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오른편인가? 왼편인가? (10월8일 삼일밤) | |
| 마태복음 25장 31-46절 어떤 부인이 예배가 막 끝났을 때에 헐레벌떡하고 예배당에 들어왔습니다. 그 부인은 청소하고 있던 집사님께 예배가 끝났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집사님은 \"예배는 끝났지만 봉사는 막 시작을 했습니다(Lady, the worship is over, but the service has begun.).\" 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여기서 집사님은 워쉽(worship;예배)이란 단어와 서비스(service;봉사)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이야기입니다. 진실한 예배는 예배가 끝난 후 우리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봉사로 다시 시작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우리의 삶 속에서 행해야 하는 봉사를 균형 있게 이루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배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예배가 참 예배가 되려면 우리의 삶에 영향을 주고 일상성 속에서 봉사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훌륭한 예배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바로 우리의 삶속에서의 봉사, 즉 오른 편에 서는 신앙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에게 오메가 포인트가 있음을 알려주며 마지막 심판 때에 우리가 오른 편에 세워지는 양이 되어야 함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오늘의 이 말씀을 통하여 오른 편에 서는 신앙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오른 편에 서는 신앙은 하나님이 심판이 반드시 있음을 믿는 신앙입니다. 하나님과의 결산이 반드시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에 우리의 신앙과 삶은 보다 더 경건하고 진지하고 보람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분명히 믿고 경건과 진실을 회복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미국의 유명한 가수이자 방송인인 에디 카토는 성공을 위해 정신없이 질주하는 전형적인 미국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앞뒤를 가리지 않고 숨가쁘게 달려가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보낸 짤막한 한 줄의 편지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인생관이 바뀌어 훨씬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편지는 이렇습니다. \"내 아들 에디야, 너무 빨리 달리지 말아라(Do not go too fast.). 그렇게 하면 주변의 좋은 경치를 하나도 못보고 그냥 지나친단다.\" 에디 칸토는 어머니의 편지를 받고 자신의 수첩에 네 가지 질문을 적어 놓고 한평생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살았습니다. \'내가 하는 일이 과연 가치 있는 일인가?\' \'누구를 위해 일하고 있는가?\' 인생의 참다운 보물을 추구하고 있는가? 이웃에게 어떤 공헌을 할 것인가? 그는 한평생 네 가지 질문을 하면서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제 잠깐 길을 멈추고 서서 인생의 오메가 포인트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세계가 어떻고 경제가 어떻고 정치가 어떻고 하기 전에 내 인생의 오메가 포인트를 진지하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내 운명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를 살피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9장27절에는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이 가까이 다가옴을 늘 인식하고 그 오메가 포인트를 바라보며 신앙의 경건과 진지함을 회복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오른 편에 서는 신앙은 주님이 가장 깊이 관심하고 계신 지극히 작은 자에게 손을 펴서 돕 고 구제하는 신앙입니다. 주릴 때에, 목마를 때에, 나그네 되었을 때에, 벗었을 때에, 병들었을 때에, 감옥에 갇혔을 때에 먹이고 마시우게 하고 영접해주고 옷을 입히고 찾아가 주는 사랑을 베푸는 신앙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하신 말씀 중에 예수님의 윤리가 가장 확실하게 분명하게 독특하게 드러내는 것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입니다. 간단한 사건을 예로 들어 귀중한 교훈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여기 불한당을 만난 사람이 있다. 제사장이 그를 보고 그냥 지나가고 레위인도 그를 외면했다. 그러나 너희들이 업신여기고 상종하기도 꺼려하는 천한 사마리아 사람은 길을 멈추고 그를 돌보아 주었다. 과연 누가 우리의 이웃이냐? 누가 사람다운 사람이냐?\"를 묻고 있습니다. 손을 펴서 구제한 사람이 예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입니다. 오늘의 본문에도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앞에 놓고 심판하실 것을 미리 예고하시는 것입니다.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별하는 것과 같이 양은 그 오른 편에, 염소는 그 왼편에 두리라 오른 쪽 양들에게는 내가 어렵고 고통스러웠을 때에 주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왼 편의 염소에게는 내가 배고플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않았다고 책망하십니다. 탈무드에 보면 세 친구 이야기가 나옵니다. 항상 가까이 있고 이 친구 없으면 못살 것 같은 친구가 있고 그 다음 가끔 만나는 친구가 있고 아주 드물게 만나는 친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임금님의 소환령을 받고 벌벌 떨면서 같이 가줄 친구를 찾는데 없으면 못 산다던 친구는 아예 못 간다고 거절하고 가끔 만나는 친구는 궁궐 앞에 가지만 가주고 그 이후는 모른다고 하였는데 아주 드물게 만난 친구는 의외로 내가 같이 가서 임금님께 네 사정을 변호해 주리라고 따라 나서는 것입니다. 첫째 친구는 인생이 살아가면서 매일 매일 필요하다고 하는 돈이고 가끔 만난 친구는 친구와 가족이며 죽어서까지 따라와서 변호해 주는 친구는 자선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섬김은 기분이나 환경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보상을 바라지 않습니다. 결과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섬김의 대상을 스스로 구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지속적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보람을 주고 하나님의 기억에 남는 일은 지극히 작은 자 즉 우리가 도움을 주어도 다시 갚을 길이 없을 정도의 이웃들에게 그들 속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고 돕는 것입니다. 이웃사랑의 신앙 그것이 오른 편에 서는 신앙입니다. 항상 이웃을 돕고 사랑함으로 오른 편에 서는 신앙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오른 편에 서는 신앙은 결국 주인의 잔치에 참여하고 주인의 즐거움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오른 편에 서는 신앙으로 영원한 생명과 복락을 누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이 진리라면, 그 후에 심판이 있다는 것도 진리입니다. 심판에는 하나님의 심판(계20:11-15)과 그리스도의 심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사망과 생명에 관한 심판입니다. 즉 천국과 지옥을 나누는 심판입니다. 여기의 심판의 표준은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소유했느냐, 하지 않았느냐,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였는가 아닌가에 달렸습니다. 그리스도의 심판은 상벌의 심판으로 표준은 행위입니다. 그리스도의 터 위에 금, 은, 보석으로 공적을 세우는 사람과 나무, 풀, 짚으로 세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불로 심판할 때, 타는 사람은 해를 받고, 타지 않으면 상을 받습니다. 나 자신을 위한 노력과 행위는 모두 불에 타는 것이지만, 주님의 영광을 위하고, 이웃의 영혼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성품으로 섬기는 일은 불에 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1923년 9월 1일에 일어났던 일본의 관동 대 지진은 10여 만의 생명과 수백만의 금화를 태워 버렸다. 그 때에 특히 피복매매 광장에서 된 일을 보면 3만 명이나 한 자리에서 죽었는데 그렇게 불꽃 가운데서도 살겠다고 어떤 사람은 의복가방을 들고 오고, 어떤 사람은 돈뭉치를 가지고 오고 어떤 사람들은 과자봉지를 들고 나오고, 어떤 사람은 바이올린, 어떤 사람은 화장품을 가지고 광장 한복판에 모여 살겠다고 애를 쓰다가 최후엔 비명을 지르며, 하나님 혹은 부처님 하다가 다 죽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런즉 우리의 소망은 하늘뿐입니다(마16:26). 진정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하늘나라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며, 시도 아니고 꿈의 동산도 아닙니다. 그 곳은 따듯하고 정겨운 가정과 같이 우리를 끌어들이는 힘이 있습니다. 오른 편에 서는 신앙은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알고 지극히 작은 자에게 사랑을 베풀고 영생 복락을 누리는 신앙입니다. 그날이 가까이 옴을 볼수록 더욱 주님 앞에 경건히 서는 신앙인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