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


 

1. 다양한 정착설이 대두된 배경

    역사비평적인 방법론에 의해 성서해석학이 대두되기 전까지만 해도 성서의 증언은 의심받지 않았다. 여호수아에 의한 가나안 정복(수 1-12장)은 무력에 의한 것이었으며 그 이면에 하나님의 초월적인 도움이 있었다는 사실이 그대로 믿어졌다. 그런데 성서비평학이 확립되면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에 대한 견해가 다양하게 대두되었다. 우선 성서내부의 불일치에 관한 점이다.
 

2. 무력정복설과 이주설

    사사기 1:1-2:5의 보도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은 때론 무력에 의해 때로는 평화적인 이주나 가나안 원주민과의 협력체제하에 서서히 이루어진다. 이와 같은 사실에 근거하여 어떤 사람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게 된 배경은 평화적인 이주방법에 의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평화적인 이주는 정복설과는 달리 이스라엘이 점차적으로 가나안에 이주했다는 것이다. 유목민이었던 이스라엘은 농업을 영위하는 가나안의 원주민과 계약을 체결하여 공존공생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자연적인 인구증가에 의해 이스라엘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사람이 거주하지 않은 지역을 중심으로 생활하다가 점차적으로 원주민의 거주지역에 침투했다는 평화적 이주설은 무력에 의한 정복설이 보여준 비합리적 보도를 거부하는 내용이어서 우리의 주목을 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갈등요인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데서 문제점을 야기한다.
 

3. 농민혁명설

    여호수아 1-12장의 무력정복보다는 사사기의 증언이 보다 합리적인 보도로 받아들여지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성서의 사회학적 연구가 가속화되었다(삿 1:1-2:5). 멘덴홀(G. E. Mendenhall)과 같은 사람은 이스라엘의 초기형성사를 재건하면서 사회학적 연구결과를 토대로 하였다. 이스라엘의 가나안정착을 설명하기 위해 멘덴홀은 \'농민혁명가설\'을 세웠다. 이집트를 탈출한 무리들과 가나안의 하층계급이 연대하여 가나안의 봉건제후에 대항한 것이다. 가나안의 농민, 몰락한 제사장, 부역꾼, 장인 등의 하층계급 사람들은 당시 이집트의 봉신으로 있었던 가나안 도시국가들의 제후들에 의해 강제부역과 과다한 공물징수에 시달린 것으로 짐작된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과 이들의 연대는 자연스러운 것이었으며 그 결과 세력을 결집하여 가나안의 도시국가 체제에 도전한 것이다. 멘덴홀이 주장한 농민혁명가설은 여호수아서에서 보여준 무력에 의한 정복을 어느 정도 충족시켜 주면서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복의 주도권을 잡았다는 점에서 상당한 지지를 받아 왔다. 동시에 이스라엘과 가나안 원주민과의 연대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이 이 가설의 타당성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문제점이 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과 가나안의 농민계급이 연대하게 된 배경이 불분명하며 고고학적 증거 역시 가나안 도시들이 무너진 연대에 의심을 갖게 한다. 어찌됐건 이젠 더 이상 \'가나안 정복\'이라는 말은 학계에서 통용되기 어렵게 됐다. 대신 \'가나안 정착\'이라는 용어가 자리잡아 가고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이 급진적이고 갑작스런 무력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점진적인 방향에서 납득할 만한 사회적 과정이 필연적으로 수반된다는 것을 뜻한다.
 

4. 사회종교적 재부족화설

    갓월드(N. K. Gottwald)는 멘덴홀이 제시한 사회학적 연구방법을 한층 발전시킨 사람으로 유명하다. 『야훼의 지파들』(The Tribes of Yahweh)이라는 책을 써서 일약 세계적인 학자로 등장한 그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배경을 매우 진보적인 방향에서 제시한다. 그는 멘덴홀과는 달리 출애굽 사건이 가나안 진입의 주된 동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나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갓월드에 의하면 출애굽 사건은 너무 미미한 사건이거나 역사적으로 신빙성 있는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은 가나안 외부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가나안 내부에서 발생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만약 출애굽한 무리가 있었다면 당시 이집트의 영향권 아래 있던 가나안의 도시국가체제에서 노예와 유사한 생활을 했던 무리일 것이다. 가나안에 대한 이집트의 영향력이 감소된 틈을 타서 사회저변에 깔려 있던 하층계급이 연대하여 가나안의 봉건제후에 대항한 것이다. 이들은 원주민의 거의 80퍼센트에 달하는 유목민과 농민들, 용병과 해적들, 그리고 각종 장인들과 배교한 제사장들로 구성된 잡다한 무리들이었다. 이집트의 지배하에 있던 가나안 도시국가들의 수탈체제를 벗어나기 위해 이들이 힘을 합하여 자치체제를 형성하고자 한 사건이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렇게 모인 정치·경제적 집단이 지역별로 모여 이스라엘의 12지파체제를 갖추게 되고, 나아가서 국가형성의 토대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 갓월드가 주장하는 \'사회종교적 재부족화설\'이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이 출애굽한 무리에 의해 발생한 것이 아니라 가나안 내부에서 갑자기 출현하였다고 하는 \'사회종교적 재부족화설\'은 성서의 출애굽 사건을 정면으로 부정한 것이 되기 때문에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으며 아직까지도 일부에서는 이 이론에 대해 거부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갓월드의 사회학적 분석은 나름대로 근거를 지닌다. 우선 성서의 증언이 역사적으로 입증하기에 무리가 따른다는 점이다. 갖가지 기적적인 사건들이 가나안 정복과정중에 발생했으며 사건의 진행과정도 초자연적이며 신비적인 방식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사람들을 전멸했다고 기술하고 있는 점 역시 실재 역사적 사건을 근거로 하고 있기보다는 후대 사가의 해석에 더 의존한 것이다. 이 모든 점을 들어 무자비한 무력정복은 납득하기 힘들다. 또 하나 결정적인 근거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이 성서의 증언대로 이집트에서 430년 동안 살았다면 그들이 가나안에 살면서도 얼마 동안 이집트 문화에 젖어 있을 법도 하다. 그런데 지금까지 발견된 고고학적 근거는 팔레스타인에서 이집트의 유물이 거의 발견되지 않으며, 발견된다고 하더라도 아주 미미하다는 점이다. 이스라엘은 출애굽한 과정에서도 이집트의 종교상황은 거의 모르는 듯 했으며 오히려 가나안의 상황을 더 잘 알고 있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내부에서 형성되었다는 주장은 최근의 고고학 연구에 의해 더욱 개연성 있는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주전 14세기에 크게 성장했던 가나안의 도시 라스샤므라(우가릿)에서 발견된 문헌은 고대 가나안의 종교생활과 사회생활을 잘 보여준다. 그 문서에 나타난 종교사상과 구약성서의 내용에 많은 유사점이 발견된다. 구약의 히브리어와 당시 우가릿 언어 역시 유사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고, 둘 사이에 음과 뜻이 동일한 단어가 많이 발견되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가나안의 생활과 이스라엘의 초기 생활은 이질적이라기 보다는 거의 동질적인 것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