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무엇이 다릅니까? (8월13일 주일) | |
| 누가복음 3장 15-17절 어느 교회에서 김씨와 박씨 두 사람이 동시에 장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김장로는 드러내 보이고 칭찬 받기를 좋아했는가 하면 박장로는 항상 숨어 봉사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두 장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가게되었습니다. 김장로는 백, 적, 흑 세 마리의 말에 아홉 상자의 보물을 싣고 교회 성가대를 앞세우고 요단강을 건너 천국과 지옥의 분기점에 이르렀는데 문지기가 감동하여 간단히 검문한 후 천국길로 인도했답니다. 천국 입구에 도착하니 천사가 다시 검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아홉 상자 속에 있는 것이 다 썩어서 악취가 나더랍니다. 천사는 크게 노여워하며 그를 지옥으로 보냈답니다. 빈 손으로 간 박장로도 똑같은 통로를 거쳐 천국문 앞에 이르렀습니다. 천사가 그에게 “자랑할 것이 무엇이냐?”라고 묻자 그는 \"아무것도 내어놓을 것도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 은혜에 감사할 뿐입니다.”라고만 했지요. 그런데 천사가 그의 몸을 검사하려고 허리에 맨 띠를 풀자 12 금강석이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천사는 크게 기뻐하며 그를 천국으로 안내했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나타난 모양으로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내용으로 하나님께 인정받아야만 갈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 달라도 달라야 합니다. 성경에는 대칭적인 비유의 교훈이 많이 나옵니다. 지혜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마 25:2), 오른편 양과 왼편의 염소(마 25:33), 우편 강도와 좌편 강도(눅 23:33), 좋은 씨와 가라지(마 13:25), 본문에서의 알곡과 쭉정이의 비유입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이것과 저것이 비슷한 것 같으나 사실은 다르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본문에 나오는 알곡과 쭉정이는 무엇이 어떻게 다른 것일까요? 첫째로, 속을 보면 다릅니다 알곡이냐 쭉정이냐는 속을 보고 판가름합니다. 알곡과 쭉정이는 늘 함께 섞여 있으며 겉모양이 똑같아서 구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속을 보면 알곡은 꽉 차 있고 쭉정이는 텅 비어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들이 모두 모이는 곳입니다. 겉으로 보면 어떤 사람이 속이 차 있는 알곡 신자이고 어떤 사람이 속이 비어 있는 쭉정이 신자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헨리 드루먼드 교수와 대화를 하고 있는데 한 노신사가 지나갔습니다. 어떤 사람 : 교수님, 저 신사분을 아십니까? 저 분은 우리 불신자 모임을 만든 분입니다. 드루먼드 교수 : (깜짝 놀라며) 아니, 저 분은 교회 장로가 아닙니까? 어떤 사람 : 맞습니다. 저 분은 장로이시죠. 하지만 불신자 클럽을 만드셨답니다. 마을의 모든 사람들은 저 분이 어떤 사기꾼인가를 잘 알고 있지요. 그래서 우리는 모두 신앙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오래 교회를 다녔으나 속을 보면 말씀도 없고 믿음도 없는가 하면, 어떤 이는 그리 오래 교회에 다니지 아니했어도 성령 충만, 말씀 충만, 믿음 충만합니다. 알곡 신자란 교회에 다닌 연수나 직분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질과 내용으로 일컫는 것입니다. 둘째로, 날려 보면 다릅니다 알곡과 쭉정이는 바람에 날려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키질을 해 봐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키’란 농부들이 알곡과 쭉정이를 분리시키기 위하여 사용하는 도구로서 키질을 해 보면 쭉정이는 가벼워 날아가 버리고 알곡은 무거워 날아가지 않습니다. 알곡 신자와 쭉정이 신자는 환란이라는 바람이 불어 봐야 알 수 있는 것으로 고통의 시련은 알곡 신자와 쭉정이 신자를 정확하게 분리시켜 놓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이 세상에서 알곡과 쭉정이를 고르는 키는 말씀입니다. 알곡 신자는 꾸짖는 책망의 말씀을 들을 때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로구나.”라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오나, 쭉정이 신자는 불만을 품고 교회를 떠남은 물론 하나님마저 떠나버립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비현실적이고 높아서 그렇게 살 수가 없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높이는 말 같으나 사실은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한 핑계요, 불신앙의 발로일 뿐입니다. 어느 사진관 주인의 이야기입니다. 고객에는 두 부류가 있는데, 세리 고객과 바리새인 고객이랍니다. 세리 고객은 사진이 좀 잘못되었을지라도 사진에 나온 자기 모습을 트집잡지 아니하고 찾아가는 사람으로, “사진이 잘못 나온 것 같아서 미안합니다.”라고 하면 오히려 “내 모습이 그렇게 생겼는데 어떻게 합니까?”라고 한답니다. 헌데 바리새인 고객은 자기 모습 그대로 사진이 나왔음에도 “왜 이렇게 잘못 나왔느냐, 사진을 수정해 달라, 다시 현상해 달라.”고 생트집을 잡는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시여! 여러분은 세리 고객입니까? 바리새인 고객입니까? 셋째로, 심어 보면 다릅니다 알곡과 쭉정이는 심어 보면 구별이 됩니다. 알곡은 땅에 묻히면 생명이 있으므로 발아되어 싹이 나고 성장, 꽃이 피고 열매를 맺으나 쭉정이는 땅에 묻고 아무리 기다려도 생명이 없는고로 싹이 나지 아니하며 썩어 없어지고 맙니다. 이것이 알곡과 쭉정이의 또 하나의 다름입니다. 알곡과 쭉정이의 다름은 생명의 유(有)와 무(無)에 있습니다. 쭉정이 신자는 계속이 없는 중단이요, 수확 없는 허무입니다. 그래서 당대의 자기 모습으로 끝나 버립니다. 그러나 알곡 신자는 계속되는 전진으로 싹이 나고 열매가 있으며 자기를 통하여 많은 수확을 거두게 하고 생명의 유산이 계대되어 내려가게 하는 살아 있는 씨앗의 사람입니다. 인도네시아 육교는 양쪽으로 오르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상하게도 한 쪽으로만 오르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유인즉, 양쪽 계단의 육교 세우는 비용을 공직자들이 가로채고, 건축업자들이 떼어먹어 결국 한 쪽 계단의 육교 비용만 남아 하나로 만들어진 것이랍니다. 우리 나라도 떼어먹기는 마찬가지인데 양쪽에 계단이 있잖습니까? 그래도 인도네시아는 한쪽 계단 세울 돈으로 한 쪽만이라도 튼튼히 만들었건만 우리 나라는 한 계단 만들 돈으로 두 계단을 만들었으니… 성수대교가 어찌 아니 무너지겠습니까? 어느 나라 어느 국민이든지 알곡 나라, 알곡 국민 되지 아니하면 그 나라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어느 중직의 가정에서 고등학교 3학년이 된 아들에게 대학입시 공부에 지장이 있다고 교회에 못 나가게 했다고 합니다.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어떻게 중직이 그런 어리석음을 범할 수 있을까요? 육신의 소욕으로 쭉정이 자식을 만들면 후회할 날이 올 것입니다. 대학 합격하기 전에 하나님께 믿음의 합격부터 해야만 합니다. 어느 교회에 부흥회를 갔을 때 어떤 어머니의 간증입니다. “저는 열심히 교회를 다니는 고3 아들에게 대학 입시가 있으니 교회에 가지 말고 공부만 하라고 했습니다. 헌데 제 아들은 대학에 떨어졌습니다. 재수했으나 또 떨어졌지요. 그래서 삼수를 하려는데 그 애가 정신 이상이 되어 대학은커녕 저는 자식까지 버리게 되었습니다. 저의 어리석음이 아들을 망쳤어요. 그러나 다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아들이 치유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겉은 깨끗하게 보이나 속에서는 시체가 썩어가는 회칠한 무덤 같은(마 23:20) 교인 되지 마십시오. 겉은 깨끗하나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 차 있는 대접 같은(마 23:25) 교인이 되지 마십시오., 자녀들을 생명의 싹이 나고 성장하여 결실하는 알곡 신자로 키우지 아니하면 열매를 수확할 수 없습니다. 뼈저린 후회의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함께 살고 있으나 알곡과 쭉정이는 다릅니다. 쭉정이는 알곡이 아닙니다. 만일 쭉정이인 자가 스스로 알곡이라 생각하고 있다면 그는 하나님을 우롱하는 자요, 사람들을 기만하는 자입니다. 알곡과 쭉정이 모두에게 똑같이 타작 마당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타작 후의 결과는 다릅니다. 쭉정이는 키질할 때 날아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옥 불에 던져 태워지는 신세가 되고, 알곡은 남아 있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들어가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어떤 이의 ‘첫 마음’이라는 글입니다. 1월 1일 아침에 먹은 첫 마음으로 1년을 산다면, 학교에 입학하여 새 책을 앞에 놓고 일과표를 짜듯 공부를 한다면, 사랑하는 이와 처음 눈이 맞던 날의 떨림으로 내내 부부생활을 한다면, 직장에 첫 출근하는 날 신발끈을 매던 마음으로 직장 일을 한다면, 아팠다가 낫던 날의 감사한 마음으로 삶을 살아간다면, 개업날의 첫 마음으로 언제나 손님을 맞는다면. 처음 예수님을 믿던 날, 혹은 세례를 받던 날, 아니 예수님의 사랑을 처음 알았던 날의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면 비참한 후회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타작 마당에서 쭉정이가 되어 후회하는 자가 되어서는 아니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지금부터 알곡 신자가 되도록 삶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지금 내 삶의 사건 하나하나가, 언행이, 일거수일투족이 타작 마당에서 내가 맞게 될 결과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이라는 내 삶의 시간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유예 기간입니다. 우리는 유예 기간의 삶을 생명이 들어 있는 씨앗으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생각만으로는 알곡 신자가 될 수 없습니다. 지금, 곧 실천의 사람이 되십시오. 하나님께선 실천의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기독교인들인 우리는 1차적으로 믿는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그러나 알곡이냐 쭉정이냐라는 2차적인 문제 해결은 살아 가는 삶에 달려 있습니다. 알곡 신자란 교회에 다닌 연수나 직분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질과 내용으로 일컫기 때문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