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 모형의 성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제사 모형의 성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⑴

(레 1:1-17-7:38)




1.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신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으로 인도하여 언약을 체결하셨습니다. 이후 성막을 만들게 하셨고, 여기에 나아와 드려야 할 제사 제도들을 주셨습니다. 당시 시내산에 도착한 모세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궁극적으로 성취하실 중보자의 직무를 수행하여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를 언약 관계로 결속시켰습니다. 이때부터 이스라엘 백성은 특별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토대 위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성막을 만들 것을 지시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임마누엘하셔서 영원히 함께 하시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천막을 치고 거주했던 것처럼, 이제 여호와께서도 친히 당신의 장막으로 내려와 거주하시므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실 것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막은 하나님의 집이라고 불리워집니다.

성막이 세워진 때는 출애굽한 다음해인 제 2년 1월 1일이었습니다(출 40:17), 레위기는 이때로부터 시작해서 약 1달간에 걸쳐 기록이 됩니다. 그러나 좀더 정확하게는 성막이 세워질 때부터 레위기의 내용이 동시에 병행해서 주어졌습니다. 왜냐하면 레위기의 내용이 성막이 지어지기 전에 임시로 사용되었던 회막에서 베풀어졌기 때문입니다(1:1). 이후 2월 1일부터는 인구조사가 시작되고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의 군대로 편승되었습니다(민 1:1). 그리고 2월 20일에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시내산을 출발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힘입어 구원을 누리는 삶을 살게 된 새로운 공동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당신께서 베푸신 이러한 축복과 신분을 잘 유지해 나가게 하시기 위하여 필요로 하는 수단들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율법 조항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율법을 충실히 좇아서 사는 것을 통하여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 나가야 했습니다.

이 율법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첫째 부분은 도덕법입니다. 이 법은 만고불변의 법칙입니다. 둘째 부분은 국가법입니다. 이 법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나라로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여러 가지 계명들로 구성되었습니다. 가령 수혼법이라든가 가나안 땅의 경계에 대한 기록들입니다. 셋째 부분은 의식법들입니다. 이 법은 이스라엘이 범죄하였을 경우 하나님 앞에서 취해야 하는 제식(祭式)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집을 상징하는 성막에 나아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제사를 드려 헌신과 속죄를 이루어 나가야 했습니다.

특별히 각종 제식들은 하나의 모형 체제를 이루고 있습니다. 장차 미래에 일어날 어떤 획기적인 역사를 계시하였던 것인데,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하여 성취되어질 영원한 속죄의 제사를 보여주는 모형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와 같은 제사 제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교제 관계를 실제로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는 차원에서는 일종의 상징 체제였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받은 제사법들은 속죄의 원리 안에서 이미 받은 구원을 보다 굳건하게 누리게 하는 목적으로서의 상징이었지, 장차 구원을 받게 해주는 수단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상징이란, 어떤 사실이나 원칙 혹은 영적 진리를 볼 수 있는 형태로 묘사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모형은 미래에 성취되어질 어떤 원형을 가리키는 데서 나타납니다.

모세의 체제하에서 제사법들은 낮은 단계의 진리 형태를 취하여 물질적인 형태를 띄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제사법을 충실히 지켜 행함으로써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성립될 수 있었습니다. 제사법이 내포하고 있는 신학적 원리를 의지하는 신앙 형태를 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으로 들어오셔서 십자가의 형벌에 자신을 내어주셨을 때, 구약에서 계시되어져 나온 \'모형들의 체제\'는 완성되었습니다. 따라서 당시까지 구약 이스라엘이 누렸던 각양 제사 규례의 상징들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막과 제사 모형의 실체가 되는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막의 모형적 계시는 온전히 성취되었습니다. 제사가 모형으로서 계시해 나왔던 바도 역시 온전히 성취되었습니다. 이 큰 결론은 의심할 여지없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과연 그와 같은 모형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원리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계시하였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것을 정확하게 아는 것은 우리의 신앙에 큰 유익이 될 것입니다.

2. 죄의 본질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사법이 주어진 근본적인 이유는 다음의 두가지 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였을 경우 이를 사함받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장차 오실 메시아의 인격과 사역을 역사 속에서 계시해 나가는 하나님의 계시의 도구가 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 모두 죄를 도말하는 수단을 목적으로 삼습니다.

그러면 죄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편의상 제사 개념과 맞물리고 있는 \'죄 개념\'에 대해서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모든 제사는 기본적으로 죄를 전제합니다. 즉 죄를 속하거나 사함받기 위한 수단인 것입니다. 속죄 제사의 극치라고 볼 수 있는 속죄일의 제사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대제사장 아론은 \'아사셀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면서 \'죄\'를 고백합니다. 그런 다음 이 염소는 이스라엘 모든 백성의 죄를 지고 광야의 아사셀에게 보내집니다. 레위기 16장 21을 봅니다. \"아론은 두 손으로 산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낼지니.\" 여기서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은, 아론이 두 손으로 산 염소의 머리에 얹고 안수하면서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백한 부분입니다. 안수하면서 죄를 고했던 이런 상징적인 행동을 통하여 죄책의 전가가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은 아쉽게도 우리말 개역성경의 번역이 미미하여 원어가 가르치는 의미를 충분히 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고 그 죄를…\'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원문의 의미를 충분히 살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영어 성경(NASB, RSV)에서는 본래의 의미가 아주 정확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범죄(iniquities)와 그들의 모든 죄악(transgressions)과 그들의 모든 죄(sins)\"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보면 죄를 구체적으로 세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첫 번째로 살펴볼 단어는, \'범죄\'(히; 아원)입니다. 이 단어는 \'공정\'의 반대로 \'부정\'을 가리킵니다. 여기에는 행위적인 측면이 포함됩니다. 그래서 이것은 \'범죄 행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가령 사무엘상 20장 8절에 보면, \"그런즉 원컨대 네 종(다윗)에게 인자히 행하라 네(요나단)가 네 종(다윗)으로 여호와 앞에서 너(요나단)와 맹약케 하였음이니라 그러나 내게 죄악이 있거든 네가 친히 나를 죽이라 나를 네 부친(사울)에게로 데려갈 것이 무엇이뇨\"라고 한 표현이 나옵니다. 이 성경 구절은 다윗이 요나단에게 한 말입니다. 다윗은 자기를 낮추어 요나단의 종이라고 했습니다. 이때 \'내가 죄악이 있거든\'이라고 했는데, \'내게 범죄(아원)가 있거든\'의 의미입니다. 다윗은 요나단에게 만일 자기에게 범죄가 있으면, 붙잡아서 너의 아버지 사울에게로 데려갈 것 없이 네가 직접 나를 죽이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한 것입니다. 그만큼 자신은 공정하여 죄가 없다고 한 것입니다.

두 번째로, \'죄악\'(히; 페사)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신뢰의 파기\'를 가리킵니다. 이 단어의 어원은 보편적으로 \'술수\', \'위반\', \'어긋나다\', \'거역하다\' 등의 의미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좀더 세부적인 의미로는 \'반역\'과 \'신뢰의 파기\'라고 하는 개념을 가지고 있어서 죄의 특성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단어는 죄를 신학적으로 규정해 주고 있습니다. 죄는 여호와께 반역한 것이요, 그분과의 약속을 파기한 행위인 것입니다. 가령 아담이 범죄 했을 때의 죄의 성격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인간이 여호와께 대한 관계에서 실패했거나 혹은 의도적으로 여호와를 거스린 죄에서 찾아집니다. 이 죄의 성격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발생하고 있는 과실(過失)에서도 찾아집니다. 그 실례를 출애굽기 22장 9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어떠한 과실에든지 소에든지 나귀에든지 양에든지 의복에든지 또는 아무 잃은 물건에든지 그것에 대하여 혹이 이르기를 이것이 그것이라 하면 두 편이 재판장 앞에 나아갈 것이요 재판장이 죄 있다고 하는 자가 그 상대편에게 갑절을 배상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재판장이 죄 있다고 선언한 것은 죄악(폐사)인데, 물건을 맡은 사람 쪽에서 관리를 잘못하여 상호간의 신뢰를 깨트린 데서 발생했습니다.

세 번째로, \'죄\'(히; 하타)라는 단어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죄를 가리키는 가장 보편적이고도 중요한 단어로 사용되고 있는 이 단어는 \'목표를 놓치다\'라는 뜻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이 죄는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유지해 나가야 할 목표를 놓치고 있는 \'관계의 실패\'를 가리킵니다. 곧 인격 대 인격의 관계에 있어서 실패한 것을 드러냅니다. 한 예로, 사무엘상 2장 25절인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판결하시려니와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하되 그들이 그 아비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었더라\"에서 \'사람에게 범죄하면(하타)…여호와께 범죄하면(하타)\'의 의미가 그것입니다. 사람에게 범죄한다는 것은 사람과의 관계를 깨뜨린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여호와께 범죄한다는 것은 여호와와의 관계를 저버린 죄를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이 이 죄에 있을 경우, 반드시 여호와께서 명하신 제사를 드려서 용서를 받아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일련의 제사법 제도를 제정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제사법을 좇아서 사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을 누리는 삶을 온전히 보전해 나갔습니다. 이때 이스라엘이 제사 제도에 참여하는 것은, 그것을 제정하신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데서 되어지는 일입니다. 곧 계속적인 신앙 행위입니다.

3. 제사 제도의 기원은 하나님의 계시

성경에서 제사의 기원은 한참 옛날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첫째, 가인과 아벨이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둘째, 홍수 후에 노아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셋째,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이 제사를 드렸습니다. 넷째, 애굽의 이스라엘 백성의 경우에도 제사 개념이 전혀 새롭지만은 않았습니다. 이는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족장들로부터 제사 의식을 계승받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당시 애굽 사람들의 보편적인 우상숭배의 영향하에 있었던 때문입니다. 물론 이 두 경우는 외형적인 측면에서는 유사하였지만, 그것의 동기와 기원이라고 하는 측면에서는 확연하게 구별되었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자의적인 숭배였고, 이스라엘은 옛적부터 전해져 내려온 제사 계시를 신앙하는 데서 나온 경배였습니다. 다섯째,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제사법들을 직접적인 계시로서 주셨습니다. 즉 5대 제사법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후 본격적으로 제사 제도를 주셨습니다. 이 제사의 종류는 모두 다섯 가지입니다.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입니다. 이 5대 제사에 대한 기록이 레위기 1장 1절부터 시작하여 7장 끝 부분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5대 제사의 전형적인 형태는 \'유월절 의식\'에서 찾아집니다. 당시 이스라엘이 출애굽하기 위하여 시행했던 유월절 의식은 하나의 제사 행위였고, 속죄의 사상을 웅변적으로 나타내 보여줍니다. 이 속죄의 원리를 좀더 구체적으로 정교화시킨 것이 레위기에 나타나는 제사법들입니다. 이렇게 레위기의 제사법은 유월절 제사의 큰 기둥을 기반으로 삼습니다. 이런 까닭에 제사법은 구속사에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확연히 나타나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출애굽이 있기 전 애굽에서 역사한 하나님의 열 번째 재앙은 죽음의 사자가 애굽 전역의 가정에서 처음 난 장자들을 일순간에 쳐죽인 온 몸을 전율케 하는 무서운 재앙이었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은 예외적으로 보호받았습니다. 그것은 \'유월절 양\'으로 잘 알려져 있는 \'어린양의 희생 제사\'에 근거하여 되어진 일입니다. 어린양의 피가 문설주에 발라져 있는 집은 심판이 넘어갔습니다. \'대속\'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출애굽기 12장 27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 하매 백성이 머리 숙여 경배하니라.\" 여기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고 했습니다. 이 제사를 드린 사람들은 애굽의 장자들이 하루 아침에 목숨을 잃는 여호와의 심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어린양의 피를 대신 받으시고 이스라엘의 장자들을 사유하셨던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속죄의 제사에 근거하여 이스라엘을 용서하셨습니다. 곧 심판으로부터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대대로 이것을 기념하는 유월절을 지키면서 여호와의 은혜를 누리며, 그 사실을 후손들에게 가르쳐야 했습니다.

훗날 바울은 고린도전서 5장 7절에서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 말하여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유월절 사건과 연계시켰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의 죽음에 대속물로 내어주심으로 과거 출애굽 당시의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이 예표한 바를 성취하신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유월절 제사에서 나타나는 중요한 사상이 \'대속\'의 개념인데, 이것이 레위기에서 5대 제사의 전형이 되어졌습니다. 따라서 제식(祭式)의 중요한 신학적 원리는 속죄(贖罪)와 대속(代贖)의 개념에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대속에 의한 속죄의 은혜를 가르치시기 위하여 \'5대 제사법\'을 주셨습니다.

4. 구약성경 해석시, 소위 말하는 영적인 해석을 조심해야 함

5대 제사법을 살펴보기에 앞서 먼저 구약성경을 해석할 때 주의할 점, 특별히 성막의 제도와 제사법 제도 등을 해석할 때 각별히 조심해야 할 것에 대해서 잠깐 언급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의 희생제의(犧牲祭儀)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과 관련하여 이해하는 데 있어서 그저 쉬운 방식대로 결과론적인 대입만을 주장할 경우에는 매우 잘못된 우화주의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래서 비록 본의는 아니겠으나 어이없게도 본문 말씀을 변개시킵니다.

�치만 니(Watchman Nee)의 경우를 한 예로 보겠습니다. 그는 우리와 상당히 친숙해 있습니다. 그의 많은 책들이 상당히 많이 번역되어 있고,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구약성경 해석은 철저하게 우화주의(allegorism)입니다. 그 사실을 비평하기 위하여 그의 저서 중 \'A Living Sacrifice\'을 대표적으로 보겠습니다. 이 작은 책자는 \'생명의 말씀사\'에 의해 \'산 제물\'이라는 제목으로 오래 전에 번역되었습니다.

�치만 니는 자신의 성경 해석이 정통적인 것이라고 주장하기 위하여 예표론(豫表論, typology)이라고 하는 신학적인 전문 용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잘 검토해 보면 사실상 철저하게 우화적 해석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우를 범했을까요? 그것은 그가 알레고리와 모형론을 혼동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화와 모형을 구분하지 못하는 오해는 오래 전에 알렉산드리아 학파를 대표하는 오리겐(Origen)의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천여년 동안의 세월을 거치면서, 종교 개혁기에 이르러 비로소 바르게 잡혀지기까지, 성경의 바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을 싫어하고 유명인의 해석을 맹목적으로 답습하며 괴이한 영해(靈解)를 좋아하는 호기심 많은 주석가들에 의하여 더욱 고착화되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우화주의 해석의 득세에 제동을 거는 건전한 신학 세력이 초창기부터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미 안디옥 학파는 그들이 가진 건전한 해석 체계에 입각하여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알레고리주의적인 해석을 비판하였습니다. 그러나 세력이 열세하였던 까닭에 도리어 이단이라는 죄목을 뒤집어쓰면서 단죄를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교회의 힘이 정치적인 세력과 결합되어 있었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이단이라는 정죄 하에 힘이 있는 쪽에서 물리적인 폭력과 핍박을 가해 오면 당할 수밖에 없었던 교회 정치의 암흑기였습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무력으로 안디옥 학파를 짓밟았습니다. 그 영향력은 대단히 커서 이후부터는 드러내 놓고 알레고리주의적인 해석을 비판하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양식 있는 신학자들은 이런 현상에 대해서 크게 우려하였습니다. 결국 종교 개혁기에 이르러 루터와 칼빈에 의해서 알레고리주의적인 해석은 결정적으로 제동을 받게 됩니다.

우화주의적인 해석은 성경의 본의를 왜곡하는 지극히 사단적인 역사입니다. 이런 해석 체계에 성령께서 역사하실 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당신이 세우신 진리의 체계를 통하여 역사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화주의 해석 하에서는 진리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말씀이 왜곡되는 현상만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칼빈은 말하기를 \"경솔한 추측을 하느니 보다는 무지를 고백함이 더 낫다\"고 하면서, \"알레고리 해석 체계는 성경의 권위를 깎아 내려는 사단의 체계\"라고 단호하게 못박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 일부 종교 개혁자들은 이 치명적인 오류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여 여전히 알레고리 해석에 머물렀고, 그 부정적인 영향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무서운 능력으로 재현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화주의 해석은 소위 \'영해\'라는 명분 아래 생각이 깊지 못하고 진지하지 못한 일부 무식한 청중들 속에서 열화와 같은 환영을 받으며 급속히 퍼져 나왔습니다.

5. 우화주의 해석의 실례

워치만 니도 이러한 해석 체계를 개혁파 교회권 내에 퍼뜨린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이제 그의 저서 \'산 제물\'을 통해서 그의 설명이 얼마나 황당무계한 것인지를 보겠습니다. 그는 제사법 중에 화목제와 관련하여 말하기를, \"모형론을 공부한 사람은 모두 어깨(정갱이)와 떡이 주 예수의 두 가지 다른 요점을 대표한다고 합의한다. 어깨는 힘이 있는 곳이다. 수양의 어깨는 마치 기름이 하나님의 영광을 지시하듯 주 예수의 거룩한 성품을 보여준다. 떡은 그의 인성을 나타낸다. 그는 누룩도 없고 점도 없는 완전한 사람이시다. 그는 성령에 충만하시고 가장 예민하시며 가장 부드러웠다. 그의 내적 느낌과 영적 감각은 굉장히 섬세했다. 그는 거칠지 않고 부드러워서 마치 한 번 건드리면 부서질 엷은 과자나 웨하스 같았다. 이것들을 아론의 손에 두어 여호와 앞에 흔들어 드리게 했다. 먼저 아론의 손에 채워졌고 다음에 그것들이 그의 손에서 번제로 불살라졌다. 이것이 헌신제사(위임식 제사)라고 불리웠다. 조금 설명을 더 해보겠다. 히브리어로 헌신이란 실제로 손에 채운다는 것을 뜻한다. 그 손이 처음에는 비어 있었다. 그러나 다음에는 채워졌다. 아론의 손에 채워졌을 때가 그의 헌신의 때였다. 그의 두 손은 채워져 있었기 때문에 그는 다른 그 무엇을 가질 수가 없었다. 이것이 헌신이다. 그의 두 손이 수양의 어깨(뒷다리)와 기름, 그리고 무교병으로 채워져 있었으니, 이것이 헌신이다. 주님의 인성과 함께 그의 신성도, 신령한 힘과 주님의 누룩 없는 생활이, 그리고 성령과 주님의 감수성이 충만히 점령하게 될 때, 바로 이 때가 헌신의 때이다\"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터무니없는 해석인데, 이런 해석을 신령하다고 보면서 마구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국내의 현실을 보면 이런 유의 해석들이 얼마나 심각하게 영향력을 끼치고 있어 성행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다음의 경우를 보십시오. \"제물이 수컷인사실은 주께서 남자로 오실 것을 예표한다. 고운 가루는 신구약 성경 말씀에 의해 부서져야 할 것을 상징한다. 꿀은 인정과 육정과 물정에 끌림을 의미하여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물은 정에 끌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뜨는 것은 주께서 옷을 벗기움을 당하고 홍포를 입은 사실에서 성취되었다. 내장과 정갱이는 물로 씻어 올려놓았는데, 이것은 십자가상에서 흘리신 피와 물을 의미한다. 불을 놓아 사름은 십자가상의 고통과 그로 인한 성령 강림을 뜻한다. 또는 \'번제시의 황소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을 상징하고, 양은 완전한 항복을 상징하고, 또한 야생 비둘기와 어린 비둘기는 완전한 가난과 순진성을 상징한다. 소제 때 드리는 곱게 잘 갈은 밀가루는 균형 있고 굴곡 없는 예수님의 성품을 보여주며, 기름은 성령의 역사로 태어나신 예수님을 계시한다. 유향은 하나님 앞에서 사신 예수님의 생애의 향기이며, 불은 죽기까지 고난을 받으심으로 시련을 받으신 예수님을 보여준다. 그리고 누룩 없는 과자는 거짓 없는 진실된 예수님의 성품을 반영하며, 꿀을 섞지 않는 이유는 예수님의 성품은 그 자체로서 달콤하기 때문이다. 소금은 음식을 상하지 않도록 보존하고 맛을 돋구어 주는데, 따라서 예수님의 진리가 나타내는 효과성을 계시하는 것이다.\"

구약 시대 때 주어졌던 제식의 의미를 이렇게 우화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이는 제식의 표면에 나타난 외형적인 모습을 억지로 예수님의 사역에 끼여 맞추는 데서 오는 결정적인 오류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실상 본래적인 의미에 충분히 이를 수 없습니다. 제사법에 대한 이런 식의 해석은 설상가상으로 \'성막의 의미\'에 대한 \'우화주의\'와 어우러져서, 제식이 계시하고 있는 본래적인 의미와는 전혀 다르게 왜곡시키며 변질시키고 있습니다. 우화주의는 모형(type)과 실체(antitype)간의 상응(correspondence)을 찾음에 있어서 \'피상적 유사점\'에 주목하기 때문에 빠져드는 함정입니다. 그런데도 우화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려는 신학적 태도를 가진다면 상징이나 모형이 나타내고자 하는 본래의 의미를 바르게 해석할 수 없습니다. 모형과 상징을 해석하려 할 때에 삼아야 할 중요한 원리는, 성취된 실제와 대응하여 있는 신학적 본질(the theological essence of the events)이 일치하여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구약 시대의 제식들에 대한 해석은 일차적으로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도 적용되었던 바, \'성례전적 효과\'라고 하는 측면에서의 \'상징적인 의미\'가 먼저 밝혀져야 바르게 이해되어질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신학적 원리를 찾아야 합니다. 나아가 이것이 \'구속사\'로서의 \'특별계시 역사\' 속에서 어떠한 발전을 이루어 나왔는가 하는 관점까지 고려되면서 최종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사실과 접촉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원리를 충분히 고려하여 해석될 때에 비로소 설교학적으로 바르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5대 제사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6. 번제

첫 번째 제사는 \'번제\'(히브리어; 올라)로 불리웁니다. 이 제사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위하여 성전에서 계속되었습니다. 번제라는 단어를 직역하자면 \'올라가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제사의 특성인 \'온전히 헌신한다\'는 의미를 아주 적합하게 표현해 주고 있는 제사법이 번제입니다. 번제는 헌신제입니다. 그래서 이 번제에서는 증여적(贈與的) 성격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곧 제물이 예배자를 위하여, 그리고 예배자를 대신하여 여호와께 드려진다는 헌신을 크게 부각시키는 것입니다. 이 제사는 매일 아침마다 드려졌습니다. 그래서 번제는 상번제라는 명칭으로 불렀습니다(출 29:38-46 레 6:9 민 28:3).

번제를 드릴 때에는 제물의 가치를 손상시키지 않도록 오직 \'흠 없는 제물\'만을 드려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므로 흠이 있는 어떠한 것도 제물로 드릴 수 없습니다. 사실 제사장이라 할지라도 신체적으로 흠이 있으면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지 못합니다(레 21:17-21). 그런즉 제물인 경우에는 더더욱 흠이 없어야 합니다. 이는 \'대속물\'로서의 가치, 곧 제물의 순결한 속성을 드러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 제물의 순결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성과 상응합니다(히 9:14).

그러면 희생제물을 제단에서 태우는 상징이 의미하는 바를 보겠습니다. 제단에서 동물을 태우는 것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철저히 죽이는 것으로서의 완전하게 죽이는 것을 상징한다고 보는 해석이 있습니다. 이는 잘못된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이미 이루어진 속죄의 의미를 약화시키기 때문입니다. 일단 한번 죽었으면, 이미 피를 뿌린 속죄가 이루어졌으며 죄값이 치러졌습니다. 철저히 죽이고 말고 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바른 해석은 번제물을 제단에서 태워서 여호와께 드릴 때에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가 올라간다\"고 한 표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온전한 헌신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번제는 사람이 하나님께 드려야 할 헌신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다윗은 아리우나에게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삼하 24:24)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값 없이\'는 \'대속과 헌신\'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드리는 자신의 예배가 희생으로서의 헌신적 요소가 없이 드려지게 되면 불경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번제는 제물을 부분적으로 태워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태워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것이 상징하는 바는 \'온전한 성별\'입니다.

7. 소제

두 번째 제사로 \'소제\'(히브리어; 민하)가 있습니다. 이 제사의 특징은 여호와께 제물을 드릴 때에 동물이 아니라 곡식과 그것을 빻아서 만든 떡 등의 농산물(農産物)을 드린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소제 역시 흠 없는 온전한 제물이어야 하므로 덜 여물은 상태로는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반드시 익은 것이어야 합니다. 설 익은 것은 드릴 수 없습니다.

소제는 곡물을 바치는 성격상 피를 뿌리는 요소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어떤 신학자들은 소제는 단독으로 드려지지 못하고 반드시 피의 제물이 동반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 제사에서 피를 뿌리는 요소가 없는 것은 순전히 제물이 곡식이라는 특성에서 오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이 제물 역시 속죄를 나타내기 위하여 동물 제사의 요소를 온전히 갖추어서 드려져야 했습니다. 따라서 소제를 드릴 때에는 반드시 기름과 포도주를 첨가하여 드리게 됩니다. 여기서 소제의 식물(meal)은 동물 제사의 고기(meat)와 상응하고, 식물성 기름(oil)은 동물의 기름(fat)과 상응하며, 포도주(wine)는 동물의 피(blood)와 상응합니다.

이 제사 역시 헌신의 요소가 내포되어야 하는 원칙상 친히 스스로 경작하지 아니한 야생의 산물은 사용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즉 자신이 직접 수고하여 얻은 것이 아니고서는 제물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제물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을 바쳤던 데서 나온 생산물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헌신한 것이 되어집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막과 성전에 항상 비치해야 했던 진설병은, 일종의 소제물이었습니다. 즉 여기에 전시된 열 두 개의 의도적인 떡 덩이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헌신을 의미하였습니다.

소제는 기름을 붓는 전제로 드립니다. 이때 소제물을 발효시켜 부패시키는 작용을 하는 누룩이나 꿀을 넣어서는 안되고, 반대로 순결의 상징인 소금과 기도의 상징인 유향을 넣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제사가 천상에서 열납되는 장면을 시각적으로 그려놓은 부분이 나옵니다.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들이 어린양 앞에 부복했을 때,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들었는데, 이것은 성도들의 기도들이라고 했습니다(계 5:8).

이 소제물 역시 \'하나님과의 접촉\'을 상징하는 번제단에서 태워짐으로써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가 되었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받으신 합당한 제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때 곡식들 중의 얼마를 취하여 드리는데, 이것을 가리켜 \'기념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일부분만을 바쳐도 전체를 다 바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즉 일부가 태워지는 것으로 전체를 대신했습니다.

여기 소제도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가 됩니다. 여호와께서 기쁘시게 받으시는 제사라는 말입니다. 이는 사도행전에서 가이사라의 백부장 고넬료 앞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자가 \"…네 구제와 기도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라고 말했던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소제물도 사람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에 제물의 가치가 충분히 있었고, 따라서 사람의 생명을 대속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제에서 나타나는 신학적 원리 역시 \'대속의 개념\'입니다. 따라서 이 소제 역시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시게 될 대속 사역을 상징하였습니다. 소제물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은 아니고, 소제로서 드려지는 제사에 담겨 있는 대속의 원리가 그렇습니다.

8. 화목제

세 번째 제사로 \'화목제\'(히브리어; 쉬라임)가 있습니다. 이 제사는 명칭에 있어서 히브리어 \'샬렘\'이라는 형용사와 상응합니다. 화목제는 다시 경우에 따라 감사제, 서원제, 자원제 등의 세 가지로 나뉘어집니다. 이 제사는 하나님과의 화목을 웅변적으로 묘사하는 제사입니다. 따라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사입니다. 이 제사만이 가진 하나님과의 화목에 대한 두드러진 특성은, 제물을 먹었던 유월절 의식에서도 자세히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이 제사는 제물을 드린 자가 제물을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제사입니다. 이렇게 화목제는 속죄에 뒤따르는 사죄의 결과로서 하나님과의 화목을 묘사합니다. 이것이 제사를 드린 자가 하나님 앞에서 제물을 먹도록 된 사실을 통하여 상징되고 있습니다.

화목제는 제물을 바치는 사람이 특별히 떼어 여호와께 불살라 바쳐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슴 부위와 기름 덩어리입니다. 제물을 바치는 사람이 그것을 여호와 앞에 가져와 여호와께 특별히 바친다는 뜻으로 흔들어 바치면 제사장은 기름을 취하여 제단에서 불살랐습니다. 이때에는 기름을 취하여 제단에서 불살랐습니다. 화목제에서는 기름을 이렇게 특별하게 취급하는데, 양이 너무 적은 까닭에 이것을 다른 번제물 위에 놓고 함께 태웁니다. 기름은 제물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기름을 바친다는 것은,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사실을 의미하였습니다.

한편 가슴은 오른편 뒷다리와 함께 제사를 총괄적으로 집행하는 대제사장의 몫으로 남겨 둡니다(레 7:31-34). 그리고 나머지 부분들을 수종드는 제사장들이 먹습니다(레 7:15-21). 화목제가 가지는 이와 같은 식사의 특성으로 말미암아 항상 흥겨운 분위기 속에서 제사가 드려졌습니다. 그래서 화목제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언약을 갱신하였을 때(수 8:31), 사울의 왕위가 승인되었을 때(삼상 11:15), 성전 낙성식 때(왕상 8:63) 등의 경우에 드려졌습니다.

화목의 의미는 보다 적극적입니다. 단순히 죄가 사해졌다는 것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여호와를 섬김으로써 향유하고 누리게 되는 역동적인 축복이 있습니다. 식사의 요소는 바로 이것을 적극적으로 상징합니다. 식사는 하나님과의 적극적인 교제의 축복에 대한 상징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식사를 준비한 편은 사람이 아닌 여호와이십니다. 여호와께서 주인이 되셔서 친히 베푸신 식탁에 우리는 손님으로 참여합니다. 그래서 이 제사의 즐거움은 항상 여호와의 성막에서 베풀어집니다. 출애굽기 24장 9-11절에서 보여지는 대로 첫 언약식 때에도 회목제를 드림으로(5절) 여호와의 산에서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에게 식사가 베풀어졌습니다.

화목제에서 식사로써 나누는 교제는, 훗날 주의 만찬에서 그 의미가 완전해졌습니다. 즉, 주의 만찬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의 식사(God\'s gift-supper)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식탁에서 그의 죽으심을 기념하면서 화목제물이 되어주신 그분의 은혜를 기억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진정한 화목제물이십니다(요일 4:10). 구약의 화목제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상징하여 주고 있는데, 그 궁극적인 성취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계시하는 모형이었습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바울은 로마서 5장 1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라고 했습니다.

9. 속죄제

네 번째 제사로 \'속죄제\'(히브리어; 카타트)가 있습니다. 이 제사에 이르러 비로소 구체적으로 죄의 용서를 뜻하는 속죄 제사의 가르침이 적극적으로 나타납니다. 이 제사는 죄책에 대한 속죄를 가장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따라서 이 제사로 \'사죄의 축복\'으로서의 \'구원\'이 가장 의미 깊게 체험될 수 있었습니다.

이 제사에서는 속죄와 관련된 사람들의 등급의 높낮음에 따라 바쳐야 하는 희생 제물의 급수가 달라집니다. 이것은 신분의 차이 때문이 아니고, 그 신분이 관여하는 일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더 악한 영향을 미친 죄의 경중의 문제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그와 같은 제사 의식을 통해서 죄를 용서해 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믿음이 있어야 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제사 행위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즉, 제사를 드리는 일 못지 않은 심정으로 죄를 용서하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의지하여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구약시대 역시 신약시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선포된 말씀에서 근거를 찾는 구원의 원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속죄제에서의 말씀의 중요성은, 제사장이 제물을 드린 자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죄를 선포한다는 데서 찾아집니다. 즉, 제사자가 갖게 되는 사죄에 대한 확신은, 제물을 드린 것 자체만으로는 얻기 힘든 것이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제사장이 선포한 사죄의 선언을 붙잡고 의지하는 데서 비로소 굳건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레위기서 도처에서 나타납니다(4:26,31,35 5:10,16,18 6:7 16:34).

다시 말하자면, 범죄한 자가 사죄를 받으려면 제사를 드린 그 자체보다 앞서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제사를 통해서 사죄하겠다고 하신 여호와의 약속을 신앙하여 신뢰하는 일입니다. 사죄해 주겠다고 하신 여호와의 약속을 붙잡고, 그것에 근거하여 제사를 드리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없이 형식적으로 제사가 드려지면 하나님께서 어쩔 수 없이 용서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제사 제도 그 자체에서 사죄의 확신을 얻으려 하지 말고, 선포되고 들려진 말씀에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제사장을 통해서 들려질 경우도 있고, 또는 그가 하나님께 드리기 위하여 제물을 가지고 나아오는 때에 사죄의 말씀을 확실하게 붙잡는 데서 되어지기도 합니다.

물론 사죄하시는 분은,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해 주시는 분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출 34:7).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심판을 벗어날 방도를 친히 마련해 주신 구원의 도리를 붙잡고 나아와 속제물을 바칠 때에 기꺼이 대속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속죄제에서는 속죄의 상징이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고의적으로 범한 죄는 사해지지 않고 부지중에 범한 죄만 해당되었습니다. 제사를 드리면 사죄될 것을 전제하고, 그러니까 회개하면 되지 하는 생각을 가지고서 의도적으로 죄를 범한 경우에는 제 아무리 많은 제물과 비싼 제물을 가져와도 사죄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제사를 드릴 수 있는 형태의 죄에는 분명 한계가 있었습니다. \'짐짓 행한 죄\'에는 그것을 사하는 제물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짐짓 행한 죄란, 고의적인 범죄를 가리킵니다. 이 죄는 주를 모독한 행위가 되어집니다(민 15:30).

이런 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부정하는 것으로써 자신이 그분의 은혜 안에 속해 있지 않다는 것을 자인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럴 경우 이 사람은 제사 영역밖에 놓여집니다. 이 사실은 여호와의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의적으로 죄를 범하였던 엘리의 아들들의 죄와 그들을 만류하지 아니한 엘리의 죄를 심판하실 때 하신 말씀에서 명백하게 나타났습니다. 사무엘상 3장 14절을 보면,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이나 예물로나 영영히 속함을 얻지 못하리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고의적으로 하나님을 거스르는 범죄에는 용서가 따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온전한 대속물이라고 하셨습니다(막 10:45)

10. 속건제

다섯 번째 제사로 \'속건제\'(히브리어; 아샴)가 있습니다. 이 제사는 손해 배상을 치러야 하는 제사입니다. 그래서 속건제는 일종의 보상제(補償祭)입니다. 즉 상대방에게 얼마나 갚을 것인가에 대한 가치 평가가 있는 제사입니다. 얼마간의 배상 혹은 보상이 반드시 수반되는 제사입니다. 가령 이웃을 속이거나 그들의 물건을 훔친 일에 대하여 사죄를 얻으려면 그마만큼 보상을 해주는 성의가 있어야 합니다. 단지 여호와께 나아와 제사를 드리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죄가 사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속건제가 내포하고 있는 이같은 사상은 하나님께 손상을 입혀드린 인간이 진정으로 치러야 할 속죄제가 어떤 것인지를 규정해 줍니다. 즉 하나님께로부터 빼앗은 것을 보상해 드림으로써 완성되는 제사인 것입니다. 사실 인간의 모든 죄는 하나님께 하지 말았어야 할 것을 위반한 데서 있게 됩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받으셨어야 할 순종을 빼앗은 데서 범하게 된 죄입니다. 속건제는 이것을 바로 잡습니다.

예수 그리스께서는 우리가 마땅히 하나님께 드렸어야 할 보상을 대신 담당해주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는 바로 이 \'아샴\'이었습니다. 이사야서 53장 10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이라고 표현한 것을 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하지 말았어야 할 것을 함으로 하나님께 범한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빼앗았던 순종을, 당신의 온전한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께 되돌려 드렸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속하시는 온전한 속건제물이 되셨습니다.

11. 5대 제사의 특징

이스라엘의 5대 제사는 각기 나름대로 특징을 보여줍니다. 각각의 제식이 갖는 제사 방식들을 독특하게 갖는가 하면, 공통점을 갖는 것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들 제사법들은 궁극적으로는 속죄를 상징하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속의 원리를 계시했습니다. 그러므로 제사법 모형을 해석할 때에 각각의 의미에서 구체적인 실체를 찾아내어 적용하려 하기보다는 핵심적인 사상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첫째, 번제와 소제는 제물을 태우는 데서 특별한 특징이 드러납니다. 짐승 전체를 남김 없이 제단 위에서 태웁니다. 이 두 제사가 상징하는 의미는 정화, 정결, 헌신 등입니다.

둘째, 화목제는 제물을 드린 자가 제물을 먹을 수 있다는 데 특징이 있습니다. 이 제사는 식사의 교제와 즐거움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화목을 상징합니다.

셋째, 속죄제와 속건제는 피를 다루는 방식이 특이합니다. 번제와 화목제의 경우 피는 특별하게 사용되지 않고 그냥 흘려버렸지만, 이들 제사의 경우 성소에 들어가서 성소장 앞에 일곱 번 뿌리거나 향단 뿔에 바르며, 남은 것은 번제단 밑에 쏟아야 했습니다(4:5:5-7,16-18). 혹은 성소에 들어가 피를 뿌리는 의식을 생략하는 대신에 번제단 뿔에 바르고, 남은 것은 단 밑에 쏟아야 했습니다(4:25,30,34 5:9).

12. 이방 종교 형태로 변질된 제사

하나님께서는 제사를 받으십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표현이 \'식물\', \'향기로운 냄새\'등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자칫 잘못 여호와께서 당신께 드려진 음식과 태워진 향기에 실제로 만족하시는 듯한 의미로 잘못 생각되기도 하여, 왜곡된 이교적 사상으로 나가기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이방인들의 제사 동기와 형식을 따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제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한 가지 놀라운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들 제사에는 복을 구하는 기원제(祈願祭)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참으로 성경 제사법에서 기원제가 없다는 사실은 주목을 요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제사법이 이방 세계들의 경우와는 달리 축복을 기원하는 일체의 미신적인 요소를 근본적으로 피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약 율법 어디에서도 희생제사가 하나님의 호의를 받아내는 수단이라고 가르친 곳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타락하면서 점차적으로 이런 사고방식에 물들어갔습니다.

후기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제사 개념은 서서히 이교적 개념의 도입으로 말미암아 혼탁해졌습니다. 당시 이방 세계에도 피상적으로는 같은 형식을 취하는 온갖 유의 제사 행위들이 있었습니다. 구약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에 주목하지 아니함으로 이같은 이교적 개념들을 무분별하게 도입하였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이 일어나 이를 준엄하게 책망했습니다. 선지자들은 제사의 의미를 그런 식의 이교적 사상 속에서 찾아서는 않되고, 오직 이스라엘이 맺고 있는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인 구속사에서 찾으라고 하였습니다. 몇 가지 사례를 보겠습니다.

먼저 아모스 4장 4-5절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광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의 기뻐하는 바니라 이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지지지지금 아모스의 말은 상당히 풍자적(諷刺的)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백성을 향하여 죄를 범하라고 명령하는 여호와란 상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 등장하는 벧엘과 길갈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종교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벧엘은 여로보암이 세운 성소가 있었고 길갈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최초로 상륙한 곳으로 이후 사무엘 선지자가 특별한 관심을 가졌던 장소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의미 있는 종교 중심지가 여호와의 이름을 드높이는 곳으로 사용되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가 되어 여호와의 이름을 더럽히는 왜곡으로 점철되어 나왔고, 이제는 놀랍게도 \'범죄의 온상\' 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이라는 표현은, 당시 제사가 끊이지 않고 드려졌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십일조\'라는 표현 또한 기타 부수적인 의식들이 철저히 수행되었음을 암시합니다. 이처럼 각종 의식과 형식이 흘러 넘쳤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예배는 바른 목적 하에 드려지지 아니한 것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었기는커녕, 도리어 그분의 거룩하신 이름을 더럽히기만 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지금 선지자는 풍자적인 방식으로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라는 말도 풍자입니다. 왜냐하면 제식 규레는 이것을 명백히 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레 2:11).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게 해서 이와 같은 변질된 예배를 드리는 죄악에 빠져들게 되었습니까? 이것은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라는 표현에서 단적으로 드러납니다. 여기서 선지자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백성들의 \'곡해된 열심\'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생활 특성상 그처럼 삼일마다 십일조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그러한 열심의 이면에 있는 왜곡된 열심을 겨냥한 말씀인 것입니다. 특히 이런 식의 그릇된 열정은, 오늘날 단지 그것이 열심이었다는 단순한 사실 하나에만 근거하여, 자신의 잘못된 신앙적 행위들을 정당화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주의 깊게 관심을 가져야 할 경고입니다.

또 하나의 실례는 이사야서 1장 10-17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13절에서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고 하신 말씀이 주목을 요합니다. 이스라엘이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므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는가 하면, 기도를 받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15절). 이스라엘의 기도가 제 아무리 간절하고, 길게 지속된다 할지라도 여호와께서는 결코 이것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백성들이 기도하기 위하여 치켜든 손에는 강포와 포학에서 나오는 잔인한 살인의 피가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무수한 제물을 가지고 나아오기에 앞서 이것을 제거하는 일을 먼저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백성들은 절기를 성대하게 치르는 것을 통하여 자기들의 죄악의 대가를 상쇄하려 하였습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이방 종교들의 제사에서 찾아지는 미신인 것입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지성주의요, 감가상각(減價償却) 신앙입니다.

호세아 선지자의 메시지도 동일한 성격으로 선포되었습니다. 호세아 6장 6절 말씀입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여기서 제사와 번제가 거부되었습니다. 즉 인애를 저버리는 사람이 이를 개선하려 하지 않고 무조건 제사만 많이 드리면 된다고 하는 그 생각을 거부하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결핍된 상태에서 습관적으로 번제를 드리는 생각도 거부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불만을 유화(宥和)시키기 위한 수단에만 치중하였고, 결국 제물만 많이 같다 바치면 만사가 다 해결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성도가 정작 삶 자체를 돌이키지는 않고 교회가 회집하고 있는 모든 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하여 많은 예배를 드리고, 헌금이나 많이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끝으로 미가서 6장 6-8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이 부분에 대한 이해는 1절부터 시작됩니다. 1-5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배은망덕한 죄를 신랄하게 지적하셨습니다. 그러자 6절에 등장하는 화자는 \'이교적인 보상적 속죄 수단\'인 수다한 제사와 제물로 \'여호와를 달래보려고 시도\'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도가 6-7절의 제안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나 미가 선지자는 8절에서 이 제안을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라고 합니다. 보상적 성격을 가진 화려하고 풍성한 제의로써 과거의 태만과 배은의 죄악을 상쇄할 수 있다는 식의 이교적인 사고방식을 단호히 거부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배와 새벽 기도회 등을 이런 동기로서 행하는 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이런 경우 죄를 상쇄해보겠다는 생각보다는, 어떤 축복을 얻어내겠다는 동기가 더 많을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솔로몬이 드렸던 일천번제의 경우를 들어 이런 그릇된 생각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삼습니다. 그러나 율법 그 어느 곳에서도 제사 행위가 하나님의 호의와 보상을 받아내는 수단으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보상이나 대가 혹은 상쇄의 동기로 제사가 드려지는 한 어떤 경우에도 예배와 제사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구약과 신약을 무론하고 일관된 원리입니다.

요약해 본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제식을 주신 것은 이미 목적이었지 수단이 아니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당신에 의해 선택된 구원의 은혜를 누리고 보존함으로 찬양과 경배와 성별이 끊임없이 지속되기를 원하셔서 이러한 의식을 주신 것입니다. 시편 43편 21절에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함이니라\"고 했는데, 이를 위해서 제식을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제사 제도의 모든 중심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이십니다. 구약 제사의 사상은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를 강하게 부정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종교가 이방의 우상숭배와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점입니다. 사람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하는 전제하에서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모든 활동의 기원과 내용과 목표를 하나님께 두어야 했습니다.

13. 결론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계승되어져 나온 제사법들은 구원을 누리는 수단이었습니다. 제사는 당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은혜 안에 거하게 함으로 성례전적인 효과를 누리게 하였고, 나아가 장차 메시아 안에서 이루어질 속죄의 원리를 정교하게 계시하게 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주신 제사법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과 함께 속죄의 방편으로 제공되었던 성격상, 이미 그 당시에도 은혜의 수단으로 작용하였습니다. 물론 이것은 제사 제도 그 자체가 은혜의 수단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제사에는 그와 같은 제도 안에서 사죄를 약속하신 언약의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고 의지하는 신뢰가 붙어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심판받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은혜를 배반한 죄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 제도의 의의를 이교적으로 이해하는 가운데 기계적으로 받아들인 데서 자초한 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 깊이 숙고하지 않은 데서 이런 죄를 자초하였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무조건 열심을 내려하기 때문에 결국 이교 무속 신앙 세계에서 자행되고 있는 우상숭배적인 제사 체제들을 받아들이는 결과를 자초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후기 이스라엘 역사는 미신적 신앙형태가 범람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종들이 일어나 개혁의 선봉에 나섰습니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선지자들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동기로서 이스라엘이 제식을 수단화하는 것을 준엄하게 책망하였습니다. 첫째, 자기들이 범한 죄로 말미암아 장차 초래케 될 하나님의 심판을 모면키 위한 수단으로 제식을 시행했을 경우입니다. 이는 계산심리로 제사를 이용하는 것인데, 선지자들의 불같은 책망을 받았습니다. 둘째,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사의 동기가 물질적이요 매매적인 정신에서 행해졌을 경우에도 책망을 받았습니다. 즉 어떤 보상의 은총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제물을 드린 것입니다. 제사를 많이 드리기만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태도로 말미암아 선지자들의 집중적인 책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셋째, 제사 의식과 행위가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각종 제사 의식은 크게 증가되었지만, 정작 그것을 뒷받침 해주어야 할 합당한 정의롭고 도덕적인 생활에는 관심을 가지지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이상은 구약 백성들이 자행한 죄악들의 공통점입니다. 선지자들은 이것을 집중적으로 책망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쉽게 고쳐지지 않고, 도리어 한 걸음 더 나아가 그와 같은 삶의 부도덕을 감추고, 숨기는 방편으로 다시금 이같은 각종 제사 의식을 증대시키는 악순환을 되풀이하였던 것입니다(사 58:1-14 59:1-8).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계시를 저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 대속물이 되셔서 우리를 속죄해 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게 해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부터 우리는 제사가 아니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예배를 드리며 구원을 누리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의 부패한 심성 역시 구약 백성의 상태와 별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칫 잘못하면 이스라엘의 경우처럼 예배를 잘못 사용하는 죄에 빠져들기 쉽습니다. 행여라도 이러한 오류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진실되게 받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깨어 기도하는 일에 게으르지 말고 항상 경성하여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시 14.11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