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충성스런 소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엘리 제사장 때 하나님의 법궤를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빼앗겼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빼앗은 하나님의 법궤를 자기들의 신당에 두었습니다. (다곤의 신당)
이튿날 아스돗 사람들이 일찍 일어나 본즉 다곤이라는 신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어 몸뚱이만 남아 있습니다. 블레셋 나라에 큰 재앙이 계속 내려 더 이상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블레셋 방백들을 모아 법궤를 본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결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새 수레를 만들어 멍에를 메어 보지 않은 젖 나는 소 두 마리를 택하여 수레를 소에 메우고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 벧스메스로 향하여 가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암소가 벧세메스로 바로 향하여 갈 때 울며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다른 길로 가지 아니하고 곧 바로 벧세메스 경계까지 가서 법궤를 이스라엘 땅에 옮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1. 하나님의 법궤를 멘 소의 충성스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① 소는 법궤를 메는 소였습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소가 있습니다. 밭을 가는 소, 짐을 나르는 소 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소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법궤를 끄는 멍에를 메었습니다. 영광스런 멍에입니다. 이 세상에서 멍에들 치고 이 보다 더 자랑스러운 멍에를 멘 소는 없을 것입니다.
법궤는 나무로 만든 궤로서 그 안에 십계명 석판과 만나를 담은 항아리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들어 있습니다. 법궤는 오늘의 교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법궤를 소처럼 메고 천성을 향하여 가는 부름 받은 자들이 바로 교회의 모든 성도들입니다. 이 세상에 많은 멍에가 있습니다. 직장의 멍에가 있습니다. 사업의 멍에가 있습니다. 정치적인 멍에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저 마다 각기 다른 멍에를 메고 있습니다. 그러나 숭고한 멍에는 법궤인 교회를 이끌고 가는 멍에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주님의 몸인 것입니다.
② 소는 새끼를 떼고 울며 헌신하였습니다.
벧스메스의 암소는 어린송아지를 떼어 놓고 눈물이 앞을 가려 울면서 갔습니다. 우리들도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오늘 이 시간 신령한 눈을 뜨고 벧스메스로 눈물을 흘리며 묵묵히 걸어가는 소를 바라보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오늘 성도들은 교회의 멍에를 그 어떤 것보다 우선적으로 멜 줄 알아야 합니다.
③ 두 소는 보조를 맞추어 나아갔습니다.
법궤 수레를 끄는 소는 두 마리였습니다. 그러므로 걸음이 맞지 않고는 나아 갈 수가 없었습니다. 두 마리의 소 여덟 개의 발이 맞추어 갔으니 참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충성도 혼자 하는 충성은 쉽습니다. 그러나 서로 맞추어 충성하기는 어렵습니다. 고집으로는 일이 되지 않습니다. 혼자만 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 혼자 걷지 말고 주님과 더불어 같이 맞추어 걸어야 합니다. 옛날에 녹은 하나님으로 더불어 3백년간이나 동행하였습니다.
오늘날 교회에는 혼자 충성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다 같이 충성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교회 안에서 다른 사람이 충성하는 것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봉사도 한 사람의 충성이나 헌금보다 서로 협조하는 충성이 더 자랑스러운 것이요 진실히 요청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충성하는 성도들은 서로 보조를 맞추시기를 바랍니다.
④ 소는 좌우로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뒤에서는 젖을 먹는 어린 송아지의 어미 소 찾는 소리가 들려오고 주위는 소란하고 복잡한 환경입니다. 그러나 소들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좌우로 치우치지도 않고 앞만 향하여 갔습니다. 먹을 것이나 산이나 사람을 구경하며 가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교회에서 성도들은 좌우로 치우치지 않아야 합니다. 어떤 극단적인 것에도 치우치지 않아야 합니다.
⑤ 소는 끝까지 갔습니다.
소는 죽을 때까지 주인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한결같이 충성을 합니다. 소는 충성을 하되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변덕이 없었습니다. 소는 여름이나 겨울이나 가을이 구별이 없었습니다. 충성하되 고집이 없이 충성하였습니다. 우리도 충성하되 끝까지 해야 합니다.
2. 소가 법궤를 메고 벧스메스까지 갈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왔습니까?
① 소는 먹이에서 힘을 얻고 있습니다.
오늘 성도는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아멘으로 소화할 줄 알아야 합니다. 몸에 병이 걸리면 진수성찬이 있어도 먹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먹는 양식입니다. 생명이 되는 것이기에 머릿속에 기억하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설교는 생명의 말씀이기에 마음으로 먹어 우리의 피와 살이 되게 해야 합니다.
② 소는 발에 굽이 있어서 먼 길도 잘 갔습니다.
이외 같이 천국을 향해 가는 성도들은 발걸음에 굽이 있어야 합니다. 성도들은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앉고 서는 자리가 다르고 행동이 분명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성도들은 성일 (주일) 을 구별하고 바쁠 때도 주일을 성수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성도는 십일조를 구별하여 바칠 줄 알아야 합니다.
③ 소는 멍에와 법궤를 쉽고 가볍게 메고 갔습니다.
예수께서 말씀 하시기를 “ 내 멍에는 쉽고 내 집은 가벼우니라.” 사랑의 멍에는 쉬운 것입니다. 사랑스런 손자를 등에 업는 할머니는 힘들어도 무거워 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을 사랑하므로 헌신하고 충성하는 성도는 선할 일에 낙심하지 않습니다. 피곤을 모릅니다. 지금 메고 있는 구역장 각종 직책이나 각 기관의 멍에가 무겁습니까? 일하기가 힘이 듭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적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에게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를 믿은 것은 구원을 얻은 조건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사랑하는 것은 헌신할 수 있는 조건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인 것을 믿으면 됩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으면 족합니다. 더 밀어도 별것 아닙니다. 그러나 사랑의 길을 무한한 것입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점점 더 부족을 느끼게 됩니다.
3. 멍에를 멘 소는 번제물이 된 것입니다.
성도는 아름다운 삶은 주님을 위해 향기로운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소는 평생 주인을 위해 일하다가 마지막에는 제물이 되어 주인을 위해 죽는 것입니다.
벧스메스에 도착한 소는 장작더미 위에서 불살랐습니다. 소는 유익한 동물입니다. 소는 자기를 위해 산다든지 죽는 일이 없습니다. 주인을 위해 살고 주인을 위해 죽습니다.
소는 주인을 위해 일할 뿐입니다.
밭을 갈고 농사를 지어도 모두 주인의 것만 남습니다. 소는 볏짚과 콩깍지 고구마 순으로 만족합니다. 소는 죽으면서 주인에게 최상의 봉사를 하게 됩니다. 구약에 보면 소는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거룩한 제물이었습니다. 리도 주님 앞에 제물이 되어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교회를 위해 죽어야 합니다. 정과 욕심을 죽이고 감정을 죽이며 내 자신이 죽어 향기로운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멍에를 멜 수 없으면 구레네 시몬처럼 억지로라도 지고 따르는 자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