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3강 소망이 부끄렵게 아니함은

제23강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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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강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5:5-8)  

5:5-8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지난 시간 우리는 환난의 의미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우리가 당하는 환난이 우리에게 괴로움만 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환난을 허락하실 때는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펴본 환난의 유익이 무엇이었습니까? 환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을 낳고, 연단은 우리의 소망을 이루어줍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환난 자체만을 바라보아서는 안됩니다. 환난 너머에 있는 소망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환난 중에서라도 얼마든지 감사하고 기뻐하며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고양이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자기의 고양이가 자기의 무릎 위에서 평안히 잠자고 있는 것을 사랑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가위로 그 고양이의 털을 사정없이 다 깎아버렸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고양이는 깜짝 놀랐습니다. 고양이는 거울에 비친 자기의 흉측스러운 모습을 보고서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고양이는 털이 뜯긴 곳을 자기의 혀로 핥으면서 속으로 다짐했습니다.
\"이제 다시는 나를 미워하는 주인 곁으로 가까이가지 아니하리라.\"
그러면서 그 고양이는 방 한쪽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계속해서 서럽게 울기만 했습니다. 저녁이 되었습니다. 앞집에 사는 고양이인 고순이가 문을 두드리면서 크게 소리쳤습니다.
\"야옹아, 나와서 놀자!\"
그러나 야옹이는 자기의 모습이 너무나 창피해서 나가지 않았습니다. 이웃집 고양이 친구들은 지붕 위에 모여서 마음껏 뛰어 놀았습니다. 그러나 야옹이는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겨울이 되었습니다. 날씨가 점점 추워졌습니다. 이상하게도 이웃집 고양이 친구들이 하나 하나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습니다. 하루는 야옹이 주인이 야옹이를 데리고 시장에 갔습니다. 어느 모피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모피점의 진열대 위에 고양이 가죽 여러 개가 진열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야옹이 주인은 야옹이에게 이렇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여기 흰 가죽 보이지? 이것은 바로 앞집의 고순이의 것이란다. 여기에 있는 검은 고양이 가죽 보이지? 이것은 뒷집에 있는 고돌이의 것이란다. 여기에 있는 누런 가죽은 옆집에 있는 누렁이의 것이란다. 이제 알겠느냐? 내가 너의 털을 사정없이 깎아준 것은 너를 미워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너를 잡아가지 못하도록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란다.\"
그 소리를 들은 야옹이는 비로소 주인의 깊은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뒤로 다시금 주인을 잘 따르게 되었답니다.
제가 어릴 때 살았던 시골 동네에는 과수원이 많았습니다. 이른봄이 되면 일군들은 사과나무의 가지를 쳐줍니다. 어떤 때는 굵은 가지조차도 사정없이 잘라버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때는 어린 마음에 어른들이 하는 행동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 어른들은 저렇게 손해나는 짓을 할까? 가만히 두면 저 가지에도 틀림없이 열매가 많이 맺을 텐데. 참 이상하다.\"
그러나 철이 드니까 그것이 절로 이해가 되었습니다. 일군들이 사과나무의 가지를 잘라내는 것은 나무를 미워해서가 아닙니다. 불필요한 가지를 잘라주어야 사과나무가 더욱더 온전히 자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때로는 털을 깎아내는 듯한 아픔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가지를 잘라내는 듯한 아픔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환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미워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환난을 허락해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환난 속에서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환난을 당할 때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확신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환난 속에서 기뻐하고 감사하고 즐거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속에서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는 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편의상 오늘 본문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 봅니다.

첫째로, 우리의 소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합니다.

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소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합니다. 소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아니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소망을 이루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소망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헛된 소망입니다. 썩어질 세상에 두는 소망입니다. 이런 소망은 신기루와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사막을 지나갑니다. 물이 다 떨어졌습니다. 목이 갈합니다. 그런데 멀리 쳐다보니까 오아시스가 보입니다. 기를 쓰고 그곳을 향해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곳에 도착해 보니까 오아시스가 어디로 가버렸는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신기루였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낙심이 되었을 것입니다. 없는데도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서, 가짜를 진짜처럼 생각하고 달려온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부끄럽게 여겨졌겠습니까?
성경에서도 그 비슷한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해 농사가 잘 되었습니다. 그래서 곡간을 새로 짓고 그 속에 곡식을 가득가득 쌓아놓았습니다. 그러면서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내 영혼아, 이제는 편히 쉬면서 먹고 마시고 즐기자.\"
요즘 말로 하면 어떤 사람이 사업을 잘 했습니다.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큰 빌딩을 지었습니다. 은행에 돈을 많이 저축해 두었습니다.
\"이제는 이것만해도 내가 일평생 동안 충분히 먹고 살겠지.\"
그러나 물질에 소망을 두고 기뻐하는 사람을 향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12:20의 말씀입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그렇습니다. 사업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사업이 망해버릴 때, 함께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권력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권력이 붕괴할 때, 함께 붕괴해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다 신기루를 좇는 것과 같습니다. 부끄러움을 당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종류의 소망이 있습니다. 참된 소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두는 소망입니다.
\"이 몸의 소망 무엔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은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습니다. 낙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그 소망을 이루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오직 한 분에게 소망을 두고, 환난에서 인내로 인내에서 연단으로 연단에서 소망으로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나아가는 우리들을 신실하신 예수님은 결코 실망시키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반드시 우리의 소망을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스데반을 생각해 봅시다. 굵은 돌멩이들이 그를 향해서 날아오고 있습니다. 그는 순교하는 자리에서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았습니다. 그는 장차 자기에게 임하게 될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스데반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우편에 서 계신 것도 보았습니다. 두 손을 활짝 벌리시고 \"이리 오너라!\"하시면서 반겨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결과 돌에 맞아 죽는 자리에서도 그의 얼굴은 천사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우리 나라의 여순반란사건 때였습니다. \"사랑의 원자탄\"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손양원 목사님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두 아이는 모두 어린 중학생이었습니다. 목사님의 두 아들이 빨갱이들에게 붙들려 나무에 묶였습니다. 빨갱이 가운데 한 사람이 그들을 고문했습니다.
\"만일 너의 머리 속에 있는 예수 사상을 빼내지 아니하면 내가 너를 죽이겠다.\"
그 때 아이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네가 우리 목은 떼어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의 마음 속에 불타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결코 빼앗지 못할 것이다!\"
결국 두 아이는 총살당했습니다. 사흘 뒤에 순교한 두 아들의 시신을 앞에 놓고서 손 목사님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의 두 아들은 미국으로 유학 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미국보다 훨씬 더 좋은 하늘 나라로 인도해 주셨으니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기독교인으로서 평범하게 살다가 죽는 것만 해도 감사한데, 예수님을 전하다가 순교하게 해 주신 것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는 오히려 환난 가운데서도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환난 너머에 있는 소망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뒤에 두 아이를 죽였던 범인이 붙잡혔습니다. 그도 역시 젊은 학생이었습니다. 그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손 목사님은 경찰서로 뛰어갔습니다.
\"그 아이를 죽이지 마십시다. 차라리 그 아이를 제게 양자로 주십시오. 그 아이를 죽이는 것은 사랑하는 제 두 아들을 다시 한 번 죽이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내가 그 아이를 맡아서 훌륭하게 기르겠습니다.\"
그의 청원은 받아 들여졌습니다. 손 목사님은 그 아이를 자기의 양자로 삼았습니다. 훌륭하게 믿음으로 잘 길렀습니다. 나중에 그 아이는 자라서 주의 종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를 반겨줄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 가운데서 바라보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기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딤후4:7∼8에 있는 말씀입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예수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은 결코 실망하지도, 부끄러움을 당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소망을 이루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왜 우리의 소망이 그처럼 확실한지 살펴봅니다.

내가 잘나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환난을 통해서 인내심을 그만큼 배양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나의 신앙과 인격이 그만큼 연단을 받았기 때문도 아닙니다. 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나도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속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엄청나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단어가 있습니다. 5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어주실 때, 인색하게 한 방울씩 한 방울씩 톡톡 떨어뜨려 주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부은 바 되었다고 했습니다. 아낌없이, 조금도 남긴 것 없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쏟아 부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지금도 우리를 향해서 폭포수와 같이 넘치게 부어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을 우리의 어디에 부어주셨다고 했습니까?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물론 우리가 얼마든지 머리로 지식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우리의 마음 속에 쏟아 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만 해도 우리의 가슴이 뜨거워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이 메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칠 줄 모르는 눈물과 감격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엄청난 사랑을 우리의 마음 속에 쏟아 부어주는 역할을 누가 하십니까? 오늘 본문을 다시 보십시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주도권은 하나님에게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솔선으로 우리의 소망이 분명히 이루어지는 것이지, 내가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신 소망을 분명히 이루어 나가실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여러 해 전이었습니다. 미국 네바다 주립대학과 인근에 있는 대학사이에 농구 시합이 벌어졌습니다. 입추의 여지가 없을 만큼 수많은 관중들이 경기장에 꽉 들어찼습니다. 열기가 얼마나 뜨거웠는지 모릅니다. 전반전이 끝나고, 잠시 쉬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관중석 중간에서 영화의 스크린처럼 흰 천이 커다랗게 펼쳐졌습니다. 사람들은 웅성웅성 하면서 호기심을 가지고 그 천을 뚫어져라 쳐다보았습니다. 그 천에는 집채만한 큰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Susan, will you marry me(수잔, 나와 결혼해 주겠소)?\"
어떤 남학생이 자기가 사랑하는 여학생에게 사랑의 고백을 하면서 결혼해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것을 보고서 관중 가운데 한 사람이 갑자기 소리지르기 시작했습니다. \"Say yes(예라고 말하라)!\" 그 소리를 시발로 해서 그곳에 있는 관중들이 다 한 목소리가 되어서 이렇게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Say yes(예라고 말해라)!\"
한참 뒤 어디에선가 분명하고도 또렷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Yes, I will(예, 하겠어요).\"
결혼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소리와 함께 그곳에 있는 관중들은 모두 일어났습니다. 모두가 뜨거운 박수를 보내며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얼마나 멋있는 장면입니까? 기막힌 사랑의 표현과 또 그것을 응원하는 관중들의 마음, 또 멋진 사랑을 받아들이는 여학생의 뿌듯한 행복감. 정말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멋진 장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마음 속에 쏟아 부어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의심이 가십니까?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대한 첫사랑을 다시 회복하시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밖으로 나가서 이따금씩 푸른 하늘을 쳐다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저 푸른 하늘에 뭉게뭉게 떠 있는 구름들을 한 번 쳐다보시기 바랍니다.
\"○○야, 내가 너를 너무나도 사랑한단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쓰신 사랑의 글을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의 소망이 확실한 것은 내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나도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한 사랑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봅니다.

이것은 과거에 내가 어떠한 형편에 있을 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 주셨는지를 생각해 보면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6절 상반부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가 연약할 때에 사랑해 주셨습니다. 본문에 \"연약하다\"라는 말로 번역을 했는데, 이것은 연약한 번역입니다. 본래 뜻은 \"전혀 힘이 없다\"라는 뜻입니다. 무능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무능할 그 때에 나를 사랑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에게 무슨 힘이 있었습니까? 우리가 무슨 힘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또 우리가 무슨 능력으로 죄의 자리에서 벗어나 구원에 이를 수가 있었겠습니까? 아무런 힘이 없었습니다. 전적으로 무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우리를 하나님은 어떻게 사랑해 주셨습니까? 6절 말씀을 다시 봅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우리는 경건치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살았습니다. 하나님 밖에서 멀리 살고 있었던 우리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속에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을 심어주셨습니다. 또 하나님이 창조하신 천지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어떠했습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못했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생각은 허망하여 졌습니다. 그리해서 썩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죽어 마땅한 우리들, 경건치 못한 우리들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요3:16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경건치 못한 우리를 위하여 보내주셨습니다. 그리해서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기약대로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대신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남을 위하여 죽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비록 그 사람이 의인이라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내가 살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죽이기는 쉽지만,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내가 희생하고 죽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많다는 뜻입니까? 적다는 뜻입니까? 간혹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어쩌다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는 의인도 아니었고, 선인도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다 죄인이었습니다. 우리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었습니다. 혀로는 속임을 베풀었습니다.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었습니다. 입안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했습니다. 우리의 발은 피를 흘리는 데 빠를 뿐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죄인되었던 우리를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야,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 줄 아느냐?\"
이렇게 단순히 말씀만 하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나 대신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심으로 말미암아,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증명해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10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원수 되었을 때에.\"

하나님은 우리가 연약할 때에도 사랑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경건치 못할 때에도 사랑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에도 사랑해 주셨습니다. 심지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고 사랑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기록한 바울의 삶을 통해서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본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그는 예수님과 원수되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만일 그 때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바울에게 벼락을 내리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바울의 삶은 그것으로 끝장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참 끈질겼습니다. 멀리 다메섹에도 예수 믿는 사람이 숨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사람들마저도 다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의 공문을 받아들고 그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내려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바울은 원수로서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버리지 아니했습니다. 그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에 우리는 무능했습니다. 경건치 못했습니다. 죄인이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고 사랑해 주신 것입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다 형용 못하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 위에
죄 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제로 삼으시고 죄 용서 하셨네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괴로운 시절 지나가고 땅 위의 영화 쇠할 때
주 믿지 않던 영혼들은 큰소리 외쳐 울어도
주 믿는 성도들에게 큰 사랑 베푸사
우리의 죄 사했으니 그 은혜 잊을까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하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아직도 부족합니다. 때로는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때로는 실수합니다. 때로는 쓰러집니다.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보려고 애쓰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니 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 주지 아니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해 주셨는데, 왜 지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 주지 아니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망을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망은 결코 우리를 부끄럽게 아니할 것입니다.

\"사랑이 무한하신 아버지 하나님, 이 시간도 하나님의 전에 올라와서 신령과 진정으로 경배 드리며 오늘도 주신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와, 크기와, 넓이와, 깊이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연약할 때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경건치 못할 때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도 하나님은 사랑해 주셨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그 때도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해 주셔서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리해서 결국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이와 같이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인생 길을 걸어가면서 때로는 힘들고 어려울 때가 있지만, 하나님의 그 사랑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의지하면서 소망을 붙들고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도록 붙들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