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칼빈의 생애
칼빈(John Calvin, 1509. 7. 10-1564. 5. 27)은 루터보다 20년 후에 프랑스 노용(Noyon)에서 서기관이었던 제라르 칼뱅(Gerard Calvin)의 아들로 태어났다. 칼빈은 칼뱅의 영어 음역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어릴 때는 교황 제도에 무조건 헌신했으며 교역자가 되기 위해 파리, 라미슈르, 몽테그 대학 등에서 신학을 연구했다. 그러나 부친 노용이 성직회에 불만을 품고 칼빈이 법률(法律)을 공부하도록 강권(强勸)하여 3년간 법학(法學)을 배웠으나 부친이 별세한 후에는 다시 신학으로 되돌아 왔다. 1522년 세네카의 저서《관용론》(De Clementia)을 주석 출판하여 일약(一躍) 학자로 인정받았다. 그는 1533년 파리 대학 장 니콜라스 코프(N. Cop)의 취임 연설문을 초안해 주었는데, 그 연설문에서 성직자들을 비난한 것이 화근이 되어 파리를 탈출, 방랑생활에 들어갔다. 방랑 기간 중 루이 드 틸레(Louis de Tillet)의 집에서 교부(敎父)들에 관한 광범위한 독서를 할 수 있었다.
1536년에 《기독교 강요》(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를 출판하였다. 이 해 여름에 스트라스부르그로 공부하기 위해 가던 도중 제네바에서 화렐(Farel)을 만나 종교 개혁에 참가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산 피엘(St. Rierre)교회에서 바울 서신을 강의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10월 초 로잔에서 로마 카톨릭 신학자들과 공개 토론을 한 후 명성을 얻고 곧 교회 개혁을 시작했다. 칼빈은 특히 자녀 종교교육, 도덕적 훈련, 신앙고백 제정 등에 주력했다. 그러나 신앙고백을 따르지 않으려는 자들의 강력한 반항과 반대파들이 시의회의 정권을 잡음으로 인해 1538년 추방되어 스트라스부르그에서 3년간 머물게 되었다.
이 기간 중에 칼빈은 부처(Bucer)및 독일 종교개혁자들과 접촉할 기회를 갖고, 여러 곳에서 종교 토론회에 참석하며《로마서 주석》을 출간, 신학 교수 및 설교자로서 폭넓은 활동을 했다. 또한 1540년에 뷰레(Idelette de Bure)여사와 결혼을 했다.
칼빈이 스트라스부르그에서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는 동안, 제네바는 로마 카톨릭 추기경 사돌레토(Jacopo Cardinal Sadoleto)가 제네바에 편지하여 로마 교황에게 복종할 것을 강요하므로 곤경(困境)에 처해 있었다. 결국 칼빈이 장문의 편지로 이에 답하여 제네바를 어려움에서 구출했으며(1939), 여러 가지 어려움과 변화를 겪은 제네바에서는 다시 칼빈을 초빙(招聘)하기에 이르렀다.
칼빈은 1541년 제네바에 오면서 곧 예배 모범을 기초하고 교회 법규 제정 위원을 두어 11월 20일에 초안을 200인 의회에 제출하여 가결하게 했다. 이것을 시행 감독하는 위원회를 ‘콘시스토리움’(Consistorium)이라고 하는데 교직회에서 12명, 소의회에서 2명, 60인 의회에서 4명, 200인 의회에서 6명씩 모두 24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었다.
교회 법규의 목적은 “교회에 덕을 세우고 개인을 바르게 하며 징계 대상자를 훈계하여 그가 죄에서 벗어나게 하며 교회가 결코 죄를 경시(輕視)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요긴(要緊)하다”고 되어 있다. 이로써 신앙과 생활의 순결을 지키고 댄스와 연극 등 향락 생활을 배격하고 특히 성도덕의 순결을 지키는데 비상한 노력을 지불했던 것이다.
교회 법규 강행의 철저함에 따라 반대를 유발(誘發)시켜 10년간 고투(苦鬪)가 시작되었는데 신앙과 생활의 엄격주의에 대한 반대, 신앙 사상 즉, 이단과의 고투이다.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의 범신론(汎神論)적 이단 사상으로 인해 그를 화형(火刑) 시키도록 하는 시의회의 결정에 칼빈은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리하여 제네바는 교회 도시로 변했고 오랫동안 유럽에 있어서 프로테스탄트의 아성으로 군림했다. 또한 학교를 설립하여 각지에서 모여든 많은 학생들을 개혁주의 정신으로 훈련시켰다.
칼빈의 업적을 종교 개혁자, 신학자, 저술가로 평가할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외에 다른 어떤 정권을 이용하는 일을 극히 삼가 했으며, 그의 청렴한 생활은 너무도 잘 알려져 있다. 칼빈은 학생 시절에 과도한 공부로 인해 소화기 만성 질환을 얻고 편도선, 결석증으로 1일 1식의 고통을 당하면서도 학문연구를 쉬지 않았다. 이는 ‘하나님말씀의 사역자’됨을 중히 여기고, 성경을 주관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역대 성경학자들의 견해를 살펴 정확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진지하고도 열렬(熱烈)한 의도에서였다.
1564년 5월 17일 위대한 종교개혁자 칼빈은 제네바에서 별세했다.
2. 칼빈의 신학
칼빈주의는 칼빈이 성경으로부터 신학적 체계를 수립한 것이며 종교개혁의 완성된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칼빈주의는 교부들의 전통에 근거한다. 자유주의자나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어거스틴과 칼빈은 기독교 주의 사상에다 새로운 교리를 창안해 낸 자이며,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주권, 선택, 예정 교리는 성경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교부들의 문헌을 충분히 연구하지 못해서 범하는 오류(誤謬)이다.
어거스틴과 칼빈은 오직 성경에 근거했을 뿐 아니라 동시에 초대 교회의 신학에 뿌리박고 있다. 초기 4세기 이후의 교부들을 연구해 보면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그들 역시 칼빈의 업적으로 돌리고 있는 교리들을 성경에서 발견해 낸 것을 알 수 있다. 초대 교부들이 교리를 대성(大成)시키지 못한 것은 5세기 펠라기우스의 출현 시까지는 이렇다 할 이교(異敎)의 도전을 받지 못한 연고라고 할 수 있다. 4세기 이후의 신학적 결실이 어거스틴이요, 칼빈의 주류(主流)는 어거스틴에게서 찾아 볼 수 있는 만큼 어거스틴- 칼빈 신학은 독특한 것이 아니라 성경과 전통적인 노선을 계승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칼빈의 신학은 종교개혁 신학의 최정상(最頂上)이다. 칼빈 신학은 종교개혁이 약속한 것의 최종적인 성취이다. 루터의 위대한 힘은 동시에 약점이기도 했다. 루터는 독일인에게는 강하게 호소할 수 있었으나 보다 범세계적인 개혁을 요청하는 다른 나라들에게는 큰 호소력이 없었다. 하나님의 계획 면에서 볼 때 루터는 칼빈의 필요한 선구자였으며 칼빈의 종교개혁의 완성을 위해 필요한 실제적 인물이었다. 칼빈주의는 그 범위와 호소력이 국제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루터, 부처(Bucer), 쯔빙글리(Zwingli)의 노력의 총 결산이었다. 칼빈은 그들이 닦은 터 위에 보다 명석(明晳)하고 정확한 성경에 근거한 교리적 체계를 수립했다.
칼빈은 ‘주석의 왕자’로 불릴 만큼 성경 주석에 탁월(卓越)하며 사실 칼빈 이후의 신학이 다소간(多少間)에 칼빈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이 없다. 다른 개혁자들이 성경을 의존하는 마음이 희박한 듯이 보이는데 반해 칼빈은 성경 중심의 완숙(完熟)한 경지에 이르렀다. 칼빈은 쯔빙글리와는 달리 철학을 완성하려는 동기도 없었으며, 루터처럼 영적 난제(難題)를 해결하기 위해 성경을 발췌한 것이 아니라 성경을 조직적으로 연구하는 신학체계를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종교개혁은 칼빈으로 인해 열매를 맺고 교회는 성경적 전통을 되찾게 되었으며 중세 스콜라 철학의 축적된 위험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