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주석

로마서 주석
제 8 장

본장은 기독교 구원론 전반의 원리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제 1-8장까지의 일련 기사의 연속 부분이다. 6-8장에서는 이신득의의 원리에 따라 하나님 앞에서 법적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성도들이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닮아 의롭게 되는 길, 즉 성도의 성화에 대해 설파하면서 죄와 싸워야 할 것, 죄의 법에서 벗어나야 할 것, 고난을 극복할 것에 대한 권면과 하나님의 양자로서 얻을 천국에서의 궁극적인 승리의 소망을 가질 것에 대해 교훈하고 있다.
이러한 문맥 하에서 본장은 일명 ‘작은 로마서\'라고 불리우는 갈라디아서 5장과 같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성경을 한 개의 지환으로 본다면 로마서는 그 보석이고 제 8장은 그 보석이 반짝이는 첨단이다\'(Philip Jacob Spener). 로마서 8장을 이렇게 볼 수 있는 이유는 바울이 본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가 누릴 수 있는 네가지 ‘영적 자유\'를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에서 해방되었고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얻게 되었다(1-4절). 둘째,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며 우리는 그 영의 뜻대로 생활함으로써 ‘패배\'로부터 해방되었다(5-17절). 셋째,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것이며 우리는 그분의 영광에 참여할 것이기 때문에 ‘실망\'으로부터 해방되었다(18-30절). 넷째,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 대하여 우리를 위한 중재가 되시며 우리는 그분의 사랑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으므로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었다(31-39절).
한편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의 생활이 승리의 생활임을 말하고 있는 본장에서는 특별히 성령이란 단어가 19회나 나온다. 이것은 성도가 참 자유를 누리며 승리의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되어지는 일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영에 속한 사람(롬 8:1-11)

전장 말미에서 성화 과정상에 나타나는 심각한 갈등을 해부해 보인 바울은 본장에 이르러서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에게 필연적으로 주어지는 위대한 자유와 축복, 나아가 궁극적 승리에 대해 담대하고 확신에 가득찬 필치로 설파함으로써, 4장에서 7장에 걸쳐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되고 분석된 칭의론과 성화론에 관한 주제들을 모아 영화론이라는 최고의 매듭과 결합시킨다. 특히 본문은 죄의 사망의 권세를 깨치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 곧 성령의 지배를 받는 자가 누리는 온전한 자유와 생명의 원리를 소개한다.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러므로 이것은 위의 말씀에서 내리는 결론을 유도하는 접속사이다. 곧 인간이 제힘으로는 도저히 죄를 이길수 없으니 구원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만 성립된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이제\'(now)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있는 자\'라함은 바울의 신앙 사상에 흔히 나오는데 그 연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요 16:1-7; 17:21; 14:20)에 벌써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와 연합하여 일체가 된다. 따라서 그의 죽으심이 우리의 죄 값인 죽음을 대신하고 그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을 성립시킨다.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정죄\'(헬, 카타크리마) ‘카타크리모’에서 유래한 것으로 ‘불리한 선고(판결)’, ‘정죄’(롬 5:16, an adverse judgment)의 의미로 법정용어이며 ‘유죄판결’을 가리킨다. 즉 ‘심판에 의한 단죄’를 뜻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대한 하나님의 정죄는 그 인간의 ‘사망’을 의미한다. ‘정죄’라는 용어는 신 25:1에서는 전형적인 법정 용어로 사용되었다. 재판관(사사)들은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해야’한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정죄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동사의 더욱 중요한 용법과 명사적인 용법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정죄하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이러한 내용에 관한 성경적 교훈은 다음과 같은 요한복음의 두 구절로 요약될 수 있다. 사람들의 정죄됨은 여기에 있으니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빛보다 어두움을 사랑함이라. 이는 자기들의 행위가 악하기 때문이다’(요 3:19). 또 다른 구절에 말씀하시기를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즉, 정죄)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여기에는 매우 사실적이고 심각한 정죄가 나타나 있다. 즉 그릇된 길을 택하고 빛보다 어두움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무서운 하나님의 정죄(심판)가 임하여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로 말미암아 이러한 정죄로부터 구원을 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롬 8:1).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생명의 성령의 법\'이란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이라기 보다는 ‘생명을 주는 성령의 법\'이란 뜻이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죄와 사망의 법\'이란 정확히는 ‘죄의 법과 사망의 법\'인데 ‘옛 세대의 율법\'을 가리킨다. 그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갱신되기 전의 법이요 성령의 영향력을 행사받지 못하는 법이다.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본절의 ‘육신\'은 육적인 나약한 존재 양식을 가리킨다. ‘할 수 없는 그것\'이란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는 그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하시나니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그분에게 불가능한 것은 없다. 전능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위조적인 문제들을 야기시킴으로써 종종 하나님의 전능에 대해 소피스트적인 반론을 제기한다. 그런것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진정한 문제를 제기한 것이 못된다. 전능은 하나님의 주권과 관련시켜야만 한다.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의 보편적인 성격은 죄가 있는 것이고, 그리스도는 그런 육신의 모양을 가졌으나 죄는 없으시다. 그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성을 가지셨지만 그 인간성은 그의 전부가 아니었다. 그는 또한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셨다.

육신에 죄를 정하사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정죄가 육신안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육신, 그리스도의 인간성 안에서 정죄하셨다. 그러므로 그의 육신을 십자가에 다셨다. 그는 어떤 다른 인간의 육신이 아닌 그리스도의 육신 즉 그리스도의 인간성만이 모든 인류의 죄를 짊어지도록 하셨다. 본절의 ‘정하사’(헬, 카타크리노)는 ‘불리한 판단을 하다’, ‘선고하다’, ‘정죄하다’, ‘저주하다’(롬 8:3; 벧후 2:6, condemn)의 의미이다.

8: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여기서 ‘육신\'(헬, 사륵수)은 인간의 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 본성을 가리킨다. 한편 ‘영’(헬, 프뉴마)은 성경에는 언제나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모든 육체의 영들의 아버지시라고 언급한다(민 16:22; 히 12:9). 인간은 영을 보유하고 있을 권한이 없고(전 8:8; 시 104:29), 인간이 죽으면 그의 영혼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전 12:7). 이와 같은 언급들로 인해 어떤 신학자들은 ‘영\'에 관해 ‘창조설\'(creationism)을 강력하게 주장해 왔다. 이것은 각 사람의 영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창조하신 것이라는 견해이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영혼 유전설’(traducianism)을 강하게 주장해 왔다. 이는 육체뿐만 아니라 ‘영\'도 부모의 생식으로부터 유래된 것이라는 견해이다(물론 이 경우에는 하나님께서는 근본적으로 그것들의 ‘창조주\'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임에는 틀림없다). 구약성경에 있어서 특히 정신적이고 정서적인 활동에 관한 한 ‘영혼\'(soul)과 ‘영\'(spirit)의 기능들은 때때로 서로 일치하고 있다. 그 이유는, 영혼이란 눈으로 보고 감지할 수 있는 생명인데 이것을 통해서 ‘영’이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혼은 육신적인 감각에 있어서 굶주리기도 하고 목마르기도 하지만 영은 결코 그렇지 않다. 신약성경에서 ‘영’이 언급된 경우는 하나님께 관계된 문제들에 있어서나 성령께서 인간의 영에 작용하는 문제들에 있어서 아주 흔히 발견되어진다. 그러나 ‘영’은 몹시 슬퍼하기도 하고(창 26:35, ‘근심하다\'), 겸비하기도 하고(마 5:3, ‘가난하다\'), 걱정하기도 하고(요 13:21, ‘민망하다\'), 생각하기도 하고 (사 27:24; 욥 20:3), 기억하기도 한다(시 77:6). 그런데 신약성경에는 구약성경의 히브리어에는 없는 마음(mind)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있기 때문에 구약성경에서는 ‘영’의 기능으로 묘사된 것들이 신약성경에는 ‘영’의 기능으로 묘사되어 있다. 구약성경이나 신약성경에 있어서 인간의 심중의 생각이나 의중이 쏟아나오는 곳은 ‘영’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려면 그의 영이 새로와지지 않으면 안된다(시 51:10; 갈 5:22; 요일 4:13). 때때로 ‘영\'이라는 단어는 영어에 도입되어서 보편적인 단어로서 사용되고 있는데 ‘마음가짐\' 혹은 ‘재능\'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쓰인다. 인간은 질투심(민 5:14, ‘의심\')을 가질 수도 있고, 거만한 마음(잠 16:18), 통회하는 마음(시 34:18)을 가질 수도 있다. 회막을 짓는 자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위해 ‘지혜로운 영\'을 부여 받았다(출 28:3). 루드비히 쾰러(Ludwing Koehler)는 ‘영\'이라는 단어가 기상학적인 기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형식의 표현을 매우 그렇듯하게 설명했는데, 그에 따르면 ‘영\'은 ‘숨\'이나 ‘바람\'을 가리킨다고 한다. 따라서 ‘영’은 생명력을 가리키기도 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게 하는 영을 가리키기도 한다. 때때로 문맥상 ‘영’이라는 단어가 ‘하나님의 영’을 가리키는지, 혹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영’을 가리키는지 분간하기가 어려운 구절들이 있다(시 51:11; 롬 1:4).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곧 그리스도께서 믿는 죄인들을 대신하여 그 육신에 정죄를 받은 결과로 그들이 객관적으로는 공로없이 칭의를 받는다.

8:5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육신을 좇는 자\'는 부패하고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좇아 사는 자를 자리킨다. ‘육신의 일’이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함은 물론 결국에는 사망에 이르게 하는 각종 죄악된 행위들을 가리킨다.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영을 좇는 자\'란 성령의 인도함을 좇아 사는 성도를 가리킨다. ‘영의 일\'이란 영적인 것으로 이는 성도가 마땅히 열매 맺어야 할 성령의 열매들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들이다. 이에 해당하는 것은 갈 :22-23의 열매들이다.

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육신의 생각\'이란 부패하고 타락한 인간 본성이 지향하는 죄의 성향을 가리킨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육신의 정욕\'(요일 2:16), ‘죄악된 마음\'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왜 사망인지 7, 8절에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영의 생각\'이란 성령의 지배와 인도를 받는 것을 가리킨다(14절). 이는 곧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물론이요 그 관계를 굳건히 지속하는 것을 의미하니 그 자체가 이미 영생인 것이다.

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이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육신의 생각\'으로 살아가는 삶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다. 육신은 죄의 지배를 받으며 마귀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사람이 마땅히 위할 하나님을 위하지 않고 자기만을 위함을 말함이다. 즉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하는 것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1:18이하의 주제를 연상시킨다. 여기서 ‘하나님의 법\'은 일차적으로 율법을 의미하지만 보다 넓은 의미에서는 신, 구약 성경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명하시고 요구하시는 의롭고 거룩하며 선한 뜻이라 하겠다. 그러나 부패한 인간 본성은 그에 순복하기 보다는 도리어 그에 반동하며 범법하는 성향을 표출한다는 사실에 대하여서는 이미 여러번 언급되었다(롬 5:20; 7:14). 이는 죄와 사망의 권세가 인간의 부패한 심령을 주장하여 인간을 종노릇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할 수도 없음이라 극과 극은 서로 대립할 뿐 굴복이란 것이 없다. 원수 사이는 굴복치 않을 뿐 아니라 굴복할 수도 없다. 하나님의 원수인 우리의 타락한 본성은 하나님의 법에 종속되어 있지도 않으며, 그 본성상 하나님의 법에 종속될 수도 없다.

8: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육신에 있다\'함은 \'육신을 좇는 자\'(5절)로 몸 안에 있다는 의미가 아니고 부패한 인간성의 지배를 받는다는 뜻이다. 즉 부패한 인간 본성을 좇아 사는 자연인을 가리킨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7절의 ‘할 수도 없음이라\'를 반복한 것이다. 부패한 인간 본성의 자연인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왜냐하면 저들은 죄를 짓되 죄를 죄로 여기지도 아니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기 때문이다(롬 3:18). 그러나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자들은 성령께서 심령 가운데 조명해 주심에 따라 죄의 결국이 어떠함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구습을 버리고 날마다 새 사람 입기를 힘쓰게 되는 것이다.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하나님의 영이 그리스도인 속에 거하고 계심을 조건으로 하여 그리스도인의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이 좌우됨을 말한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면 육신의 사고방식 및 행동방식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이란 ‘성령\'을 가리킨다. 앞에서는 ‘하나님의 영\'이라 하였고 본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영\'이라 하였다. 한편 본절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결정하는 선언문과도 같다.

8: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앞에서는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것을 말하였으나 본절은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는 조건을 말한다.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해 내재하시기에 그리스도와 성령을 동일시하고 있다.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앞에는 아담 안에서 범죄한 모든 사람이 사망의 권세하에 예속된 것과 관련하여(롬 5:12) 모든 인간이 육체적으로 죽음을 면할 수 없는 것을 가리킨다(Barmby, Godet, Witmer). 그러나 여기서 ‘몸’(헬, 소마)은 단순히 자연사할 인간의 육신만을 가리키기보다는 아담의 범죄 이후 죄악의 지배를 받는 인간의 부패한 심성가지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처럼 죄의 지배하에 있는 것으로 인하여 인간은 결국 사망에 처하여지게 되었기 때문이다(롬 6:16).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본절의 ‘영\'은 ‘성령\'의 의미보다는 ‘몸\'과 대조되는 개념으로서 ‘인간의 영혼\'을 가리키는 것임이 분명하다(Bengel, Meyer, Vincent, Witmer). 한편 본절의 ‘의\'는 ‘도덕적인 의\'보다는 ‘하나님의 의\'로 ‘산 것\'이란 ‘생명\'을 의미한다.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10절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과 같은 말이다. ‘너희 안에 거하시면\'은 성령께서 성도 가운데 내주하시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이는 장차 하나님께서 성도를 부활시키시리라는 사실에 있어 성령이 이를 보증하시는 분이 됨을 의미한다. 즉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께서 다시 사신 것은 장차 그에게 속한 성도들도 부활하게 되리라는 증거가 되는데 이를 보증하시는 분이 곧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심령에 보내 주심으로 성도 가운데 내주하시는 성령인 것이다.

하나님의 후사(롬 8:12-17)

하나님의 자녀인 신분으로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유업을 상속받은 성도의 기쁨을 노래한다.

8: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그러므로 본절의 접속사 ‘그러므로\'는 지금까지의 논증으로부터 어떤 결론을 내리기 위해 사용된 것이다.

형제들아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한 형제 자매된 성도들을 다정스럽게 부르는 호칭이다. 그런데 본서에서 이러한 호칭은 대개 권면이나 경고 등을 베푸는 대목에서 주로 사용되는 것으로 수신자의 관심을 환기시킨다는 특징을 띠고 있다.

우리가 빚진 자로되 이것은 신자는 선을 행할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 책임감의 원천은 9-11절에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이다. 한편 1:14에서 ‘빚\'은 ‘사명적 의무감\'을 가리켰으나 본절의 ‘빚\'은 그 문맥상 ‘도덕적 의무감\'을 가리킨다. ‘빚진 자’(헬, 옵헤일레테일)는 ‘옵헤일로’에서 유래한 것으로 ‘소유주’, ‘채무자’, 상징적으로 ‘게으른’, 도덕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범죄자’, ‘빚진자’, ‘가진자’, ‘죄인’(롬 8:12, debtor, a transgressor)의 의미로 구약성경에는 별로 나오지 않는다. 그 이유는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세의 율법에 따라서 형제애와 상호 협력의 정신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빚을 돌려받는데 대한 어떤 제도적인 조치는 마련되어 있지 않았지만, 누구나 빚을 갚지 않으면 엄하게 정죄되었다(신 15:1; 삼상 22:2; 왕하 4:1; 느 5:5; 시 37:21). 가난하여 빚을 못 갚게 되면 노예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채주의 권한은 제한되어 있었다(레 25:39; 신 24:6). 로마법에서는 빚진 자가 그 빚을 갚지 않으면 감옥에 갇히도록 되어있었다(마 5:25). 신약 시대에는 로마의 상업적인 관습 때문에 대금업자에 관한 기록이 성경에 많이 나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빚진 자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두 가지 유명한 비유를 사용하셨다. 그러한 중대한 관계는 사업적인 토대 위에서 성립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영적으로 파산자이기 때문이다(마 18:27). 바울은 자신의 사도적 신분에 대해서 ‘빚진 자\'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했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와 모든 사람들에게 빚을 졌다는 생각 때문에 열심을 다하여 복음을 전파했던 것이다(롬 1:1. 14). 도덕적이건 경제적이건, 모든 종류의 채무는 이 단어로써 표현될 수 있다. 신자들은 여러 가지 세금들을 국가에 대한 의무로서 온전히 지불해야 한다(롬 13:6). 남편은 아내에게, 그리고 아내는 남편에게 부부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전 7:3).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써는 구원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롬 4:14; 갈 5:3). 그리스도인들은 자기가 갚을 수 있는 것 이상으로 형제들에게 빚지고 있다(롬 13:8).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 형제들에게 복음에 대해 깊이 빚지고 있었다(행 11:29; 롬 15:26). 똑같은 내용을 ‘종\'의 개념으로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인을 값주고 사서 자신의 것으로 삼으셨으며, 종노릇하는데서 해방시키셨다.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그리스도인은 육신에게 대해 육신대로 살 의무감이 없다. 그는 육신에게 대해서는 아무런 의무가 없다.

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여기 ‘죽음\'은 특별히 ‘영적인 죽음\'을 가리킨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도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10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또한 영적인 생명을 부여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육체적인 죽음을 맛보아야 한다. 그 이유는 육체적인 죽음이란 극복해야 할 마지막 원수이기 때문이다(고전 15:26). 죽음은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사라질 것이다. 그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은 썩지 않을 몸으로 부활할 것이다(고전 15:52; 빌 3:20, 21). 성도들은 장차 그 몸이 부활할 것이기 때문에, 성도의 죽음은 ‘잠자는 것\'으로 묘사될 수 있다(살전 4:15). 육체가 전혀 움직이지도 않고 죽은 상태에 있다가 완전한 상태로 생기를 회복하는 것은, 사람이 밤에 잠이 들어서 활동을 정지하고 있다가 아침에 다시 일어나는 것에 비교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죽음의 공포에 압도당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존전에서 더 이상 죄와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여기 ‘영\'이란 말은 성령을 의미한다. 몸의 행실이란 말은 단지 신체의 생리적 활동을 가리키지 않는다. 이것은 죄악에 지배된, 모든 구체적 활동을 말함이다. ‘행실\'(헬, 프락사이스)은 ‘악한 행실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성령의 사람\'이 악행을 떠나면 떠날수록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게 된다.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그리스도인은 철저히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자이고, 그 영을 앞서는 자가 아니다. 과거 옛 세대에서는 제 자신의 노력과 의를 주장했으나 지금 새 세대에서는 온전히 성령께 의존하며 그의 인도를 받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 인도는 강제로 함이 아니고 내적으로 마음을 변화시키며 또 감화시켜 악행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더욱 가까이 나오도록 하심이다.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본절의 ‘하나님의 아들\'(헬, 휘오스)을 16절의 ‘자녀’(헬, 테크논)라는 말과 구분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테크논\'은 하나님 안에서의 신생을 강조하는 태어난 자라는 말임에 비해 ‘휘오스\'는 가족 구성원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한 아이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한다.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정확히는 무서움에 이르게 하는 ‘종의 영\'이다. ‘노예\'는 늘 무서움 가운데서 명령에 순종한다. 공포는 실로 그의 삶의 특징이다. ‘종의 영\'은 우리를 무서움에 빠져 들어가게 한다.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앞의 ‘종의 영\'과 대조되어 있다. 이런 대조는 사해 문서와 12족장의 유언서에 흔한 대조다. ‘양자의 영\'은 ‘종의 영\'과 달리 자유함의 영이요 친밀함의 영이다. ‘아바\'는 아람어로 예수께서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으로(막 14:36), 그의 제자들에게도 이 특권을 허락하셨다(눅 11:2). 초대교회는 이 어구를 주기도를 드릴 때나 기타 기도시(祈禱時)에 사용했다(갈 4:6).

8: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아들을 삼아주는 일은 객관적 역사이므로 우리 영만의 증거가 아닌 성령의 객관적 증거가 있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종은 주인을 가리켜 ‘아버지’라고 부르지는 못한다. 이는 어디까지나 아들만이 부를 수 있는 호칭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가리켜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서는 성도들에게만 새롭게 부여된 특권임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로 확신하지 못하는 자가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기도하고 헌신할리 만무하다.

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후사’(헬, 클레로노모이)란 ‘상속자’란 뜻으로 유업이란 뜻으로 쓰이는 구약의 이 용어는 비록 그 말들이 가족 재산의 궁극적 통제권을 지닌 장자권 계승에 관한 법조항에서 발견되기는 하지만 그것이 필수적으로 상속적 계승과 재산 소유의 특별한 의미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창 15:3; 민 27:1-11; 36:1-12; 신 21:15-17). 주된 어근은 ‘나할’과 ‘야라쉬’이다. 전자가 분깃을 받는다는 의미이기는 하지만 양자 모두 일반적 의미로는 소유(물)을 뜻한다. ‘분깃\'이란 말 ‘헤레크’도 같은 개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후사’됨은 그리스도와 ‘함께’(헬, 순) 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우리 단독으로 후사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함께’(헬, 순)란 말이 붙은 동사가 앞에서도 나왔고 여기서도 두 번이나 나온다. 우리의 모든 영욕이 그리스도와 관련지어져 있음을 나타낸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이므로 그와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하며, 그리할 때 그와 함께 영광도 받게 될 것이다.

소망과 인내(롬 8:18-25)

새하늘과 새땅의 도래와 더불어 만물까지도 새롭게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 통일되는 그 날을 꿋꿋한 인내로써 기다릴 것을 가르친다.

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치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생각건대’(헬, 로기조마이)는 본래 계산하다, 목록을 작성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는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확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의 고난’은 당시 교회에 대한 유대인들의 끊임없는 핍박 및 점증하기 시작하던 로마 당국의 박해에 비추어 볼 때 현재의 고난이란 그 같은 환난을 가리키는 것임이 분명하다. 한편 고난(헬, 파데마타)은 일차적으로 희생의 제물이 당하는 고난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는데,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테마타’는 ‘파스코’(내가 고난 당하다)에서 파생된 말이며, 벌게이트 역(the Vulgate)에서는 ‘passio\'로 번역되었다(롬 8:18; 고후 1:6, 7; 딤후 3; 11; 히 10:32; 벧전 5:9). 이 말은 특별히 그리스도의 고난을 가리키는데 사용된다. AV의 행 1:3에서 ‘파테인’은 ‘passio\'로 번역되었고, 벌게이트 역은 다른 곳(고후 1:5; 빌 3:10; 히 2:9, 10; 벧전 1:11; 4:13; 5:1)에서 ‘파테마\'(골 1:24에서는 ‘트립시스\')를 ‘passio\'로 번역했다. 이 단어는 라틴 교회의 저자들에 의해 사용되었으며, 일찌기 무라토리 단편(Muratorian Frigment)에도 사용되었는데, ‘고난\'(passion)이란 말은 고대 영국 교회의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기도서(1549년의 기도서)에도 나타난다. 벌게이트 역에는 ‘파씨오\'(passio)란 말이 육체의 고통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레 15:13, 25). 고난은 또한 내적인 감정의 경험을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AV에는 ‘호모이오파테스’(행 14:15; 약 5:17)가 ‘같은 성정\'(성정이 같은)으로 번역되어 있다.

장치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미래적 하나님 나라 영광으로서 종말론적인 영광이다. 그것은 성도의 몸의 구속 즉 그리스도인의 신혼의 영광스러운 변화 혹은 그 변화를 일으키는 신적 영광을 포함한다. ‘영광’(히, 카보드; 헬, 돝사)은 헬라어 ‘도케오’(생각한다, …처럼 생각된다)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헬라어의 두 가지 의미는 ‘돝사’가 고전 헬라어에서 두 가지의 주된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대한 설명이 된다. 즉 ‘돝사’는 첫째로 ‘견해\'(자신이 스스로 생각한 것)란 뜻이 있고, 둘째로 ‘평판\'(다른 사람이 그에 대해 생각한 것)이란 뜻이 있다. 여기에서 명성, 명예, 칭찬이란 뜻이 생겼다. 일반적으로 ‘돝사’는 칠십인역의 양식을 밀접하게 따르고 있다. 그것은 인정을 받고 환영을 받는다는 의미에서 ‘영예\'라는 의미로 사용된다(눅 14:10). 그리고 그것은 창조주이시며 심판주이신 분을 피조물들이 소리 높여 존경을 표한다는 의미에서 ‘영예\'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계 14:7). 하나님께 대해서는 그 말이 그의 위엄(롬 1:23)과 그의 완전하심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며, 특히 의로우심(롬 3:23)과 관련하여 사용된다. 그는 ‘영광의 아버지\'로 불리운다(엡 1:17). 그가 임재하실 때 빛이 나타남은 구약성경에서와 같이 신약성경에도 때때로 일어난 현상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는 주로 성자에게 이러한 모습이 나타났다. 성자께서 변형되신 것은 그의 지상사역에서 단 한번 있었던 일이다. 그러나 승천하신 후에는 사울이 회심할 때(행 9:3)와 요한이 밧모섬에 있을 때(계 1:12)그러한 모습으로 현현하여 계시하셨다. 바울이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면서 부요함(엡 1:18; 3:16)과 권능(골 1:11)이란 말을 사용함을 볼 때, 그의 생각이 구약성경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권능을 표현할 때도 영광이라는 말이 사용되었다(롬 6:4).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다(히 1:3).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완전한 본성이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야고보가 그리스도를 ‘영광의 주\'라고 말했을 때(약 2:1), 그는 아마도 성막에 하나님께서 영광으로 임재하셨던 계시를 생각했던 것 같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뜻하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나 지금이나 자기 백성의 죄를 주목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이심을 기억해야 한다. 이와 같이 야고보서를 읽는 사람은 한쪽으로 치우치지 말아야 할 것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의 형상이시며 성자되신 그리스도의 영광이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계실 때에는 죄인들의 눈에는 가리워졌으나, 그를 따르던 믿음의 사람들의 눈에는 분명하게 보였다(요 1:14). 성육신(成肉身)하시기 전에 성자께서는 영광(신적 생활 양식과 영적 교통의 완전성을 훼손시키려는 죄악이 전혀 없는) 가운데서 성부와 함께 거하셨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께서도 성육신 이전에 자신의 그러한 상태를 알고 계셨다(요 17;5). 따라서 성자께서 성부에게로 되돌아가는 것을 영광에로 들어가신다고 하는 것은 적절하다(눅 24:26). 그러나 이제 성자께서 성부에게로 돌아가시게 되면, 이전에 그가 성부와 친교를 나누었던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나누게 될 것이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성자에게 영광을 주신다(벧전 1:21).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구원사역에 대한 성부의 뜻을 성실하고 완전히 성취한 데 대한 보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빌 2:9-11; 행 3:13). 그러므로 성자께서 땅에서 올리우심과(딤전 3:16) 다시 나타나심과(골 3:4; 딛 2:13) 장차 심판 주와 왕으로서 임하시고 행동하신다는 표현들은(마 25:31) 모두 위엄이나 광채와 관련된 것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예수님 그리스도의 비하(卑下)의 신분으로서 세상에 계실 때에는 별로 드러나지 않았던 것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이에 뒤따르는 ‘영광’(벧전 1:11) 이 서로 대조가 된다는 것이 사실이지만, 요한복음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나타나 있다. 즉 십자가의 고난 자체가 영광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렇게 아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요 12:23). 사복음서를 통해서 볼 때, 이 때는 그리스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를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불명예스러운 십자가를 이처럼 영광스럽게 생각하신 것은, 십자가의 고통과 수치를 모면해 보려는 최면적인 술수를 꾀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영광스럽게 생각하신 것은, 자기가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으로서 성부께서 자기에게 하라고 맡기신 구속사역을 완수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내세에 천국에서 영광을 누리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이다(롬 5:2). 내세에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과 같은 새로운 몸을 갖게 될 것이다(빌 3:21). 그리스도인의 이러한 영광스러운 새 몸은 현재의 몸보다 훨씬 뛰어난 것이다(고전 15:43). 신자들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는 영광의 소망이시다(골 1:27). 그리스도는 천국에서도 가장 귀한 존재이시다(계 21:23). ‘영광’이란 단어가 복수로 쓰여서 권위자들을 가리키기도 한다(유 8절). 그런데 이것이 천사들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영예와 존귀를 가진 사람들을 가리키는지 결정하기가 용이하지 않다. 이 말의 특별한 용법은 송영(頌榮)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것은 설교나 서신의 끝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에 대해 하나님을 송축하는 것이다(롬 11:36).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영광’이란 단어가 동사로 쓰여서 갈 6:14에서와 같이 ‘자랑하다\'라는 뜻을 나타내기도 한다.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이는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일시적인 것임에 비해 장차 누리게 될 영광은 영원한 것이며, 또한 그 영광의 고귀함에 비추어 볼 때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너무도 하찮은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고후 4:17, 18).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을 확신하는 성도는 끝까지 신앙의 인내를 하게 되는 것이다(Witmer).

8:19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의 본절의 ‘피조물’(헬, 크티시스)이 의미하는 영역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른데 보편적으로 인류를 제외한 모든 자연계를 의미하는 것(Lenski, Calvin, Hidge, Godet, Harrison, Meyer, Witmer)으로 보는 것이 무난하다.

고대하는 바는 ‘고대하는’(헬, 아포카라도키아)은 ‘목을 뽑아 바라보다’는 뜻의 한자숙어 ‘학수고대’와 같은 뜻이다. 그것은 경주를 기다리고 있는 말과 같이 ‘머리를 들고 기다림’을 뜻한다.

하나님의 아들들의 구약에서는 천사들(욥 1:6), 방백이나 왕(시 2:7; 82:5-6), 이스라엘 민족(출 4:22)을 비유하여 불렀으나, 신약에 와서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롬 8:15). 즉 신자들을 가리킨다.

나타나는 것이니 숨기어 있던 것이 나타남을 가리킨다.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숨기어 있는 상태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영광중에 나타날 것이다(요일 3:2). 부활과 신령한 몸으로서의 변화 그리고 영화 등을 경험케 될 것이다. 그때 그들은 그들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같이 빛날 것이다(마 13:43).

8:20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허무’(헬, 마타오체스)는 ‘부패’ 혹은 ‘헛됨’을 의미한다.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만물은 썩음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 즉 허무에 굴복되어 있다.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피조물이 허무에 굴복한 것은 아담의 타락이 피조물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를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아’라고 하였는데 이는 ‘이로’ 즉 이 세상을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진행하고 계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8: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는 것이니라

그 바라는 것은 ‘바라다’(헬, 엘피스)는 단순한 기대가 아니라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확신에서 오는 소망’을 뜻하는 단어이다. 그러므로 공동번역은 ‘거기에 희망이 있습니다’로 의역하고 있다.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데서 만물이 비록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함께 쇠락하고 부패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한가닥 희망이 있는 이유를 본절은 말한다. ‘썩어짐의 종노릇’이란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의 다른 표현으로 ‘썩어짐’(헬, 프도라)은 물리적 육체적 부패 즉 사망과 파멸을 의미하기도 하고(고전 15:42, 50; 벧후 2:12), 도덕적 영적 부패, 타락, 사멸을 나타내기도 하나(갈 6:8; 벧후 1:4; 2:19) 여기서는 문맥상 전자의 의미로 볼 수 있다.

해방되어 ‘해방’(헬, 데세타이)은 예속 상태로부터 벗어나 이전에는 누리지 못했던 즐거움과 만조을 찾게 된 상태를 가리킨다. 성경에서 이 개념은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바울은 영적 사망으로 이끄는 죄의 파괴적인 힘으로부터(롬 6;18), 구원을 가져다 주지 못하는 제도인 율법으로부터(갈 4:21), 어둠에 속한 사단의 세력으로부터(골 1:13)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신다는 그리스도의 사상을 잘 설명하였다. 이렇게 자유롭게된 사람들은 당연히 그들속에 있는 죄와 육체적 사망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다(롬 7:14, 23, 24; 8:18). 따라서 자유롭게된 자들은 하나님의 성령을 받게 되며 그의 자녀로 여기심을 받는다(갈 4;5; 롬 8:1,16). 이토록 소중한 자유에 이르게 된 자의 합당한 반응은 기꺼이 자신을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의 종으로 바치는 것이다(롬 6:17; 고전 9:1).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만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유일한 방도이기 때문에 할례와 같은 특정한 의식을 준수해야 하는 구약의 의무로부터 그리스도인이 자유롭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문법적으로 ‘자유’에 걸리기보다는 ‘영광’에 걸린다. 한편 ‘하나님의 자녀’(헬, 테크논 토우 데오)란 관용구에 있어 엡 2:3, 5:8, 벧전 1:14, 벧후 2:14등에서 사용된 헬라어 ‘테크논’(자녀)과 엡 2:2, 5:6, 골 3:6, 살전 5:5 등에서 사용된 ‘휘오스’(아들)간에는 의미상의 차이가 없지만 요일 3:1의 ‘하나님의 자녀’란 개념에 대한 웨스트코트(Westcott)의 주석은, ‘테크논’을 향상할 가망이 있는(하나님과의)성격의 공유를 특징짓는 것으로 정의하나 휘오스에 대해서는 특권의 지위에 관한 것으로 정의한다. 요한복음과 서신들에서의 강조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들에 대해 거듭남을 통한 하나님의 생명의 제공, 곧 하나님의 생명의 공유를 명시한다. 그러므로 요한은 ‘테크논’을 사용하는 데 비하여 바울은 양자 결연(롬 8:15)을 받고 하나님의 상속자들이 된 자들의 지위와 특권에 대해 쓰고 있으며, 따라서 그는 이러한 관계에 대해 ‘휘오스’를 사용한다(갈 3:26; 4:6; 롬 8:14), 지위와 특권에 대해 이와 유사하게 ‘휘오스’를 사용한 예는 ‘하나님의 아들\'(마 5:9), ‘너희 아버지의 아들\'(마 5:45), ‘혼례식장의 자녀들\'(혼인집 손님들, 눅 5:34)등 복음서에도 나온다.

영광의 자유에 이는 것이니라 ‘썩어짐의 종노릇’과 대조된다. ‘영광의 자유’는 ‘영광스런 자유’가 아니라 ‘영광이 주는 자유’이다. ‘영광의 자유’란 장차 성도들이 누리게 될 영광스러운 자유인데, 이는 죽음으로부터 자유하여 영생하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피조 되었으나 죄로 인해 순상된 모습을 본래의 상태대로 회복하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

8: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헬, 쉬스테나조)란 말은 ‘만물이 다함께’란 뜻을 가진다. 이것은 그것들이 무의식 중에라도 종말적 소망을 사모하여 탄식함을 의미한다. 한편 ‘탄식’이란 ‘한탄하는 한숨’, ‘괴로워 함’, ‘신음’(groan)의 의미로 메시야가 오기 전 하나님의 백성뿐 아니라 자연 세계도 고통을 당한다.

함께 고통하는 것을 자연계는 병들어 가고 있으며 사탄의 발악으로 인해 파괴되고 있다(사 24:7; 렘 4:2; 12:4). ‘실로 귀를 대지에 대고 들으면 천연의 신음 소리가 들린다. 나는 아프다. 나는 괴롭다. 사람의 아들들아 빨리 구원받아 너와 함께 우리를 구원시키라고, 우리는 이 썩어짐의 종됨을 견디지 못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원한다라고’(內村). 이 소리는 바로 메시야적 산고의 소리이다.

우리가 아나니 본절의 ‘아나니’(헬, 오이다멘)는 ‘경험적 지식\'이라기보다는 ‘직관적 지식\'을 가리킨다. 즉 그것은 우리의 보편적인 관찰, 신념, 상식이란 것이다(마 22:16; 롬 3:19; 7:14; 요일 3:15). 고래로 자연이 그 본래대로의 상태에 있지 않다는 것은 인류 일반의 확신이다(Ovid).

8: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신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란 ‘신자’들을 가리킨다. 신자들은 성령을 받았고(고전 12:4-11; 갈 5:22-23). 그런 의미에서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자연 만물은 성령의 선물을 받지 못했으나 신자는 받았다.

속으로 탄신하여 신자는 이미 성령을 받았지만 성령의 열매 전체는 받지 못하였고 그 일부만을 받은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 역시 술퍼하며 탄식하며 신음하고 있다.

양자될 것 본절의 ‘양자될 것’(헬, 휘오데시안)은 몸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우리의 영혼이 아들이 된다고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속죄와 부활에 의해서 보증되어 있음 같이 우리의 몸이 우리의 구원과 부활 중에 포함되어 있음은 그리스도의 속죄와 부활에 의해서 보증되어 있는 것이다. ‘양자’(헬, 휘오데시아)는 신약에서 다섯번 나온다(롬 8:15, 23; 9:4; 갈 4:5; 엡 1:5). 이 단어는 갈 4:5에서 모든 신자들을 위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의해서 확보된 성숙한 양자권에 대해 사용되며(갈 3:26), 구약에서의 이스라엘의 미성숙과 대조된다(갈 4:3). 이러한 대조가 하나님에 대한 양자 관계로부터 이스라엘의 제외를 뜻하지 않는다는 것은 롬 9:4에 의해 명시되는데 거기서 ‘양자됨’은 구약의 증언과 일치하며 이스라엘의 특권들 중 하나로 진술된다(출 4:22; 신 14:1; 사 43:6; 63:16), 갈 4:3, 5의 대조는 비교상의 것이며 절대적
인 것이 아니다. 그 차이는 대체로 구약과 신약간의 차이가 일치한다. 구약은 예비적이며 신약은 완성적이다. 신약에 양자 됨의 은혜는 바로 모든 사람이 구별없이 성취된 구속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의해, 구약 시대의 교육학적인 훈련에 일치하는 후견인의 준비를 필요로 하지 않고 양자 됨의 완전한 축복을 얻는다는 점에서 나타난다. 율법시대의 발전 단계에서 얻어진 것에 대한 특별한 영역에는 이제 어떠한 요점의 반복이 없다. 롬 8:15, 엡 1:5는 바로 갈 4:5의 성숙한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그 대조를 갈 4:5에서와 같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까는 의문시된다. 롬 8:23에서 우리는, 부활에 부여된 은혜를 가리키기 위해 ‘양자 됨’이란 말을 종말론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음을 본다. 이것이 엡 1:5에서도 이러한 의미로 사용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롬 8:29). 이것은 장래의 양자 됨의 특권을 제한하지 않는다. 롬 8:15는 현재의 특권을 나타내고 있으며 갈 4:5는 이러한 취지가 더욱 명백하다. 계속되는 ‘너희가 아들인고로’란 절은 ‘너희가 양자 됨을 받았으므로’를 의미한다(요일 3:1, 2). 롬 8:23은 완전히 실현되는 것임을 가리킨다(눅 21:28; 엡 1:14; 4:30; 롬 13:11; 빌 2:12; 살전 5:9; 벧전 1:5). 양자 됨은 칭의와는 다른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특별한 행동이다. 양자됨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행동이며, 헬라어로는 양자 관계에 있어서의 임명의 개념을 명백히 나타낸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은 권위나 권리, 곧 예수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만 속하는 권리 부여에 의해 성립된다(요 1:12). 이러한 행동은 특별히 하나님 아버지의 행동이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요일 3:1; 엡 1:5). 양자 관계가 지속되는 것은 하나의 결과로서 하나님 아버지에 의한다. 이러한 결론을 지지하는 증거가 많다(요 20:17; 롬 1:7; 고전 1:3; 고후 1:2; 살후 2:16). 양자됨의 영은 성령이다(롬 8:15; 갈 4:6). 양자됨의 행위는 양자의 신분에 필수적인 것이며, 양자 됨의 영은 그러한 신분으로 말미암아 나오는 특권들, 이를테면 ‘아바, 아버지’란 부르짖음으로 표현된다. ‘양자들’을 지칭하는 표준적인 말로는 헬라어 ‘휘오이’와 ‘테크나’가 있다. 요한은 거의 ‘테크나’만을 사용하는데 계 21:7에만 ‘휘오스’가 나온다. 바울은 이 두 단어를 사용하는데 롬 8:14-17은, 그가 의미에 있어 명백한 구별을 하지 않고 한 단어에서 다른 단어로 교체시킬 수 있는 숙련됨의 실례이다. ‘테크논’은 이것의 어원상,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하나님의 행위로서 중생을 가리킨다고 지적할 만한 충분한 증거가 없다. 중생은 양자 됨과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가족으로서의 새로운 삶과 양자 됨의 특혜들의 발휘를 위한 예비 행위이다. 그러나 아들로서의 자격을 이루는 것은 양자됨의 뚜렷한 행위에 의한다. 양자 됨은 중생이나 성화보다는 칭의와 더욱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행동이다. 양자 됨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일치하는 결정의 특혜를 부여한다. 그들은 중생에 의해 하나님 나라의 일원들이 되며(요 3:3, 5)양자 됨에 의해 그의 가족의 일원이 된다(갈 4:5, 6). ‘아바, 아버지’란 말로 표현된 신뢰와 친밀함에 의해서처럼 하나님에 대한 접근이 더 잘 특징지워지는 것은 없다. 그리고 신자들에게 있을 영광은, 그들이 많은 형제 중 맏아들(롬 8:29)로서의 하나님 아들의 형상과 같이 될 때인 자신들의 아들로서의 자격에 대한 계시이다(롬 8:19). 한편 ‘양자’란 단어가 구약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자녀가 없는 부부를 위한 일부다처 등 여러 다른 방책이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메소포타미아 및 시리아 문헌에 따르면, 고대 근동에서 양자 입양은 어떤 어린이로 하여금 출생에 의한 자녀와 동일한 특권 및 책임을 가지고 새로운 가족 관계에 들어가도록 하는 법적인 행위였다. 아브라함은 그의 종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으려 했던 것 같다(창 15:3). 모세(출 2:10) 및 에스더(에 2:7,15)는 비이스라엘의 법에 따라 양자로 입양되었음에 틀림없다. 이스라엘 국가는 하나님의(양자로 입양된) 아들로 여겨졌다(렘 3:19). 신약에서는 양자 입양이 바울 서신에서만 발견되며, 그것은 (법적으로) 종에서 아들로 신분이 변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관계이다(갈 4:1이하). 양자 입양에 관한 문맥에서 사용된 롬 8:15, 갈 4:6의 ‘아바, 아버지!\'라는 외침은 양자가 된 종의 인습적인 외침인 듯하다. 하나님의 양자가 된 자녀는 하나님 아버지께 가까이 나아가며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상속인이 되는 권리를 갖는다(롬 8:15이하). 이 개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사실 및 예수 그리스도의 탕자 비유(눅 15:19이하)에도 암시되어 있다. .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그들은 양자가 되었고, 구원을 이미 받았으나 몸은 아직도 죽음의 종된 상태에 있다. 그러기에 이미 양자가 되었으나(15절), 실질적인 양자의 영광을 아직 누리지 못하고 있다. 구원의 완성은 미래에 있다. 그리하여 그들 역시 구속을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8: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앞서 자연계에도 희망이 있었듯이 신자들에게도 소망이 있다. 즉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았고 이제 구원을 바라는 소망중에 살고 있는 것이다. 한편 구원을 얻었으매(헬, 에소데멘)가 과거 시제인 것은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인치심을 받는 것이 이미 예수 믿은 그 즉시로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몸의 구속은 장차 성취될 일이니 우리는 이를 소망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섬기면서 사는 것이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사실 눈에 보이는 것은 이미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다라서 이를 소망한다는 말은 어패가 있다. ‘소망’(헬, 엘피스)이란 본시 미래적인 것을 기대함이니 곧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바람이다(히 11:1). 헬라와 로마 시대에 있어 헬라어 ‘엘피스’(히, 바타)는 선이나 악의 기대로서 중성적 의미를 지녔었다. Thucydides와 같은 몇몇 사람은 그것을 냉소적으로 다루었고 또 다른 Menander와 같은 사람들은 그것을 칭송하였다. 산스크리트(Sanskrit) 시(詩)들은 소망을 악(惡)들 중에서 구별하였다. 바울은 이방 세계를 ‘(세상에서) 소망이 없다’(엘피다 메 엑콘테스)라고 특정 짓고 있다. 구약의 기자들은(전도서를 제외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소망\'이라고(렘 14:8)했다. 그들은 여호와를 의뢰하고(렘 17:7), 인내하며 그를 바라고(시 42:5), 또는 적극적으로 그의 축복을 기다린다(시 62:5). 몇몇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야 왕국에 대한 유물론적인 소망들을 마음에 품었었다. 그러나 영국의 7조문(the Anglican Article vll)는 다니엘이 부활을 기대하는(단 12:2)것과 같은 이유로 고대 족장들이 무상한 약속들만을 기다리는 것을 부인하였다. 그리스도 자신이 그리스도인의 소망이라고 서술되어졌고(딤전 1:1) 그의 부활로 인해 그리스도인의 실질적인 소망이 새로운 세대에 주어졌으며,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통하여 소망을 넘치게 받는다. 그 ‘소망’은 구원과 관련되며 믿음과 사랑과 마찬가지로 은혜의 본질이다(고전 13:13). 그러나 그곳에서 말해지는 믿음은 과거와 현재를 언급하나 소망은 미래를 포함한다(롬 8:24-25). ‘소망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인 축복이다(행 2:26; 딛 1:2). 소망은 다음과 같은 도덕적 열매를 맺는다. 하나님을 기쁨으로 신뢰하며(롬 8:28), 고난 중에도 부끄럽지 않게 인내하고(롬 5:3), 기도함으로 참는 것 등이다. 한편 소망은 실제적인 의를 바라며(갈 5:5), 소망은 좋은 것이고(살후 2:16), 복스러우며(딛 2:13) 영광된 것이다.(골 1:27) 소망은 하나님의 불변하심(확고 부동성)과 이어져 영혼을 닻과 같이 견고케 한다(히 3:6; 6:18, 19). 소망은 구약의 족장 시대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첫 번째 언약으로부터 비롯된다(롬 4:18).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의해 품어졌고(행 26:6,7), 바울에 의해 복음의 소망으로 선포되었다. 가끔 ‘엘피스’라고 불리우는 소망은, 예를 들면, 예수 안에 있고(딤전 1:1), 데살로니가 사람들 자체이고(살전 2:19), 또는 하나님(렘 17:7) 자신이시다. 마찬가지로 바라는 것도 ‘엘피스’인데(요일 3:3;골 1:5), 그것은 하늘에 쌓아둔 소망이며 ‘파루시아’(재림)에 초점을 맞추고 ‘마라나타’(주여, 오소서!)를 외치는 소리를 기대하는 것이다. ‘엘피스’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 집합적인 소망이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그들의 죽은 형제들과 다시 연합되는 소망를 바랐다(살전 4:13-18). 그리고 전도자들은 그들의 회심을 소망했으며(고후 1:7), 그들이 완전하게 되기를 기대했다(골 1:28). 대장 목자되신 그리스도는 이러한 소망에 대해서 그의 영광을 다 함께 보는 것이 그의 뜻이라고 말하고 있으며(요 17:24), 이것의 완성은 성령이 친히 그리스도인의 마음과 교회 내에 역사하심으로 이루어진다(롬 8:16, 17).

8: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허무의 자연세계에 속하지 않은 ‘오는 세대의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신자들이 이미 소유한 것보다 더 많다는 것을 예비하고 계심’을 의미한다. 그것은 물질계에서 얻을 수 있는 만족의 것들이 아니다.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17절의 ‘고난도 받아야 될 것이니라’와 같은 말이다. 인내는 고난을 동반하고 소망이 있는 곳에 인내가 있는 것이다. ‘참음으로’(헬, 디 휘포모네스)의 의미는 첫째, 문자 그대로 참음으로의 의미이다. 둘째, 이룰 때까지 조바심을 내지 않고 ‘인내심을 가지고서’이다. 이는 성도에게 확실한 소망이 있으니 이를 성취하기까지는 인내해야한다는 해석이다. 본절은 두 개념을 병행해야 할 것이다. ‘인내’라는 말은 라틴어 동사 indurare 에서 나왔는데 그 뜻은 ‘굳게 하다, 견고하게 하다’이다. 그러므로 인내란 견디는 능력이다. 인내는 당면한 고난, 환난, 아픔을 굳은 힘으로 견디는 것이며, 슬플 때 그 슬픔을 참는 것이며, 다른 사람에 대하여 관용을 베푸는 것이며, 시험이나 유혹에 든든히 서서 넘어지지 않는 것이며, 믿음에 있어서 요동하지 않는 것이다.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10:22; 24:13),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 흔들리지 아니하면’(골 1:23),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약 1:12),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약 5:11),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히
3:6, 14)은 모두 인내의 증거들이다.

구원에의 확신(롬 8:26-39)

성도의 구원은 영원전부터 계획되고 정해진,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훼방세력에 의해서도 파기되거나 변경되어질 수 없는 확고부동한 은혜임을 강력히 주지시킨다. 요컨대 구원에는 그 계획에서 완성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주권적 권능과 무조건적 사랑이 개입되기 때문에 성도의 견인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이와 같이 \'성도가 소망중에 인내하는 것 같이\'란 의미이다(Harrison, Meyer). 즉 본절에는 이와 유사하게 성령께서도 끝까지 성도들을 보호하사 온전히 구원에 이르도록 역사하시는 것이 묘사되어 있다.

성령도 본절에서 성령께서는 ‘연약한 이를 돕는 영’으로 활동성을 보여준다. ‘성령’(히, 루아흐; 헬, 프뉴마)에 관한 구약성경은 성령의 본질에 관한 것이 아니고, 그 ‘활동\'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인간에게있어서의 성경의 활동\'이 강조되어 있는데, 물론 성령께서는 창조 사역에 가담하신 분이시기도 하다(창 1:2; 욥 26:13; 사 32:15). 특히 성령께서는 창조된 것을 유지시키시는 분이시다(시 104:30; 욥 34:14). 우주 만물에게 생명력을 공급해 주시는 창조의 주체이신 성령께서는 또한 인간의 체내 기관에게 생명력을 공급해 주는 분이기도 하다(창 2:7; 욥 33:4). 인간의 내부에 존재하면서 인간에게 생명력을 공급해 주는 ‘루아흐’는 ‘인간의 영\'이라고 합법적으로 일컬어지기 때문에, 구약성경에서는 인간의 본성에있어서 생명의 본체가 ‘인간의 영\'(the Spirit of man; 욥 27:3; 시 104:29, 30)과 ‘하나님의 영\'(the Spirit of God)으로 자유로이 지칭되고 있다. 구약성경에서 성령께서는 인간의 세 가지 인격적인 측면에서 활동하심이 나타나있다. 첫째로 인격적인 면이다. ‘루아흐’는 지혜와 총명과 지식의 영이시며(출 28:3; 35:3, 31; 신 34:9), 인간에게 합리성을 제공하시는 영이시다(욥 32:8). 이에 대한 비범한 예는 요셉(창 41:38, 39)과 모세(민 11:17; 출 18:22, 23)와 칠십인의 장로들(민 11:16, 17)과 브사렐(출 31:2이하; 출 35:3-36:2)의 경우이다. 두 번째로 도덕적인 면이다. 지혜의 영은 또한 인간 속에 하나님의 도덕적인 특성을 공급해 주시는(시 143:10; 사 30:1; 느 9:20) 성결의 영이시다(시 51:11; 사 63:10, 11). 따라서 인간의 도덕성은 필수적인 요소가 되어 있다. 그러므로 당연히 하나님의 ‘루아흐’는 인간의 내부를 비추는(깊은 속을 살피는) ‘등불\'이며(잠 20:27), 인간의 도덕심을 살아 있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결의 영께서는 죄로 인하여 근심하시며(사 63:10), 죄인에 대해서 그 죄를 책망하신다(느 9:30). 사울에게 있어서 ‘죄에 대한 성령의 책망\'은 ‘여호와의 악신\'으로 묘사되어 있다(삼하 16:14; 18:10; 19:9). 왜냐하면 그것(그 책망)이 사울의 양심을 괴롭혔기 때문이다. 바로 이 영이 사람 안에서 다스리고 심판하는 성령이시다(창 6:3). 구약성경에서는 인간의 영과 그의 도덕적인 속성들 즉 교만(전 7:8; 잠 16:18), 급한 분노(전 7:8), 겸손(잠 16:19), 인내심(전 7:9), 신실성(잠 11:13) 등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세 번째로 신앙적인 면이다. 이것은 선지자들의 체험 가운데 아주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선지자는 ‘성신에게 감동된 자\'였다(호 9:7; 겔 2:2; 3:24). 이 ‘루아흐’를 통해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고(슥 7:12; 암 3:7), 그것을 선포했다(미 3:8; 삼하 23:2). 다시 말해서 선지자의 속에 계신 성령께서는 본질적으로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 주시는 계시의 영이시다. 그러나 이 당시에는 이러한 정도까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택한 백성에게 성령으로 함께 계셨다. 즉 아직 선지자의 성령 체험은 전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허락된 것은 아니었다(민 11:29). 아직 성령의 시대가 이르지 아니했다. 그러나 성령께서 모든 성도에게 임하실 때의 현상이 예레미야(31:32, 33)와 에스겔(11:19, 20; 39:29; 36:26, 27)에게는 알려졌었고, 메시야(사 11:2) 즉 여호와의 종(사 42:1; 48:16; 61:1)이 성령의 은사들을 충만히 받을 것이 예시되었다. 메시야가 오시면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과(슥 12:10), 모든 육체(욜 2:28, 29)에게 성령이 부어지실 것인데, 오순절에 이 사실이 입증되었다. 한편 신약성경에서 강조점은 다시 성령의 활동성에 주어졌다. ‘성령’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은 아주 방대한데, 첫째로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그리스도인일 수도 없다(갈 3:2). 그리스도의 영을 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께 속한다는 것이다(롬 8:9).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성령 안에서의 삶이며(갈 5:16), 그리스도인의 특성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께서 활동하신 열매들이었다(갈 5:22). 율법이 결코 이룰 수 없었던 것들을 성령께서는 이제 내부로부터 성취하신다(롬 8:1-4). 참으로 성령으로 태어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율법의 오랜 통치(지배)가 끝났다(롬 7:6). 둘째로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시다(롬 8:9; 고후 3:17; 고전 6:17; 갈 4:6; 롬 8:14). 이것은 바로 성령 안에서 말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동시에 그리스도를 적대시하는 말을 할 수 없는 이유이다(고전 12:3).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영이시라고 말하는 것은 성자와 성령이 동일한 실체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것은 다만 그 두 분의 뜻(목적)이 같다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셋째로 성령의 신성과 인격성은 또한 바울의 가르침에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며(롬 8:9; 고전 3:16; 고후 6:16), 삼위일체 하나님 중의 한 위(位)이시다(고후 13:13; 마 28:19). 성령의 활동에 있어서 그 인격적 특성은 사도행전에서와 같이 바울 서신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예컨대 성령께서는 그의 은사들을 신자들에게 주심에 있어서도 주권적이시며(고전 12:4-10), ‘그의 뜻대로 하시고’(11절), 성령은 성부의 뜻을 계시하시며(고전 2:10-12), 그리스도인들을 가르치시고(13절), 그리스도인들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축복하신다(살전 1:5). 넷째로 성령의 특성은 성령과 신자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강조되어 있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육체 즉 죄악 성품을 거스려 싸우도록 하시는데, 이는 이 죄악의 성품을 통해 죄악이 그리스도인안에 침투해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신자들은 바로 이 성령을 통해서 육체를 죽일 수 있는 것이다. 육체를 죽이는 일을 실패하면 성령께서는 이로 인하여 근심하신다(엡 4:30). 성령을 힘입어 육신의 행위를 죽임으로써 전제적인 죄의 통치가 끝이 나고(엡 6:12-14),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효과가 그리스도 안에 성취된다(엡 6:9, 10; 빌 3:10,11). 그런 후에 ‘성령의 열매’가 맺히기 시작하고(갈 5:22), 성령의 인도하심과 증거하심이 분명해진다(롬 8:14-17). 또한 도덕적인 변화가 이루어지고(고후 3:18), 신자들은 성령을 통해서 ‘육체를 따라 살지 아니하고 성령을 좇아 살게 되며’(롬 8:5-8), ‘의의 종’이 되는 것이다(롬 6:15). 다섯째로 이와 비슷하게 바울 서신에는 성령께서 신자들의 집단(교회) 속에 활동하심이 강조되어 있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몸 즉 교회를 보양하시는데, 교회의 예배(빌 3:3; 고전 14:15)와 친교(엡 4:3; 빌 2:1)와 은사들(고전 12:4-11)과 교회의 기원(고전 12:13)은 바로 성령의 생동적인 임재에 기인한 것이다(그리스도께서는 이 성령을 통해서 교회에 거주하신다). 여섯째로 바울은 또한 성령과 세례를 연관시키고 있다. 세례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되심과 부활하심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신자들이 죄에 대해서는 죽고, 성령의 세례를 통해서 새 생명으로 부활함과도 같다(롬 6:1-4). 세례 의식은 그리스도인이 믿음을 가지고 그것에 참여하기 때문에 유효한 것이다. 유아 세례가 유효한 것도 ‘인간의 효과적인 행위\' 때문인데, 이것을 통하여 성령께서 행동하시고 말씀하신다.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의 연약함’이란 단순히 육신의 유한성 및 유약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보다 근본적으로 이는 인간의 부패하고 타락한 본성, 즉 죄의 성향을 의미한다. 이러한 죄성 때문에 성도들 역시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종종 범죄하게 되는 것이다(롬 7:15-23). ‘도우시나니’(헬, 쉬난틸람바노마이)는 ‘상대편을 붙들어 주는 것’을 의미한다. 참으로 성령께서는 성도의 연약함을 도와 죄악의 험한 파도를 헤치고 하나님 나라에 도달하도록 하신다.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본절의 ‘마땅히 빌 바’의 의미에 대하여 여러 견해가 있는데 첫째로 기도의 내용을 가리킨다. 둘째로 간구의 사물이다. 셋째로 기도의 방법이라는 견해 등이다. 문맥으로 보아 두 번째의 견해를 취해둔다(Cranfield). 우리가 무엇을 목적으로 간구해야 할지, 그 목적하는 대상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말할 수 없는’의 의미는 첫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통상적인 인간의 언어로를 표현할 수 없는’(Denney, Fritzsche, Zahn), 둘째로 ‘말로 표현되지 않는’(Augustine, Godet, Cranfield)의 두 뜻이 다 가능하다. 한편 ‘성령의 탄식\'은 소리없는 탄식이다. 그 신음들은 말하여질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성령의 의도를 표현하지 않아도 알고 계시기 대문이다(Barrett).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이로써 우리는 성도를 위하여 하나님께 중보 기도를 하고 계시는 분으로 그리스도와 성령 두분이 계심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양자의 사역 방법은 서로 다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상에서의 구속 사역을 성취하신 후 부활, 승천하사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면서 사단이 하나님께 성도를 참소하는 것과 관련하여 우리를 위하여 변호하고 계시기 때문이며(34절), 이에 반해 오순절 강림하신 성령께선 성도의 심령가운데 내주하사 성도들이 하나님께 무엇을 간구해야 할지를 친히 일러주고 계시기 때문이다(요 14:26).

8:27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칭호다(삼상 16:7; 왕상 8:39; 시 7:9; 잠 15:11; 렘 17:10; 행 1:24; 15:8).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모든 생각을 다 아신다. 이는 삼위 하나님의 유기적인 관계를 잘 말해 주는 것이다.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성령께서는 성도를 위하여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기도를 해 주시는데 이는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기도만이 응답받기 때문이다(약 4:2, 3).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신자 사이에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주지의 사실을 말하려 함을 뜻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란 구약시대에는 경건한 유대인을 가리키는 칭호였으나 신약시대에 와서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란 앞의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다. ‘뜻대로’(헬, 카타 프로데신)는 ‘미리 작정된 목적을 따라’이다. 하나님은 예정된 목적이 있어 성도를 부르신다. 하나님의 목적은 변경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영화의 보증에도 변동이 없을 것이다. ‘부르심’(헬, 크게토이)이란 말은 신구약에 약 700회 정도 나온다. 구약에서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때(창 4:26) 그것은 하나님의 보호를 요구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 편에서도 그 분이 주도하신, 자신과 그 백성간의 밀접한 관계를 지적하시면서 그 백성들이 자신을 섬기도록 부르신다(삼상 3:4). 사 43:1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과업을 주시고 보호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시면서 자기 백성으로 부르신 사실을 보여준다. 신약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리스도 안에서\'(빌 3:14) 그의 소유가 되게 하기 위한 것이다(벧전 2:9).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부르심이 구원(살후 2:14), 교제(고전 1:9), 봉사(갈 1:15)를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점과 거기에 응답하는 자들은 곧 ‘부르심을 입은 자들\'임을 강조하고 있다(고전 1:24), 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만큼 효력 있는 것이요, 그 분의 불변적인 뜻에 기초를 둔 것이기에 그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반드시 그에 화답할 수밖에 없음을 말한 것이다(롬 8:28; 9:11). 마 22:14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청함 받은 자\'(듣기만 한 자)와 ‘택함을 입은 자\'(응답한 자)를 구별하신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A(알렉산드리아)와 B(바티칸)사본 등에는 본절에 ‘하나님’이란 낱말이 첨가되어 있다. 번역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장하사 결국에는 선한 결과가 빚어지게끔 역사하신다’는 말이 된다. 이는 천지 만물을 주장하시고 섭리하시는 분이 곧 하나님이심을 강조해 주는 표현이다. ‘모든 것’(헬, 판타)은 헬라어 ‘파스’에서 파생한 것으로 ‘모든’, ‘~마다’, ‘무엇이든지’, ‘누구든지’, ‘아무나’, ‘전부’, ‘아무 물론하고’, ‘무릇’, ‘종신토록’, ‘무리’, ‘범사에’, ‘무슨 일이든’, ‘물론’, ‘무엇을 하든지’, ‘각색’ 등으로 쓰였다. 이는 성도의 영광과 고난(현재의 고난, 38-39절), 기쁨과 슬픔(십자가), 완전과 불완전 이 모든 일체의 것이 ‘합력하여’(도움, 유익을 줌, 이바지함) ‘선’(장차 올 영광)을 이룬다. 이는 성도 구원의 확실성을 노래한 것이다. 한편 본절의 ‘선’이라는 구약 히브리 단어는 ‘감각을 즐겁게 해서 심미적이거나 도덕적인 만족을 주는 것’을 뜻한다. ‘선’에 해당하는 신약의 헬라어는 ‘도덕적 혹은 물질적인 양질을 뜻하며 때때로 고상하고, 명예로우며, 감탄할 만하거나 가치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도덕적 선과 영적 선의 성경적 개념은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적이며 다음과 같은 네가지 요소에 결부된다. 첫째로 하나님은 선하시다. ‘선\'은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뜻하며, 다음으로 하나님이 일하시고 창조하시며 명령하시고 베푸시는 것, 마지막으로 자기 백성들의 삶 가운데서 승인하신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선은 하나님으로부터 정의되는 것이지, 거꾸로 선이라는 개념에 준해서 하나님을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완전하게 선하시며(막 10:18) 다른 사람이나 일들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만큼 선한 것이다. 종종 하나님의 선하심은 찬양의 주제나 기도의 요지가 되었으며(시 86:5; 106:1) 그가 행하신 일(시 119:68) 특히 가난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 가운데 나타난다(시 25:8, 9). 둘째로 하나님의 일은 선하다. 하나님이 하신 일은 그의 지혜와 능력을 나타내며(시 104:24) 하나님이 손수 행하신 일로서 모든 물질 창조는 선하다(창 1:31; 딤전 4:4). 셋째로 하나님의 선물은 선하다. 하나님의 선물은 그의 관대함을 나타내며 그것을 받은 자에게 유익한 것들이다. 즉 모든 좋은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약 1:17).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연의 복을 베푸시며(행 14:17), 완전한 아버지로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녀들에게 좋은 선물을 주시는 방법을 알고 계신다(마 7:11). 물질적 수준의 선은 옛 언약하에서 약속되었으며(신 30:15) 영적 특권에 속하는 선은 새 언약의 선물이다(히 9:11; 10:1). 사람들을 하나님께 더 가까이 이끄는 것은 심지어 불유쾌한 것이라 해도 그것은 무엇이든지 선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롬 8:28; 고후 4:17; 히 12:10). 넷째로 하나님의 명령은 선하다. 하나님의 명령은 그의 도덕적 완전을 나타내며 우리를 축복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것이다(롬 7:12; 12:2).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악에 직면했을 때라도 선을 행하여야 한다(롬 12:9, 21).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 역시 선하다. 하나님은 그의 명령을 따라 행하는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는(딛 3:8) 그런 순종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신다(딤전 2:3).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선한 일을 하도록 구원하셨다(엡 2:10).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선한 일을 위한 모든 기회를 붙잡아야 하는데, 그 선한 일은 곧 그들을 ‘단장해 주는\'(딤후 2:21; 딤전 2:9, 10) 것일 뿐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과 다른 이들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방편이다. 아울러 율법의 정신과 그 문자적 요구 모두를 성취하는 것이 된다(롬 13:8; 마 5:18). 성경 신학은 율법이 요구하는 바는 사실상 사랑임을 주장하면서 의인과 선인을 동일시한다. 인류에 대한 사랑은 그들에게 선을 행함으로 표현되었으며(갈 6:9, 10) 초대 교회의 가난한 자에 대한 구제 제도로 예증되었다(행 2:44, 45; 4:32).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본절은 28절에 대한 설명이다. ‘미리 아신 자들’이란 28절의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 대한 보다 보완적인 설명이다. 30절의 ‘미리 정하신 그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성도’들을 가리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미리 알다’란 것은 하나님의 예지가 택하심의 근거가 되는 듯한 인상을 주나 예지가 예정을 앞서는 것은 아니다. 한편 ‘미리 알다’란 하나님의 예지를 가리킨다. 신학적으로 ‘예지’란 ‘모든 미래의 사건들과 그 진행에 대한 하나님의 선견(先見)과 통찰력(洞察力)’을 가리킨다. 성경에 끊임없이 나타나 있는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 즉 실제적인 것과 가상적인 것, 과거의 것과 현재의 것과 미래의 것들을 다 아신다는 것이다. 인간의 지식은 매우 한정되어 있고 관찰과 추리 작용을 통해서 얻어지는 반면에 하나님의 예지는 무한하고 직관적이며, 본래적이고 즉각적이다. 하나님의 예지는 첫째로 하나님 자신에 관한 지식과, 둘째로는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포함된 모든 것들에 대한 지식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지는 또한 예언(豫言)의 근거가 된다. 인간에게 있어서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모두 현재이다. 이것은 ‘영원한 현재\'라는 말로 잘 표현될 수 있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지존무상하시며 영원히 거하시는 분’(사 57:15)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시편 기자는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경점 같을 뿐이니이다’(시 90:4)라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 앞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은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정하시고 아신 것들이다. 이처럼 ‘시간’(Time)이란 유한한 피조물의 속성을 지니고 있으머 하나님 앞에서는 외계적인 하나의 물질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는 시간을 초월하여 계시며 그것을 바라보고 계신다. 그러나 시간에 제한받지 않으신다. 성경을 볼 때 하나님께서는 계획에 따라서 행동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계획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미래에 대해서도 아신다. ‘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心思)는 대대에 이르리로다’(시33:11).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였느니라’(사 46:9, 10). 아마도 예지에 관하여 가장 난해한 문제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도덕적인 책임에 관한 것이리라.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모든 일들을 예정하고 주관하신다는 ‘하나님의 주권\'(主權)이 나타나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길을 선택하고 그에 대해서 도덕적으로 책임을 지는 ‘인간의 자유 의지\'도 나타나 있다(행 4:27, 28; 엡 1:11; 롬 8:29, 30; 시 33:11; 사 14:14; 눅 22:22; 단 4:35; 욥 43:2). 이것은 완전하게 설명할 수 없는 신비인 것이다. 칼빈주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주권 교리를 강조하는 반면에 그와 동시에 인간은 그의 본질적 한계 내에서 자유로운 존재이며, 도덕적으로 자기의 행위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임을 주장한다. 반면에 알미니안주의(Arminianism)신학자들은 예정(豫定)대신에 예지(豫知)를 주장한다. 어떤 신학자들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미리 아신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또 다른 신학자들은 하나님께서는 알 수 있는 사건들은 모두 다 미리 알고 계시지만,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행동들은 본질상 맡겨진 부분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란 ‘성도의 성화’를 얘기하는 부분이다. ‘형상’(헬, 에이콘)이란 ‘본체’(헬, 모르페)보다는 약한 말로서, 대표하는 것과 나타내는 것의 양면의 뜻을 가진다. 이는 단순히 외형적으로 닯는 것 이상의 모형의 뜻이다.

미리 정하셨으니 ‘미리 정하심’(헬, 프로리센)은 ‘미리’(헬, 프로)와 결정하다(헬, 오리조)의 합성의미로 신약에 6회 나타난다. 이것은 ‘예정’을 의미하는데 이는 한번 정함으로 여원히 작정한 것을 가리킨다. 예정을 정의하기를, 이것은 신학적인 교리로서 무엇보다도 칼빈주의와 연관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칼빈주의자들은 주장하기를 영원 전부터 하나님께서는 미래에 일어날 모든 일들을 정해 놓으셨는데 그 중에는 궁극적인 구원과 인간의 유기(遺棄)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예정 교리는 수많은 복음적 교회들의 신조들 속에 포함되어 있으며, 교회와 국가에 현저한 영향을 끼친 것이다. 아마도 예정에 대한 가장 완전한 표현은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에 나타나 있는 것 같은데, 이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이란 전세계 대부분의 장로교회들과 개혁교회들에 있어서는 권위있는 신조이다. 또한 영국 국교회와 미국의 감독 교회는 39개항의 온건한 칼빈주의 신조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침례교회와 회중교회는 일반적으로 공식적인 신조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이러한 교회들의 수많은 대표적인 신학자들의 저서들 속에는 이 예정 교리가 나타나 있다. 기독교회의 처음 3세기 동안에 교부들의 글 속에는 이 예정교리가 주로 미개발된 상태로 되어 있었다. 이 예정 교리는 어거스틴에 의해 처음으로 적극적이고 완전하게 드러나게 되었는데,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 구원의 유일한 근거라고 했다. 중세 시대에 안셈(Anselm)과 롬발드(Peter Lombard)와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다소 어거스틴의 견해를 따랐으며, 예정이란 하나님께서 만물을 개괄적으로 섭리하고 통치하는 것과 어느 정도 동일시됐다. 종교 개혁의 선구자들인 위크리프(Wycliffe)와 후스(Huss)는 엄격한 예정론적 견해들을 주장했다. 개신교 종교 개혁 시대에는 이 예정교리가 루터(Luther)와 칼빈(Calvin)과 쯔빙글리(Zwingli)와 멜랑크톤(Melanchthon)과 낙스(Knox)와 그 당시의 모든 탁월한 지도자들에 의해 강력하게 주장되었다. 그런데, 멜랑크톤은 이후에 자기의 견해를 수정하였고, 그의 지도 하에 루터 교회는 이 예정 교리를 반대하게 되었다. 루터의 주요한 저서인 ‘의지의 굴레’(The Bondage of the Will)와 ‘로마서 주석’(the Commentary on Romans)에는 루터가 칼빈과 같이 이 예정 교리를 충성스럽게 받아들였다는 것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 예정 교리를 분명한 논리로써 강조한 사람은 칼빈이었기 때문에, 그때부터 이 교리는 ‘칼빈주의\'라고 명명되었으며 개혁 신학 체계에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인 교리가 되었다. 영국의 청교도들과 미국에 처음으로 이주한 사람들, 그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의 계약파들(the Covenanters)과 불란서의 위그노들(the Huguenots)도 철저한 칼빈주의자들이었다. 근래에 이 예정 교리는 휫필드(Whitefield), 핫지(Hodge), 댑니(Dabney), 커닝햄(Cunningham), 스미드(Smith), 쉐드(Shedd), 스트롱(Strong), 카이퍼(Kuyper), 워필드(Warfield)에 의해 주장되어 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에는 이 교리가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그 자신의 뜻의 가장 지혜롭고 지극히 거룩하신 계획에 따라 장차 되어질 모든일을 자유롭고 변함없게 예정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죄의 창조자라는 것도 아니요, 모든 피조물들의 의지가 강압을 받는다는 것도 아니요, 제 2인자(因者)들의 자유나 우연성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성립하는 것이다’. 예정 교리에는 이처럼 하나님의 목적이 모든 유한한 피조물에 대해서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이고 독자적인 것으로 나타나 있으며, 오직 그 뜻의 영원한 계획에서 비롯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또한 하나님은 자연의 운행을 지시하시며 역사의 진행을 가장 세밀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주관하신다. 그러므로 그의 뜻은 영원 불변하고, 거룩하고 지혜로우며, 주권적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미래 모든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豫知, foreknowledge)의 근거가 되며, 또한 하나님의 뜻은 미래 사건에 대한 지식이나 미래 사건들 자체에서 비롯되는 어떤 것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예정 교리에 대한 반대는 역시 예지에 대해서도 반대가 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예지하신 것은 예정과 마찬가지로 고정되고 확정된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을 자신이 알고 있다면, 그 이전에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결정을 했던 것이 분명하고, 우리의 예지(豫知)는 우리의 결정보다 앞서는 것이 아니라 결정에 뒤따르는 것임이 분명하므로, 우리의 예지는 우리의 결정에 근거한 것이 확실하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도 미래를 예지하고 계시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미래를 예정하셨기 때문이다. 이 예정 교리가 나타나 있는 몇몇 성경의 참고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5),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엡 1:11),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성에 모였나이다’(행 4:27, 28),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으나’(행 2:23)등이다. 그 외에도 행 13:48; 롬 8:29, 30; 9:11, 12, 23; 고전 2:7; 엡 2:10; 시 139:16등에도 나타난다. 심지어는 인간의 범죄 행위조차도 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인간의 범죄 행위도 예견되고 허용되어 정확한 곳에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통제되고 다스려지게 된다. 그리스도의 못박히심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범죄임에 틀림없지만, 우리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도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정확히 꼭 필요한 곳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행 2:23; 4:28). ‘선택’교리는 특정한 사람들의 선택과 관련된 것으로서, 일반적인 예정 교리를 특별하게 적용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는 마치 예정의 교리가 죄인의 구원과 관계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성경은 일차적으로 죄인의 구원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이 선택의 교리는 자연히 특별한 곳에서만 언급되는데, 이 선택이라는 단어가 신약 성경에만 약 48회 나온다. 이 선택을 통해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는데, 이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어떤 차이점과 공로보다 앞선 것으로서 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인류는 두 부류로 나뉜다. 즉 그 한 부류는 영생을 얻도록 선택된 자들이며, 다른 한 부류는 영원한 사망에 버려지게 된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이러한 뜻은 아담 안에서 구원 얻을 만한 절대적인 호기(好機)를 가졌지만 그것을 놓쳐 버린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를 가리킨다. 이런 자들은 타락의 결과로 죄책에 사로잡혀 있고 부패해 있다. 따라서 그들의 동기는 그릇되어 있고,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얻을 모든 권한을 상실해 버려서, 모든 타락한 천사들처럼 그들의 불순종에 대한 형벌을 당연히 받게 될 것이다. 그 반면에 인류의 한 부류인 선택받은 자들은 죄와 죄책의 상태에서 구원을 받고 거룩함과 축복의 상태에 들어간다.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은 단지 파멸된 그들의 이전 상태대로 그냥 남아 있을 뿐이다. 그들은 근거없는 처벌은 아무 것도 받지 않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단지 사람으로 취급하실 뿐만이 아니라 죄인들로 취급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구원 문제에 있어서 선행(good works)이란 구원에 종속되어 나타나는 것이고, 구원을 얻기 위한 공로는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요 15:16)라고 했다. 그리고 바울도 말하기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라고 했다. 그러므로 선행은 구원의 열매요, 증거이다. 칼빈주의자들 간에도 신적 계획 속에 있는 사건들의 순서에 관하여 서로 다른 몇가지의 견해들이 있어 왔다. 그 문제점은 이것이니,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피조물들을 그 섭리의 대상으로 생각하셨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는 단지 그 창조하신 인간들을 모두 동등한 섭리의 대상으로 생각하셨는가 하는 것이다. 타락 후 선택설 학자들(Infralapsarians)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들의 일부분만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사건들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계획하시기를, 첫째로 창조하시고, 둘째로 타락을 허용하시고, 셋째로 이 타락한 사람들 중의 일부를 구원하기로 선택하시고, 나머지 타락자들을 그대로 버려두시며, 넷째로 선택자들을 위해서 구속주를 예비하시며, 다섯째로 성령을 보내사 이 구속을 선택자들에게 적용하신다는 것이다. 이 계획에 의하면 선택은 타락에 뒤따르는 것이다. 타락 전 선택설 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그 사건들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계획하시기를, 첫째로 창조될 인간들 중 일부는 생명을 주시기로 선택하시고 다른 일부는 파멸하기로 선택하시고, 둘째로 창조하시고, 셋째로 타락을 허용하시고, 넷째로 선택자를 구속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다섯째로 성령을 보내사 이 구속을 선택자들에게 적용하신다는 것이다. 이 계획에 의하면 선택은 타락에 앞선다. 타락 후 선택설의 사건 순서가 더 성경적이고 논리적인 것 같다. 구원이나 형벌의 문제에 있어서 최소한 죄가 사람들을 서로 다른 운명으로 결정지어 줄 신의(神意)에 대한 배경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분별에는 반드시 죄가 포함될 필요는 없으나, 여기서와 같이 구원이냐 형벌이냐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그 논리적 근거로서 인간들이 죄인으로 간주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주권자이시지만, 이 하나님의 주권은 아무렇게나 행사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주권은 다른 속성들, 예를 들자면, 공의, 거룩하심과 지혜 등과 조화를 이룬 가운데서 행사된다. 무죄한 인간 즉 죄인으로 간주되지 않은 인간들이 영원한 불행과 죽임을 받도록 예정된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성경적인 개념과 맞지 않는다. 성경은 사실상 타락 후 선택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택함을 받았다(요15:19). 그리고 토기장이는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있다고 했다(롬 9:21).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리고 ‘형제’는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양자가되었으므로 신분상 예수와 형제 관계에 있는 성도들을 가리킨다. 하나님이 우리를 미리 정하신 목적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 뿐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들 즉 그리스도의 형제(兄弟)이 되게 하기 위해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들(신자들) 중에 ‘맏아들’(헬, 프로토토코스)이시다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정하신 이들를 부르심은 복음에의 보편적 소환이 아니라 실제 구원을 받도록 부르시는 특수한 소환이다.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이는 부르심의 성질을 해명한다. 부르심을 받은 각 사람은 칭의 하심을 얻는다. 여기에 논술된 칭의는 3장과 이하에 논의된 칭의와 동일한 것이니 사람을 의롭다 하심은 사람 자신의 장점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에게 돌아와서 또 그가 오직 신앙으로 받은 그리스도의 의(義) 때문이다. ‘칭의’는 ‘의롭게 하다’는 말로 원어상 ‘무죄 석방하다\' 혹은 ‘의롭다고 선언하다\'는 뜻의 법적 용어이며 의롭게 하신 것은 재판관의 행위이다. 온 땅의 재판관이신(창 18:25)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의를 요구하신다. 여기서 ‘의’란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사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에 미치지 못하는 자들을 정죄함으로써 재판관으로서의 의로움을 보여 주신다(롬 2:5).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용서하실 때에는, 그 베푸신 바 은혜를 공적으로 밝힘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를 실행하신다. 바울 서신에 나오는 ‘양자 삼음\'과 같은 개념은 하나님의 이러한 은혜를 잘 보여 준다. 신약에서 ‘의롭게 하다\'라는 동사는 모두 39회 등장하며 그 중 29회는 바울 서신이나 바울의 말 속에 나타난다. 칭의는 범죄한 백성의 죄악을 제거하시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지닌 자들에게 값없이 의를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사역이다. 이러한 칭의는 사람들 자신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대신하여 율법을 지키고 희생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가능해졌다(롬 3:23-26; 4:5, 6; 5:18, 19). 바울은 복음이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다고 말한다(롬 1:17). 하나님은 믿음 있는 자들에게 그의 의로움을 나누어 주신다(롬 5:17). 그리고 하나님은 죄인들을 심판하시며 또한 합당한 절차를 거쳐 구원하심으로써 그의 공의를 만족시키신다(롬 3:25, 26). 하나님은 재판관으로서의 공의를 계속 유지시키시면서 하늘 법정에서 그들을 용서하신다. 이러한 칭의의 개념은 바울의 신앙 사상에서 핵심적인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선교 소명을 칭의라는 말로 표현했다(갈 2:15; 빌 3:4). 칭의는 성도와 하나님 사이에 가로놓인 적의를 사라지게 한다(롬 5:9, 10). 그리고 성도는 의인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모든 복들을 유업으로 받는다(롬 8:14). 현세이서나 내세애서, 성도를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분리시키거나 그가 의롭게 된 상태를 파괴시킬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롬 8:30). 이와 같은 칭의 개념으로부터 유대인과 이방인의 동등 자격(갈 3:8), 구속(갈 3:13), 믿음(롬 4:23), 성령의 은사(갈 4:6) 등에 관한 바울의 사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또한 칭의의 개념은 바울의 역사관의 핵심이기도 했다. 인류를 대표하는 첫 사람 아담의 타락 이후에 온 인류에게 정죄가 내려졌다(롬 5:12). 하나님은 아브라함 및 그의 가족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셨고,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게 여기셨으며, 그의 후손 중 한 사람을 통해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되리라고 약속하셨다(갈 3:6). 모세 율법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죄를 알게 하고 칭의의 필요성을 일깨워 주었다(갈 3:19). 대표성을 띤 둘째 사람인 그리스도를 통해 칭의는 만민에게 유효하게 되었다(갈 3:26).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멸망받을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는 그 누구도 의롭게 될 수 없다(롬 3:9).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대신하여 그들에 대한 하나님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켜 주셨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하나님은 죄인들을 의롭게 하신다(롬 3;21; 5:9).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의의 상태에 동참하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에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 달리 말하자면,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공의에 근거하여 성도들을 대신하신다는 것이다.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는데(갈 2:17), 이는 그들이 개인적으로 율법을 지켰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대신해서 율법을 준수하신 분 ‘안에\' 있기 때문에 의롭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순종과 죽으심을 근거해 죄인들을 용납하심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는 여전히 손상되지 않는 것이다. 성도들은 믿음으로 칭의를 받아들인다. 그렇게 되면 믿는 행위 자체가의롭게 되기 위한 인간의 공로가 되고 하나님 단독적 은혜로써만 칭의가 가능하다는 사실이 거부되기 때문이다(롬 4:5,16; 11:6). 아브라함의 경우에서 처럼, 믿음은 오히려 하나님의 약속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것이며 이러한 믿음을 통해 성도는 이미 은혜로 주어져 있는 칭의를 확실히 부여잡게 되는 것이다(롬 4:18). 어떤 사람들은 약 2:14-26의 내용이 오직 믿음으로써만 칭의를 얻을 수 있다고 하는 바울의 주장과 상반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생각에 따르면, 야고보가 바울의 교훈이 성도들로 하여금 방탕하게 살도록 부추긴다고 여겼을 것이다(롬 3:8). 그러나 바울은 ‘의롭게 하다\'는 말을, 믿는 자들을 받아들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뜻하는 좁은 의미로서 사용한다. 반면에 야고보는, 그 말을 실천을 통해 내적 믿음의 실제를 입증해 보이는 것이라는 넓은 의미로 사용한다. 구체적 선행을 동반하지 않는 단순한 교리만으로는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입증할 충분한 단서가 되지 못한다는 점에 관해, 바울도 전적으로 동의했을 것이다(엡 2:10; 5:5, 6).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미래형이 아니고 단순과거형이다. 흔들리지 않는 확실성을 나타낸다(Mayer, Lietzmann). 왜냐하면 하나님의 ‘미리 정하심’은 실패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예정(미리 정하심)은 역사이전 영원하신 경륜에서 이뤄졌고(엡 1:4-5), 부르심은 역사 내에서 교회의 선교를 통해 이뤄지고, 의인은 역사 내에서 초역사적으로 이뤄지는 것이며, 영화는 역사 이후 영원에서 이뤄질 것이다’(이상근).

8: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이 일’은 28-30절에서 논의한 이른바 성도의 구원 즉 영화의 사실뿐 아니라 1:18-8:30에서 지금까지 논한 모든 사실들을 가리킨다.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반대자의 비난을 전제하고 하는 말이다. ‘무슨 반대할 말이 있겠는가?’의 뜻이다. 즉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대하여 말한 후 여기서부터는 그 효과를 선언한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본절의 조건문은 사실을 전제한 조건문이다. 즉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실지 안하실지 의심하며 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현재 우리를 위하고 계심을 확신하고 하는 말이다. 그것은 복음의 압축적인 요약이다(Cranfield).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이는 대적자가 없다는 말이 아니고 우리가 그 대적을 두려워할 만한 세력은 아무도 없다는 말이다.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이 자기 희생적 사랑에 관한 언급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를 희생 제물로 내어 주신 것이다. ‘아끼지 아니하시고’는 70인역의 창 22:16절과 꼭 같은 낱말이다.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아끼지 아니한 것처럼 하나님도 자기의 독생자 예수를 아끼지 아니하셨다.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모든 것’은 구원 자체는 물론 성도들이 궁극적 성화의 단계에 이르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가리킨다(Harrison, Witmer). 그리고 이는 그 때에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게 될 영광(18절)까지도 의미한다(Denny). 한편 ‘은사’(헬, 카리스)는 헬라어의 복수 명사 ‘카리스마카’를 번역한 것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말이나 행동을 통해 가시적으로 표출된 것을 일컫는다. 이 단어의 단수형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선물(롬 5:15, 16; 6:23), 또는 어떤 특별한 은총이나 자비(고전 7:7; 고후 1:11)를 칭하는 데 쓰였고, 복수형은 주로, 특별한 봉사를 위해 신자에게 주어진 성령의 갖가지 은사들을 구약(욜 2:28)과 그리스도(막 13:11; 요 14:12)에 의해서도 약속된 바 있으며 행 2장에 명시된 요순절에 성취되었다. 이 은사들의 주요한 목적은, 교회(조직으로서)를 세우는데 유익하게 사용되는 것이었다(고전 12:4). 아울러 이 은사에는 불신자로 하여금 죄를 깨닫고 회심케하는 역할도 포함되어 있다(고전 14:21). 사도 바울은 성령의 은사가 그리스도의 재림시까지 계속될 것을 확신했다(고전 13:8). 물론 과거에 그러한 은사가 중지된 듯한 현상이 간헐적으로 있긴 했지만, 이는 교회의 영성과 믿음이 무너질 기로에 있을 때 일시적으로 보였을 뿐, 이것 역시 그 뜻대로 은사를 주시는 하나님의 가주권적인 목적에서 일탈된 것일 수 없다(고전 12:11). 성경의 은사에 관한 목록들은 대략 네 군데(롬 12:6-8; 고전 12:4-11, 28-30; 엡 4:7-12)에 나타나 있는데 서로 다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도 모든 종류의 은사를 총망라하여 열거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불완전한 편이다. 은사들은 대개 두 범주로 분류된다. 즉 말씀의 사역을 맏은 신자들에게 주어진 은사들과 교회의 실무 봉사를 위한 은사들이다. 정규적인 사역을 위한 은사가 있는가 하면, 방언이나 신유의 은사와 같은 상황에 따라 발효되는 것이 있고, 자연적인 능력의 배양으로 말미암는 은사와 특별한 능력이나 자질의 형태로 임하는 은사가 있다. 말하는 것과 관련된 은사를 받은 자들을 사도라 불렀는데, 이 명칭은 원래 열두 제자에게 붙여진 것으로(마 10:2), 바울이 스스로를 그렇게 칭했고 그 외의 다른 몇몇 사람들에게도 적용되었다(바나바, 행 14:4; 안드로니고와 유니아, 롬 16:7). 그들의 특별한 소임은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었다(갈 2:7).

8: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송사하다’(헬, 엥칼레오)는 법정 용어로 ‘고발하다’, ‘고소하다’, ‘기소하다’는 뜻이다. 본절에서는 곧 성도의 죄에 대하여 양심이나 율법, 그리고 사단이 하나님께 고소하는 것을 가리킨다.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앞의 그러한 고소들은 모두 기각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성도는 예수의 대속 사역을 믿고 그 피 공로를 힘입어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얻은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본절은 앞절 33절의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와 평행구절이다. 33절은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신 사실을 가지고 성도의 구원의 확실성을 보증한 것이다. 즉 성도를 택하시고 의롭다 하신 이가 하나님이시기에 감히 성도를 송사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34절은 그리스도의 중보를 가지고 성도의 구원의 확실성을 보증한 것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고 계시니 우리의 구원은 더 없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사단의 참소로부터 성도를 보호하시려고 친히 하나님께 변호하고 계시는 사실에 대하여서는 26절에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의에 근거해 자신이 피로써 산 성도들이 결코 정죄 당할 수 없음을 하나님께 아뢰고 계시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우편’은 ‘능력’, ‘특별한 존귀’의 상징적인 방향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우편은 하나님의 능력을 대리하여 우주를 지배하는 특별히 존귀한 위치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본래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러한 것들을 지니고 계셨으나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사람의 신분에까지 낮아지셨다. 그러나 대속 사역을 성취하시고 부활, 승천하사 다시금 이 모든 것을 취하신 것이다(빌 2:6-11).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이는 무엇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다는 것이다(39절). 여기서 ‘그리스도의 사랑’이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까지 대속물로 내어주신 것을 가리킨다(마 20:28).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바울이 복음을 증거하는 중에 갖은 환난과 핍박을 당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본절은 자신의 경험에 근거한 고백이라 할 수 있다. 먼저 ‘환난’(헬, 드립시스)은 여자적으로 ‘일제히 억누르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외부적인 어려움이다. ’드립시스‘란 헬라어가 영어 흠정역(AV)에서는 ‘환난, 고난 당하는, 고난, 격동, 짐을 진, 박해, 고통\'등 여러 가지로 번역되었다. 동사 ‘들리보’는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내용에 대해서 사용되었다. 첫째, 비유(마 13:21; 막 4:17; 요 16:21). 둘째, 징벌(롬 2:9; 살후 1:6; 계 2:22). 셋째, 강론(행 7:10; 7:11; 고후 8:13; 행 11:19; 고전 7:28). 넷째, 묵시(마 24:7, 21, 29; 막 13:19, 24). 다섯째, 제자들과 훈계(제자들을 임명하심, 살전 3:3). 그리고 훈계에 대한 여러 가지의 언급들로 ‘안정성’(롬 8:35; 계 7:14), ‘세련됨’(롬 5:3; 12:12; 고후 7:4; 1:6), ‘위로 받음’(고후 1:4; 4:17; 빌 4:14; 살전 3:7), ‘구제함’(약 1:27; 고후 1:4; 딤전 5:10)등 이다. 헬라어 ‘들립시스’에 담긴 뜻은 다음과 같은 히브리어들 속에 잘 표현되어 있다. ‘추크’와 그 관련어들로 그 히필(hiphil)형은 ‘곤란을 당하다’, ‘괴로움을 당하다\'(신 28:53, 55, 57)를 의미한다. ‘곤고’(헬, 스테노코리아)는 ‘곤란하고 괴로움’을 의미하는데 이는 내부적인 어려움을 의미한다. ‘핍박’은 자신이 신봉하는 종교나 사상 때문에 이런저런 해를 당하는 것을 뜻한다. ‘기근’은 굶주림으로 양식이 없어 당하는 것이다. 바울 역시 그리스도의 일군으로서 여러 번 주리며 목마르고 굶었었다고 고백하였다(고후 11:27). ‘적신’(헬, 귐노테스)은 ‘벌거벗음’이란 뜻으로 입을 옷이 변변치 않아 헐벗을 만큼 궁핍한 것을 가리킨다. ‘위험’은 신변의 위협을 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자신이 죽을 뻔한 고비도 여러 번 넘겼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였다’고 고백하였다(고후 11:23, 26). ‘칼’은 상해를 입거나 목 베임을 당하는 것 따위를 가리킨다. 즉 전쟁이나 세상의 권력의 표징으로 생명을 직접 위협하는 위험이다. 이것들은 바울이 선교현장에서 겪은 현실적 경험들이다.

8: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기록된 바 시 44:22을 가리킨다. 이는 본래 이스라엘 백성이 국가적 위기에 처한 것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한 시이다.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이스라엘의 환난을 종일 여호와를 위해 죽임을 당케 되는 고난으로 노래한 것이다. 바울은 이를 신약의 성도에게 적용하고 있다. ‘종일이란 것은 내 생명의 시간의 전부이다’(Origen).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도살할 양’이란 제물이 될 양을 의미한다. 그것은 아무런 반항할 힘이 없는 양이다. 여기서는 성도가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환난을 당하게 되는 것을 비유한 표현이다.

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그러나 승리의 확신에 찬 ‘그러나’이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모든 일’이란 35절의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를 의미한다. ‘우리는 사랑하시는 이’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아들을 죽음의 자리에까지 내어준 ‘하나님’은 물론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순종으로 내어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넉넉히 이긴다’(헬, 훼페르니카오)는 의미는 ‘결정적인 승리를 얻다’는 뜻이다. 이는 성도의 승리가 결코 우연이 아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결정적인 승리에 동참하는 것임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넉넉히 이기는 것’은 ‘압도적으로 승리하는 것’을 말한다.

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내가 확신하노니 본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페이스마이’는 완료시제로 ‘내가 확신하는 바에 이미 굳게 서 있다’는 의미이다. 즉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과 성도의 구원에 대하여 의심하는 시기를 통과하여 이제는 그 무엇으로도 이를 부인할 수 없다는 굳센 신념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본절은 ‘인간 생애 전체’를 뜻하는 말이다(Bengel). 바울은 이 둘을 인격화시켜 말한 적이 있다(롬 5:7, 21; 6:9, 12).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영계의 전체’를 가리킨다(Godet). 전자는 선한 천사들(meyer), 후자는 악한 천사들을 의미한다(엡 6:12; 골 2:15).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시간적 전체’를 가리킨다(이상근).

능력이나 ‘권세의 전체’를 가리킨다(이상근).

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높음이나 깊음이나 \'공간적 전체\'를 가리킨다(Bengel, Denney, Dunn).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지금까지 거론된 피조물 이외의 일체 것들을 의미한다. 즉 본절과 38절에서 언급한 것 이외의 알려지지 않은 모든 것을 가리킨다.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35절의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고 한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그리하여 성도의 구원의 확실성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