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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목 교수의 문화칼럼 에 해당하는 글169 개 |
2008/10/26 병든 사람들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위로 (4) 2008/10/19 가을과 모차르트 (3) 2008/10/12 에누 바이러스의 감염자가 되자 (4) 2008/10/05 칭찬도 배워야 할 복음적 예술이다. (2) 2008/09/28 하나님의 약속 (5) 2008/09/21 갚을 수 없는 빚 (3) 2008/09/14 인내는 희망을 품는 기술이다. (1) 2008/09/07 추석 -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자. (1) 2008/08/31 거룩한 교회, 고상한 크리스챤 (2) 2008/08/24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가 중요하다 (1) 2008/08/17 누가 먼저 십자가를 질 것인가? (1) 2008/08/10 역설적 계명,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라. (2) 2008/08/03 나는 동바리 나무 토막 입니다. (3) 2008/07/27 성령의 마음, 성령의 사람들 (2) 2008/07/20 공허와의 전쟁 (1) 2008/07/13 중류(中流)의 지주(砥柱)를 보라 (3) 2008/07/06 온전(穩全)한 순종 (2) 2008/06/29 성령의 시대 (4) 2008/06/22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3) 2008/06/15 나로 하여금 이렇게 기도하게 하소서 (4) 2008/06/08 누가 주를 믿고 따를 것인가? (3) 2008/06/01 교회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 (1) 2008/05/25 멋있는 크리스천이 됩시다. (1) 2008/05/18 그야말로, 당신은 인간이십니다. (4) 2008/05/11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합시다. (1) 2008/05/04 잘 살려거든 거룩한 생명을 선택하십시오. (1) 2008/04/27 성령이시여, 나를 온전히 채우소서. (3) 2008/04/20 최후의 승리는 내가 나를 이기는 것이다. (3) 2008/04/06 혀를 다스려라. (4) 2008/03/30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4) 2008/03/23 내가 사니, 너희도 살리라 (1) 2008/03/16 내가 썩어야 향기가 난다. (2) 2008/03/16 왜 믿음이 자라지 못할까요? 2008/03/09 왜 믿음이 자라지 못할까요? (1) 2008/02/24 받은 축복을 헤아리며 늘 감사하자. (1) 2008/02/17 얄미운 기도, 경솔한 기도. 2008/02/10 죤의 믿음과 실천 (1) 2008/02/10 어떤 종류의 말을 사용하십니까? 2008/02/03 떪감을 주거든 연시를 만드십시오. (1) 2008/01/20 하나님! 고통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7) 2008/01/13 역경이 우리를 아름답게 만든다. (7) 2008/01/06 사람에게 시간은 무엇인가? (7) 2007/12/30 네 가지 질문 (8) 2007/12/23 하늘의 향기를 땅에 내려주신 크리스마스 (1) 2007/12/16 타는 목마름으로! (5) 2007/12/09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7) 2007/12/09 가정예배는 경건의 모본이다. (6) 2007/11/25 디모데와 그 한가지 부족한것 (7) 2007/11/18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상품을 팔고 있다. (6) 2007/11/11 화상(火傷)과 동상(凍傷) (3) 2007/11/08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고 (6) 2007/10/28 <말썽>보다 <말씀>을 세우십시오. (9) 2007/10/21 은혜는 언제 우리곁에 다가오는가? (9) 2007/10/14 [선데이칼럼]이제부터 교회는 미션(Mission)이다. (7) 2007/10/07 교회는 십자가를 중심에 두고 세워진 생명 공동체다. (4) 2007/09/30 너희가 이렇게도 깨달음이 없느냐? (10) 2007/09/23 생각하며, 감사하는 추석명절 (7) 2007/09/16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께 받고 사는 존재들이다. (12) 2007/09/09 지금 우리는 어디에 서 있으며,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10) 2007/08/26 이것이 바로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13) 2007/08/19 예수님에 푹 빠지십시오. (16) 2007/08/12 믿음의 기도, 그 분이 누구십니까? (16) 2007/08/05 신앙의 실제적인 뿌리는 어디서 시작되는가? (10) 2007/07/31 패배란 마음의 상태에 불과하다. (10) 2007/07/22 장기판의 차(車)처럼 오만과 자만에 빠지면... (11) 2007/07/15 소르본 교회도 볼 수있습니다. (14) 2007/07/08 당신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10) 2007/07/01 무엇을 찾으십니까? (4) 2007/06/24 못난이를 선택하시는 하나님의 이유 (5) 2007/06/17 바르게 지는 것이 옳게 이기는 길입니다. (13) 2007/06/10 당신은 하나님의 명기(名器)입니다. (7) 2007/06/03 위하여! 누구를 위하여? (6) 2007/05/27 나의 혀는 길고 손은 짧았나이다. (13) 2007/05/20 시련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입니다. (17) 2007/05/13 왜, 그 사람들이 우리들보다 잘 사는가? (4) 2007/05/06 더 무겁고 더 험한 십자가를 지십시오. (11) 2007/04/29 파충류만도 못한 인간들 (5) 2007/04/22 세 가지 종류의 성도들 (12) 2007/04/22 십자가를 누리십시요. (9) 2007/04/15 하필이면 왜 그 사람인가요? (10) 2007/04/08 주여, 당신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 (10) 2007/04/01 당신의 삶을 통째로 바꾸고 싶습니까? (4) 2007/03/25 푸로소프 박사에게 배우십시오. (10) 2007/03/18 별것 다 기억하는 사람들 (6) 2007/03/11 저는 <친절한 죄인>입니다. (6) 2007/03/05 묶지만 말고 풀어야지요 (13) 2007/02/25 <게으른 부자>는 결코 용서 할 수 없다. (1) 2007/02/18 장로란 어떤 분인가? (7) 2007/02/11 지식(智識)인가? 잡식(雜識)인가? (8) 2007/02/04 복음의 열정(enthusiasm)을 가진 사람들 2007/01/28 베품의 손길보다, 불우한 자의 인격을 존중하라. (5) 2007/01/28 아침은 늘 새롭지만, 아첨은 언제나 괴롭다. (6) 2007/01/14 예수의 피 밖에 없습니다. (5) 2007/01/07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6) 2006/12/31 한해가 또 저물어 간다. (6) 2006/12/24 단순하게 믿으라 (12) 2006/12/17 십자가를 함부로 폄훼(貶毁)하지 마십시오. (11) 2006/12/10 하나님 앞에 겉과 속이 다름은 옳지 않다. (11) 2006/12/03 꿈꾸는 사람들만이 더 큰 꿈을 가질 수 있다. (7) 2006/11/26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8) 2006/11/19 한 장의 비누가 물에 녹으면 (10) 2006/11/12 시냇가에 심은 나무들 (9) 2006/11/05 예수님의 질문 (6) 2006/10/29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7) 2006/10/29 글쓰기의 어려움과 고통 (7) 2006/10/15 마귀가 실제로 있습니까? (5) 2006/10/08 마음의 소금을 간직하십시오. (2) 2006/10/01 하나님보다 높아 지려고 하는 죄 (8) 2006/09/24 하늘나라 일꾼을 뽑습니다. (7) 2006/09/17 생각하는 힘을 키우십시오 (6) 2006/09/10 책 좀 읽읍시다. (1) 2006/09/03 죤. 바리콘 (John. Barley Corn)씨의 가족을 아십니까? (11) 2006/08/27 어떻게 예술공연을 감상해야 합니까? (4) 2006/08/20 바보 같은 눈물, 바보 같은 인생 (6) 2006/08/13 부채로 성령의 바람을 불게하라 (10) 2006/08/13 문화선교는 하나님의 축복이다. (9) 2006/08/13 바라보면 벽이지만 밀고 나가면 문이다. (5) 2006/07/28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의 신앙적 의미 (4) 2006/07/28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예수님 (5) 2006/07/28 “주여, 우리로 기도하게 하소서” (4) 2006/07/28 나 자신을 내려놓으십시오 (5) 2006/07/28 故 윤덕수 목사를 기리며… (7) 2006/07/28 우리가 행복한 이유는 (5) 2006/07/28 크리스마스, 도데체 이게 뭡니까? (4) 2006/07/28 무엇을 <아멘>하십니까? (9) 2006/07/28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들 (5) 2006/07/28 성문밖, 그들은 누구인가? (5) 2006/07/28 자식농사 (6) 2006/07/28 설교가 예배의 주 요점은 아니다. (7) 2006/07/28 영안이 밝아야 한다. (3) 2006/07/28 너의 모든 것이 내 안에 있다. (5) 2006/07/28 Poison이냐? Poisson이냐? (6) 2006/07/28 주의 영광을 우리에게 보이소서 (5) 2006/07/28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섭리의 진리는 과연 무엇일까? (4) 2006/07/28 지금 네가 어디 있는냐? (5) 2006/07/28 쉬지 말고 기도하라 2006/07/28 주기도문을 드릴 때마다 2006/07/28 더러 알아도 모르는 척하라 (4) 2006/07/28 정말, 죄송합니다. 2006/07/28 신앙도 날씨에 따라 변하나? (5) 2006/07/28 자 화 상 (10) 2006/07/28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향기로운 것은 (3) 2006/07/28 오늘은 당신에게 최고의 선물 (5) 2006/07/28 바캉스가 가져온 그늘 (4) 2006/07/28 올림픽 챔피언과 하늘의 면류관 (5) 2006/07/28 故김선일형제-사막에 뿌린 선교의 피 (4) 2006/07/28 누가 그를 우는 갈대로 만들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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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든 사람들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위로 김영목 교수의 문화칼럼 | 2008/10/26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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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몹쓸 질병은 수천가지가 넘지만 지켜야 할 건강은 단 하나뿐이다.
15년을 내환(內患)으로 병원을 집처럼 들락날락거린 나에게 환자가 지닌 마음의 고통은 그 어느 누구보다도 가슴으로 잘 이해할 수 있다. 흔히 병상조력자들은 ‘질병은 육체의 장애일 뿐 마음이나 의지의 장애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얼마나 얄밉고 겉도는 충고인가? 환자는 몸보다 마음이 더 아픈 것을 어떻게 견디고, 참하게 받아드리란 말인가? 그들은 날마다 병상에서 자신의 꺼져가는 넋에 보다 가까이 다가서며 영혼의 절벽을 처절하게 산책하는 사람들이다. 다가설수록 안타깝고, 껴안을수록 측은 하고, 불쌍한 사람들이 바로 환자다.
환자가 날마다 절박하게 생각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일 뿐이다.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 보다 어떻게 해야 병이 나을 것이냐 하는 것 이외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이 부럽다 못해 못내 미운 것은 자신외 활발하고 건강한 밖의 모든 사람들이다. 건강이 그 토록 부럽다는 것이다. 몹쓸 병에 걸린 사람들은 안개 낀 겨울 숲 속에 한두 마리 떼 지어 우는 까마귀 소리에도 자신의 미래를 민감하게 예측한다. 그들은 한 없이 불안하고 예민하다.
그러나 우리들 스스로 건강하다고 자랑하지 말라. “우리는 누구나 어떤 면에서 병들어 있는 것일세, 병의 증세를 찾지 못했을 때 그것을 건강이라고 부를 따름이지... 건강이란 상대적인 말에 불과 할 뿐이야.” ■ T.S 엘리어트
그렇다. 환자라고 문병하며 위로하고 동정하지 마라. 그들과 우리의 차이는 확인된 환자와 미확인된 질병의 차이일 뿐이다.
때로 예절 없는 병문안이나 위로심방 때문에 욥기에 나오는 욥처럼 위로보다 상처를 입는 환우가 더 많다. 그래서 더더욱 병상심방은 경건해야 한다.
우리가 환자들을 위해 중보기도자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은 그들이 건강을 잃었을 때, 그리스도를 가까이 모실 수 있는 은혜와 기회야말로 <그리스도 없는 건강>보다 더 축복받은 상태라는 사실을 이해시키는 일이다.
그리고 환자로 하여금 이렇게 기도하도록 그들의 마음을 이끌자.
-아버지 하나님! 병중에 있는 동안 나의 속사람을 위하여 특별한 은혜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고요한 중에 우리의 삶을 어떻게 영위해 왔는지를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연약한 기간 중에 당신께서 나의 눈을 열어 주실 것을 기도드립니다. 당신의 빛 가운데서 나의 인생을 보게 하시고, 당신과 다른 사람들을 슬프게 한 것들과 당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죄지은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병중에서 은혜의 시간, 회개의 시간을 주심으로서, 나의 옛 생활과 옛 행실과, 옛 습관에서 돌아설 수 있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당신의 징계가 헛되지 않아 당신의 형상과 같이 깨끗하여 지고, 변화된 새로운 피조물로서 이 병상에서 털고 일어서게 하옵소서. 당신께서 저에게 새로운 생활과 건강을 주실 때에는 당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기쁨이 될 수 있는 삶을 살도록 도와주시옵소서.” - ■ 바실리나 슐링크
이처럼 우리가 연약한 환우들을 생각하고 보살피며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이다. 그 사랑은 치료할 필요가 없는 거룩한 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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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과 모차르트 김영목 교수의 문화칼럼 | 2008/10/19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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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다.
<한로>도 이미 지났고, 무서리 내리는 <상강>이 코앞에 다가섰다. 교육관 12층에서 바라보는 북한산 인수봉, 오봉은 날마다 단풍잎으로 물드는 - 아름답고 쓸쓸한 가을이 야곰야곰 칠부능선을 따라 내리서고 있다. 10월 서리 맞은 단풍잎이 춘삼월 꽃보다 더 붉다더니 교회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가을은 아름답다 못해 슬프기까지 하다...
정말이지, 전혜린의 우울한 독백처럼 <가을은 모든 것의 정리의 달>인 것 같다. 우리의 신앙도 -믿음 안에서 만남과 나눔과 섬김도 한 해가 가기 전에 계수할 필요가 있다. 믿음생활도 솔직히 잘 하려면, 힘들고 지치고 피곤할 때가 많다. 쉬어가는 계절, 가을의 위로 속에 가을에 가장 어울리는 음악은 없을까? 모차르트 <크라이넷 협주곡 4장조 K622중에서 2악장>을 가슴에 묻어보자. 일명 <모차르트의 크라이넷 협주곡>이다. 가을과 모차르트는 서로 잘 어울리는 매치 메이커다.
어쩌면 이곡은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영화음악으로 친숙한 곡이다. 거의 모든 곡에 손을 댄 모차르트는 크라이넷을 위해서는 단 2개의 뛰어난 걸작품만을 남겼다. 그 중 하나가 <크라이넷 협주곡>이다. 이 곡은 모차르트가 숨지기 전 불과 두 달 전에 완성된 곡으로 알려져 있다. 들으면 들을수록 맑고 고운 슬픔이 단풍잎처럼 가슴을 아리도록 물들게 한다.
말년에 모차르트는 비엔나에서 불행하고 가난한 생활을 불끼 없는 냉방에서 양말을 장갑삼아 작곡하며 살았다고 한다. 쇠약하고, 병들고, 가난하고, <버려진 가을 남자> 같은 모차르트를 지극정성으로 도운 한 친구가 있었다. 크라이넷 연주자 안톤스타들러 (Anton Stadler)였다.
배고픈 모차르트의 손에 빵과 돈을 쥐어주며 <나는 변함없이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속삭인 안톤스타들러-그는 모차르트에게 가장 아껴 존경하는 벗, 외우였다.
바로 이 놀라운 모차르트의 크라이넷 협주곡은 고마운 친구 스타들러를 위해 쇠약해진 모차르트가 손수 작곡한 곡이다.
가을 - 사랑하면서 만나고 나누고 섬기는 사람들 가운데 나의 분주한 <오늘> 때문에 <어제>에 버려지고 죽어간 사람들이 없는지... 이 가을에 거두고 보살피며 돌보시기 바란다.
이 아름다운 크라이넷 협주곡을 감상하시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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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누 바이러스의 감염자가 되자 김영목 교수의 문화칼럼 | 2008/10/12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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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 주변에는 불안하게 전개되는 <사회현장상황>에 대한 위기와 불안, 비극적 실수들이... 과연 일반 사람들의 신념이나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솔직히 우울하고 불안하다.
실예로 금융위기로 인한 지나친 위기의식이라든지, 최진실씨의 자살로 인한 ‘베르테르식 모방효과’, ‘자기실현적 위기의식으로 인한 공황심리’ 경쟁교육에서 유발되는 ‘모차르트효과’ 성격도 나이도 살아온 인생역정도 모두 다른 사람들이 꿈 하나로 뭉쳐 서로 부딪히고 싸우고 화해하고, 얼싸안고 보듬어나가는 모 방송국 수목드라마의 ‘베토벤 바이러스’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전혀 새로운 희망 - 이런 사회적 영향과 파급효과에 대한 희망 만들기로서 ‘에누 바이러스’(Ennui-Virus)의 등장 등... 사회심리학자들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세상을 향해 머리를 맞대고 서로 도와야 할 일들이 늘어나고 있다.
나는 오늘의 <사회적 위기상황>이 나쁜 바이러스에 감염되었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예컨대 지나친 위기의식이 더 큰 위기를 부추기고 있다. 가정, 교회, 나라, 기업할 것 없이 모두 <망한다>, <안된다>, <절망이다>, <희망이 없다>을 합창한다. 도대체 사람들은 왜 이런 불안을, 왜 이런 공포를, 말하고 믿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까? 자기실현적 위기의식 때문일까? 피학성 때문일까? 망상증 때문일까? 모방증 때문일까? 아무리 세상이 곤두박이 치고 요동해도 희망은 있다. ‘위기는 기회다’라는 희망의 혁명은 언제나 가능하다. 비록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을지라도 복음을 품은 마음은 항상 풍부하지 않은가...
여기 에누 바이러스를 가진 사람이 있다.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말과 행동을 하며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 있다. 육체가 아닌 영혼과 마음에 대한 희망바이러스를 가진 사람- 그가 누구인가? 구약의 인물<느헤미아>다. 느헤미아는 에누 바이러스를 가진 인물이다. 그는 제사장도, 예언자도 아니었다. 다만 희망을 가지고 남부끄럽지 않은 형태로 조직했던 헌신적인 평신도였다. 모든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할 때 그는 <하나님이 도우시면 가능하다>고 끝까지 희망을 불어 넣었다.
절망과 반대, 낙심, 어려움 속에서도 그는 희망의 노래를 잃지 않고 행복과 희망을 퍼트리는 에누바이러스를 가진 행복전도사였다.
바로 느헤미아의 에누 바이러스의 다음 전염자는 바로 오늘의 우리들의 몫이다. 그리고 부정적인 말이나 생각에서 긍정적인 말과 외침으로, 절망의 늪을 희망의 바다로 만들어야 한다. 희망- 정신과 영혼에 대한 에누 바이러스는 <고귀한 생명의 구조와 인간정신의 원동력을 이루는 본질적 요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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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도 배워야 할 복음적 예술이다. 김영목 교수의 문화칼럼 | 2008/10/05 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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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하는 사람들에게 ‘파데레브스키(Paderewski)콩쿠르’하면, 유럽과 폴란드의 음악적 자존심을 걸고 모든 장르의 곡으로 경연을 펼치는 것으로 유명하다.
우리나라에서도 미국동포 박정아 양이 제6회 국제피아노콩쿠르에서 최고 연주자상을 수상한 바 있다.
파데레브스키는 누구인가? 파데레브스키 아그나시 얀 (Ignacy Jon Paderewski), 그는 리스트 (Franz Liszt) 이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세계 최고 세계 최상의 전설적 피아니스트이다...
그는 소년시절부터 피아니스트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했지만 음악학교 선생님들은 그를 반가워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외모도 빨강머리로 특이 한데다가 그의 손가락부터가 피아노를 치기에 너무 짧고 너무 굵었기 때문이다. 그 어느 누구도 그를 제자로 받아드리기를 거절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마음의 상처와 낙담에 빠진 그에게 어느 날 당대의 유명한 피아니스트인 루빈스타인 (Anton Rubinstein)을 특별히 면접할 기회가 이 소년에게 찾아왔다. 소년은 거성 루빈스타인 앞에서 피아노를 쳤다. 루빈스타인은 묵묵히 그의 연주를 듣고 박수를 쳤다.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비록 부족하고 미흡한 점은 많지만, 앞으로 대성할 수 있는 제목감으로 인정했다. 루빈스타인은 그 소년의 미래를 내다 본 것이다.
너무나 기쁘고 감격한 소년은 매일 7시간씩 피아노를 연습하겠다고 루빈스타인에게 약속했다.
수십 번의 퇴짜와 거절로 낙심과 실망에 빠진 소년은 이처럼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 그리고 폴란드의 초대대통령, 국민적 영웅, 세계적인 작곡가로 만든 것은 다름 아닌 노력하는 한 인간에 대한 격려와 인정 때문이었다.
쇼팡하면 전문 연주가로 파데레브스키를 손꼽는다. 그의 아름다운 열정적 심성이 오선지에 그려진 <피아노 협주곡 OP.17> - 그를 감히 폴란드의 국보적 국민적 사랑과 존경을 받는 피아니스트겸 작곡가로 만든 것은 그의 미래를 끝까지 믿고 지지하며 내다 본 루빈스타인의 긴 안목 때문이었다.
우리가 사는 교회나 가정, 그리고 직장, 생활환경에는 감정이 서린 꾸지람, 충고나 책망보다는 칭찬과 격려와 인정 그리고 박수를 더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영국 속담에 “바보를 칭찬해 보라 그러면 훌륭하게 쓸 수 있다.”는 말처럼, 큰 스승 루빈스타인은 제자 페데레브스키에게 던진 그 한마디 격려와 칭찬은 <고매한 정신에게 있어서는 박차였으며, 박약한 정신에게 있어서는 위대한 목표>였다.
예수님의 사역의 절반은 버림받은 자들에 대한 위로와 격려 칭찬이었다. 칭찬도 우리가 배워야 할 복음적 예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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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약속 김영목 교수의 문화칼럼 | 2008/09/28 0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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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날마다 우리들에게 이것만은 ‘꼭 기억하라’ ‘잊지마라’ ‘믿어라’고 누누이 바라시고 당부하시는 말씀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신실한 약속이다. 세상에 이 믿음만큼 든든하고, 확실하며, 안전한 것이 또 어디 있을까? 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신뢰와 확신이다. 그것은 값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약속의 진실성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선물로 알고 꾸준히, 그리고 확실하게 믿으면 된다.
그렇다면 당신의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것만은 꼭 기억해주기를 바라시는 약속의 말씀이 무엇일까? 요한 웨슬리의 기도처럼, 내 가슴에 하나님의 약속의 도장을 찍고 영원토록 믿음의 명세로만 아로새길 가장 확실하고 가장 믿을 수 있는 하나님의 당부의 말씀을 소개하기로 하자.
➀내가 너에게 능력을 주리라 (I will strenghen you) ➁내가 너의 필요를 채우리라 (I will provide for you) ➂내가 너에게 응답하리라 (I will answer you) ➃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I will be with you) ➄내가 너를 편히 쉬게 하리라(I will give you rest) ➅내가 너를 축복하리라 (I will bless you) ➆내가 너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I will not fail you) ➇내가 너를 믿는다. (I believe in you) ➈내가 너를 위해 있으리라 ( I am for you) ➉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I love you)
이 놀랍고 감격적인 약속들은 신비스럽게 주어지고 받아지는 우리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안에 근원을 두고 있음을 결코 있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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갚을 수 없는 빚 김영목 교수의 문화칼럼 | 2008/09/21 0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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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리먼 브러더스 몰락으로 촉발된 세계금융쇼크를 바라보면서 문득 이런 예화를 생각하게 되었다.
보스톤의 백만장자인 <바아턴> 회장에게 어느 날 <스트로사>라는 한 젊은 청년이 찾아왔다. 그는 큰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꿈을 이루는데 빈털터리 여서 큰일에 쓰일 밑천이 될 2000불을 빌려 달라고 부탁했다.
비록 자기 자신에게는 담보가 될 물건은 없지만... 일에 대한 꿈과 용기, 그리고 비젼이 있으니, 그 걸 믿고 대여해 주시면, 그 은혜를 평행 잊지 않겠노라고 말했다.
바아턴씨는 청년의 정직한 용기 하나만을 믿고 이천불을 선 듯 빌려 주었다. 스트로사는 열심히 일해서 얼마후 그 돈 전부를 갚았다. 이 일이 있은 후 10년이 지났다. 미국에는 대 경제공황이 일어나서 바아턴 회장의 회사는 파산이 될 지경에 이르렀다. 소문으로 이 사실을 알게 된 스트로사는 충격에 빠진 바아턴 회장을 찾아가 “회장님이 빚진 돈 7백5십만불을 내가 대신 갚아 주겠다”고 말했다.
바아턴회장은 깜짝 놀라면서 “자네가 빌려갔던 돈은 이미 갚았는데 무슨 소리요?” 하고 의아해 했다.
“분명히 회장님이 빌려주신 빚돈 2천불은 옛날에 갚았지만 어렵고 힘들 때 당신이 베풀어 준 그 사랑과 그 은덕은 평생 갚지를 못합니다. 그 때에 2천불로 장사를 해서 오늘 저는 이렇게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라고 스트로사는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빚을 갚고 안 갚고는 수입이나 계수상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 됨됨이 - 곧 인품의 문제다. 받은 은혜와, 입은 은덕, 베푼 사랑은 갚을 길이 없다. 사랑과 은혜를 돈으로 갚을 수 있다거나, 갚아진다고 믿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어쩌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갚을 수 있는 빚>보다 <갚을 수 없는 빚>이 더 많다. 지금까지 음으로 양으로 두루, 고루, 널리, 깊히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 - 그 <계속 사랑>, 그 <전부 은혜>, 그 <크신 은덕>- 그것은 무한채무로서 오직 영원을 통해서 갚아 질수 있다. 성경은 말씀하신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빚진 자라는 전제아래... “피차 사랑의 빚 이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말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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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는 희망을 품는 기술이다. 김영목 교수의 문화칼럼 | 2008/09/14 0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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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를 비롯한 모든 성도들의 가장 아름다운 신앙적 품성은 무엇일까?
참는 것이다. 참는 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도무지 참을 수 없는 것을 참는 것을 말한다. 현대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아버지 쉴라이에르마허(F.Schleiermacher)는 성도의 경건성을 강조하면서 “인내, 참을성이야말로 희망(소망)을 품는 가장 탁월한 기술이다.” 라고 말했다. 그러기에 신약성서 로마서에는 -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단련을, 단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권면한다.
인내의 맛은 마치 육모초즙처럼 쓰다. 그러나 최후에는 달고 부드러운 열매를 맺는다. 신앙생활이나 섬기는 일 그 자체는 긴 인내다. 만약 우리가 좀더 참고, 좀더 견디려고 노력만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엄청난 능력을 우리에게 내려주신다. 참고 견디면 문이 열리고, 열쇠가 풀리며, 하늘길이 트인다.
<자장>이 스승<공자>곁을 하직하면서 인생의 미덕이 될만한 마지막 가르침을 여쭈었다. 공자는 떠나는 제자에게 “모든 행실의 근본은 참는 것이 제일이다.”라고 대답했다.
<자장>이 다시 묻기를 “선생님, 어째서 참아야 합니까?”
- “천자가 참으면 나라에 해가 없을 것이요, 제후가 참으면 땅이 커질 것이요, 벼슬아치가 참으면 그 지위가 올라갈 것이요 형제가 참으면 집안이 부귀할 것이요, 부부가 참으면 일생을 같이 해로 할 것이요, 친구끼리 참으면 서로 명예를 세워줄 것이요, 나 자신이 참으면 <화>와 <해>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자장>이 다시 물었다. “선생님, 참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 “천자가 참지 않으면, 나라가 빈터로 화할 것이요, 제후가 참지 않으면 몸조차 없어질 것이요, 벼슬아치가 참지 않으면 법에 걸려 죽게 될 것이요, 형제가 참지 않으면 각각 분거할 것이요, 부부가 참지 않으면 자식을 외롭게 할 것이요, 벗끼리 참지 않으면 정의가 멀어질 것이요, 나 자신이 참지 않으면 근심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인내와 신앙은 태산이라도 움직인다.
인내는 천당문을 여는 열쇠다. 하나님은 모든 일에 참고 견디려는 성도들을 향하여 이렇게 당부하신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계14: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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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자. 김영목 교수의 문화칼럼 | 2008/09/07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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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는 어떤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의 죽음과 함께 같이 죽고 함께 망하는 사람들이 여럿이 생깁니다. 우리는 흔히 죽은 자를 사망(死亡), 혹은 망자(亡者)라 부릅니다. 동시에 죽은 자의 남편은 망부(亡夫)가 되고, 죽은 자의 부인은 망처(亡妻)가 됩니다. 물론 죽은 자의 후손은 고자(孤子) 아니면 망손이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순수한 우리말이 아닙니다. 더구나 우리가 믿는 신앙도 아닙니다. 이런 말들은 한문에서 유래된 말로써 사망이란 문자 그대로 <죽어 망한다.>는 뜻이고, 망부, 망처나 망자(亡者)는 모두가 <망할 놈>이란 의미입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은 <망하는 것으로 끝나는 죽음의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 어느 곳에서도 <죽어 망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사역은 더 이상 사망이 인간의 삶을 좌우하거나 죄의 결과로 활개 치는 것을 중단시켰습니다.(요 5:24, 롬 6:23)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진 부활의 소망과 생명의 승리를 확신케 했습니다.
그러나 옛날부터 우리민족은 사람이 죽으면 <세상을 떠났다.>, <돌아가셨다>는 말을 써 왔습니다. 이처럼 아름답고 내일의 삶이 뚜렷한 우리말의 ‘내세관’을 두고도, 왜 하필이면 절망적인 의미의 한자의 말 - 남의나라 말인 ‘망(亡)자’를 사용하고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도 사망한다는 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떠난다.>는 의미의 별세(別世)나 하늘나라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간다.>고 하셨을 뿐입니다.
우리 모두는 죽거나 망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추석을 앞두고, 돌아가신 조상들을 생각하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의 신앙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참조 - 김수창 <돌아가는 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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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교회, 고상한 크리스챤 김영목 교수의 문화칼럼 | 2008/08/31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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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사람들의 눈에 비친 오늘의 크리스채너티, 그들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굴욕과 치욕을 먹칠한 오감(汚監)일까? 소망과 기대를 비추는 등대일까? 유일한 가능성으로서 희망의 혁명일까?
카나다의 원로목회자요 신학자인 피에르 버튼(Pierre Berton)은 <안일한 좌석(The Comfortable Pew)>이라는 책에서 오늘의 크리스채너티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부여한 <지도적 위치와 사명>을 깡그리 포기하고 말았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은 필자를 포함, 말씀을 위한 그들의 봉사는, 모두 입과 말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려드는 진한 유혹을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 스스로 그리스도의 고상함을 잃거나 손상한 채로 하나님의 성령을 벗어나 있거나, 하나님의 형상(Image Dei) - 인간의 고상한 인격, 인간의 도덕적 성품을 - 잃은 채... 세상 사람들을 진절머리 나게 한다.
고상한 크리스챤은 말과 행동을, 믿음과 실행을 함께 실천해야 한다. 디이트리히 본회퍼 역시 “나를 따르라.”에서 희생과 봉사없는 고상한 신앙이라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크리스쳔은 모름지기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세상에 의해서 고통 받을 일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된다.
고상한 크리스채너티의 절대적과제는 그들 스스로의 영혼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를 위해서 자신들의 영혼을 - 험하고 힘든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세상과 모험에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적극적으로 내어 놓거나 던지거나 바치는 삶이다.
사도바울은 오늘의 크리스채너티들에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성도의 가장 고상한 길>이라고 단정했다. 즉 세속적인 지식이 인생의 본질과 구원의 진리를 가르쳐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지식에 까지 새로워진 자는 자연히 그리스도를 닮거나 좇아가는 이른바 고상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범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L.넬슨 벨은 <고상한 그리스도인이 됩시다.>에서 이렇게 권면한다. 고상한 그리스도인은 - 참을성을 잃지 않는다. 화가 나더라도 건설적인 길을 모색한다. 잘 되는 사람의 행운을 시기하지 않는다. 타인에게 자기의 중요성이나 뛰어난 점을 강조하지 않는다. 타인의 좋은 점 긍정적인 부분만 바라본다. 타인의 실패나 사악함을 즐기듯 고소한 듯이 바라보지 않는다.
언제 누구 어디에서나 좋은 예법의 선지자이다. 매사 그의 마음과 생활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준다. 사람 앞에서가 아닌, 하나님 앞에서 항상 깨끗하고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한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 - 그리스도인의 인격과 도덕적 성품임을 잊지 않는다. 그것이 그들의 긍지요 자부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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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준을 어디에 두느냐가 중요하다 김영목 교수의 문화칼럼 | 2008/08/24 0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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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언행을 적은 <논어>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공이 공자에게 묻습니다.
“선생님 훌륭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까? 온 마을 사람들이 그 사람, 참 좋다, 훌륭하다고 하면 그 사람은 훌륭한 사람입니까?”
공자는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시다면, 온 마을 사람들이 나쁘다고 하면, 그 사람은 정말 나쁜 사람입니까?”
역시 공자는 <아니라>고 또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과연 훌륭한 사람입니까? 고 되묻자 “훌륭한 사람이 그를 훌륭하다고 하면 훌륭한 사람이고, 나쁜 사람들이 그를 나쁘다고 하면 그 사람은 진짜 좋은 사람이다.” 라고 공자는 대답했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사실입니다.
기준없이 어떤 일을 내 입맛대로 판단하는 것은 매우 경솔한 짓입니다. 더구나 <...분명히>, 라든지 <...틀림없이> 등 이런 저런 상상과 감정이 판단으로 옮겨지면 결과는 아주 심각해집니다. 그래서 말썽이 생기는 것입니다.
교회나 신도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교회도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고,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서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의 시비가 항상 끊이지 않습니다. ‘훌륭한 사람’, ‘나쁜 사람’의 판단과 기준 때문에 때로 교회가 시험에 들기도 합니다. 특정한 판단이 교회의 평안을 해쳐서는 안 됩니다. 기준 없이 남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좋든지, 나쁘든지 누가 그를 인정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사람은 항상 자기 자신에 대해선 어떤 걸 생각하고 남에 대해선 다른 걸 생각하는 감정의 치우침과 쏠림현상이 있습니다.
스스로 자기 자신을 옳다고 인정하거나, 많은 사람들이 옳다고 인정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 사람이 옳은 사람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하실 때 만- 비로소 옳은 사람입니다. 기준을, 판단을 어디에 두느냐가 중요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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