고 예언하고 은사행하고 설교하고 하는 역사도 같은 맥락이다. 여기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이것이다. 1930년대를 거쳐서 사회적 혼란기에 직면한 한국교회는 수많은 이단사이비 세력들이 등장하여 기독교 신앙 정통과 본진을 위협하고 혹세무민하는 혼란상을 연출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여 교회는 정통신앙을 파지하고 이단 사이비 척결에 대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박태선 전도관을 위시하여 문선명 통일교와 나운몽 장로의 용문산 기드온 신학교 등은 기성교회를 뒤흔들고도 남는 위력을 발휘하였다 이는 비참한 전쟁의 참화를 극복하자는 뜻에서 기성교회의 권력은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정규 신학교 출신 설교자들을 대신하는 이단적 카리스마들이 대거 등장하여 교권을 농단한 것이다. 이러한 신흥종교의 발흥에 직접적인 영향을 대라면 그것은 1930년대의 이용도 목사가 있다. 여기에서 발원하여 배재학교를 나온 만주 용정출신 황국주가 있고 훗날 통일교를 일으킨 문용명 곧 문선명이 있다. 이들은 다같이 이용도 목사에게서 은혜를 받았다. 우리는 이것을 한국 메시아운동사의 맥을 같이하는 김백문·유효원·변찬린·한에녹 씨의 것을 담지하고 있다. 물론 한태동 교수의 부친이신 한에녹 장로를 여기에 포함시키는 문제는 논외로 하자. 그러나 이들의 흐름은 일정하게 해방 후 극심한 사회적 혼란기에 처하였던 한국교회의 영적 전통의 형성과정에서 빗나간 한국교회 신비주의 신앙운동의 일맥으로 파악할 수 있으며 이른바 민중 메시아 운동의 한 줄기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므로 민중 메시아 운동은 이러한 한국기독교의 신비주의 신앙에서 출발하였고 샤머니즘을 비롯해 선도와 민간 불교의 전승에서 수혈 받은 신비주의가 혼합주의적 형태로 나타났다고 해석한다. 특히 문선명의 통일교는 정득은 여인의 피가름에서 힌트를 얻었고 한준명 씨의 어린양 혼인잔치에서 형상화하였다. 한국동란 후 피가름의 은밀한 전수행위는 기독교를 모태로 하는 신흥종교운동의 비밀스런 의식으로 발전하는 양상을 띠었다. 덧붙여 이단 신앙 사상들이 우후죽순처럼 솟아났다. 김백문 씨의 이스라엘 수도원과 유효원의 통일교 원리강론과 한에녹 씨의 영원한 복음, 변찬린 씨의 성경의 원리 상·중·하도 한결같이 한국교회의 민중 메시아 운동의 산물이라 할 만하다. 지금도 민중 메시아 운동의 경전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들의 입장은 전통적인 한국인의 종교성에 뿌리박은 신비주의 신앙운동으로서 민중메시아 운동이다. 그때마다 이들을 이용도 목사의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보았다. 물론 종교적 비의를 전수할 목적으로 집필된 이단 문서들에는 불행했던 한국 현대사의 굴곡진 역사의 뒤안길에서 버림받은 민중의 종교심성을 선동하고 조직화하려는 목적이 숨어 있다.
따라서 이러한 종교적 혼란기를 직면한 한국교회의 장자 교회라고 부를 수 있는 장로교회도 100여개 가까운 분파로 분열되어 나갔다. 언제나 문제되는 것이 정통과 이단이다. 오랜 세월 동안 누적된 분열상을 겪으면서 장로교는 이단과 정통 나누기가 생존 법칙이 되었고 이러한 교회풍토가 자연히 이단 감별사의 위치에 서게 하였다. 거기에다 텃새까지 가세하니 점입가경이 되었다. 이러한 바탕에서 보자면 특히 황해도와 평양에서 인기가 많고 부흥회를 인도하던 이용도 목사는 자연스럽게 이들 집단들과 부딪치고 대립하면서 약점인 신비 신앙 사상의 단초들이 장로교 정서에 상충되었고 이단정죄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특히 이용도 목사 최후의 8개월 동안에 진행된 원산 광석산 기도원에서의 신앙행태나 내용들이 대상이다. 이러한 전후 정황들을 살펴보면 결과적으로 스웨덴보리 신비신앙으로 빠져나가는 것도 자연스럽다. 18세기 세계적인 신비신앙의 극치를 이루었던 그에게 경도되어 버린 예수교회를 이해 못 할 것도 없다. 극단에서 극단으로 이어진 위험한 게임을 이용도 후계 세대들은 경험하였다. 이는 아마도 이용도 목사도 예상치 못했던 결과였으리라. 일정한 형태의 종교 카리스마를 소유하고 있는 교주들이 종교 독점행위를 이루는 것은 상상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지나친 독선과 이권에 눈 먼 사람들이 카리스마를 배경 삼아 선량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마음대로 조작하고 인권을 유린하는 행위를 서슴대지 않았던 것이 오늘날도 한국교회의 도덕성을 땅에 떨어뜨린 작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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