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주께서 아시나이다 (4월30일 주일) | |
| 요한복음 21장 15-18절 프랑스 파리의 엥발리드 성당안에는 나폴레옹의 무덤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당 한 가운데 놓인 엄청나게 큰 대리석 관속에는 나폴레옹의 시체가 아닌 재가 들어 있습니다. 나폴레옹은 1821년에 세인트헬레나섬에서 죽어 매장되었는데 20년후에 그의 유해가 프랑스로 돌아올 때 화장해서 그 재를 갖다 넣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대리석관에 이르는 입구위에 나폴레옹의 유언이 크게 새겨져 있습니다. \"나는 나의 유골이 세느 강변,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프랑스 국민 한 가운데서 안식 취하기를 원하노라\" 나폴레옹은 프랑스국민을 사랑했는데 그것도 그냥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토록\' 사랑했다고 합니다. 그는 자기의 야망을 위해서 수없이 많은 청년들을 죽였으며, 남의 귀한 집 자식들을 모스크바로 데려가서 얼어죽게 만들었습니다. 자기의 정복욕을 위해서 수없이 많은 생명을 죽이고서도 승리의 영광을 자기 가족에게 돌렸으며, 프랑스 국민들을 정복욕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그런데도 사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프랑스 국민들은 그 말을 믿고 그 유언과 함께 무덤을 그렇게 크게 만들어 놓았다고 합니다. 우리의 사랑도 이와 같은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자기 중심적으로 사랑합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이기심입니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사랑하면 할수록 더 많은 사람들과 부딪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의 사랑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전 까지의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안전을 위해서 서슴없이 주님을 부인하고 배신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서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 주님앞에 변화된 사랑의 모습을 가지고 이제는 경솔히 말할 수 없어 \'주께서 먼저 아십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아시나이다\'의 고백은 과연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로, \'회개하는 마음을 가집니다\'의 고백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한 후 마음에 굉장한 가책을 느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면서 통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자기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통회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세 번 고백한 그 이면에는 지난 날 잘못에 대한 회개의 심령과 함께 이제는 다시는 배신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심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실패한 자가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를 용서해 주시기를 즐기시고 회개하고 돌아온 자에게는 과거에 실패했던 일보다도 더 큰 축복을 내려주신다는 사실을 성경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의 유명한 작가 빅톨위고가 있습니다. 그는 많은 작품을 쓰고 유명해지자 돈을 많이 벌게 되었고 생활도 방종하여 술과 여자를 좋아하고 타락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빅톨위고에게는 사랑하는 외동딸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이 딸아이가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가출한 것입니다. 며칠이 지난 뒤에 딸아이의 시신이 세느강물 위에 떠올랐습니다. 아버지는 딸아이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가슴을 치면서 통곡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장례식후 딸 아이의 방에 들어가보니 딸이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가 있었습니다. \"아버지, 이제는 방랑의 생활을 청산하시고 집으로 돌아오세요. 집에는 하나님과 어머니와 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세요. 아버지에게 인생의 방향을 전환할 수 있는 한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서 제가 집을 떠납니다.\" 이딸아이는 아버지의 회개를 바라보면서 죽음을 택했던 것입니다. 빅톨위고는 딸아이의 죽음을 통해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의 자서전속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돌려세우기 위해 딸의 죽음이라는 충격을 내게 주셨습니다.\"란 고백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회개시키기 위해서, 인생의 방향을 되돌리기 위해서, 잘못된 방향을 돌려세우기 위해서 아픔이라는 충격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이 충격을 고통으로만 생각하지 마시고 이 충격을 통해서 내 자신을 돌려 세울 수 있는 회개의 기회로 삼으셔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기회를 붙들 수 있고, 인생의 승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빅톨위고는 자기의 인생관을 재정립하고 자기의 타락한 생활을 정리한 후 \"이젠 어딘가 좀 봉사하고 살아야지\"라고 생각하고 사회복지국의 말단 공무원으로 취직을 했습니다. 그는 어려운 자를 찾아가서 상담하고 도와주는 일을 열심히 하여 뭇 사람의 존경을 다시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후 프랑스 정부의 교육부장관까지 역임하게 되었습니다. 그후 빅톨위고는 \'레미제라블\'이란 작품을 통해서 새로운 출발이 얼마나 위대한 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회개입니다. 베드로는 제자로서는 실패했지만 다시 제자권을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깊이 회개함에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회개한 심령을 주께서 아시리라고 믿고 고백한 것입니다. 진정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주님께로 향한 전적인 믿음을 가집니다\'의 고백입니다 주께서 베드로를 칭찬하신 장면을 보면 베드로의 믿음이 왕성할 때였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베드로가 주님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놀라운 신앙고백을 할 때 주님께서 아낌없이 칭찬해주면서 말씀하시기를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내 교회를 이 반석위에 세울 것이라. 천국 열쇠를 네게 주겠노라\"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반면에 마태복음 14장에선 베드로가 물위로 걸어오신 주님을 바라보며 자신도 걷게 해달라고 요청해 \'오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가다가 물결을 보고 두려워하여 물에 빠져갈 때, \"믿음이 적은 자여, 어찌하여 의심하느냐?\"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베드로의 믿음이 왕성했을 때는 칭찬을 받았지만 베드로의 믿음이 흔들릴 때는 책망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 우리의 재산, 지위, 지식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향한 어떤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지를 보십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께 전적으로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몇 년전에 서울의 어느 아파트 7층에서 불이 났는데 마침 7층의 어느 아파트에 5살짜리 아이하나가 불을 피하지 못하고 갇혀 있었습니다. 소방대원도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연기가 가득찼습니다. 동네사람들은 아이를 구하지 못해 안절부절합니다. 그래서 동네사람들이 이불을 가져다가 들고 창문을 향해서 그 아이이름을 부르면서 \"뛰어내려. 뛰어내려\"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어두컴컴한 그 아파트 창문을 열고 밑을 내려다 보았지만 겁에 질려서 뛰어내리지 못합니다. 그때 급하게 연락을 받은 아이의 아버지가 뛰어 왔습니다. 이불을 같이 잡고 아이 이름을 부르면서 \"아버지다\"하면서 \"뛰어내려\" 하니까 그 아이는 그때서야 주저없이 뛰어내렸습니다. 그래서 안전하게 살았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자기를 하나님께 던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믿음을 통해서 능력을 주시고, 앞길을 열어 주시고, 소망이 되어 주십니다. 베드로뿐 아니라 여러분도 이런 믿음을 회복했음을 주님께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이제는 주님을 위해서 죽으리라\'는 순교의 고백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18절에서 베드로의 장래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라고 하셨스빈다. 이 말씀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라고 19절은 해석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은 베드로가 장차 늙어서 순교당할 것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팔을 벌리리라\'는 십자가에 순교하는 장면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대로 주님의 말씀을 전파하다가 로마에서 형장으로 끌려가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하였습니다. 지금도 로마에 가면 원형극장 한 쪽 스탠드에 큰 십자가 하나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 십자가는 베드로가 붙잡혀서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던 그 십자가라고 합니다. 베드로의 죽음은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비참한 죽음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면 베드로야말로 로마를 복음화시키고, 그리고 세계를 복음화시킬 수 있는 가장 첫 기초를 놓은 것입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죽음입니까? 인생의 승리는 마지막을 보아야 합니다. 찬송중에 영광송이 있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 2장과 4장입니다. \'Gloria Parti\' 란 영광송입니다. 곡은 후대에 붙여졌지만 가사는 초대교회때 사도들이 순교하기 위해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마지막으로 부르던 찬송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 찬송과 영광을 돌려 보내세. 태초로 지금까지 또 영원무궁토록 성삼위께 영광 영광\" 죽음의 형장에 끌려가는 사람이 \"영광 영광 영광 성삼위께 영광을 올리세\"라고 부르는 그 찬송은 패배자의 발걸음이 아니라 승리의 개선가인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인생의 승리입니다. 진정한 의미가 있는 삶입니다. 프로 바둑기사가 바둑 한판을 두는데에는 보통 400여수를 주고 받습니다. 그런데 프로기사들은 바둑이 끝나고 나면 그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확하게 다시 바둑판위에 놓습니다. 그것을 복기라고 합니다. 물론 그분들의 두뇌가 뛰어난데가 강훈련한 까닭도 있겠지요. 그러라 실은 프로가 아니더라도 가능하다고 합니다. 프로기사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프로기사들은 의마가 없는 돌을 놓지 않습니다. 의미있는 돌만 놓기 때문에 그 의미를 따라가면 복기가 가능하답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돌아보십시오. 30년을 살았습니까? 50년, 혹은 60년을 살았습니까? 그 가운데 몇 수가지 복기할 수 있습니까? 만약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도 모르게, 복기할 수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인생이 끝났구나\"하는 생각이 든다면 지금까지 무의미하게 살아온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의미있는 돌들을 두어야 합니다. 내 자신의 영광과 이익을 위해서 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죽어야 합니다. 제네바에 가면 종교개혁자인 장로교의 창시자인 칼빈의 묘가 공동묘지에 있습니다. 그런데 칼빈의 묘소에는 조그만 안내판 외엔 비석이 없습니다. 그가 죽을 때 이런 유언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 무덤에 비석을 세우면 나의 추종자들이 예수보다도 내묘소 비석을 더 우상시할 것임으로 세우지 말라\" 그래서 제네바를 찾는 수없이 많은 참배객들은 정작 칼빈의 묘를 알지 못합니다. 이제 우리는 정말 주님의 영광만을 드러내고 우리의 이름은 자꾸 지워가는 훈련을 계속해야 합니다. 우리가 존귀해지는 것은 우리의 인생이 끝난 다음에 주님께서 해주시는 것이지 사람이 해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수없이 나를 부인하고 살아오지 않았느냐? 이제는 진정 네가 나를 사랑하고 있느냐?\' 이 물음에 우리는 베드로처럼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더 잘알고 계십니다\' \'주께서 다 아십니다\' 이제는 진정 회개하는 마음으로 날마다 자신을 돌아보며 살겠나이다. 이제는 주님만을 향한 강건한 믿음으로 순간 순간 살겠나이다. 이제는 주님만을 위하여 살고, 주님만을 위하여 죽는 자가 되겠나이다. 이제는 \'말로만의 예수사랑\'이 아닌 \'삶으로의 예수사랑\'을 보여주며 살겠나이다라고 고백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