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분부하신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렸다가 성령을 받으라는 부탁입니다. 또 하나는 성령을 받거든 나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분부 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제자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열심히 성령 받기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그들이 기도하기 시작한지 열흘 만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지 50일 만에 그 날은 바로 오순절의 명절날이었습니다. 그날 마가의 다락방에 불 같은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바로 이 날이 오늘의 기독교 역사상에 신기원을 이룩한 날입니다. 이 날이 이 땅에 교회가 탄생한 날입니다. 이 날이 지금부터 이 천 년 전 일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후 제자들은 위축되었습니다. 실의에 빠져서 낙심하고 의기소침해 있었습니다. 오순 날 성령 받고나서 제자들은 새 힘을 얻었습니다. 새 능력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새 각오와 새 인생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오늘 날 이 땅에 기독교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하나님의 영, 성령을 충만히 받아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 성령을 충만히 받은 사람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인 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 너희는 성령의 전” 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성령을 따라 살라는 것입니다.
1. 성령을 좇아 행하라고 한 것은?
성령의 기준을 두고 살라는 말입니다.
사람의 삶에는 어떤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양심의 기준을 두고 살아갑니다. 그 사람은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하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기준을 두고 살아가기 때문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정의에 기준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정의에 기준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은 적어도 불의를 행치 않아 합니다. 삶의 목표를 정의에 두고 살아가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불의를 보면 고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냥 있어도 그 사람만은 가만히 있지 않니 합니다.
삶의 목표를 정의에 두고 살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런 것에만 기준을 두고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두 신앙인이 가져야 하는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것들은 모두 주관적인 것들입니다. 상황이나 형편에 따라서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가 없습니다. 성도들은 성령에 기준을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제시하시는 삶의 기준이 되고 변치 않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2.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은?
성령의 인도를 받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성령을 보내신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인도하고 도와주시기 위해서 인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고 성령을 보내신 이유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기준을 두고 성령의 인도를 받고, 성령에 순종해 가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바로 그가 그리스도인입니다.
사도 바울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선교사입니다. 사도 바울은 평생을 선교사로 헌신하였습니다. 길을 가다가 만나는 사람이 있으면 그를 붙잡고 예수그리스도를 전하였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소개하였습니다.
예수의 부활을 전하였습니다.
천국을 소개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 후에 40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서 살았습니다. 그때 성령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그 모습을 나타내셨습니다. 그 광야는 길이 없는 곳입니다. 그래서 낮에도 구름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 밤에는 움직이는 대로 백성들은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가며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성령은 앞으로 가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뒤로 가고 싶어집니다. 성령은 그 자리에 멈추어 있기를 원하시는데 우리는 계속 성급하게 나아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마음에 따라서 내 뜻대로 움직이며 살아갑니다. 그것은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내 소욕대로 내 뜻대로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의 대치된 생활입니다. 그렇게 살다보면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생활은 결국 실패와 실수로 얼룩진 삶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본문 16절에서 “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3.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은?
성령의 힘을 받아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오늘 날은 옛날에 없던 풍요로운 시대입니다. 그 어느 시대 비해서 오늘 날은 얼마 되지 안했다고 하지만 그래도 풍요로운 시대가 승용차도 소유했고 문화 혜택도 받을 만큼 받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어딘지 모르게 현대인들의 마음속에는 흡족하지가 않습니다. 만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가슴 한 구석은 텅 빈 것 같이 허전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인간의 한계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 이상의 능력은 없습니다. 그 한계를 우리는 스스로 넘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고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이상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고민도 해 보고 갈등도 느끼고 술도 마시게 됩니다. 괴로워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주시는 힘을 받아서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그 성령께서 주시는 힘이 나에게 임하게 되면 나는 나의 능력을 초월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생각을 추월하게 됩니다.
나의 무능한 것도 보완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무지도 깨우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께서 주시는 힘을 가지고 살아갈 때 그 사람을 가리켜서 우리는 그리스인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주시는 힘을 가지고 일할 때 그 일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도 돈을 가지고 일을 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을 과시하고 힘을 발휘하려고 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분은 지나치게 요령을 가지고 일을 하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보면 언제나 수단이 앞서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이 앞서고 우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일이 돈을 가지고 되는 일입니까? 재주나 요령이나 수단을 가지고 되는 일입니까?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언제나 시기가 따르고 다툼이 일어나고 편이 갈라집니다.
어느 선교사가 외국말을 잘하였습니다. 선교 단체에서는 아무 의심 없이 받아 들여서 선교지에 파송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외국말을 잘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현지에서 일을 하는데 기대 이하로 일을 잘하지 못하였습니다. 언제나 수단과 요령에 의해서 일을 하려고만 하였습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말의 실력만을 과신하고 노력은 하지 안했습니다. 선교를 말로 하는 것입니까? 말만 잘한다고 선교가 되는 것입니까? 우리는 이와 같은 과신을 해 서도 안 되고 이 같은 우를 범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이 서툴고 부족해서 염려스러운 마음으로 파송했던 선교사들은 오히려 누구보다 더 선교를 잘해 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부족한 것을 알고는 기도하면서 노력하였습니다. 성령의 의지해 가면서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이 하는 일에는 언제나 진지하고, 성실하고, 열심히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사람이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란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성령의 힘을 입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힘으로 일하고 그 힘으로 살고 그 힘으로 헌신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가 성도입니다. 그가 하는 일을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이 땅에 성령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4.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은?
성령의 지배를 받아서 살아가는 일입니다.
무당은 귀신의 지배를 받고 귀신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당은 귀신이 시키는 대로 일을 하고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귀신이 주는 힘으로 굿을 하고 점을 치고 춤을 추고 액땜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가리켜서 무당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술주정하는 사람은 술을 지배를 받습니다. 술주정하는 사람은 술이 시키는 대로 합니다. 술이 시키는 대로 소변을 보고 땅바닥에 뒹굴고 추태를 부립니다. 왜냐하면 술의 지배를 받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성령의 인도를 받고 살아가야 합니다. 성령의 이끌려 살고, 성령의 조종을 받으며 살고, 성령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참된 위력이 어디에서 주어집니까? 신앙생활의 주는 참 기쁨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완전히 지배를 받고 살아갈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께로 완전히 붙들려 살아갈 때 얻어 지는 것입니다. 이 상태를 가리켜서 성령이 충만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리차드 범브란트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목사입니다. 공산치하의 루마니아에 밀입국을 해서 선교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간첩혐의를 받고 고문을 받았습니다. 리차드목사님은 고문을 받으면서도 전도를 하였다고 합니다. 기절을 했다가 깨어나서는 “내가 어디까지 전했더라.” 하고는 다시 전도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맨 정신으로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성령에 지배하에 있으니까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인간 그 이상의 용기와 집념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길을 가다가 양지바른 언덕에 잘 지어 놓은 양옥집을 보세요. 다시 한 번 보고 싶어집니다. 너무 아름답고 잘 지어 놓은 집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집의 외적인 아름다움만을 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집에 누가 살고 있느냐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만일 세상에서 악한 사람이 그 집에서 살고 있다면 그 집이 값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 집은 주인의 품위에 따라서 그 값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아주 초라한 집이라고 할지라도 온 나라가 존경하는 선비가 살고 있는 집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그 집을 우습게 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나의 모습이 겉에서 볼 때는 볼품이 없는 사람입니다. 외소보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내 속에 힘이 원천이 되시는 성령께서 함께하고 힘의 원천이 되시는 성령께서 함께하고 계시다면 나는 이 세상에서 어느 누구보다도 귀한 하나님이 사람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이 같은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스도인이요 성령의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이름입니까?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존재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5장에서 “ 나는 지금까지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 부터는 이 같이 알지 않기로 했다고” 하였습니다. 지금까지는 육신으로 보이는 것과 만져지는 세상적인 기준으로 생각해 보아왔습니다. 이제부터는 성령의 기준으로 보고 생각하기로 했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지내를 받고 인도를 받으면서 살다보니 그 보는 기준과 생각하고 판단하는 기준이 달라졌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이 주시는 힘을 받아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