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하나의 탕자

♣ 주일설교 2008-10-05 ♣
\'또 하나의 탕자\'


눅 15:25-32 / 권 다니엘 목사

 
(본문)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웠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 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우리가 지난 주일에 살펴 본 둘째 아들은 집을 나간 집 밖의 탕자였습니다. 둘째 아들은 일단 집을 나갔다가 재산을 다 탕진하고 나서야 다시 돌아옵니다. 집 밖의 탕자로 있다가 집안으로 돌아옵니다. 아버지의 아들로 돌아 온 것입니다. 이 아들은 인생의 큰 변화를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맏아들인 형은 집을 나가지도 않았고 오랫동안 사랑하는 아버지의 그늘 아래서 집안 일을 돌보며 평범하게 살아왔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그 마음 속을 살펴보면 또 하나의 다른 탕자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집 안의 탕자였던 것입니다. 집을 나갔다가 돌아온 동생보다 조금도 더 나을 것이 없는 형임을 우리는 성경 본문을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둘째 아들을 위해서 너무나 기뻐서 귀향 축하 환영 잔치를 열었습니다. 그때 밭에 나갔던 큰 아들이 돌아옵니다. 돌아오다 그는 잔치하는 요란스러운 소리가 자기 집에서 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는 종들에게 \'무슨 일이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종이 \'당신의 동생이 건강한 몸으로 집에 돌아 왔으므로 당신의 아버지가 살찐 소를 잡고 온 동네 사람들을 초청하여 진치를 베풀었나이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때 맏아들의 반응이 28절에 나옵니다. \'저가 노하여 집에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노하여 집에 들어가기를 거절한 것이 맏아들의 반응입니다. 둘째 아들이 집에 들어오니, 큰 아들이 집에 들어오기를 싫어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집 안의 탕자를 볼 수 있습니다.

  맏아들이 화를 낸 이유가 무엇입니까? 29-30을 볼까요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맏아들이 화를 낸 이유는 논리정연합니다. 이 맏아들의 발언에서 표면적으로 비판할 만한 것을 찾을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맏아들의 이러한 불만의 배후에는 불의가 있었습니다. 맏아들로서 중대한 과오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오늘 성경 본문을 통해서 맏 아들의 불의와 과오가 무엇인지를 알게 될 때, 우리는 맏아들을 왜 집안의 탕자라고 말하는지 그 이유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첫째, 맏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를 못했습니다.

  우리는 보통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심정을 몰랐다고 생각합니다. 재산을 나누어 분가시켜 줄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서둘러 독립을 요구하며 재산을 받아 먼 나라로 떠나갔던 둘째 아들이 어리석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심정의 헤아리지를 못하고 어리석은 짓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자, 그러면 맏아들은 진정 아버지의 심정을 잘 이해하고 있었을까요?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맏아들도 아버지의 심정을 몰랐던 것이 분명합니다.
  평소에 자기는 아버지의 마음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자기 동생이 돌아오니 아버지의 처사가 자기의 생각과는 아주 달랐던 것입니다. 이것은 맏아들이 근간 아버지의 마음을 잘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헤주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관심은 물질이 아닙니다. 잃어버린 영혼입니다. 잃어버린 생명입니다. 그러나 집안에서 날마다 아버지와 함께 있었고, 함께 예배를 드렸고, 함께 일했던 맏아들은 동생에게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돈에만, 물질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살아서 돌아온 것만도 기뻐했지만 맏아들은 그 동생이 돌아옴으로써 일어날 손해를 계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상속법은 아들이 둘일 경우, 형은 유산의 2/3를 갖고, 동생은 1/3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동생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미리 1/3, 즉 유산을 챙겨서 먼 나라에 가서 탕진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므로 맏아들은, 현재 아버지의 재산은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 동안만 아버지의 것이지 돌아가시기만 하면 모두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생이 돌아왔으니 오늘 잔치 비용부터 시작하여 앞으로 동생이 쓰는 돈이나 동생을 위해 쓰이는 돈은, 모두다 자기 돈을 쓰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계산했던 것입니다. 머리가 이렇게 돌아가니 동생이 돌아온 것이 못 마땅할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아버지께, 창기와 함께 살림을 먹어 버린 \"이 아들\"이 돌아왔다고 표현을 했습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받아서 쓴 둘째 아들과, 아버지가 죽기를 기다려 유산이 자기의 것이 되기를 고대하는 맏아들 중에서 누가 더 나은 아들입니까?  둘다 탕자인 것입니다. 집을 나가지 않았다는 것만 다를 뿐입니다.  이렇게 돈을 앞세우고, 돈에 대한 집착이 강해지면 이성은 마비되기 쉽습니다.  

  어떤 배가 파선이 되어 배에 탔던 사람들이 조그마한 구명선에 올라타게 되었는데 구명선에 도달하려면 가느다란 줄을 타고 가야만 했습니다. 한 사람씩 건너가는데 제일 마지막까지 건너가지 못한 사람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금덩어리를 많이 갖고 있었기에 금을 두고는 도저히 구명선을 탈수가 없어서 할 수 없이 금덩어리를 자기 허리에다 차고 건너가게 됩니다. 무거운 몸으로 가느다란 줄을 잡고 건너가는데 가운데쯤 오자 너무 무거워 그만 줄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중요합니까? 

  아버지는 말씀하시기를 \'이 아들은 죽었다 살았고 잃었다가 얻었고, 더군다나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왔으니 우리가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이 제일 중요하기 때문에 재산 없어진 것은 상관하지 않으셨습니다. 건강하게 돌아온 것에 만족하고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형은 지금 내 재산이 축나고 있다는 계산이 앞섰기에 동생을 영접하는 것에 불만이 컸던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물질보다 영혼을 사랑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면 우리는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나만 예수 믿으면 되지.\' 라고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전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우리의 아버지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바로 이해 하는 것입니다.

둘째, 맏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에 잘 순종하고 있다고 착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맏아들은 아버지에게 달려들면서 하는 말이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라고 말했습니다. 명을 어긴 것이 없다는 말 그대로 생각해 보면 겉으로 순종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내적으로는 순종이라는 것 뒤에 대단히 위험한 저항이 깔려 있었습니다.
   마가복음10:20절에 보면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나아 와서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하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네가 율법을 아느냐\"하고 물으시니, 이 부자 청년은 \'어릴 적부터 다 지켰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바로 이 대답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만일에 그 청년이 \'어떻게 율법을 다 지킬 수가 있겠습니까? 도저히 지킬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면 진정한 영생의 길이 그에게 제시되었을텐데, \'어릴 적부터 다 지켰습니다.\'라고 말하므로 스스로 길을 막았던 것입니다. 율법을 다 지킨 자가 어째서 또 영생 얻는 방법을 묻는 것입니까? 착실한 것 같으나 자기 의에 빠진 교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나가서 전도해 보면 \'내가 무슨 죄가 있나 나는 깨끗한 사람이다.\' 이렇게 자기 의에 빠진 사람들 종종 만날 것입니다. 사실 이런 사람들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어디에 병이 들었는지 자신이 모르는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맏아들은 명을 어긴 것이 없다고 하면서 실제적으로는 아버지의 마음을 슬프게 하고 있었습니다. 아프게 하고 있었습니다. 겉으로 나타난 모습을 보면 맏아들로서 그를 듯 하지요. 그러나 그 내면적으로는 얼마나 아버지께 불효하고 부족한 아들이었는가를 그 자신은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맏아들을 높이 칭찬할 수도 있겠지만 그는 자기만 아는 메마르고 차가운 사람이었습니다

  나의 부족함을 알고, 죄인임을 아는 내적인 고민과 반성과 회개가 있어야 하는데 맏아들에게는 이런 것이 없었습니다. 이 정도면 괜찮다는 의식뿐이었습니다.

셋째, 맏아들은 아버지께 불평을 토했습니다.

  맏아들은, \'아버지는 나를 즐겁게 해준 적이 없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나를 위해 잡은 적이 없다\'고 불평을 했습니다. 부모가 아들을 위해서 염소 새끼를 잡고 파티를 열어 주어야만 그 아들이 부모의 사랑을 받는 것입니까?
  \'나는 수고 많이 했고 나는 의롭게 살았는데 받은 것이 없다.\'는 불만은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이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지요.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을 인하여 하나님께 늘 감사를 해야 합니다. \'저 사람은 신앙생활을 잘 하지 않으면서도 어려움이 없는 것 같은데, 나는 신앙생활을 잘 하는데 왜 이렇게 어려울까?\' 하는 생각에 사로 잡히게 되면, 하나님에 대해서 불평이 나오게 되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미움과 질투와 시기가 생기게 됩니다. \'그 사람도 좀 잘 안되었으면 좋겠다.\' 
  은근히 이런 생각이 들 수가 있습니다. 무서운 것이지요. 바로 맏아들의 마음 심보이지요.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들을 생각해 보면 나의 지금의 위치에서 감사하지 않을 수 없지요. 내가 받은 것이 얼마 많고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농부가 한 여름 동안 수고하고 가을에 추수를 한 다음에 내가 한 것은 무엇이며, 하나님이 한 것은 무엇인가를 한번 나눠 보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저 햇빛과 비나 주셨을 뿐 나머지는 다 내가 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좀더 깊이 생각해 보니 하나님은 바람도 불게 하셨고 내게 건강도 주셨고, 부지런함도 주셨고, 농사짓는 지혜도 주셨고, 등등 자꾸만 생각났습니다. 결론은 내가 한 것은 하나도 없다고 스스로 인정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받은 은혜는 잘 보이지를 않고, 심지어는 아무 것도 받지 않은 것처럼 생각된다면, 내 자신에게 엄청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맏아들은 아무것도 받지 않았다고 했지만, 아버지는 \'내 것이 다 네 것이다.\'고 했습니다. 내 것은 다 네 것인데 무엇을 못 받았다고 하느냐고 안타까워하십니다. 

  미국에 월버 체프만이라는 유명한 전도자이자 목사님이셨던 분이 있었습니다. 그 목사님 섬기던 교회의 어느 교인이 13세 때 가출한 아들을 찾으러 매일 돌아 다녔답니다. 이곳 저곳을 찾아 헤매던 중 드디어 18년 만에 우연히 필라델피아 역전에서 그 아들을 발견했습니다. 그 역전에서 막 나오려는데 어떤 남루한 옷차림의 청년이 초점 없는 눈으로 방황하며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마약 환자처럼 보이는 이 청년이 그에게로 다가와서 \"25센트만 주세요.\"라고 말했을 때, 그는 구걸하는 청년이 자기 아들인 것을 단번에 알아볼 수가 있었습니다.
  \"야, 너 톰 아니냐? 나는 니 애비다.\"
  그러나 이 청년은 그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초점 없는 눈동자로 \"아저씨, 25센트만 주세요\"라고 계속 구걸했습니다. 이 아버지는 아들을 덥석 껴안으며 이렇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제는 25센트가 문제가 아니다. 내가 바로 네 아버지야. 너는 내 아들이고, 그렇게 때문에 내 집과 내 돈 그리고 나의 농장이 다 네 것이야. 내 생명조차도 네 것이란다. 나의 가진 모든 것이 네 것이야. 가자 집으로 가자. 그리고 나와 함께 같이 살자.\"

  하나님 아버지도 우리에 대해서 똑 같은 마음을 가지고 게십니다. 로마서 8:23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넷째, 맏아들은 자기의 사명을 몰랐습니다.

  동생이 마귀의 종노릇을 하며 완전히 타락해서 멸망의 길로 가고 있다면 그 동생을 구원해야 할 사람은 누구보다도 그의 형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동생을 찾아 나서야 하고, 또 돌아오게 하여 구원 얻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큰 아들은 자기의 책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가정을 책임질 줄 아는 맏아들이라면, 이것이 아버지의 책임이며 또한 자신의 책임이라는 분명한 깨달음이 있어야 했습니다.
  또한 동생이 돌아 왔을 때 환영하는 것도 아버지 혼자의 일이 아닙니다. 그 가정의 맏아들로서 그는 당연히 동생을 환영할 책임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맏아들이 자기 동생을 어떻게 불렀는지 아십니까? 
  30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이 아들이...\'라고 동생을 지칭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이 아들\'이란 원문에 보면 \'이 당신의 아들\'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한 번도 맏아들의 입에서 그의 동생을 \'자기 동생\'이라고 인정하고 고백한 단어가 없습니다.  친구들은 \'내 벗\'(29절)이라고 지칭하면서 동생에게는 \'이 당신의 아들\'이라고 지칭한 것은 \'내 동생이 아니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러한 맏아들에게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은 \'네 동생\'이라고 분명히 밝혀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나의 특권을 주장하고 누리기에 앞서서 복음 전할 책임을 다하고 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리는 탕자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누가 교회 안에 있는 탕자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사는 사람과 먼저 믿은 성도로서의 사명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마가복음16:15 에 보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돌아오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기뻐해야 할 일은 멸망할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요, 또 우리가 가장 힘써서 할 일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나는 탕자가 아니니 다행이야, 이렇게 생각하기에 앞서 과연 나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얼마나 헤아리고 있으며 하나님의 아버지의 마음을 얼마나 기뻐시게 해드리고 있는지를 살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집안의 탕자인 맏아들과 같은 생각과 행동이 배어있다면 뉘우치고 회개합니다. 그리고 특히 하나님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영혼구원을 위해 최선을 다하셔서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