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의 유형에 관한 연구

설교의 유형에 관한 연구

- 목 차-
* 서 론 / 3
제1장 설교의 명칭과 정의 /4
1.설교의 명칭과 의미 --------------------------------------- 4
2.설교의 정의 --------------------------------------------- 4
1)사전의 정의---------------------------------------------- 5
2)학자들의 정의 ------------------------------------------- 5
제2장 설교의 유형 /10
1.설교형식에 따른 분류 ------------------------------------- 10
1)제목설교 ------------------------------------------------ 10
2)본문설교 ------------------------------------------------ 10
3)강해설교 ------------------------------------------------ 11
a)강해설교의 명칭문제 / 11 b)강해설교의 정의 /12
c)강해설교의 목적 /12
2.설교 내용에 따른 분류 ------------------------------------ 12
1)인물설교 ------------------------------------------------- 12
2)교리설교 ------------------------------------------------- 13
3)윤리설교 ------------------------------------------------- 13
제3장 설교의 중요성과 그역사 /14
1.예수 그리스도와 사도와 교부들 ---------------------------- 14
2.수사들과 개혁자들 ---------------------------------------- 16
3.청교도들과 개혁자들 -------------------------------------- 18
4.19세기 --------------------------------------------------- 19
5.20세기 -------------------------------------------------- 20
제4장 한국교회 설교의 역사적 고찰 / 24
1.선교 초기의 설교 유형 ------------------------------------ 24
1)선교사 설교의 문제점 ------------------------------------ 25
2.초기 한국교회의 설교 내용 -------------------------------- 27
3.일재시대 암흑기의 설교 내용 ------------------------------ 27
4.초기 설교의 특징 ----------------------------------------- 28
2
5.고난받는 교회와 설교 ------------------------------------- 31
6.1960년대 이후의 설교 ------------------------------------- 32
제5장 현대설교의 유형과 분석 / 33
1.백주년 기념 설교집의 분석 -------------------------------- 33
1)일반적 유형 분석 ---------------------------------------- 33
2)신앙적 유형 분석 ---------------------------------------- 33
3)구조론적 유형 ------------------------------------------- 34
4)성경 본문 분류 ------------------------------------------ 35
5)현행설교와 기호설교의 내용 분류 비교 -------------------- 37
6)현행 예화와 기호 예화의 분류 비교 ----------------------- 38
2.장로교회의 설교유형 -------------------------------------- 38
1)해석과 적용의 유형 -------------------------------------- 39
2)말씀의 현장화 ------------------------------------------- 39
3)설교목적에 따른 유형 ------------------------------------ 39
4)구조적인 면에서의 유형 분석 ----------------------------- 42
5)현대 설교 현장의 위기 ----------------------------------- 43
제6장 보수주의 교회가 지향해야할 설교 유형 / 45
1.원로와 선배들의 견해 ------------------------------------- 45
1)박윤선 목사 --------------------------------------------- 45
2)임택진 목사 --------------------------------------------- 45
3)박희천 목사 --------------------------------------------- 45
4)홍정길 목사 --------------------------------------------- 45
5)이병돈 목사 --------------------------------------------- 46
6)장두만 목사 --------------------------------------------- 47
7)계지영 목사 --------------------------------------------- 49
8)정성구 목사 --------------------------------------------- 50
2.예수님과 사도들의 견해 ----------------------------------- 53
결론 / 54


3



-서 론-

화란의 설교학자인 반델 베흐트(Van del Vegt)는 말하기를 설교없이는 구원없다라는 라는 유명한 명제를 남겼다.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선포 즉 설교를 통해서 구원운동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 기독교는 처음부터 설교의 종교였다. 그렇기 떠문에 기독교가 참으로 기독교 다와지고 ,교회가 참으로 교회다
와지기 위해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참되게 설교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설교사를 살펴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정확하게 그리고 힘있게 증거되던 시대는 교회가 바르게 성장했고 반대로 강단에서 설교의 능력을 잃었을 때는 교회는 물런 국가와 사회도 어두워지고 부패했었다 그러므로 현대교회가 설교의 중요성을 다시 일깨우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것은 교회의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 가려는 개혁운동이기 때문이다. 사실 16세기의 종교개혁은 바로 성경관의 개혁인 동시에 설교의 개혁이었다 존 칼빈을 위시해서 뜻을 같이한 개혁자들이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를 외쳤을때 무었보다 강단의 개혁 즉 설교의 개혁을 염두에 둔 것이다. 개혁자들은 1천년 가까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진 어두운 교회를 향해서 형식주의와 의식주의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갈 것을 외쳤다. 결국 참된 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데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본 논문은 이런 개혁적인 취지에서 한국교회 초기설교 부터 현대교회에 이르기까지의 설교의 역사를 고찰해 보면서 앞으로 우리 보수주의 교회가 지향해야 할 설교를 논해보고자 한다.


제 1 장
설교의 명칭과 정의
사람이 무엇을 하려고 할때는 우선 자기가 하려고하는 그일에 대하여 명확한 정의를 내릴수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만일 이를 잘못하면 아무런 진전도 보지 못할 것이요 모든 노력은 헛 수고가 될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설교의 명칭과 정의를 내려보는 것이 중요한 순서인 것 같다
1.설교(說敎)의 명칭과 의미
사실 설교란 말은 일본 명치(明治) 초년에 일본교회가 헬라어의 또는 에 해당하는 말을 설교라고 번역해서 사용하던 것을 해방이후 우리교회가 받아 사용하고 있다.(해방전에는 강도라는 말을 썼다)
한국교회가 영어에서 설교란 말을 번역할 때 그 용어들이 서로 다른 어근에서 나왔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설교(Sermon), 설교하는것(Preaching)은 어근이 각각 다르다. 영어의 Sermon은 라틴어의 sermo에서 나온 말로서본래는 담화나 연설같은 뜻을 가지고 있었으나 근대적인 의미로는 교회에서 예배의 중심으로서의 설교형식을 갖춘 연설로 이해 되었다. 이때 Sermon은 넓은 뜻으로서 설교를 말할때 쓰여진다.
그러나 Preaching은 설교하는 행위 자체를 두고하는 말이다 이것은 곧 헬라어의 에 해당하는 말의 번역으로서 말씀의 선포 또는 복음내용을 선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preach란 말 자체는 라틴어의 praedico에서 나온 말로서 선포하다,찬미하다,예언하다의 뜻을 가진 말이며, 이는 또한 헬라어의 에서 유래했다.이 말은 예언을 말하거나 신적 계시인 말씀을 선포하는 의미를 가진 뜻이다
2.설교의 정의
설교가 무엇인가라는 정의를 내리기 위해서 설교학자들이 많은 시도를 해보았으나 \"말씀의 봉사라는 의미의 사도적 계념이나,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한 엄숙한 부분인 \"하나님 앞과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
-------------------------
1)설교학 정성구 (총신대학 출판부) P 34-37

서 그의 나타나실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는 말씀을 크게 넘어가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 아래에서 사전과 설교학자들의 정의를 몇 가지로 생각해보기로 하자.
1) 사전의 정의
국어사전:종교 교리를 설명함 또는 그 설명
웹스터사전:종교적인 주제를 가지고 공적으로 강화하는것
(\"to discourse publicly on a religious subject\")
철학대사전:교회에서 사람들을 기독교도 다운 생활로 인도하기 위하여 계시된 진 리를 일반에게 알리어 설명하는 것
기독교 대사전 :종교적 진리를 공중 앞에서 말로 설명하는것
그리스도교대사전:성경이 증언하는 복음의 진리를 현대 교회에 산 진리로서 증언하는 행위

2)학자들의 정의
앤드류 블랙우드:미국 감독교회의 대설교가인 그는 설교라는 것은 필요한 어떤것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선정된 인물이 성경의 거룩한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사무엘 볼베더:미국 칼빈신학 설교학 교수인 그는 설교를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구두로 행하는 선포라고 정의했다
필립 브륵스는:인간에의한 인간에게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의 전달이라 정의 했다
에반스는:설교는 인간에 대한 구원의 선포이다 했다
다드(C.H.Dodd):영국의 다드교수는 설교는 자기의 말을 전달하는 교훈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를 선택하여 보낸 분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이다 즉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설교이다
펠프는:말씀하기를 설교의 순수한 개념은 성경에 포함된 종교적 진리를 사람들의 마음을 향해서 연설하는 것이라고 했다
------------------
2)고려출판사 1992년
3)기독교서회 P506

호핀은:설교란 공예배시에 기독교 진리를 계획적이고 구체적으로 확신을 가지고 선포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가르비는:설교의 긍극적 근거를 말하지 않고 설교란 영생을 위하여 인간의 인격을 통한 신적 진리의 전달이다.라고 정의 했다
포사이드:설교는 복음의 연장이고 복음의 선포이다.설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하고 중단없는 행위로서 그것이 계속적으로 반복 되어 선언되는 것 이라했다
짐그레함: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해 주고 설명해 주는 것이다
고도고상:설교란 하나님께서 부름받은 설교자가 성령의 인도에 의하여 성경의 말씀을 고백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증거하는 것이다
헤릭 존슨은: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고 사람을 구원하려는 계획과 목적에서 사람을 감동하도록 권면하는 법있는 강화이다 라고 정의했다
정성구:설교란 구속주인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을 만나도록 해주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임택진;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에게 전달하는 행위이다.
박희천:설교란 하나님의 말씀을 조리있게 잘표현하여 양떼들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끼치는 것
곽선희:설교란 계속적인 하나님 말씀에 대한 재해석이다
천병욱:설교란 그리스도가 교회에 대하여 말하고 교회가 세상에 대하여 말을 계속하는 은혜의 수단이다
이주영:설교는 하나님꼐서 세우신 사람을 통하여 전달되는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라고 정의 하면서 덧붙이기를 설교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선포하는 것 곧 구속사역이 그 중심이 되는 것인데 이것을 선언하고 선포하여 죄인의 마음 속에 성령의 역사가 임하여 구원역사가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참된설교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요약하고 있다
박준서:성경적 의미에서 설교란 성경 본문과 오늘의 삶의 상황을 이어주는 교량이요 오늘의 구체적인 상황에서 말씀의 의미를 새롭게 재발견 하는 작업이요 오늘의 상황을 말씀의 빛 아래서 밝히 조명해 주는 것이요 또한 설교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변하는 상황에 적용시켜주는 작업이다 라고 했다.
------------------------
4)현대교회와 설교 존스타트(반석)P13
5)현대설교학 이주영 (성광문화사)P24

이 외에도 많은 학자들이 설교에 대한 정의를 내렸으나그 뜻은 대동소이하고 다 옳은 듯한 표현이다 어쨌던 설교에 대한 정의에서 꼭 집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설교는 초자연적으로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계시된 진리의 선포란 점이다.
위의 정의를 인정하면서도 우리 한국장로교회가 전통적으로 내려온 헤릭존슨의 정의를 채용하고 그의 정의에 대한 해석을 함으로써 설교가 무었인가를 더욱확실히 드러내 보고자 한다.존슨이 말한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고 사람을 구원하려는 계획과 목적에서 사람을 감동하도록 권면하는 법있는 종교적 강화이다 라는 정의를 채용키로 한다. 다음 내용은 헤릭 존스의 정의에 대한 곽안련 박사의 해석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첫째로,설교는 강화라는 부분을 생각해보자.
설교는 어떤 형식이 되었던 하나님의 말씀의 증거이다 그런데 설교는 여러가지 형식도 많고 방법도 많다. 예컨대 개인전도, 노방전도, 등의 무형식적 설교이다또 기도회 때 하는 즉석 설교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논하는 설교란 법칙이 없이 무원칙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고 안수 받은 목사가 공식 예배시에 설교하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설교자가 종교적 영적 강화라함은 이런뜻이다.
즉 이 세상에는 종교적 진리가 아닌 다른 많은 진리가 있다. 예컨대 과학에서 증명한것은 진리라고 할 수 있다 수학, 화학, 천문학, 철학, 등의 진리가 있다.사람들은 이것을 학문으로 연구하며 받아들인다. 이런것들은 설교에 이용하여 도움을 줄 수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이런 세속적 진리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다예배시에 이런 내용을 설교하는 것은 설교일 수가 없다.그러므로 설교는 종교적 진리를 증거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
러나 종교적 진리란 말을 쓸때현세와 내 세에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의미한다.

셋째로, 이 세상에는 기독교 외에도 많은 종교들이 있다.
그런데 이런 종교들의 내용은 기독교의 진리와 같은 것이 아니고그와는 반대된다. 세상의 일반 종교는 모두가 자연 종교이며 자율주의적 종교에 불과하기에 계시종교이며 생명의 종교인 기독교와는 다르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종교적 진리라고 해서 다 설교라 할 수 없다. 그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생명의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여야 한다.그런데 여기서 기초를 둔다라는 의미는 설교 할 때 매 구절 마다 성경구절을 인용한다는 의미를 갖지는 않는
다. 같은 제목 아래 유사한 성경 구절을 나열한다고 설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위에 기초를 둔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성경 본문에 충실해야 된다는 의미이다. 성경은 물런 종교적 진리이다. 그러나 어떤 구절의 핵심이 무었인지 분명히 모른채 다만 그 본문에 나타난 현상만 가지고 설교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설교 일 수가 없다. 예컨대 마3:16절에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란 한 구절을 인용하여 비둘기의 특징과 성격, 모양세
로부터 여러가지 교훈을 허다고 하자 . 물런 종교적으로 좋은 강연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이런 것은 설교라고 할 수 없다.

넷째, 설교의 목적은 인간을 구원하려는 계획을 전해야 한다.
설교는 구원과 양육이 포함되어야 한다. 설교는 불신자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백성들에게 천국백성으로 살아 갈 수 있도록 훈련 시키며 성화 과정으로 이끌어 주어야 하는 것이어야 한다 설교자는 그 설교가 얼마나 훌륭한 웅변인가를 보여주는 기회가 아니다. 연극장에서와 같이 반시간 정도 연극을 하는 것도 아니다 . 참된 설교자는 파선된 배를 보고 그들을 건져내려는 결사적인 노력과 열심을 갗지 않으면 않된다 . 사람들은 겉 모양으로 보아서는 모두가 신사숙녀이지만 저들의 마음 가운데는 온갖 이기심 탐욕, 증오심,죄악으로 말미암아 영혼이 침체되어 있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 그러므로 설교자는 강단에 설 때마다 청중들에게 그 설교가 마지막 설교이며 최후의 설교로 알고 증거해야 한다. 왜냐하면 내일 일을 우리는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지금 죽어가는 자에게 최후의 설교를 한다는 심정으로 열과 정성을 다드려 설교에 임
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심령을 움직이는 설를 원하고 있다. 설교의 목적은 인간 구원이다.이것은 생명을 내걸고 해야할 사역이다.

다섯째,설교는 감동을 받도록 권면하는 것이다.
감동하도록 하지 않는 설교는 설교라고 할 수 없다.설교를 든고 심령이 변화되고 삶이 변화 되어야 한다. 설교는 든는 사람들의 의지에 호소하는 것이므로 새로운 믿음 깊은 회개 , 진리에 대한 확신,경건한 생활에 대한 새로운 결심이 일어나도록하지 않으면 않된다.설교는 교육과는 다르다.설교는 지식 전달이 목적이 아니라 그 영혼을 움직이고, 의지를 움직이고 , 인격을 바꾸는 것이어야 한다.

여섯째, 설교는 방법론도 중요하다.
설교는 은혜받은데로 말하고 싶은 데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설교는 노방전도나 개인 전도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물런 개인적으로 전도하면서 성경을 풀어서 가르칠 수도 있고, 형식이 없이 어디든지 노방에서도 설교는 가능하다. 그러나 설교는 예배에 있어서 중심부로서, 예배순서에서 행해져야 한다. 그 이유는 개혁교회의 예배의 중심은 설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교는 설교법에 따라야 하며 수사학적으로 꾸며지고 조직된 것이어야 한다

일곱째, 설교는 강화의 형식을 띤다.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 중에는 글도 중요하나 역시 구두로 하는 말이 중요하다 .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우리의 뜻을 전하는데 는 눈, 손, 동작,등 여러가지가 있으나 그래도 입으로 하는 말이 가장 효과적이다. 저술가나 화가는 눈으로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화초 장사나 향로 장사는 후각을 만족케 한다
곽안련 박사의, 말 같이 설교자는 사람들 앞에서 손짓 얼굴 표정, 몸짓으로 사람들의 눈을 이용하여 그들의 마음 속에 진리를 넣어주려고 노력할 뿐 아니라 그의 말로서 그들의 귀를 두두려 더욱 강하게 그들의 영혼에 호소한다. 이것들 보다 더 힘있고 유효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곧 인격이다 라고 하였다.
설교자에게 있어서 인격은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는 큰 힘이 된다. 이 세상에서는 인격의 힘보다 더 강한 것은 없다. 설교자는 그의 인격으로 사람을 잡을 수 있어야 한다. 가령 우리가 어떤 설교자의 감동적 설교를 속기로해 두었다가 나중에 읽었다 하자. 그 때 너무나도 평범한 설교가 어떻게 커다란 충격과 감격을 주었는지 이상히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설교자는 인격을 빼버리고 설교 원고만 읽는 다면 별로 감동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직접 예배에 참석하고설교자의 온 몸으로의 설교를 보고 듣는다면 그 말씀 앞에 녹아지 된다. 그리고 같은 원고라도 누가 설교 하는가에 따라서 그 반응도 무척 달라지게 된다. 그것은 모두가 설교자의 인격과 관련된다. 설교는 단순히 말이 아니고 인격에 담겨진 하나님의 말씀이라야 효과적이며 능력있는 말씀이 된다.
우리는 위에서 설교란 무엇인가 라는 항목에서 여러가지 설교의 정의를 내리는 중 헬릭 존슨의 정의가 적절하다고 생각되기에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위와 같은 해설을 해 본 것이다.

--------------------
6)설교학 정성구(총신대학출판부) PP193-197



제 2 장
설 교 의 유 형
1.설교형식(본문취급)에 따른 분류
1)제목설교
설교형식 자체가 연역적이다. 다루고자 하는 제목과 문제를 내걸고 그 문제에 대해서 성경이 말하는 것을 여기 저기서 뽑아 그 제목을 증명. 지원하고 그 제목에 대한 설교자 자신의 결론적 요점을 전개시켜 나가는 설교이다 무조건 제목설교를 정죄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생각한다. 필자도 강해설교를 선호하고 주장하지만, 목회자로서 목회하다 보면 불가피하게 제목설교가 필요한 상황이 있다는 사실을 긍정하지 않을 수 없고 강해설교를 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무조건 그 사람을 축복하시고 제목설교를 했다고 해서 무조건 그 사람을 정죄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역사적으로 제목설교자 중에 널리 알려진 훌륭한 설교자들이 많이 있다. 좀 자유주의적 색체가 있기는 하지만 에머슨 포스틱 같은 침례교 설교자가 이에 해당하고 빌리 그래함 목사도 역시 제목설교자 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목설교는 성경 그 자체의 말씀보다도 설교자가 말하고 싶어하는 의도에서부터 설교가 출발할 수 있다는 위험성이 있다.
제목설교는많은 사람들을 훌륭하게 인도하는 일에 사용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설교의 전제가 인간적일 수 있고 위험하다는 것이 약점이다. 트리니티 신학교의 월터 카이져 교수는 심지어 5년에 한번씩 할수 있다면 제목설교를 시도하십시요.시도한 다음에 즉각적으로 회개하십시오.라는 말을 했다.
그것은 제목설교가 가진 위험성을 경계하기 위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1) 참고)
주제설교와 제목설교는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으나 실제로는 구별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주제라는 뜻은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것을 뜻한다면제 목이라함은 보다 구체적이고 세분한화한 내용의 특징을 전제한다.
2)본문설교
본문설교자들은 대체로 본문을 짧게 정한다. 본문설교의 천재라고 일컬어지는 사람은 유명한 스퍼젼이다. 든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의 설교가 길지 않은 것을 알게 된다. 본문 설교는 성경의 한두 구절을 본문으로 정하는 설교이다
주제와 대지가 본문에서 나오는 설교를 전통적으로 ,역사적으로 본문 설교라
---------------------
청중을 깨우는 강해설교 이동원(요단출판사) P97-103

고 불러왔다. 본문설교의 위;험성은 본문을 짧게 잡기 때문에 문맥을 무시기 쉽다는 것이다. 본문 자체의 진정한 의미를 끌어내기 보다는 의미를 강요할 가능성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스퍼전의 ,유명한 설교에도가끔 문맥을 무시한 채 지나치고 그릇된 적용들이 나타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3)강해설교
필자가 강해설교에 대해 관심을 갖게된 동기는 처음으로 미국 유학을 갔을 때였다 하이킹이라는 설교학 담당 교수가 설교를 한편씩 써오라고 해서 써가지고 갔는데 ,사랑에 대한 주제의 설교였는데 F를 주었다 필자는 최선을 다했는데 왜 낙제를 주었냐고 따졌다. 교수는 당신의 설교는 근본적으로 전제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당신이 제목을 정했을 때 당신에게는 사랑이 무엇인가 라는 선입견적인 사고가 있었다 그것이 네 설교이지 하나님으로부터 온 말씀은 아니지 않느냐라는 지적을 받았다.
다시쓸것을 요구하면서 본문을 선택하라. 본문을 들어보라 . 본문을 분석하라. 그다음에 본문을 발전시키라 그리고 설교를 써보라. 본문에 근거해서 본문이 무었을 말하고 있는가 ?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이 무었을 말씀하시고자 하는가? 에 관심을 가지라고 충고했다.

루니아(Klaas Runia)박사는 \"말하기를 기독교적인 설교가 되려면 성경적인 설교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성경적인 설교 방법은 어떤 것인가? 대다수 설교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는 강해설교가 가장 성경적인 설교라고 인정하고 있다.

톰슨(D.Thomson)은 말하기를 \"나는 전부터 성경적 설교의 바탕으로서 강해설교를 주장해 왔다\"고 하였다.또 성경주석가요 설교가인 메이어((F.B Meyer)는 그의 학생들에게 언제나 사용될 수 있는 설교 방법은 오직 강해식 설교법\" 이라고 썼다.또 강해설교 연구가로 알려진 로빈슨은 말하기를 \"신적인 권위의 능력을 가장 온전하게 전달하는 설교가 바로 성경 강해설교이다
라고 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같이 가장 성경적인 설교는 강해설교라는 결론을 얻는다.
A .강해설교의 명칭문제
강해설교란 영어의 Expository Preching 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그런데 이 말이 번역되는 과정에서 주해(註解) 설교 또는 주경(註經) 설교 해석설교 성경설교 등으로 매우 다양하게 불리어지고 있다. 그러나 주해나 주석은 해석하는 작업이요 강해라고 할때는 설명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강해는 단순히 글자 풀이나 언급을 하기 보다는 알아 듣기 쉽게 말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게 생각해 볼 때 주석이나 주해설교라는 말보다 강해설교란 명칭이 설교의 성격으로 보아 잘 어울리는 말이 된다고 본다.
B.강해설교의 정의
a)메이어의 정의
강해설교란 그 속의 비밀을 파악할 수 있으며 ,그 정신이 설교자의 설교자의 심령속에 들어 오기까지 설교자의 머리와 마음과 두뇌와 근육을 총동원하여 이에 대하여 생각하고 , 울고 그리고 기도한 성경 중의 어느 한 책이나 또는 보다 확장된 부분의 말씀을 계속적으로 취급하는 방법이다 라고 했다.
b)로빈슨의 정의
미국 보수 침례신학교 학장인 그는 \"강해설교란 , 성경 본문의 배경과 관련하여 역사적, 문법적, 문자적으로 연구하여 발견하고 알아낸 성경적 개념을 전달하는 것으로서, 성령께서 그 개념을 우선 설교자의 인격과 경험에 적용하시며, 설교자를 통하여 다시 청중들에게 적용하시는 것이다.\"
c)데니스 레인(Denis J.V.Lane)의 정의
데니스 레인 목사는O M F 의 본부에서 상담역을 하고 있는 분으로 한국교회 에 강해설교에 대한 많은 도전을 주신 분이다. 그는 말하기를\"강해설교란 성경의 특정귀절의 뜻을 회중의 필요한 환경에 맡추어 설명함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바를 깨닫게 하는 과정을 말한다고 할것이다.
C .강해설교의 목적
강해설교를 하는 설교자들은 성도들에게 설교를 하면서 기대하는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한다
a)성경의 숨은 진리를 재발견 하게 한다
b)기독교 지식의 성장에 목적이 있다.
c)성경의 실제적 활용의 목적
d)바른 영적 성장에 목적이 있다.

2.설교내용에 따른 분류

1)인물설교
인물설교도 강해서 설교식으로 할 수도 있고 제목설교 식으로 할 수도 있다
. 취급하는 본문에 따라 어떤 인물은 맥락을 가지고 강해식으로 접근할 수 있고 한두번 등장하는 인물이나 그 인물이 성경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경우라면 제목설교적 접근을 할 수 밖에 없다.

2)교리설교
이것은 거의 제목설교의 형태와 유사하다 할 것이다. 교리 자체가 연역적인 것이고 그 교리를 변증하기 위해서 여러 구절들을 인용해야 하기 때문에 제목설교가 될 것이다.

3)윤리설교
취급하는 방법에 따라 제목설교도 될 수 있고 강해식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 윤리설교는 쟁점을 다루고 있으므로 제목설교적 형태가 주류를 이루
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제 3 장
설교(說敎)의 중요성과 그 역사(歷史)
그리스도의 교회는 설교에서 시작했다 오순절의 베드로의 설교에서 교회는 땅위에 탄생했다.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되었다

1.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밍 교부들
기독교의 창시자인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기독교의 첫번째 설교자였다. 확실이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의 갈릴리 사역을 이러한 말들로써 요약한다.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이사야 61장의 예언의 성취로서 주의 성령이 자유케하는 그의 멧시지를 전파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에게 기름부의셨씀을 주장하셨다 .예수께서는 설교자와 교사로서의 강한 사명의식을 느끼셨으며 이에 대한 요한의 증거도 이와 비슷했다(요13:13,18:20,37)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사도들이 설교사역에 우선권을 두었던 사실은 특별이 사도행전 6장에 기술되어 있다. 그들은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4절)에 전념하기 위하여 다른 형태의 봉사에 빠져들려는 유혹을 물리쳤다 .본래 예수꼐서 그들을 부르셨던 것은 바로 이일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공생에 기간동안에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마10:5-7)에게 설교하도록 그들을 보내 셨으나 부활 후에는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할 것을 그들에게 엄숙히 위임하셨다 (마28:19) 그들은 나가 두루 전파하였다(막16:20)
그들은 성령의 능력안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또는 고통과 영광의 기쁜소식을 선포하였다(벧전1:12)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제자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첫째로 베드로가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4:31)그 밖의 예루살렘에 다른 사도들, 그리고 세번의 선교 여행에서 누가의 존경을 받았던 바울이 그리하였다. 바울은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으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다(행28:31)바울은 인생 말년에 그의 젊은 부관 디모데에게 그의 임무를 넘겨주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던지 못얻던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권하라(딤후4:1,2) 1)
---------------------------
1)현대교회와 설교 존 스토트(풍만) pp22-23
(제9회 연신목회세미나 강의집)p408)

속사도교부들의 작품중의 하나인 디다케(The Didache)는 기록하기를 \"나의 자녀들아 너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를 밤낮으로 기억하라. 너는 그를 주와 같이 존경하라\"(디다케3:8, 4:1)고 했다.
순교자 저스틴의 첫번째 변증은 기독교를 변호하며 죽었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진리의 체현이시며, 인류의 구주이시기 때문에 기독교는 참되다고 주장했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주일마다 드리는그리스도인들의 예배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그의 글중 성경 읽기와 성경 본문 설교에 대한 강조점과 말씀과 성례전의 결함에 대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주일이라고 하는 날은 도시나 농촌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서 시간이 허락하는 한에서 사도들의 언행록이나 선지자들의 글을 읽는다. 그 다음에 낭독자가 읽기를 멈추면 그 모임의 지도자가 말로써 가르치며, 이 선한 교훈을 따라 살도록 권면한다. 그 다음에는 모두 함꼐 일어나 서 기도한다
. 그리고 그 앞에서 이야기 한대로 기도가 끝나면 빵과 포도주와 물이 나누어 진다
2세기말경의 라틴 교부 터툴리안은 그의 변증에서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거룩한 글들을 읽기 위하여 모인다---그 거룩한 말씀으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살찌우고 우리의 소망을 고무시키며 우리의 확신을 더욱 견고 하게 한다. 그러할지라도 하나님의 교훈들을 반복적으로 배움으로써 우리는 좋은 습관들을 굳힌다. 또한 동일한 곳에서 권면들이 행해지고 꾸지람과 거룩한 책망들이 베풀어진다(39)
희랍 교부 이래니우스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고수해야 하는 장로들의 책임을 강조 하였다.
이들은 또한 우리를 위해 그처럼 놀라운 섭리를 성취하신 ,한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가지는 이 신앙을 보존한다. 그들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족장들의 이름을 더럽히거나 선지자들을 경멸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고 성경을 상세히 설명해 준다
4세기초 가이샤라의 감독이었으며 교회사의 아버지인 유세비우스는 기원후 2백년을 설교자들과 교사들의 활동의 측면에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그들은 집을 떠나 여행하면서 아직까지 전혀 신앙의 말을 들어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설교하고. 그들에게 거룩한 복음서를 주는 것을 목표로 삼으면서 복음전도자로서의 사역을 수행하였다. 그 다음에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받아 다른 나라와 민족들에게로 떠나곤 하였다
후기 교부시대에 가장 뛰어난 설교자는 안디옥에서 12년간 설교하다가 398년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이된 크리소스톰이었다. 그의 설교의 주요한 네가지 특성들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첫째로 성경적이다. 그는 여러권의 책들을 통해서 조직적으로 설교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설교 성경의 인용과 암시들로 가득하였다 두번쩌로 성경에 대한 그의 해석은 단순하고 솔직하다.
그는 문자해석을 주장하는 안디옥 학파를 따랐는데 , 이 학파는 우화적 해석을 하는 공상적인 알렉산드리아학파와 대조되는 학파이다 세째로 그의 도덕적 적용들은 현실적이다 네째로 그는 죄를 선고함에 있어서 두려움이 없었다
사실 그는 강단의 순교자였다. 왜냐하면 그를 추방하도록 만든것은 주로 그의 충실한 설교였기 때문이다

2.수사들과 개혁자들
설교의 시대는 수사들이 나타나면서부터 그 연대가 추정된다.....우리가 알고 있는데로 강단의 역사는 설교하는 수사들과 함께 시작된다 . 그들은 설교에 대한 증가는 대중들의 요구를 자극하며 충족시켰다. 그들은 설교 기술의 혁명을 일으켰으며 그들의 직무를 확대시켰다. 아시아의 프란시스는 마치 가난에 관해서 설교하기를 위탁받은 사람과 같았다 그와 동시대 인물인 도미니크는 설교를 더 크게 강조 하였다.
하나님 말씀의 권위에 대한 프란시스회 수사들과 도미닉회 수사들의 놀라운 주장으로부터 종교개혁의 위대한 선구자인 존 위클리프에 이르기까지는 그렇게 긴 세월은 아니었다 그는 성경을 신앙과 생활에 있어 최고의 권위라고 선포했다. 그는 부지런하고 성경적인 설교자였으며, 성경으로부터 교황권, 면죄부,화체설과 교회의 부를 공격하였다 그는 목사의 가장 주요한 사명이 설교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지상에서 획득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봉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일이다 이 봉사는 특별히 성직자들에게 부여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 일을 더욱 철저하게 요구하신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께서는 다른 일들을 놓아 두시고 주로 설교 하는 일에 전념하셨으며 그의 사도들도 그와같이 하였다
종교개혁은 설교에 구심성을 부여하였다. 강단이 제단보다 눠아졌다. 이는 루터의 다음과 같은 말 때문이다.구원은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말씀없는 성체용 빵과 포도주는 성례전적 특성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다. 그러나 말씀이 전해지지 않는다면 말씀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 하나님의 약속들이 교회를 만드는 것이지 교회가 하나님의 약속들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적 생활에 절대 필요하다. 하나님의 말씀만 있다면 그 외의
모든것은 없어도 그 영혼은 살아갈 수 있다. 이것은 말씀이 그리스도에게로 집중되기 때문이다말씀으로부터 그리스도를 설교해야 하는 필요성은 바로 이 사실로 부터 유래한다.
독일에서 종교개혁을 확립한 것은 정치적 술책이나 무력의 힘이 아니라 바로 이 거룩한 말씀에 대한 설교였다 . 루터는 후에 이 사실을 이렇게 진술했다. 나는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설교하고 기록으로 남겼다. 나는 달리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말씀이 모든것을 해냈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에 그의 기독교 강요를 썼을 때도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극히 눠였다 . 특별히 그는 참된 교회의 제일 중요한 표징은 말씀에대한 충실한 설교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그는 기록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순전하게 설교되어지고 들려지며, 성례전이 그리스도의 제정하심에 따라 집행되는 곳은 의심할 여지없이 그 곳에는 하나님의 교회가 존재한다, 고하였다 사실 말씀과 성례전에대한 이 사역, 즉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는 복음의 선포는 하나님의 교회를 구별하는 영원한 표로 생각해야 한다.
영국의 종교 개혁자들은 칼빈에게 강한 영향을 받았다. 성례전은 말씀으로부터 그 효력이 나타나며 말씀없이는 효력을 상실한다는 것과 , 말씀과 성례전은 교회의 필요 불가결한 표징들이라는 것,그리고 성직은 본질적으로 말씀의 사역이라는 그의 가르침을 그들은 전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영국 성공회 19개 조항은 그리스도의 보이는 교회는 그안에서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되고, 성례전이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의식에 따라 정당하게 집행되는 신앙있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라고 공언하였다.
이 거룩한 과업을 수행함에 있어서 어떤 개혁자도 영국 종교 개혁의 대중설교자인 휴 래티머 보다 더 진하게 행한 개혁자는 없다. 그는 고위 성직자가 되지 않았으며 그의 평범하고 소박한 특성을 결코잃지 않았으며 그는 마음으로 부터 말하였으며 그의 말들은 사람들의 마음에가 닿았다 래티머의 유명한 연설은 경작의 설교로 알려져 있다 그의 연설은 그가 런던탑에 감금되었다가 풀려난 직후인 1548년 1월 18일에 성 바울 대성당에서 행해졌다 그 설교의 주제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밭에 심어지기 위하여 뿌려진다는 것과 설교자는 씨뿌리는 자 라는 것이다. 그는 그 설교를 전개시켜 가면서 레스터셔에 있는 그의 아버지의 땅에서 농사지었던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 하였다
설교자는 일년내내 애써야 하는 농부와 같아야 한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성직자들이 쓸데없는 사업과 오락에 참견하는 일로 그들의 시간을 낭비한다는 사실을 슬퍼하였다.
강력한 종교개혁의 위대한 결과들과 업적들은 주로 설교자들의 설교의 소산이었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의 최상의 그리고 최대의 지속적인 활동이 행해진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였고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사랑하고 가르친 열심있는 사람들의 사역을 통해서였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종교 개혁과 설교와의 관계는 상호의존,상호보조,상호 지도의 관계로 기술될 수 있다.

3.청교도들과 복음주의자들
초기 종교 개혁자들에 의해서 설교에 주어진 강조는 16세기 후반과 17세기에 청교도들에 의해서 계속 이어졌다.
청교도들을 이해함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은 그들이 다른 어떤 존재들이기 전에 설교자들이며 또한 그들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그들을 다른 설교자들과 구별하여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단합하고 투쟁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을 갖게 된 것은 그들 자신이 복음을 설교하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고 의식하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내게 화가 있으리라, 는 것이 그들의 영감이며 의로움이었다
17세기의 청교도들 가운데 참목자상의 저자인 리차드 박스터는 청교도 전통과 그 자신의 책이 보여주고 있는 전형들을 그대로 따른것으로서 유명하다.
한마디로 우리는 할수 있는 한 많이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행위를 가르쳐야 한다. 참으로 이 두가지야말로 목회자가 가져야 하는것이 아닌가! 그 얼마나 위대하고 탁월하며 놀랍고 신비로운 일인가!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며 학생들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학교이며 우리는 그의 안내인들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문법책이다 우리가 매일 그들을 가르치고 있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 라고 그는 썼다
대서양저편에서 미국의 청교도인인 커튼 마더는 보스턴에서 양쪽 대양 해변에 그 영향력을 미치는 목회를 하고 있었다 그는 학생과 설교자라는 그의 책속에서 목회자 후보생을 위한 지침서 라는 것을 마련하였다.그의 서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기독교 사역자의 직무는 세상에 있는 누구라도 승인할 수 있는 가장 명예롭고 중요한 일이다. 어째서 하나님의 지혜와 선하심이 이 직무를 불완전하고 죄지은 인간에게 맡기셨는가에 대한 이유를 생각한다는 것은 영원히 불가사의한 일들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설교자의 직무에 대한 위대한 계획과 목적은 사람들의 영혼속에 하나님의 왕권과 통치를 회복하는 것이다 .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아들의 놀라운 완전하심과 그의 임무와 은혜를 가장 선명하게 나타나며, 가장 명백한 언어로 선포하는 일이며, 또한 사람들의 영혼을 그리스도와 영원한 교제 속으로 끌어 들이는 것이다 . ...이것은 그에게 영광이 되는 것으로서 천사가 흠모할 만한 일이다

죠지아에서의 2년간의 생활을 청산하고 돌아온 존 웨슬리는 마음이 뜨거워 지는 경험을 가졌다 그의 경험속에서 그는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오직 그리스도 만을 의지 하였다 그의 죄들이 사라졌다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그를 죄와 죽음의 법으로부터 구원하셨다는 확신을 얻었다고 말하였다 그느 즉시 그가 받은 자유케하는 구원을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교회와 교회 마당에서 마을 잔디 받에서 들과 야외 극장에서 그는 복음을 선포하였고 그의 설교를 들으러 모인 수많은 군중들에게 그리스도를 권하였다 1757년 8월 28일자 그의 잡지에서 그는 사실 난는 설교때문에 산다 고 말하였다 그의 교과서는 언제나 성경이었다 왜냐하면 성경의 가장 우선적인 목적은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이며 독자들에게 구원을 깨우치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가 알았기 때문이다 .

죠지 휫필드는 분명코 더 능력있는 설교자였다. 그는 영국과 미국을 돌아다니며 34년동안 일주일에 평균20번 가량의 설교를 하였다 능변에다가 열심있고 교리적이며 열정적인 그는 생생한 은유들과 평범한 예화들, 극적인 제스처로써 그의 설교에 생기를 더해주었다. 그는 자신의 메시지의 권위를 철저하게 확신하였으며 그의 메시지가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존경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4. 19세기 챨스 시므온 은 캠브리지 대학부 시절에 개심하였다. 그때 그는 거기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를 열망하였다.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1782년에 그의 그 교회의 교구 목사가 되었다. 그는 54년 동안 홀리트리니티 교회의 강단을 지켰으며 성경을 조직적으로 가르쳤다 설교에 대한 시므온의 고귀한 식별은 목회자를 대사로 생각한는 개념으로부터 나왔다.
목사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대사이며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말하는 자이다.그가 성경에 근거한 것을 설교한다면 그의 말은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하는 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간주되게 되어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설교자의 말을 하나님 자신의 말씀으로 받아야 한다.
19세기 전반에 있어서 성경에 대한 고등 비평의 공격들과 찰스 다윈의 진화론 에도불구하고 강단은 영국에서 그 명성을 지켰다. 사람들은 그 당시의 위대한 설교자들의 설교를 들으려 몰려들었고 인쇄된 그의 설교를 열심히 읽었다. 그 설교자들중에는 옥스퍼드 대학교 교회의 존 헨리 뉴멘, 성 바울 대성당의 케논 리든 브리튼의 로버트슨 그리고 모든 설교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런던에 있는 메트로폴리탄 태버나클의 스펄젼이었다
1812년에 신 프린스톤신학교에서 첫번째 교수직을 맏았던 아키볼드 알렉산더의 아들인 제임스 알렉산더는 설교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우리 가운데 설교의 중요성을 올바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염려한다. 오늘의 젊은 사람들은 설교에 임할 때 대 전투를 하루 앞둔 자의 각오로 임하지 않는다 그들은 가장 강력한 열정의 원천을 찾아 인간 감정의 대양의 깊은곳까지 충격을 주어야 하는 사람으로서 설교 준비를 하지 않는다
.....설교는 하나님 자신의 방법이므로 하나님께서는 설교를 영예롭게 하실것이다.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위대한 개혁자들은 위대한 설교자들이었다
후에 알렉산더는 설교를 단지 다른 사람들의 삶에 여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또한 설교자 자신을 위한 참된 성취라고 주장하였다. 설교에는 기쁨이 있다 . 설교든는 사람에게 지루한 만큼 설교자 자신에게도 지루하게 행해질 수 있다. 그러나 설교가 훌륭하게 행해질 때 그 설교는 가장 순수하고 가장 고귀한 감동을 일으킨다. 그러한 설교에는 기쁨이 있다.
설교의 이러한 능력과 기쁨 때문에 금세기에 이르러 에딘버러의 알렉산더 화이트가 낙담해 있는 한 감리교 목사에게 설교 포기할 생각일랑 하지 마시오 하나님의 보좌에 둘러서 있는 천사들이 당신의 그 위대한 일 때문에 당신을 부러워 하고 있오! 라고 충고할 수 있었음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말은 1908년에 있었던 일이다. 또한 1907년에는 회중교회 신학자 포사이드의 저서 긍정적인 설교와 현대 지성이 출판되었다 그 책의 서두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 어쩌면 이렇게 말하는 것이 무모한 시작일지 모르나, 나는 감히 기독교는 설교와 함께 흥하거나 설교와 함께 망한다고 생각한다.

5.20세기 금세기는 행복감에 도취된 분위기 속에서 시작되었다. 교회는 전반적으로 낙관적인 분위기에 동조하였다.
20세기 초의 위대한 설교자 찰스 실베스타 혼 목사는 1914년 예일대학에서 설교의 로멘스 라는 제목으로 설교에 대한 비쳐 강좌를 인도하였다 혼은 회중교회의 목사이며 영국의 하원이었다. 그는 하원에서는 능변가로, 설교에 있어서는 열정가로 평판이 눠았다 정치가이자 설교자이엇던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으로부터 어느 것이 더 영향력 있는 것인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고
---------------------
5)현대교회와 설교 존 스토트 (풍만)pp40-1

하나하나님의 사자인 설교자는 사회의 참된 스승이다. 즉 통치자가 되도록 집단에의하여 뽑힌것은 아니다. 그들은 사회의 이상을 형성하기 위해, 그 이상을 통해서 사회 생활을 인도하고 다스리기 위해 하나님의 선택에 의하여 뽑힌 사회의 스승이다.
역사의 진정한 로맨스는 이러한 설교자들의 로맨스다 . 이 사람은 무력의충돌과 어리석은 힘의 각축들 속에서 오직 진리라는 이름의 칼과 의의 갑옷과 평화의 영을 구하면서 평온하게 서있다. 이 사람은 세상이 정복할 수 없고 저항할 수 도 없는 영웅이다 . 세상의 가장 영속적인 승리는 모두 그의 것이다. 회중교회 목사로서 , 설교를 정치보다 더 강력한 것으로 생각했던 또 한 사람은 조운즈 박사였다 그는 거의 40년 간을 본머드에 있는 리치몬드 힐 회중교회 목사로 있었다. 한 정당의 지도자로부터 의회의 후보자로 출마하도록 권고 받았을 때 그는 그 권고를 사양하면서 그 이유로서 산발랏과 도비야에게 보낸 느헤미야의 답변을 인용했다. 내가 이제 큰 역사를 하니 내려가지 못하겠노라 (느6:3) 조운즈 박사는 두마디를 강조하며 선언했다. 나는 의회가 인간의 조건을 좀더 개선 시키기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음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의 상처를 궁극적으로 치료 할 수 있는것은 입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은혜이다그러므로 구속의 은혜를 선포하는 것이야말로 사람이 부름 받을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일이다
금세기 초에 유행했던 낙관주의는 먼저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그 다음에는 참호속의 진흙과 피의 참사로 산산이 부서졌다 실로 전쟁을 경험한 후 이전의 자유로운 낙관주의를 버리고 인류에 대한 새로운 현실주의와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신앙을 표명했던 칼바르트와 같은 지각있는 신학자들은 , 설교가 이전보다 더욱 심각한 중요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그들의 확신을 표현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듣는 것보다 현실 상황에 더적절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그보다 더 중요하고 더 긴박하며 더 유용하며, 더 구속적이고, 더 유익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은 아주 자명한 이치이다
또 다른 예는 에딘버러의 제임스 블렉의 경우이다. 그는 1923년 스코틀랜드에서의 워랙 강좌와 미국의 프린스톤 강좌에서 학생들에게 그들의 설교 사역을 진지하게 수행하라는 고무적인 충고를 하였다. 우리의 봉사는 위대하고 장엄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모든 재능을 바칠 만한 것이다......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이 일찍부터 여러분의 설교 사역을 필생의 과업으로 삼아주기를 부탁한다. 우리의 일은 필요한 모든 준비와 그 일을 수행하는데 필요
한 모든 재능을 모두 사용해야 할 만큼 중대한 일이다. 여러분의 일은 영혼들
-------------------------
6)현대교회와 설교 존 스토트 (풍만)pp45-7

을 보살피고 기르는 것이 될 것이다. 그 일에 여러분 자신의 값진 삶의 열심과 열정을 쏜으라. 비록 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유럽 속에서의 세속화 과정이 가속화 되었다
할지라도 그 2차대전 조차도 설교의 중요성을 감소시키지 못했다 웨스트민스터 샌드럴홀의 월 생스터는 18세때 감리교 지방 설교자가 도었고 1950년에는 영국 감리교 협의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잘알려진 저서인 설교의 기술에서 그는 설교자의 임무와 특권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설교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말씀을 가르치도록 하나님으로부터 위임을 받았다! 위대하신 왕의 사자!영원한 복음의 증인 ! 다른 어떤일이 그보다 더 눠고 더 거룩할 수 있을까?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소식을 전한다는 것은 사람이 전념할 수 있는 가장 고상하고 거룩한 활동이다 그러므로 그 일은 어쩌면 천사들조차 부러워서 그 일을 하고자 하늘의 궁정을 버릴만한 일인 것이다.
앤드류 블랙우드도 그와 비슷하게 설교는 지상에서 가장 고상한 일로서 그 지위를 차지해야 한다고 논평하였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1960년대, 1970년대 그리고 80년대에 이르게된다. 불행이도 설교의 조수는 점점 쇠하였고 그 간조는 여전히 오늘날도 낮은채로 있다 적어도 서구 사회에서의 설교의 쇠퇴는 교회 쇠퇴의 징후이다. 회의론의 시대적인 분위기는 확신있는 선포의 회복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렇지만 설교의 결정적인 중요성을 단언하며 설교의 부활을 요구하는 소리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1974년부터 1980년까지 켄터베리 대주교를 지낸 도날드 코건보다 더 영국교 회에서의 설교의 회복에 자극을 준 사람은 없다. 설교자 대학이 영국에서 세워진 것은 주로 그의 발의에 의해서였다. 설교에대한 자신의 첫번째 저서인 은혜의 청지기들에서 그는 이러한 말로써 설교의 절대 필요성에 대한 그의 확신을 푸현하였다
여기에 하나님의 경륜의 기적이 있다. 하나님의 용서와 사람의 죄 사이에 서있는 설교자가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의 준비와 인간의 필요 사이에 서 있는 자가 곧 설교자이다. 인간의 죄를 용서에, 인간의 필요를 하나님의 전능에, 인간의 탐구를 하나님의 계시에 연결 시키는 것이 그의 과업이다
자유 교회에서의 예는 1938년부터 1968년까지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교회당에서 매우 영향력있는 목회를 해온 마틴 로이드 존즈 목사의 경우이다. 그는 주일날에 자신의 강단을 떠난일이 결코 없지만 그의 메시지는 지구의 가장먼 구석 구석까지 미쳤다. 그의 의학적인 훈련과 내과 의사로서의 초기 경험,성경 권위와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흔들릴 수 없는 신념, 그의 예리하고 분석적인 지성, 사람의 마음을 꿔뚫어 보는 그의 통찰력, 그리고 그의 열정적인
웨일즈인의 기질로 인하여 그는 50년대와 60년대의 영국의 가장 힘있는 설교자가 되었다 내게 있어서 설교의 사역은 이제까지 부름 받을 수 있었던 누구에게나 가장 귀하고 위대하며 가장 영광스런 소명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이다. 다시 말해서 가장 감격스럽고 가장 흥분 시키며 가장 보람되고 가장 놀라운 일이다.
위에서 간략한 역사적개관을 해보았다. 이 고찰은 적어도 두 가지의 가치가 있다.
첫째, 이 고찰은 설교의 위대한 중요성을 부여하는 기독교 전통들이 얼마나 길고 폭 넓은가를 증명해 준다. 예수와 그의 사도들부터 시작해서 초기의 교부들과,동방에서의 크리소스톰, 서방에서의 어거스틴과 같은 니케아 종교개혁 이후의 위대한 신학자 설교자들로 이어졌으며, 이어서 중세의 프란시스회와 도미닉회 설교 수사들, 종교 개혁자들과 청교도들, 웨슬리와 휫필드를 지나 19세기와 20세기의 현대 목사들에 이르는그 역사는 거의 2000년에 걸친
다.
둘째,이 길고 폭넓은 전통은 한결같이 일관성을 지닌다는 사실이다. 물런 여기에는 생략되었지만 설교의 중요성을 무시하고 심지어 설교를 모독하기까지 한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다. 2000년동안 이어져 내려온 그리스도인의 설교의 중요성을 증대하자는 것이었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동일한 논증과 어휘로 호소하자는 것이다 9)
-----------------------
9)제9회연신원목회자세미나 강의집 p421-

제 4 장
한국교회 설교의 역사적 고찰
미국의 설교 역사학자 다간은 교회사란 바로 설교의 역사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성장하고참으로 교회다운 자기 못,습을 나타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답게 정확히 증거될 때라는 말입니다 . 그러므로 설교의 흥망과 교회의 흠망성쇠가 항상 같이 움직인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사실 세계교회의 역사를 보면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답게 뜨겁게 확신있게 증거될 때는 교회가 힘 있는 교회요, 능력있는 교회가 되지만 교회가 쇠퇴할 때는 반듯이 강단의 쇠퇴부터 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배경을 한번 생각해 보면서 한국교회가 성장하고 축복받은 배후에는 비판의 여지도 많겠지만 한국교회의 지난날에 우리의 선배들이 눈물과 땀과 피를 바친 흔적과 자국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볼 만 합니다.
이제 한국교회는 선교 1백주년을 보내고 새로운 세기를 몇 발자국 앞으로 내딛고있습니다. 지난 한 세기동안 한국 교회의 설교 모습은 어떤 것이었으며 그 설교가 민족의 가슴에 어떻게 뿌리 내렸는가를 물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이 아닐수 없다.
1. 선교 초기의 선교사들의 설교 유형
첫째 한국 교회와 선교사들의 설교 방법에 대해 살펴보면 한국선교의 초기에 왔던 선교사들은 대체 무었을 어떻게 설교를 했는가. 또 그들의 멧시지는 한국 백성에게 어떻게 전달이 될 수 있엇는가. 사실은 별로 기록이 없어서 잘 알 수 는없다다만 선교사들이 설교하기 시작한 것은 1884년 알렌이 들어와서부터 차차 믿는 이가 더해가고 적어도 1907년 대부흥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 약20년 동안으로 그때를 선교사 주도형의 시대라고합니다. 설교도 그랬고 교회정치도 신학교 모든것이 선교사 위주로 했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들의 설교를 구체적으로 다 알 수는 없지만 교회사의 여러 기록을 보면 선교사들의 설교 내용은 단순하고 복음적이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
1)설교개발 (쿰란출판사) p212-4

1) 선교사 설교의 문제점
이땅에 처음 복음을 가져온 선교사들은 목회 경험이 없는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설교 훈련이 안된 20대에 들어 왔다. 왜냐하면 1880년대 전후 그러니까 19세기 미국의 한 풍조가 있었는데 제일 우수한 사람과 제일 열정이 있는 사람이 선교사로 가고 나머지가 국내에 남았습니다. 대단히 고무적인 일이기는 하지만 목회 경험이 없는 분들이 많히 들어온것은 사실 입니다. 그래서 20대의 젊은 선교사들이 이 땅에와 실제 경험이 부족하고 미숫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열정은 있었습니다. 그런 선교사들이 한국말을 배워서 띄
엄띄엄하는 설교 내용은 1900년대 전후해서 미국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했던 제목설교 방법을 그대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첫번째 지적이이것입니다.
그러나 미국 사람이 처음 가르칠때 제목 설교를 하는 방법을 가르쳤기 때문에 한국교회 100년사 가움대제목 설교가 통념화 되어버렸습니다. 아예 설교는 본래부터 그렇게 하는 것인가 생각할 정도로 미국 선교사들이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미국에서는 1940년대를 전후해서 강해 설교 또는 본문 설교로 전환 됩니다.
잘 아시는 대로 C.H다드같은 사람은 유명한 양식사 학자 입니다야식사 학파의 대표격인 다드가 설교의; 케리그마 문제를 이야기한 이후에 많은 신학계에 돌을 던지면서 설교라는 것은 본문을 읽고 눈감고 은혜받는 것이 아니라
반듯이 그 본문 가운데 케리그마가 무었인가 하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암시했습니다. 물런 다드의 신학 이론은 받지 않지만 그것이 상당히 자극제가 된것은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강단에 신학을 다시 찾는 한편 1935년대 화란에는 소위 구속사적인 설교 연구가 대두되어 스킬도와 칼바르트 이론이 서로 투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제목 설교의 방법은 아무래도 초기선교에 있어서 대단한 몫을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제목 설교의 방법이 한국에 전통적인 것이었는데 이제 우유병만 들고 먹던 시대를 지나서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나타난 깊은 일을 구속사적인 안목에서 접근하고 그것을 강해 하면서 설교할 줄 아는 것도 이제는 개발하고 발전 시 켜야할것입니다. 어째던 제목 설교의 방법이 한국교회 강단에 그대로 이식되었고 교회 강단에결정적인 전통으로 굳어 졌습니다뿐만 아니라 제목 설교의 영향은 주로 많은 예화를 필요로 했으니 처음 부터 설교의 한 방법으로 예화를 많이 모의고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평양 장로교 신학교에서 첫 신학지남의 첫번째 난에 바로 그 예화를 모아서 제시하는 대목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와같이 설교에 있어 현상적이고 경험적인 접근 방법으로서 예화의 사용은 선교 초기에 접촉점을 얻기 위한 것으로 공헌을 한 셈이다. 저는 이것도 긍정적으로 보고 싶다. 그러나 교회가 성장하면서도 유치한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기에 이런 경향은 걸림돌이 되기도 하고 설교에 있어서 해석학적인 이해나 성경 신학에 대한 이해는 없고 다만 단편적인 진리를 예로 들어서 현상적이고 경험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대종을 이루게 되었다.
이런것을 가리켜 요새는 예증적인 설교 모형적인 설교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목 설교를 하는 사람 모두 이 예증적인 설교를 하는데 성경에 있는 역사적 본문을 보면서 그 역사적 본문의 인물이나 성격이나 환경을 깊이 이해하여 오늘의 삶과 연결시키는 섦교, 이는 구속사적인 진리를 캐내는데 대단히 부족합니다 예를 들면 흔히 삭게오가 예수님이 보고 싶어서 어깨 너머로 보려 했으나키가 작아서 않되니 염치 불구하고 뽕나무에 엉금엉금 올라가서 예수님을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생각하기를 예수님을 보려고 뽕나무에 기어올라간 삭게오의 신앙이 너무 좋아서 그의 신앙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내용은 삭게오에게 총점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촛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예화 설교와 구속사 적인 설교와 다른 것입니다
구속사적인 설교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삭게오에게 총점이 있는것이 아니라 삭게오에게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총점을 맞춥니다. 삭게오야 내려 오너라. 오늘 너의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고 말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 가운데 나타난 메시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에서 말씀 하시는 그 메시야시라는 것을 힘차게 증거하는 그런 안목에서 접근하는 방법을 구속사적설교라고 할 수 있다.그러나 한국교회에 지금까지 내려온 제목 설교의 방법은 예증적인 설교에 주로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 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가령 우리가 다윗을 설교할 때 성경은 다윗의 인간됨과 신앙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다윗을 다윗되게 하신 하나님을 설교에서 증거해야 합니다. 그것을 구속사적 설교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신앙은 위대했습니다 하고 설교하다가 아브라함 링컨도 나오고 죠지 워싱턴 이야기도 나오고 하여 구속사와 세속사를 구별짓지 못하고 넘어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구속사적 설교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에게 그러한 신앙을 갖도록 하신 하나님을 힘있게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런류의 제목 설교의 경향이 100년동안 한국 교회에 변하지 않고 지켜 왔는데 미국에는 이미 1930년대 후반에 제목 설교의 방법에서 본문설교 또는 강해설교의 방법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을 보면 한국교회 100년 동안 전혀 설교 신학에 대한 토의가 없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10년 전까지는 설교학에 대한 책은 두가지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는 장로교에서 1925년에 나온 곽안련 목사님의 강도학인데 설교학으로 바꾸어 1세기 동안 써먹었습니다. 그 다음 1926년에 감리교에서 나온 교중에 대한 직무 라는 책이 설교학인데 그 번역한 책을 1세기 동안 썹습니다. 그래서 10년전에 신학교를 졸업하신 목사님들이 배운 설교학은 본문설교는 이렇고 제목설교는 이렇고 설교는 이렇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2.초기 한국교회의 설교 내용
이땅에 기독교가 들어온 시기는 국운이 기울어지고 온 민족이 소망을 잃고 방황하던 시기였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당시 교회는 아직도 선교사 주도형의 교회로한국교회 목사들의 발언은 미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초기 한국교회 사역자들이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외쳤던 설교는 당시 대중들의 텅빈 마음을 채우는 충족적인 말씀이었습니다. 설교자도 결국 그 시대의 정황에 아래 있었기에 그 시대마다 독특한메시지가 나옵니다 . 그래서
설교는 그 시대의 거울입니다.
가령 장영자 사건이 터졌을 떠 학생들에게 여러 주보를 가져오라 했더니 그 다음날 주보는 그런 메시지가 많았습니다. 그런 불의를 책망하는 설교가 많았습니다 설교는 바로 그 시대의 거울이라서 시대적 반응이 나타납니다. 의도적이듣 의도적이지 아니든 그것이 반듯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일제의 암울한 시대에 있었을 때 목사님들의 메시지는 이 암울한 시대를 똘고 나가 하나님의 궁극적인 스리를 외치는 메시지가 꽉 차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일제시대의 암흑기의 설교(20년-45년대)
1920년대에서 45년 사이의 메시지는 대개 출애굽기를 많이 있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되고 출애굽한 것을 우리 민족의 해방과 일치시킨 것입니다. 또 요한계시록을 많이 설교한 이유도 그것입니다. 결국 어린양의 최종적인 승리가 될 것이므로 우리 민족도 반듯시 독립하고야 말것이다. 일제는 곧 망하고 우리는 승리할 것이라는 소망을 제시했습니다. 이 민족은 설교자가 없었던들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암울한 시대에 그래도 목사님들이 생명의 메시지를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이 살아 계신것을 명백하게 증거하고 소망을 잃지 않도록 민족을 깨우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들이 살아 있는 한 민족은 죽지않고 살아납니다. 어쨌든 설교학자들이 말하는 설교는 그 시대의 거울이라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초기 선교사들의 설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언어 장벽으로 당시의 민족적 수남으로 말미암은 민족의 아품을 선교사의 서투른 설교로는 위로할 길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이만집,김장호 목사님의 설교를 보면 선교사는 우리 가슴을 몰라요 . 선교사가 우리의 아픔을 어떻게 압니까? 코 큰 사람들이 우리의 아픔을 어떻게 압니까? 이런 말이 나옵니다. 우리 민족의 아픔을 잘 모릅니다. 선교사들의 설교는 말은 됩니다 그렇지만 영과 영이 부딪치는 메
시지가 안됩니다. 감동이 없습니다.
예를들면 이가 꼬물꼬물하다는 것을 여기 작은 동물이 운동을 하오 합니다.
대충 감은 잡지만 우리의 가슴에시원한 감동이일어나는 메시지는 선교사들은 못합니다. 선교사들에게설교를 들을 때는 그냥 구경거리입니다. 그냥와서 대충 분위기를 알았지 정말 나라를 빼앗기고 남편을 빼앗기고 아내를 뺏긴 민족의 설움을 위로해 줄 수 잇는 메시지는 선교사들의 설교로는 안됩니다.
침레교회 선교사로 와 계시던 팬위크 목사님은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자기가 한국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어보니까 자기는 한번도 해보지 못한 감화력을 가지고 차분히 설교할 때 전기가 통하는 것 같고 찬물을 끼얹는 것 같더랍니다. 그런데 선교사들이 땀을 흘리고 설교하는데도 한국교회 성도들은 빙긋빙긋 웃고만 있더라는 것이 팬위크의 자서전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입니다. 선교사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에 대해 가르쳤으며 성경에 대한 광범위한 바른 지식과 정열이 있었지만 선교사와 한국인 사이에 전달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설교에 중요하게 논의되는 것이 전달의 문제입니다.
설교에 있어 전달은 아주 중요합니다. 문화적인 격차 피부색깔, 메시지의 생소함, 설득력을 동반하지 아니하는 복음전도가 동양과 서양 사이의 감정의 통로를 뚫을 수가 없습니다. 팬위크는 눈물로 하나님을 증거하고 그리스도와 속죄의 사랑을 증거햇지만 한국 사람은 소리없이 웃고만 잇었고 말씀이 가슴을 파고 들지 못했다.선교사들의 설교와한국인의 설교에는 받는 쪽이 달랐습니다. 역시 한국인은 한국 설교자들로 말미암아 가슴에 닿는 메시지를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4.초기 한국교회 설교의 특징
첫째, 민족의 구원과 자각을 일깨우는 설교였다
초기 교회의 설교자들은 이 민족의 가장 선두에 서서 대중들을 이끌어 가는 선각자의 역활을 감당 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는 목사님들이 세계정세에 가장 밝은 정보통이엇다. 바로 목사님들이 미국 선교사들과 직통이기 때문입니다. 미국등 전세게에서 일어나는 모든 내용을 가장 먼저 알고 있었습니다 .
교회만이 가장 광범위한 조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가령 목포에서 일어난 사건이 금방 서울로 전달됩니다. 교회는 전국적인 조직을 가지고 있어서 당시의 신문보다 교회의 전달이 훨씬 빨랐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목사님들의 강단 설교는 이 민족에게 영적인 기갈을 채워주엇을 뿐만 아니라 민족의 자각과 구원을 일깨우는 길잡이 역활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예컨대 모든 사람들이 불교의 윤회적 역사관을 가지고있던 시절에 강단에서 외치는 설교는 기독교 역사관인 직선적인 알파와 오메가의 역사를 들려 주었습니다 그때 교역자들은 문자대로 망루에선 파수꾼처럼 두 눈을 번뜩이고 적정을 살피며 밤를 지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길선주 목사님의 설교인 평화의 빛이라는 것에서 볼 수 있는데 길선주 목사님의 설교는 완곡한 표현 있지만 일제의 치부를 공격하는 설교는 당시에 계엄령하에 있었던것과 같았기 때문에 전부 삭제도었습니다.
삭제된 부분이 사실은 제미 있는 부분입니다 일제의 치부를 강하게 공격하는 내용입니다. 길선주 목사님은 영원한 하늘 나라를 말하면서도 사실적인 관심과 발등에 떨어진 불인 민족 구원을 힘있게 외쳤습니다.
당시 성공회 부총무였던 허현 목사는 출애굽기 2,3장을 설교하면서도 조금 색다른 말을 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의 일생과출애굽한 사건을 통해서 우리 민족이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서 구출받게 될 것을 비유적으로 말했습니다.
초기 한국 교회 설교는 민족의 구원과 자각을 일깨우는 설교였습니다.

둘째,민족의 갈길을 밝혀주는 설교였다.
앞에서도 지적했지만이땅에 복음의 진리가 뿌려지고 교회가 세워질 무렵에는 변화의 와중이었습니다. 우선 봉건주의의 몰락과, 서양문명의 도입, 국권의 상실, 일제의탄압, 민족해방의 과제를 안고 잇었다, 그러므로 교회의 강단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선포뿐 아니라민중을 계몽하고 자주, 자유 독립을 고취하는가 하면 민족의 갈길을 제시하는 설교를 했습니다.교회의 지도자들이 사실상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들로 인식되었습니다. 또 이미 그 시대 자체가 목사님들에게 그것을 요청했다. 당시 1920년대 동아일보 기사에는 교회만이 민족의 소망이다 독립신문에는이 민족이 다 예수를 믿어서 구원받게 되면 이 나라가 세계에 빛나는 민족이 되리라 는 기도문이 있습니다. 그때는 우리 기독교인들이 삶의 영역에 전부 앞장서 있었기 때문에 신문을 다 주도했었습니다. 확실히 당시 교회 지도들은 시대를 앞지르는 사람들로 인식되었습니다. 당시의 설교자는 우리 민족이 개혁해 나갈 구체적인 행동 지침을 제시했습니다. 그 메시지는 예날에 자기 모습의 껍질을 벗겨내고 새로운 것을 입혀야 할 것을 호소했습니다.
새로운 시대에 이 민족이 걸어가야 할 윤리는 소극적인 자기 방어가 아니고 적극적인 윤리를 가져야 할것을 호소 했습니다.

셋째,새로운 윤리의 표준으로서 예수를 설교했다.
우리의윤리의 표준이 어디냐 예수 그리스도가 윤리의 표준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것은 이조 500년의 유교의 아둔한 꿈에서 깨어날 것을 말했습니다.
오백년동안 유교의 형식적 윤리의 틀속에 있었던 이 나라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확실히 도전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한국 초기의 설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받고 해석했던 단순한 외침이 결국 오늘의 한국교회를 만들었고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의 청교도적이고 보수적인 설교의 틀이 오늘의 한국교회의 성장과 부흥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5.고난받는 교회와 설교
1) 설교의 두 게열
1919년 3.1일운동 이후에 는 설교의 내용이 변하고 있습니다. 물런 그에 앞서 길선주 목사의 설교는 허탈과 좌절에 빠진 이 민족의 가슴에 용기와 능력과 확신을 안겨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독립운동이 벽에 부딪치자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의 메시지는 다양한 모습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의 무디로 불리는 김익두 목사의 설교를 보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그의 설교에서 언제나 뜨겁게 외쳐졌습니다. 또한 천국에 갈자의 요건과 회개가 강조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민족적 악습을 예리하게 비판하고 미신적인 요소를 제거하는데 앞장섰습니다. 김익두 목사의 메시지는 길선주 목사와 달리 내세적이고 피안적인 현실 도피를 강조했습니다. 이것이 조금 문제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이해합니다. 그때 당시 우리민족에게는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메시지가 이분화됩니다. 이 세상에는 소망이 없다며영원한 하늘나라를 봅니다. 우리 한국교회의 보수신앙의 틀이 이 세상에 대해서 이분법적으로 생각하고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서 아무 상관이 없다는 이원론적 사색을 하는 이유가 과거 우리 민족이 40년 가까이 이런틀속에 살면서 굳어진 것입니다.
사실 우리 개혁교회 선교의 패턴은 복음의 치안성과 피안성이 동시적으로 강조되어야 그것이 개혁 교회의 설교입니다. 그러니까 미래에 대해서 장차오실 하나님의 나라를 뜨겁게 강조하면서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분명히 말해야 우리는 말씀 전부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실에 대하여 매섭게 말하면서도 장차 오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설교하는 것이 이른바 말씀 전부를 전하는 것입니다. 길선주 목사만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 대표적인 설교가 길선주 목사라는 것입니다.
김익두목사의 제자라고 할 수 있는 이성봉 목사의 메시지도 잘나가다가 끝에가서 허무주의에 빠집니다. 차라리 이 허무주의를 처음 도입에 넣고서 마지막에 십자가에 피뭍은 복음을 뜨겁게 증거했으면 좋았을텐대 처음에는 잘나가다가 나중에는 세상 만사 살피니 참헛되구나 부귀 공명 장수인들 무엇하리요 하면서 그러니 알아서 해라 이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민족은 암울하고 소망이 없고 이 세상은 썩어질 세상 일본 눔은 반듯이 망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온다.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보자 이런 식이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신아의 패턴이 자꾸 탈 현세적이고 피안적인 것이 된 이유가 이런 설교의 패턴과 무관 하지는 않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합니다.
김익두 목사님의 설교의 메시지는 병들고 찌든 영혼을 위로하고 싸매기에 충분했습니다. 세상 나라는 소망이 없기에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민족의 소망이었습니다. 실로 그가 외쳤던 민족 순수한 복음 운동은 한국교회의 형태를 결정짓는 요인이 되었고일제의 간악한 흉게가 노골화 되어감에 따라서 교회는 그 힘을 속으로 응고 시켜 갔습니다. 교회는 민족의 갈길을 밝혀 주는 중심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나라 사랑의 의식을 굳히는 터전이 되었고 자유와 평등에 대한 이념과 새로운 세게관을 제시해 주는 장소였습니다.
김익두 목사가 한참 이런 설교를 할때 김익두 목사님과 쌍벽을 이루는 분이 유명한 김장호 목사님입니다. 김장호, 김익두. 두목사님은 다 황해노회 출신입니다. 김익두 목사님의 노선은 초자연적 기독교, 이적적 기독교,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한 기도교인데 반하여 김장호 목사는 당시의 공위량 선교사 밑에 조수로 따라다니며 배워 아주 논리적입니다. 그런데 그가 공위량 목사에게 배운게 뭐냐하면 이런 메시지 였다.
모세가 홍해를 건넌 것은 기적이 아니고 바로 밀물과 썰물의 잘 보았다가 건너갔다. 이런 설교를 햇고 그때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많이 잇었습니다.
그러니까. 김익두를 따르던 사람들은 김장호 목사가 올라오면 물러가라 하고 서로 그러다가 나중에는 선교사들이 싸움을 말려도 않되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1918년에 노회가 김장호 목사를 정죄 했습니다. 결국 그때 한국교회가 취한 태도가 한국교회 신앙의 방향을 설정하는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는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령 예를 들면 니케아 회의가 왜 모이고 도르트 총회가 왜 모였습니까? 설교 때문에 모였습니다. 역사의 부기점마다특별이 시대마다 교회는 어려운일을 당할때 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젖혀놓고 이렇게 하는 것이 옳았던가 하는 질문을 할 때 또 오뚜기처럼 서서 바로 나갔습니다. 이 질문은 우리 교회가 언제라도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한국 교회도 1918년에 이렇게 협의화해서 결정했습니다. 한국교회 신앙 패턴이 보수적이 아니면 모이지 않습니다. 한국에서는 보수적 신학 서적이 아니면 팔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1918년 김익두와 김장호 사이의 논쟁에서 김익두 노선을 우리의 신앙 체계로 삼은 데서 한국 교회의 큰 흐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6. 1960년대 이후의 설교
6.25이후 혼란의 시대를 거쳐서 1960년대 국가 경제 발전에 맞추어 한국 교회 강단의 메시지는 변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기복주의 사상과 물량주의가 힘있게 된 것입니다. 1950년대 메시지는 요한 계시록을 중심으로 설교를 많이 했는데 요새는 그 설교는 별로 안합니다1960년대 전에는 장차 오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설교를 많이 했는데 요새는 이 땅에서 어떻게 잘살까? 거기에 촛점이 있습니다
이렇게 변하는 것이 옳은가 물어 보아야 겠습니다. 요새는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려우니라는 설교는 않합니다. 이 설교를 했다가는 교인들이 교회를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은 이렇게 설교 했습니다. 낙타는 바늘귀로 얼마든지 들어 갈 수 있습니다. 낙타털을 깍아서 실로 가늘게 꼬아서 넣으면 들어간다고 설교 했다고 합니다.
성경대로 하면 됩니다 부자는 절대로 천국에 못들어 갑니다 이렇게 밑둥지를 잘라놓고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야지 처음부터 겁을내서 낙타털을 뽑아가지고 넣으면 들어 간다고 하면 안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