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성으로 미국을 깨운 조나단 에드워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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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성과 대 각성 운동으로 미국을 깨운 조나단 에드워즈 미국 개신교 역사상 대 각성 운동을 주도한 하나님의 사람은 조나단 에드워즈(1703-1758)이다. 그는 탐구적이고 지적인 사상가였으며, 능력 있는 부흥 설교자였고, 지성과 영성의 균형과 조화를 강조한 청교도 목회자이다. 청교도 영성의 신학적 뿌리는 16세기 종교개혁이다. 청교도들은 칼빈이 주장한 하나님의 절대주권, 성경중심의 사상을 삶에 적용시킴으로서 종교개혁을 완성했다고 할 수가 있다. 청교도들은 인간의 전 삶이 하나님 면전에서 변화되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 (존 낙스, 존 번연, 휫필드, 조나단 에드워즈, 19c찰스 스펄젼, 존 라일, 그리고 20c의 로이드 존스, 제임스 패커)등이 그 맥락을 이어가고 있다. 금세기 최고의 개혁주의 설교자인 로이드 존스는 에드워즈에 대해 18c 미국 청교도주의 완성자로 평가하기도 한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지성과 영성을 겸비한 균형 있는 목회자, 영적 암흑시기인 18c 미국의 대 각성 운동을 주도한 청교도 영성가, 종교 개혁자라 할 수가 있다. 미국의 대 각성 운동. 청교도들이 신앙으로 세운 뉴잉글랜드 지역을 위시하여 인접한 미국 식민 주 들은 18c를 맞이하면서 신앙적 안일에 빠져들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무너져가고 이성과 합리주의가 판을 치던 18c, 영국에서는 존 웨슬리를 중심으로 “복음적 부흥운동”이 일어났고, 북미 영국의 식민지 뉴잉글랜드에서는 조나단 에드워즈를 중심으로 “대 각성운동(1720-1760)”이 일어났다. 이 운동을 제1차 대 각성운동이라 부르는데 이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사회, 문화, 정치, 경제 등 전반에 걸쳐 영향을 끼쳤기에 \"각성“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이 각성운동은 교회의 회중들을 청교도 신앙으로 환원시키는 영적 활력소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종족으로 나누어져 다양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미국 개신교도들에게 식민지의 정체성(identity)과 연합성(unity)을 제공 하였다. 더 나아가 각성운동은 미국인에게 주신 선교명령을 일깨우게 하였고, 이 명령은 그리스도의 왕국을 신천지 미국 땅에 구현시켜 모든 세계인에게 모범적 삶을 보여주도록 요구 받았다. 따라서 신학적으로 후 천년왕국설(postmillennialism)이 정립되었다. 에드워즈는 4년 동안 외조부의 사랑과 보살핌 속에서 목회 수업을 받다가 외조부가 사망하자, 24년 동안 뉴잉글랜드에서 목회를 하게 된다. 1727년 부임한 뉴잉글랜드 지역은 자유주의의 물결이 범람하여 타락하고 냉담했다. 신앙생활은 세속적이고 형식적인 상태로 전락되었다. 칼빈주의 신학 즉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오직 은총”이 무시되고 도덕적 기강이 허물어졌다. 그러나 에드워즈가 설교를 시작하면서 도시는 점차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지독한 학구파인 그는 매일 서재에서 13시간 이상 연구하며, 매주 설교 두 편을 썼으며, 심방보다는 설교준비, 말씀연구, 기도생활에 힘썼다. 1733년 노샘프턴 젊은이들의 향락적이고 사악한 모임을 준열히 꾸짖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자, 그의 설교에 깊이 감명을 받은 청년들이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이와같이 각성운동은 철저한 죄의 회개에서 시작되었다. 에드워즈는 가는 곳마다 주일을 지키지 않는 것, 기도하지 않는 것, 탐욕, 이웃에 대한 증오, 반목, 시기 등의 죄들을 낱낱이 지적하며 설교했다. 1734년 대대적인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고 더 나아가 삶과 행동에 변화가 나타나게 되었다. 1741년 7월 “진노하신 하나님의 손에 있는 죄인들” (sinners in the hands of angry god)이란 설교가 미국 전역에 큰 은혜의 역사를 일으켰다. 이 설교는 꺼져가는 청교도 정신을 새롭게 불어넣었다. 깊은 동면 가운데 있던 신자들의 가슴을 깨웠고, 영적으로 냉담했던 그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 면전으로 나오기 시작 했다. 하루 평균 13시간을 들여 준비한 그의 설교는 개인의 영혼뿐만 아니라 대 각성 운동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에드워즈의 설교의 핵심은 하나님의 진노가 아니라,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비를 받아들이도록 강력히 촉구하는데 있었다. 무절제한 주류거래, 부정한 노예제도, 남녀간의 부도덕한 성적타락으로 도시는 휘청거렸다.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할 기독교의 타락, 즉 자유주의와 이성주의의 확산은 젊은 지성인들을 교회에서 내몰았다. 이와 같은 때에 그의 설교는 잠자는 성도들을 깨우고 나아가 교회를 갱신 시키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였다. 하나님의 손, 즉 자비와 용서의 손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주신 그 사랑의 손길을 조l인들의 심령 깊숙이 심어주길 원했다. 성도의 참된 신앙고백과 신앙경험의 중요성은 에드워즈나 휫필드가 다같이 중요한 요소로 보았으며, 미국 제1차 대 각성운동의 특성이 되었다. 하나님의 주권과 부흥 에드워즈는 부흥을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일어나는 것이라 했다. 부흥이란 하나님이 직접 인간에게 임하시는 행위이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아래 이루어지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다. 영적각성이나 부흥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의 절대주권 안에서만 참된 부흥이나 각성운동이 일어남을 깨달아야 한다. 에드워즈의 집안은 3대째 목회자 가정이었다. 에드워즈는 어린 시절부터 자연과학이나 철학에 심취하였고, 예일대를 비롯한 명문대에서 공부했다. 그는 서재에서 13시간 이상씩 성경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영적은사들이나 감정표출에 관심이 없었다. 당시 일반 철학의 대표자 존 로크와 견줄만한 “인식론”을 제시한 기독 지성의 소유자였다. 지식에 대한 열망이 그로 하여금 완숙한 청교도적 사상을 가지고 “의지의 자유” “신앙의 원죄” 등 신학적 걸작과 1500여편의 설교를 남기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드워즈의 부흥에는 초자연적 현상들이 많이 나타났다. 부흥은 전적 하나님의 사역이다. 부흥에는 반드시 각성과 회개, 그리고 삶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살아 움직여 먼저 자신을 변화 시켜야 한다. 이 변화가 가정, 국가, 사회를 변화시키고 나아가 전 세계가 하나님의 임재를 심령 깊숙이 체험하는 것이다. 이것이 에드워즈를 통한 대 각성운동이었다. 부흥 혹은 각성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주권이지만 인간 편에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 에드워즈는 이렇게 말했다. “ 유효한 은혜 안에서는 우리가 단순히 수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느 정도는 하시고 나머지는 우리가 하는 그런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시고 또한 우리가 모든 것을 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산출하시고, 우리 또한 모든 것을 행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산출하신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의 행동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유일한 주체이시며 근원이시다. 우리는 다만 합당한 행동자이다. 우리는 전적으로 수동적이면서도 전적으로 능동적이다” 신앙의 성장이란 우연히 되거나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 속에서 끊임없는 노력과 순종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결과라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성도의 영적성장에 대한 성경적 관점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함께 동반 되는 것이라고 에드워즈는 말한 것이다. 에드워즈의 생애 에드워즈는 1703년 10월5일 코네티컷 식민지 이스트 원저에서 티모시 에드워즈목사와 에스더의 11자녀 중 다섯 번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청교도적 경건성 있는 목사였고 어머니도 메사츄세츠의 노 셈프턴 회중교회의 목사인 솔로몬 스토다트의 딸 이었으므로, 에드워즈는 태어나면서부터 청교도적 경건과 학문에 관심을 갖도록 훈련되었다. 6세 때 라틴어 습득, 10살에는 영혼에 관한 글을 지었고, 11살에는 자연계와 곤충들을 관찰하고, 소논문을 쓰기도 했다. 13살이 되자 코네티켓 뉴 헤이븐에 위치한 예일 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대학에 들어가기 전부터 자신의 영혼에 대한 관심이 많았었다. 아버지가 목회 하시는 교회에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을 때 자신의 신앙과 영혼의 구원에 관심을 갖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다. 하루에 다섯 번씩이나 개인기도 시간을 가졌고, 친구들과 신앙에 대한 대화도 나누었다. 또 어떤 기쁨도 맛보았었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가서 확신과 감정들은 사라져갔고, 개인기도 시간도 점점 더 가지지 않게 되었다. 옛날의 모습으로 돌아가 습관적으로 죄를 짓는 생활이 계속 되었다. 특히 늑막염이 걸린 대학생활 후반부에 습관적인 죄로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그는 크고도 강력한 내적 갈등을 겪었다. 죄를 짓지 않으려고 결심했다가 어기고는 다시 결심하는 일들을 반복했다. 때로는 하나님께 맹세를 해서라도 죄를 짓지 않으려고 몸부림치기도 하면서 이전에 죄악 된 삶과 온갖 죄를 끊어 버렸다. 그리고 구원을 얻기 위해 신앙적인 의무들을 준수했다. 그러나 전에 경험했던 감정과 기쁨은 없었다. 그런 가운데 1720년에 수석으로 졸업했다. 졸업 후 2년간 그곳에 머물면서 공부를 계속했다. 그러던 어느 날 디모데전서1;17절(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 멘)을 읽다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감각, 즉 전에 경험했던 어떤 것과도 전혀 다른 새로운 감각이 자신의 영혼에 생기는 것을 체험했다. 그는 말하기를 “ 성경의 어떤 구절도 이 구절처럼 내게 다가온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놀라우신 분인가? 만일 내가 그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천국에서 그 분에게 완전히 푹 빠지게 된다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그는 참된 회심을 경험하고 보통 때 기도하던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기도했다. 이 체험을 통해 그는 완전한 구원과 영적인 확신을 얻게 된 것이다. 에드워즈는 1720년에 뉴욕에 있는 조그마한 장로교회에서 목회현장을 실습한 후, 1723년에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724-26까지 예일대학 조교로 봉사하면서 유럽의 학문을 섭렵했다. 그는 성경 다음으로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글을 탐독했다. (존 플레이벨, 토마스 맨튼, 존 오웬, 데오필러스 게일, 사무엘 러더퍼드) 이러한 노력으로 그가 22살이 되었을 때, 그는 이미 성숙한 칼빈주의 자였으며 1726년에 외할아버지 솔로몬 스토다트가 시무하는 교회의 부목사로 취임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자격 요건을 갖추었다. 1729년 외할아버지가 사망하자 노 셈프턴 회중교회의 담임목사로 추대되었다. 에드워즈는 뉴 헤이븐에 살고 있던 사라 피어폰트와 결혼하여 30년간의 무난한 가정생활을 유지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하루 한번씩 아내와 합심하여 기도했고, 11명의 자녀들은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기도하도록 훈련받았다. 저녁식사 후에는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며 청교도적 경건을 자녀들에게 자상히 가르쳤다. 에드워즈도 휫필드처럼 새벽 4시에 기상하여 평균 13시간 정도 서재에서 성경연구를 했다. 에드워즈는 많은 서적을 가지고 있었으며, 성도들을 심방을 통해서 보다는 자신의 서재에서 만나기를 좋아했다. 그는 종종 금식기도를 하면서 영성개발과 자신의 신앙상태를 점검했다. 특히 그는 70개의 결심문을 가지고 있었는데 매일 한번씩 그것을 읽으므로 자신의 삶을 다스려 나갔다. 휫필드가 정열적인 웅변설교로 영국 사회에 혜성같이 나타났다면, 에드워즈는 자신의 탁월함을 글로서 나타냈다. 1731년 그의 글 “인간이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심”은 알미니안 신학에 반대하여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주권이 강조됨으로 인간 편에서 인간의 노력에 의해 구원을 이룰 수 없다는 정통 칼빈주의를 천명한 것이다. 1734-1735년 사이에 에드워즈가 시무하는 교회는 은혜로운 부흥을 맛보고 에드워즈가 출판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역에 대한 진술”은 미국은 물론 영국과 스코틀랜드에서 까지 널리 읽혀지게 되었다. 1740년 휫필드가 노 셈프턴을 방문할 무렵, 미국 제1차 각성운동은 식민지 지역 경계선을 넘어 여러 곳에서 불붙기 시작했다. 1750년 6월 에드워즈는 24년간 사역해온 교회로부터 축출 당했다. 이 사건의 발단은 교회의 중요한 위치에 있는 재력가의 아이들이 외설적인 책을 읽었는데 그가 이것을 꾸중함으로써 야기됐다. 에드워즈와 교회의 평신도 지도자간의 갈등은 신학적으로 확대되어 결국 교회의 정회원 230여명이 에드워즈의 사임을 찬성하고 반대자는 오직 23명뿐 이었다. 1751년 8월 버크셔스주 스톡브리지 교회에서 초빙의사를 표명했고, 그곳에 거주하는 호사톤족 인디언들의 선교사가 되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는 혼쾌히 승낙을 했고 열심히 복음을 전하며 인디언들에게 사랑을 실천했다. 이번에는 마음의 고통 못지않게 물질적 어려움이 그를 심하게 압박해왔다. 그의 가족들은 자수와 바느질, 부채를 만들어 생계를 유지해야만 했다. 설교 원고지도 거의 폐지를 사용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와 가족들은 심한 병고에 시달렸다. 그러나 결코 좁은 길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는 이곳에서 6년 동안 목회자와 선교사로 일하면서 학문연구에 집중하여 세상 끝 날까지 길이 남을 “신앙의 원죄\"와 ”의지의 자유“를 집필했다. 1758년 2월 그의 적성에 딱 맞는 프린스턴 신학교의 학장으로 취임하였으나, 취임 5주 만에 천연두 예방 접종이 잘못되어 1758년 3월 사망했다. 그 때 그의 나이 54세였다. 칼빈이나 휫필드와 같이 그 역시 한창 일할 나이에 생을 정리한 것이다. 그는 그의 임종을 지켜보는 딸에게 ”하나님을 신뢰하라, 그리고 두려워 말라‘ 고 마지막 말을 남겼다. 칼빈주의 자로서 에드워즈는 죽음까지도 전폭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맡겼기에 평온한 임종을 맞이했다. 그는 성경에 최고의 권위를 부여했고 자신의 깊은 학식과 풍부한 재능들로 말미암아 성경 혹은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지 않도록 자신을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복종시켰다. 그는 하나님께 지배당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제1차 대 각성 운동의 특징. 미국 제1차 각성운동은 칼빈주의 신학에 근거한 청교도 영성 운동이었다. 교회와 사회가 세속화되어 청교도 정신을 망각하고 있을 때 새롭게 일어난 부흥, 영성운동이 되어 미국인을 일깨우고 새로운 국가관과 민주주의 사조를 확립 시키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제1차 대 각성운동의 특징은? 1, 성경으로 돌아가는 삶을 살도록 했다. 그들은 성경말씀을 이해하였고 현실에 적용시켰다. 먼저 성경으로 자신들의 영혼을 살폈고, 성경말씀으로 자신의 양떼들을 먹였다. 그들은 불타는 열정과 사랑이 있었다. 2, 그들의 경건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는 신앙심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만 높이고 구속의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다. 뼈를 깍는 기도, 죄에 대한 분노, 이웃에 대한 힘찬 사랑과 친절한 봉사, 청빈하고 단순한 삶이 그들에게 있었다. 3,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순종함으로 경건을 드러내는 삶을 살았다. 4, 그들의 경건은 개인적 영역에 끝나지 않고 사회와 국가와 정치, 경제 그리고 문화의 영역에 큰 영향을 미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